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미례 다큐멘터리 감독(오른쪽)과 유찬호 성공회 사제가 지난달 12일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 횡단보도를 함께 건너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인터뷰 ; 가족
성공회 사제 남편과 다큐 감독 아내
성공회 사제 남편과 다큐 감독 아내
▶ 류미례(43) 다큐멘터리 감독과 유찬호(46) 성공회 사제는 지난 1년간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꿈을 유보하고 남편의 계획에 맞춰 산다는 불만이 아내에겐 쌓였습니다. 그러나 작고 소박한 집에 감사하며 행복한 세상을 꿈꾸는 이들은 다르면서도 같은 가족입니다. 대화하는 새로운 가족상을 만들어가는 ‘인터뷰; 가족’은 독자 여러분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실명과 익명 기고 모두 환영합니다. 보내실 곳 gajok@hani.co.kr. 200자 원고지 기준 20장 안팎. 원고료와 함께 사진도 실어드립니다.
2014년 10월31일, 마흔여섯살 남편은 퇴직금을 받았다. 18년 동안 사제로 몸 담았던 대한성공회 서울교구를 나와서 인천 강화도에서 친환경농민회와 장애인들이 함께하는 사업장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남편이 퇴직금을 받기 1년 전부터 우리 부부의 삶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남편이 새로운 활동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많은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성공회 사택에서 살던 우리가 집은 어떻게 구할지, 주택 자금은 어디서 마련할지, 줄어든 생활비는 어떻게 충당할지 헤쳐가야 할 것들이 많았다. 변화를 준비하며 우리는 속 깊은 이야기 대신 생활적인 대화만 주고받았다. 싸움을 피하기 위해서였지만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가족 인터뷰’라는 이름으로 나눈, 두서 없는 이 대화가 지난 15년 동안의 우리를 돌아보게 했다.
1999년 이맘때쯤 장애에 관한 공통 관심으로 처음 만났던 우리는 어느덧 많이 달라져 있었다. 성공회에서 운영하는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의 사제였던 남편은 짧은 홍보 영상을 부탁하러 독립 다큐멘터리 제작 공동체인 ‘푸른영상’에 찾아왔다. 그곳에서 사제와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처음 만났다.
나
결혼 땐 사모 역할 필요없다더니
결혼해선 교회 질서 안에 살았어
내 꿈을 유보하고 당신 꿈에 맞춰
살다 문득 미래가 두려워졌어 남편
당신은 내 성취를 기뻐하기보다
샘을 내는 것같이 보였어
나도 육아휴직을 하려 했지만
상황이 따라주지 않았던 거야 나 당신은 15년 전 날 처음 봤을 때 첫인상이 어땠어? 남편 멜빵바지를 입고 짧은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여자가 왔다 갔다 하더라고. 평소 푸른영상이라는 단체를 존경했던 나는 깜짝 놀랐지. 대표인 김동원 감독님이 사람이 커서 저런 날라리도 품는구나 생각했어. 그런데 센터에서 영상 작업 하는 거 보니 따뜻하고 좋은 사람인 것 같더라. 나 홍보 영상을 찍으면서 장애인 센터 식구들하고 놀이공원에 놀러 갔잖아. 그때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당신이 그랬잖아. “나는 라쉬공동체 같은 장애인공동체가 꿈이야. 시골에서 살 수 있겠어?” 처음 만난 지 한 달 만에 듣는 말이라 좀 당황했어. 결혼하고 나서는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어. 당신은 나한테 ‘사모 역할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웬걸, 결혼하고 나니까 사모가 되어 있더라. 내가 꿈꿨던 공동체는 같은 관심과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새로운 질서로 모이는 곳이야. 하지만 결혼 후 오랫동안 나는 교회의 규범 안에서 살아야 했어. 남편 그래도 내가 사회선교기관들만 다녀서 당신은 자유로운 편이었어. 일반 교회 사모들은 공사 구분 없이 사제를 돕느라 고생이 많지. 사제와 동등하게 목회 활동을 하며 보람을 느끼는 사모들도 있어. 나 사모 역할은 안 해도 된다고 약속한 사람이 이렇게 말하면 안 되지. 난 결혼 전에 교회도 안 다니던 사람이었어. 