[토요판] 인터뷰 ; 가족/ 엄마는 중학생
▶ 엄마는 늦깎이 공부 중입니다. 수학이 가장 어렵다고 합니다. 딸은 엄마의 학업을 돕기 위해 다시 수학 문제를 풉니다. 딸이 중학교에서 ‘열공’중인 엄마를 인터뷰했습니다. 대화하는 새로운 가족상을 만들어가는 ‘인터뷰; 가족’은 독자 여러분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실명과 익명 기고 모두 환영합니다. 보내실 곳 gajok@hani.co.kr. 200자 원고지 기준 20장 안팎. 원고료와 함께 사진도 실어드립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는 49재가 될 때까지 매일 제사를 지냈다. 아무리 정 없이 산 부부라도 상대방의 죽음이 슬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걸 알았다 한들, 엄마에 대한 애잔한 마음은 그저 마음뿐일 때가 많았다. 얼굴이라도 자주 안 보면 그 핑계라도 댈 텐데…. 2년 전 서울의 한 학력인정 중학교에 입학해 늦깎이 공부 중인 엄마는 매일 우리 집으로 출퇴근한다. 학교에 갔다가 오후에는 네살배기 둘째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와 우리 부부가 퇴근할 때까지 돌봐주기 때문이다.
‘고집대마왕’ 둘째를 보는 게 만만치 않은지라 힘에 부칠 만도 한데, 엄마는 한번도 “힘들다”는 내색을 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애, 난 이게 직업인데 힘들다고 하면 되나” 했다. ‘힘들다고 해도 되는데… 나는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만날 힘들다고 노래를 부르는데…’ 생각만 할 뿐 엄마가 힘든 거에 대해서는 모른 척 지내는 날들이 많았다. 왜 그런지 엄마에게 하는 말은 늘 망설여지거나, 후회해도 늦을 때가 많았다.
홀로 남겨진 집에서 엄마는 오랜 시간 슬프고 외로웠을 거다. 손주를 보는 일이 싫지 않으면서도 “쌀쌀맞은 기집애, 엄마가 가정부니? 넌 왜 오랜만에 엄마를 보고도 별말이 없어?”라는 말이 불쑥불쑥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 그래서 2014년이 가기 전에 엄마랑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깊은 슬픔으로부터 엄마를 견디게 한 힘이 뭐였는지, 엄마는 지금 어떤 상태인지 궁금했다.
엄마
초등학교도 검정고시로 봐
수학이 너무 어려웠어
그래도 공부하고 돌아와서
아이들 보는 시간이 참 좋았어 딸
엄마가 가르쳐달란 수학 문제
다시 풀려니 꽤 어렵더라고
근데 못 배웠다고 그렇게
많은 곳에서 무시를 당했어? 나 약속한 시간보다 좀 늦었네? 엄마 오전에 잠깐 치매 노인 돌봐주는(엄마는 요양보호사 자격증이 있다) 알바 하잖아. 할머니가 자꾸 시간을 끄셔서… 너 나가봐야 한댔는데, 늦어서 어쩌냐? 나 (습관처럼 쏘아붙이는 말투) 힘들게 뭘 그런 알바까지 해? 엄마 야야, 이 겨울에 엄마가 어디 가서 돈 50만원을 버냐? 근데 돈보다, 신기하게 그 할머니 이름이 아빠랑 똑같아. 게다가 아빠처럼 소띠고. 죽은 네 아빠려니 하고 다닌다야. 나 그러네, 정말… 근데 얼마 전에 “내가 가정부냐?”고 한 건 왜 그런 거야? 엄마 그때 엄마가 좀 아팠는데, 누구 하나 와서 죽을 끓여주는 사람이 있나… 혼자 끙끙댔어. 나 왜 말 안 했어? 엄마 말하면 뭐해. 혼자 병원에 가서 검사도 받고 해서 돈이 많이 나갔어. 그래서 보험사에 병원비를 청구했는데 글쎄 못 주겠다는 거야. 거기다가 자동차 접촉 사고도 나고… 이래저래 북받쳐서 그랬지 뭐. 나 그래서 괜히 나한테 화풀이한 거였구나? 칫. 근데 시간 참 빠르다. 