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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제 부끄러움이 정말로 부끄러워요

등록 2014-09-12 19:11수정 2014-09-14 10:35

[토요판] 가족
택시 기사의 아들
▶ 결혼을 앞둔 한 남자는 예식장 주차장이 택시로 채워질까 봐 끙끙 앓고 있습니다. 남자의 아버지는 택시 운전사입니다. 한때는 근사한 넥타이를 매고 은행으로 출근하던 시절이 있었답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데, 아버지를 향한 마음이 싸늘해졌다는 아들은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사랑보다 미지근하지만, 끈질기게 따라붙는 질척한 연민 같은 무엇. 그저 ‘남’이라면 이런 죄책감에 몸서리칠 필요도 없는데,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아버지입니다.

“딱! 한잔만 하자”던 회식이 자정까지 이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얼큰하게 취하고 싶은 밤이다. 목적지를 말하고 택시에 올라타 몸을 기댄다. 이제야 운전대를 잡은 택시 기사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나에게 택시는 참 묘한 공간이다. 생전 처음 보는 기사에게 은밀한 얘기를 털어놓을 때가 있고, 선거의 계절엔 정치 얘기를 주고받는다. 무엇보다 세상 구경을 빨리 하고 싶었던 내가 병원으로 향하던 택시 안에서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느닷없이 기사가 말을 걸어 온다.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 봐요. 약주 많이 하셨네.”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 시선을 창밖으로 뒀다. 밤거리는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드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아버지 얼굴이 떠오른다. 하루 12시간쯤, 좁은 자리에 앉아 이런저런 사연을 가진 손님을 싣고 도심을 누비는 한 남자의 인생을 어렴풋이 짐작해본다. 꼬박꼬박 채워야 하는 납입금 걱정에 전전긍긍하고 있을 그를 생각하니 술로 달랜 속이 더 부대낀다. 사실 택시 기사로 일하는 아버지는 내 마음 깊이 숨겨놓은 콤플렉스였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아버지가 아직도 잘나가는 ‘금융맨’인 줄 안다. 내 입으로 말하기에 기막히고 쪽팔리지만 아버지의 직업을 써내야 했던 모든 서류의 빈칸을 ‘회사원’이라고 채웠다. 나는 넥타이를 맨 아버지의 모습을 허상처럼 좇고 산다. 그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면 내 대답은 한결같다. “○○은행에 근무하고 계세요.” 환상의 인물을 소개하고 나면 어깨가 으쓱해진다. 나란 인간은 대체 왜 그럴까.


나를 아는 사람들은 아직도
아버지를 ‘금융맨’으로 안다
아이엠에프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실직 후 택시 운전을 시작했다

넥타이를 맨 아버지의 허상은
그 뒤에도 떠나지 않았다
결국 친구에게 들통났는데
그 좌절감, 그 죄책감이란

매사에 무뚝뚝하고 심드렁한 성격의 아버지는 참 개성 없는 인물이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배움에 대한 열망이 너무 컸던 나머지 세 번의 도전 끝에 대학에 들어갔다. 남동생 뒷바라지가 그의 몫으로 남게 되는 바람에 꿈보다 현실을 직시했다. 당시 월급을 가장 많이 준다는 은행을 선택했다. 아버지는 꿋꿋하고 바지런히 일했다. 그저 생활력이 강한 모습에 반해 결혼을 결심했다는 어머니가 그의 성실함을 증명한다. 그런 아버지가 새로 맞춘 양복에 짙은 남색 넥타이를 매고 출근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선명하게 남아 있는 아버지의 가장 근사한 모습이다.

어느 날, 집 앞에서 공을 차다 퇴근하던 아버지를 보고 달려갔다. 그의 미간이 담배를 물 때처럼 찌푸려져 있었다. 내 손마저 밀어냈다. 잠깐이지만, 그 서늘한 순간이 참 서운했다. 아버지의 그림자를 따라 집으로 향했던 그날 밤, 그는 ‘폭군’이 됐다. 손에 잡히는 물건을 닥치는 대로 집어 던졌다. 한없이 편의를 제공했던 물건들이 바닥으로 뒹굴었다. 초라하게 권력을 잃어버린 아버지와 같은 모습이었다. 1997년을 강타한 아이엠에프 구제금융 위기로 아버지는 권고사직 형태의 퇴사를 강요받았다. 당시에 유행처럼 번진 퇴사 스토리다.

오직 가족을 위해 버텨온 것이 억울하고 아쉬운 당사자의 심정은 오죽했으랴 싶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술에 취한 아버지의 폭언을 견딜 수 없었다. 하루 이틀 그것이 반복되다 보니 아버지는 공포의 대상이 됐다. 목소리만 들려도 깜짝깜짝 놀라서 몸을 움츠리게 됐다. 나도 어머니도 그 불행에 뒤엉켜 자주 우울해졌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버지는 가족 모두가 덜 상처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섰다. 중년의 남성들이 한번쯤 거쳐 간다는 택시 운전을 시작했다. 어쩌면 축하할 일이었다. 3교대 근무로 밤낮이 바뀐 아버지가 크게 하품을 할 때도 곧 다시 넥타이를 매고 회사로 출근해줄 거라 믿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이른 시간에 등교를 돕던 아버지는 항상 택시 뒷자리에 나를 태웠다. 정문까지 가겠다는 아버지를 말렸다. 학교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다. 대충 인사를 하고, 차 안을 뛰쳐나왔다. 누가 볼까봐 겁이 나서 그가 조용히 퇴장해주길 바랐다. 어느 날, 택시에서 내리던 나를 알아본 친구가 손쓸 겨를도 없이 다가왔다. 내 아버지를 금융업에 종사하는 멋진 회사원으로 알고 있던 친구였다. 그런 아버지가 운전석에서 내려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꼬깃꼬깃한 지폐 몇 장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내 이름을 불렀다. 옆에서 걷던 친구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봤지만,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친구에게 들통이 났다는 좌절감과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에 몸을 떨며 울었다. 아버지는 상처를 받은 듯했다. 우리 부자의 침묵은 내가 군에 입대할 때까지 계속됐다.

철없던 시절 한바탕 진통을 겪었지만, 또 후회할 일을 저질렀다. 대학 졸업식장에 택시 한 대가 들어섰을 때, 단번에 아버지임을 알아챘다. 주차장에 들어선 차들은 하나같이 충분히 성공했고 마땅히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는 것을 알지만, 나를 주저앉힌 것은 10년 넘게 따라붙는 타이틀 ‘택시기사의 아들’이었다. 그래서 졸업식이 끝날 때까지 비겁한 낯짝을 숨겼다. 아버지에게 학사모를 씌워주면서 뜨끔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 자신을 변화시킬 용기가 부족했다. 나는 아직도 한심한 인간이다. 결혼을 앞두고 걱정과 피로가 쌓인다. 예식장 주차장을 메울 택시들을 생각하니 아찔하다. 아버지와 같은 일을 하는 분들이 몰려올 테니 말이다. 이 못난 생각을 아내 될 사람에게 설명하기가 두렵다.

집 앞에 도착해 잔돈을 내주려는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새벽에 운전하는 거 힘들지 않으세요?”

“힘들어도 별수 있나요. 다 우리 애들 먹이고 공부시키려고 하는 거죠.”

쉼 없이 달려온 그의 인생을 부정했던 나.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기 전에 용서를 구하고 싶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데, 언제쯤 택시 운전기사의 아들로 사는 운명에 당당해질 수 있을까?

결혼을 앞둔 찌질한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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