우리가 결혼하면 장애라는 공통의 주제 안에서 당신은 목회 활동을, 나는 영상 활동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남편 그런데? 나 아이를 낳고 나니까 다큐멘터리 작업은 못하겠더라. 오후 여섯시만 되면 어린이집으로 달려가야 했으니까. 결혼할 땐 우리 둘 다 초짜였는데 내가 세 아이 키우느라 휴직 세 번 하는 동안 당신은 중견 활동가가 되어 있었어. 시작은 내가 더 빨랐는데. 남편 당신 보면서 신기했던 게 내가 일하면서 자리 잡아 가는 걸 가족으로서 함께 축하하는 게 아니라 샘을 내더라. 나 당연하지. 아이는 공동의 책임인데 나 혼자만 몇 년씩 쉬면서 애를 봤잖아. 셋째 은별이 때는 육아휴직 한다고 해놓고 약속을 안 지켰어. 남편 하려고 했어. 그런데 상황이 여의치 않았어. 나 상황은 늘 여의치 않아. 나는 어땠을 것 같아? 육아휴직 끝내고 영화 현장으로 복귀하면 다시 출발선이야. 장비도, 편집 프로그램도 다 달라져 있고 작업 영역도 다시 개척해야 돼. 컴퓨터로 말하자면 초기화 상태가 되어 버리는 거지. 남편 그래도 당신은 ‘장애’에서 ‘여성’으로 작업 내용을 바꾸면서 활동을 계속 했잖아? 나 나랑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이 내 영화를 지지해준 덕분이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길이 있었어. 당신한테 육아휴직을 하라고 했던 건 나처럼 초기화 과정을 거치길 바라서였어. 당신은 늘 너무 바빴으니까. 남편 그렇게 따지면 지금이 나한테는 초기화 과정이겠네. 나 그러네. 나는 어쩔 수 없이 초기화 과정을 거쳤는데 자진해서 초기화를 선택한 기분이 어때? 나는 서른네 살에 장애에서 여성으로 작업 영역을 바꾸면서 엄청 불안했어. 남편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는 점은 닮았지만 그때의 당신과 지금의 나는 달라. 나는 내가 잘 알고 잘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 그만둔 거야. 나 텔레비전에서 수도사들 생활하는 거 봤는데 한 달에 한 번 방을 바꾸더라. 당신은 사제니까 그런 식의 삶의 태도도 고려해야 하는 거 아냐? 남편 사제라고 해서 다 똑같이 살아야 하는 걸까? 나는 신학생 때부터 ‘전통적인 모습의 교회만이 교회인가?’ 하는 생각을 가졌고, 그래서 사회선교기관에서 활동을 해왔어. 나는 목회자이면서 활동가야. 1998년 처음 장애인센터를 시작했을 때, 장애 자녀를 둔 부모들은 “낮에 우리 애들 갈 데만 있어도 좋겠다”고 했어. 그러다 장애인들이 우편 발송과 세차 일을 시작하면서 자식들이 월급을 받고 저축을 하고 미래를 꿈꾸는 걸 보니까 부모들도 같이 변했어. 나도 같이 성장해 왔고. 나 그건 내가 잘 알아. 그게 내 영화들의 내용이었으니까. 푸른영상 후원회원 중에 특수교육 전문가가 있는데 장애와 관련된 세번째 영화는 안 만드냐고 자주 물어보셔. ‘함께사는세상’은 도심 안에서 한 실험이라 새로웠다고 하시더라. 남편 그곳에서 하고 싶은 일이 더 많았는데 2010년 강화도로 발령을 받았어. 장애 관련 활동을 계속하기 위해선 성공회를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때 했어. 나 그때부터 생각했다고? 남편 그때부터 계획했다는 게 아니라 막연한 예감이 있었다는 거지. 그러다 이번에 결단을 내린 거고. 생산성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장애인들이 독립해서 살아가려면 다른 질서와 가치를 추구해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의 질서, 정책을 더 잘 알아야 하는 거고. 지나간 경험과 이해를 기반으로 새로운 모델을 만들고 싶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은 신이 약속한 신비야. 그러니까 나한테는 지금 여기가 교회야. 나 당신 선택 때문에 애들과 내가 감수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성공회 사택을 반납하고 우리는 집조차 없었어. 은행 잔고는 얼마 없지, 필요한 것들은 많지. 돈 빌리고 대출 제도 알아보고 그러면서 머리가 너무 아팠어. 남편 그래도 이 정도면 훌륭하게 정착한 거지? 나 응, 좋아. 이 집을 구한 게 제일 좋아. 아무리 강화도라도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30만원짜리 집 구하는 일은 쉽지 않잖아. 이사 첫날 밤에 온 식구가 누워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참 좋았어. 우린 훌륭하게 독립을 이룬 거잖아. 무슨 일이 닥쳐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어. 