엄마가 중학교 입학한다고 좋아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졸업할 때가 되고. 엄마 우리 손녀딸들이 내 은인이지 뭐. 아이들 보면서 학교 다니기 시작했으니까. 몸은 힘들었지만 크게 욕심부리지 않았어. 공장 같은 데서 돈 벌면서 학교 다녔으면 더 힘들었겠지. 나 언제부터 그렇게 공부를 하고 싶었어? 엄마 항상. 늘 공부를 하고 싶었어. 배운 게 없어서 시집은 일찍 갔지만, 내 나이 50이 되면 공장 같은 데 안 다니고 공부만 할 거라고 결심했어. 나 그래도 나라면 엄마처럼 못했을 것 같아. 엄마가 가르쳐달라던 수학 문제도 이제 와서 다시 풀려니 꽤 어렵더라고. 엄마 어렵긴 하지. 그래도 초등학교라도 졸업한 사람은 기초가 있으니까 잘 따라가는 것 같아. 나처럼 검정고시 출신들이 허덕이지. 수학이 너무 어려워. 근데 이젠 ‘수학 좀 못하면 어때?’ 하는 생각도 들어. 내가 이 나이에 주저할 게 뭐가 있겠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날이 좋으나 궂으나 학교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아이들 보는 시간들이 참 좋았다. 나 나 힘들게 대학 보낸 것도 배우지 못한 엄마의 한이 한몫했겠구나? 엄마 그랬지. 아빠는 너 뭐하러 대학 보내냐고 했지만 엄마 생각은 달랐어. 엄마가 벌어서 너 생활비는 댈 테니 등록금은 대출을 받아서라도 보내자 그랬어. 그때 아빠 벌이가 시원찮았거든. 엄마는 이제껏 무지한 인생을 살았어. 속에 들은 게 없으니까 밥을 먹어도, 뭘 해도 만날 허기가 지는 거야. 재산이 많아도 배우지 못한 사람은 항상 뭔가를 갈구하고 얻으려고 하는데, 배운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좀 부족해도 그렇게 살지 않더라. 배움은 참 값진 거야. 나 학교 다니는 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 엄마 뭐니 뭐니 해도 친구들. 사실 아빠 그렇게 된 게 입학하고 딱 한 달 만이었어. 위기였지. 그래도 내가 학교를 가야만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다고 생각했어. 항시 눈물이 났거든. 친구들이 그래서 1학년 때 부회장도 시키고, 2학년 때 회장도 시키고 했던 거 같아. 바쁘게 살면 덜 슬프니까. 나이 먹어서 얻어진 우리 반 40여명 친구들이 너무 소중해. 이 나이에 어디서 이런 친구들을 만나겠어. 3천원짜리 칼국수를 먹으면서도 참 좋더라. 나 우리 학교 다닐 때 친구 만나러 나간다고 하면 ‘친구가 밥 먹여 주냐?고 타박할 때는 언제고. 역시 사람은 경험을 해봐야 한다니까. 엄마 지금 생각해보니 ‘나이 들어서 난 못해’라고 생각하는 건 참 손해인 것 같아.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는 게 좋아. 엄마 경험으로는 안 되는 것보다 되는 게 더 많았던 것 같아. 엄마 이 정도면 괜찮은 사람 아니니? 엄마는 요즘 나 자신에게 기립박수라도 쳐주고 싶어. 나 그렇게 열심히 다닌 학교 졸업식에는 왜 오지 말라는 거야? 엄마 졸업앨범도 안 찍었는데 뭐. 나 왜? 엄마 창피하니까. 친구들도 ‘야, 우리 창피하니까 고등학교 졸업식 때 졸업앨범도 찍고, 가족들도 부르자’ 하더라고. 그래서 남편이고 애들이고 다 안 부른대.(깔깔) 사실 엄마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서 마흔살까지 사는 게 목표였어. 근데 이제 쉰도 넘고 곧 있으면 환갑이잖니. 덤으로 주어진 인생이니 열심히 살아야지. 나 나 큰애 갖고 입덧 엄청 심했을 때 엄마가 미국 이모할머니네 갔잖아. 사실 그때 진짜 갈 줄 몰랐어. 게다가 출산할 때는 올 줄 알았는데, 3년 넘게 있었잖아. 