남편 올 한 해 농사도 잘됐고. 공동체는 아직 실현 전이지만 시골에서 사는 건 실현됐네. 20대에 그렸던 공동체는 막연했어. 신실한 사제가 장애인들 열 명 정도와 농사짓고 사는 거? 그런 막연하고 소박한 상이었어. 그런데 지금은 공동체도 경제적 기반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 강화에서 농민들과 함께 장애인 사업장을 만드는 일, 20대에 가졌던 공동체의 꿈이 실현되고 있어. 나 나는 걱정이 취미인 사람인데 당신 덕분에 삶을 조금은 더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된 것 같아. 내가 걱정하고 있으면 당신은 늘 “신은 우리에게 천사만 보낸다”며 위로했지. 1년 전에도, 지금도 우리에게 확실한 건 없어. 그래도 당신은 불안하지 않나 봐. 늘 긍정적일 수 있는 그 동력은 뭐야? 남편 종교. 보이는 게 다가 아니고 지금이 끝이 아니라는 믿음. 나는 꿈이 있어. 먼 훗날 다음 세상에서 나와 함께 일했던 장애인들을 만나겠지. 그 세상에는 장애가 없어서 자폐였던 친구들도 말을 할 수 있을 거야. 그 친구들이 “당신과 함께 내가 지난 세상에서 조금은 편안했어”라고 말해주는 게 내 꿈이야. 나 그 세상에서도 내 손에 카메라가 있으면 좋겠네. 그곳에서 다큐를 찍을 테니까. 류미례 다큐멘터리 감독
결혼 땐 사모 역할 필요없다더니
결혼해선 교회 질서 안에 살았어
내 꿈을 유보하고 당신 꿈에 맞춰
살다 문득 미래가 두려워졌어 남편
당신은 내 성취를 기뻐하기보다
샘을 내는 것같이 보였어
나도 육아휴직을 하려 했지만
상황이 따라주지 않았던 거야 나 당신은 15년 전 날 처음 봤을 때 첫인상이 어땠어? 남편 멜빵바지를 입고 짧은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여자가 왔다 갔다 하더라고. 평소 푸른영상이라는 단체를 존경했던 나는 깜짝 놀랐지. 대표인 김동원 감독님이 사람이 커서 저런 날라리도 품는구나 생각했어. 그런데 센터에서 영상 작업 하는 거 보니 따뜻하고 좋은 사람인 것 같더라. 나 홍보 영상을 찍으면서 장애인 센터 식구들하고 놀이공원에 놀러 갔잖아. 그때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당신이 그랬잖아. “나는 라쉬공동체 같은 장애인공동체가 꿈이야. 시골에서 살 수 있겠어?” 처음 만난 지 한 달 만에 듣는 말이라 좀 당황했어. 결혼하고 나서는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어. 당신은 나한테 ‘사모 역할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웬걸, 결혼하고 나니까 사모가 되어 있더라. 내가 꿈꿨던 공동체는 같은 관심과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새로운 질서로 모이는 곳이야. 하지만 결혼 후 오랫동안 나는 교회의 규범 안에서 살아야 했어. 남편 그래도 내가 사회선교기관들만 다녀서 당신은 자유로운 편이었어. 일반 교회 사모들은 공사 구분 없이 사제를 돕느라 고생이 많지. 사제와 동등하게 목회 활동을 하며 보람을 느끼는 사모들도 있어. 나 사모 역할은 안 해도 된다고 약속한 사람이 이렇게 말하면 안 되지. 난 결혼 전에 교회도 안 다니던 사람이었어. 우리가 결혼하면 장애라는 공통의 주제 안에서 당신은 목회 활동을, 나는 영상 활동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남편 그런데? 나 아이를 낳고 나니까 다큐멘터리 작업은 못하겠더라. 오후 여섯시만 되면 어린이집으로 달려가야 했으니까. 결혼할 땐 우리 둘 다 초짜였는데 내가 세 아이 키우느라 휴직 세 번 하는 동안 당신은 중견 활동가가 되어 있었어. 시작은 내가 더 빨랐는데. 남편 당신 보면서 신기했던 게 내가 일하면서 자리 잡아 가는 걸 가족으로서 함께 축하하는 게 아니라 샘을 내더라. 나 당연하지. 아이는 공동의 책임인데 나 혼자만 몇 년씩 쉬면서 애를 봤잖아. 셋째 은별이 때는 육아휴직 한다고 해놓고 약속을 안 지켰어. 남편 하려고 했어. 그런데 상황이 여의치 않았어. 나 상황은 늘 여의치 않아. 나는 어땠을 것 같아? 육아휴직 끝내고 영화 현장으로 복귀하면 다시 출발선이야. 장비도, 편집 프로그램도 다 달라져 있고 작업 영역도 다시 개척해야 돼. 컴퓨터로 말하자면 초기화 상태가 되어 버리는 거지. 남편 그래도 당신은 ‘장애’에서 ‘여성’으로 작업 내용을 바꾸면서 활동을 계속 했잖아? 나 나랑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이 내 영화를 지지해준 덕분이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길이 있었어. 당신한테 육아휴직을 하라고 했던 건 나처럼 초기화 과정을 거치길 바라서였어. 당신은 늘 너무 바빴으니까. 남편 그렇게 따지면 지금이 나한테는 초기화 과정이겠네. 나 그러네. 나는 어쩔 수 없이 초기화 과정을 거쳤는데 자진해서 초기화를 선택한 기분이 어때? 나는 서른네 살에 장애에서 여성으로 작업 영역을 바꾸면서 엄청 불안했어. 남편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는 점은 닮았지만 그때의 당신과 지금의 나는 달라. 나는 내가 잘 알고 잘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 그만둔 거야. 나 텔레비전에서 수도사들 생활하는 거 봤는데 한 달에 한 번 방을 바꾸더라. 당신은 사제니까 그런 식의 삶의 태도도 고려해야 하는 거 아냐? 남편 사제라고 해서 다 똑같이 살아야 하는 걸까? 나는 신학생 때부터 ‘전통적인 모습의 교회만이 교회인가?’ 하는 생각을 가졌고, 그래서 사회선교기관에서 활동을 해왔어. 나는 목회자이면서 활동가야. 1998년 처음 장애인센터를 시작했을 때, 장애 자녀를 둔 부모들은 “낮에 우리 애들 갈 데만 있어도 좋겠다”고 했어. 그러다 장애인들이 우편 발송과 세차 일을 시작하면서 자식들이 월급을 받고 저축을 하고 미래를 꿈꾸는 걸 보니까 부모들도 같이 변했어. 나도 같이 성장해 왔고. 나 그건 내가 잘 알아. 그게 내 영화들의 내용이었으니까. 푸른영상 후원회원 중에 특수교육 전문가가 있는데 장애와 관련된 세번째 영화는 안 만드냐고 자주 물어보셔. ‘함께사는세상’은 도심 안에서 한 실험이라 새로웠다고 하시더라. 남편 그곳에서 하고 싶은 일이 더 많았는데 2010년 강화도로 발령을 받았어. 장애 관련 활동을 계속하기 위해선 성공회를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때 했어. 나 그때부터 생각했다고? 남편 그때부터 계획했다는 게 아니라 막연한 예감이 있었다는 거지. 그러다 이번에 결단을 내린 거고. 생산성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장애인들이 독립해서 살아가려면 다른 질서와 가치를 추구해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의 질서, 정책을 더 잘 알아야 하는 거고. 지나간 경험과 이해를 기반으로 새로운 모델을 만들고 싶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은 신이 약속한 신비야. 그러니까 나한테는 지금 여기가 교회야. 나 당신 선택 때문에 애들과 내가 감수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성공회 사택을 반납하고 우리는 집조차 없었어. 은행 잔고는 얼마 없지, 필요한 것들은 많지. 돈 빌리고 대출 제도 알아보고 그러면서 머리가 너무 아팠어. 남편 그래도 이 정도면 훌륭하게 정착한 거지? 나 응, 좋아. 이 집을 구한 게 제일 좋아. 아무리 강화도라도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30만원짜리 집 구하는 일은 쉽지 않잖아. 이사 첫날 밤에 온 식구가 누워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참 좋았어. 우린 훌륭하게 독립을 이룬 거잖아. 무슨 일이 닥쳐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어. 남편 올 한 해 농사도 잘됐고. 공동체는 아직 실현 전이지만 시골에서 사는 건 실현됐네. 20대에 그렸던 공동체는 막연했어. 신실한 사제가 장애인들 열 명 정도와 농사짓고 사는 거? 그런 막연하고 소박한 상이었어. 그런데 지금은 공동체도 경제적 기반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 강화에서 농민들과 함께 장애인 사업장을 만드는 일, 20대에 가졌던 공동체의 꿈이 실현되고 있어. 나 나는 걱정이 취미인 사람인데 당신 덕분에 삶을 조금은 더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된 것 같아. 내가 걱정하고 있으면 당신은 늘 “신은 우리에게 천사만 보낸다”며 위로했지. 1년 전에도, 지금도 우리에게 확실한 건 없어. 그래도 당신은 불안하지 않나 봐. 늘 긍정적일 수 있는 그 동력은 뭐야? 남편 종교. 보이는 게 다가 아니고 지금이 끝이 아니라는 믿음. 나는 꿈이 있어. 먼 훗날 다음 세상에서 나와 함께 일했던 장애인들을 만나겠지. 그 세상에는 장애가 없어서 자폐였던 친구들도 말을 할 수 있을 거야. 그 친구들이 “당신과 함께 내가 지난 세상에서 조금은 편안했어”라고 말해주는 게 내 꿈이야. 나 그 세상에서도 내 손에 카메라가 있으면 좋겠네. 그곳에서 다큐를 찍을 테니까. 류미례 다큐멘터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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