엄마 그때는 내가 좀 반항기였던 것 같아. 아빠도 그렇고 오빠도 그렇고 내 기대대로 살아주지 않아서 많이 실망했었어. 떠날 때 언제 돌아올 계획도 없었어. 근데 미국도 한국이랑 똑같더라. 배우지 못한 게 또 내 발목을 잡는 거야. 이민자들이 나를 대하는 시선, 그런 게 참 힘들었어. 이리를 가나 저리를 가나, 배우지 못한 것은 참 치명적이구나 싶었지. 그리고 귀국해서 ‘이제 뭘 하나’ 하다가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니까 자신감이 좀 생기는 거야. 내처 6개월 공부하고 초등학교 검정고시를 보고 그 이듬해인 2012년에 지금의 중학교에 입학을 한 거지. 나 엄마 그거 기억나? 나 대학 다닐 때, 엄마가 공장 면접 보러 가는데 나 데려간 거. 엄마 엄마가 서류 같은 거 잘 못 쓰니까 널 데려갔지. 나 그 채용 담당자가 엄마를 엄청 무시했던 기억이 나. 엄마 엄마도 무척 당황했는데… 네가 욱하는 마음에 그분에게 ‘모르면 가르쳐주면 되지, 사람을 왜 이렇게 무시하냐’고 따지는 거야. 나 내가 그랬어? 엄마 응. 나 그렇게 무시당한 적 많았어? 엄마 아니야. 엄마가 혼자 힘으로 이력서 낸 데도 많았는데 대부분 그렇지 않았어.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열심히 일했거든. 관리자들이 그런 엄마를 많이 대견해했어. 나 처음에는 인터뷰 안 하겠다고 하더니, 엄마 말만 잘하네~. 엄마 인터뷰는 성공한 사람들만 하는 줄 알았어. 근데 뭐 난 대단한 게 없으니까 그랬지. 딱히 할 말도 없고. 그런데 그냥 사심 없이 그대로 말하면 되더라고. 어떻게 하는지 텔레비전에서 유심히 봤거든.(깔깔) 야, 이것도 2년 동안 학교에서 공부했으니 이 정도 하는 거야. 어린 시절 내 일기장은 오빠만 편애하는 엄마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했다. 갈등이 생길 때마다 엄마는 “너도 애 낳아서 키워봐라, 엄마 마음 알 테니” 했고, 그때마다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여러 번 다짐했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 엄마처럼 살기가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지금처럼 ‘직장맘’이란 인식조차 없던 시절인데, 엄마는 어떤 마음으로 일하며 애 둘을 건사하며 살았을까. 짐작하기조차 힘들다. 그런 엄마가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면서 꿈이 생겼다. 고등학교를 마치면 공인중개사 시험에 도전할 거란다. “내 적성과 딱”이라면서. <미생>의 장그래가 그랬던 것처럼 내가 엄마의 자부심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뒤늦게 이걸 알았다. 지금의 나는 엄마라는 거 그리고 엄마는 내 자부심이란 거. “엄마의 꿈을 응원합니다.” 두 딸을 키우는 직장맘 다다
초등학교도 검정고시로 봐
수학이 너무 어려웠어
그래도 공부하고 돌아와서
아이들 보는 시간이 참 좋았어 딸
엄마가 가르쳐달란 수학 문제
다시 풀려니 꽤 어렵더라고
근데 못 배웠다고 그렇게
많은 곳에서 무시를 당했어? 나 약속한 시간보다 좀 늦었네? 엄마 오전에 잠깐 치매 노인 돌봐주는(엄마는 요양보호사 자격증이 있다) 알바 하잖아. 할머니가 자꾸 시간을 끄셔서… 너 나가봐야 한댔는데, 늦어서 어쩌냐? 나 (습관처럼 쏘아붙이는 말투) 힘들게 뭘 그런 알바까지 해? 엄마 야야, 이 겨울에 엄마가 어디 가서 돈 50만원을 버냐? 근데 돈보다, 신기하게 그 할머니 이름이 아빠랑 똑같아. 게다가 아빠처럼 소띠고. 죽은 네 아빠려니 하고 다닌다야. 나 그러네, 정말… 근데 얼마 전에 “내가 가정부냐?”고 한 건 왜 그런 거야? 엄마 그때 엄마가 좀 아팠는데, 누구 하나 와서 죽을 끓여주는 사람이 있나… 혼자 끙끙댔어. 나 왜 말 안 했어? 엄마 말하면 뭐해. 혼자 병원에 가서 검사도 받고 해서 돈이 많이 나갔어. 그래서 보험사에 병원비를 청구했는데 글쎄 못 주겠다는 거야. 거기다가 자동차 접촉 사고도 나고… 이래저래 북받쳐서 그랬지 뭐. 나 그래서 괜히 나한테 화풀이한 거였구나? 칫. 근데 시간 참 빠르다. 엄마가 중학교 입학한다고 좋아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졸업할 때가 되고. 엄마 우리 손녀딸들이 내 은인이지 뭐. 아이들 보면서 학교 다니기 시작했으니까. 몸은 힘들었지만 크게 욕심부리지 않았어. 공장 같은 데서 돈 벌면서 학교 다녔으면 더 힘들었겠지. 나 언제부터 그렇게 공부를 하고 싶었어? 엄마 항상. 늘 공부를 하고 싶었어. 배운 게 없어서 시집은 일찍 갔지만, 내 나이 50이 되면 공장 같은 데 안 다니고 공부만 할 거라고 결심했어. 나 그래도 나라면 엄마처럼 못했을 것 같아. 엄마가 가르쳐달라던 수학 문제도 이제 와서 다시 풀려니 꽤 어렵더라고. 엄마 어렵긴 하지. 그래도 초등학교라도 졸업한 사람은 기초가 있으니까 잘 따라가는 것 같아. 나처럼 검정고시 출신들이 허덕이지. 수학이 너무 어려워. 근데 이젠 ‘수학 좀 못하면 어때?’ 하는 생각도 들어. 내가 이 나이에 주저할 게 뭐가 있겠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날이 좋으나 궂으나 학교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아이들 보는 시간들이 참 좋았다. 나 나 힘들게 대학 보낸 것도 배우지 못한 엄마의 한이 한몫했겠구나? 엄마 그랬지. 아빠는 너 뭐하러 대학 보내냐고 했지만 엄마 생각은 달랐어. 엄마가 벌어서 너 생활비는 댈 테니 등록금은 대출을 받아서라도 보내자 그랬어. 그때 아빠 벌이가 시원찮았거든. 엄마는 이제껏 무지한 인생을 살았어. 속에 들은 게 없으니까 밥을 먹어도, 뭘 해도 만날 허기가 지는 거야. 재산이 많아도 배우지 못한 사람은 항상 뭔가를 갈구하고 얻으려고 하는데, 배운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좀 부족해도 그렇게 살지 않더라. 배움은 참 값진 거야. 나 학교 다니는 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 엄마 뭐니 뭐니 해도 친구들. 사실 아빠 그렇게 된 게 입학하고 딱 한 달 만이었어. 위기였지. 그래도 내가 학교를 가야만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다고 생각했어. 항시 눈물이 났거든. 친구들이 그래서 1학년 때 부회장도 시키고, 2학년 때 회장도 시키고 했던 거 같아. 바쁘게 살면 덜 슬프니까. 나이 먹어서 얻어진 우리 반 40여명 친구들이 너무 소중해. 이 나이에 어디서 이런 친구들을 만나겠어. 3천원짜리 칼국수를 먹으면서도 참 좋더라. 나 우리 학교 다닐 때 친구 만나러 나간다고 하면 ‘친구가 밥 먹여 주냐?고 타박할 때는 언제고. 역시 사람은 경험을 해봐야 한다니까. 엄마 지금 생각해보니 ‘나이 들어서 난 못해’라고 생각하는 건 참 손해인 것 같아.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는 게 좋아. 엄마 경험으로는 안 되는 것보다 되는 게 더 많았던 것 같아. 엄마 이 정도면 괜찮은 사람 아니니? 엄마는 요즘 나 자신에게 기립박수라도 쳐주고 싶어. 나 그렇게 열심히 다닌 학교 졸업식에는 왜 오지 말라는 거야? 엄마 졸업앨범도 안 찍었는데 뭐. 나 왜? 엄마 창피하니까. 친구들도 ‘야, 우리 창피하니까 고등학교 졸업식 때 졸업앨범도 찍고, 가족들도 부르자’ 하더라고. 그래서 남편이고 애들이고 다 안 부른대.(깔깔) 사실 엄마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서 마흔살까지 사는 게 목표였어. 근데 이제 쉰도 넘고 곧 있으면 환갑이잖니. 덤으로 주어진 인생이니 열심히 살아야지. 나 나 큰애 갖고 입덧 엄청 심했을 때 엄마가 미국 이모할머니네 갔잖아. 사실 그때 진짜 갈 줄 몰랐어. 게다가 출산할 때는 올 줄 알았는데, 3년 넘게 있었잖아. 엄마 그때는 내가 좀 반항기였던 것 같아. 아빠도 그렇고 오빠도 그렇고 내 기대대로 살아주지 않아서 많이 실망했었어. 떠날 때 언제 돌아올 계획도 없었어. 근데 미국도 한국이랑 똑같더라. 배우지 못한 게 또 내 발목을 잡는 거야. 이민자들이 나를 대하는 시선, 그런 게 참 힘들었어. 이리를 가나 저리를 가나, 배우지 못한 것은 참 치명적이구나 싶었지. 그리고 귀국해서 ‘이제 뭘 하나’ 하다가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니까 자신감이 좀 생기는 거야. 내처 6개월 공부하고 초등학교 검정고시를 보고 그 이듬해인 2012년에 지금의 중학교에 입학을 한 거지. 나 엄마 그거 기억나? 나 대학 다닐 때, 엄마가 공장 면접 보러 가는데 나 데려간 거. 엄마 엄마가 서류 같은 거 잘 못 쓰니까 널 데려갔지. 나 그 채용 담당자가 엄마를 엄청 무시했던 기억이 나. 엄마 엄마도 무척 당황했는데… 네가 욱하는 마음에 그분에게 ‘모르면 가르쳐주면 되지, 사람을 왜 이렇게 무시하냐’고 따지는 거야. 나 내가 그랬어? 엄마 응. 나 그렇게 무시당한 적 많았어? 엄마 아니야. 엄마가 혼자 힘으로 이력서 낸 데도 많았는데 대부분 그렇지 않았어.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열심히 일했거든. 관리자들이 그런 엄마를 많이 대견해했어. 나 처음에는 인터뷰 안 하겠다고 하더니, 엄마 말만 잘하네~. 엄마 인터뷰는 성공한 사람들만 하는 줄 알았어. 근데 뭐 난 대단한 게 없으니까 그랬지. 딱히 할 말도 없고. 그런데 그냥 사심 없이 그대로 말하면 되더라고. 어떻게 하는지 텔레비전에서 유심히 봤거든.(깔깔) 야, 이것도 2년 동안 학교에서 공부했으니 이 정도 하는 거야. 어린 시절 내 일기장은 오빠만 편애하는 엄마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했다. 갈등이 생길 때마다 엄마는 “너도 애 낳아서 키워봐라, 엄마 마음 알 테니” 했고, 그때마다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여러 번 다짐했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 엄마처럼 살기가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지금처럼 ‘직장맘’이란 인식조차 없던 시절인데, 엄마는 어떤 마음으로 일하며 애 둘을 건사하며 살았을까. 짐작하기조차 힘들다. 그런 엄마가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면서 꿈이 생겼다. 고등학교를 마치면 공인중개사 시험에 도전할 거란다. “내 적성과 딱”이라면서. <미생>의 장그래가 그랬던 것처럼 내가 엄마의 자부심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뒤늦게 이걸 알았다. 지금의 나는 엄마라는 거 그리고 엄마는 내 자부심이란 거. “엄마의 꿈을 응원합니다.” 두 딸을 키우는 직장맘 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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