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희
[토요판] 이서희, 엄마의 도발
결혼 전에는 로맨스를 봐도 별 감흥이 없었다. 간접 체험하느니 직접 경험하는 편이 나았으니까. 한국 로맨틱 드라마를 보기 시작한 건,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데에 꽤 효과적이라는 주변 교포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였다. 아이들은 신기한 마음에 처음에는 몰입하는 듯하더니 금세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왜 여자는 가난하고 남자는 부자야?” “저렇게 폭력적인 남자를 왜 좋아해?” 여자를 함부로 벽에 밀치고 힘으로 제압하고 입 맞추는 재벌남, 매력적이지 않다 못해 무섭고 불편하다는 것이 공통적인 의견이었다.
로맨스가 보고 싶어요, 라고 말하는 딸들을 두고 어떤 작품을 보여줄까 고심하다 선택한 작품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었다. 매력적인 남녀 주인공이 딸아이들을 즐겁게 해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결과는? 로맨스물에 목말라하면서도 몰입하지 못했던 모녀는 함께 열광했다. 하찮은 재벌남, 귀족, 왕자 따위에 어찌 마음이 가겠는가. 로맨스라면 당신을 안고 하늘을 날아오를 줄 아는, 하울 같은 마법사 정도는 주인공으로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영원히 행복한 그들의 삶으로 끝나는 서사가 아니라, 심장을 뛰게 하는 모험과 우리가 살 세상에 대한 벅찬 상상을 선사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남자만 여자를 구원하는 환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여자도 그러하다. 당신의 나약한 속살을 더듬어 위로해줄 수 있음을 확인할 때, 뒤죽박죽 얽혀 있는 내면으로 걸어 들어가 비로소 소통하고 있음을 깨달을 때, 위기에 처한 당신을 향해 달려가 손을 내밀어줄 때, 고유한 가치를 잃고 헤매는 당신에게 세상과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라고 설득할 수 있을 때, 나는 당신의 여자로서 기쁨을 느낀다. 이와 같은 기쁨은 남녀 상호적인 것이다. 딱히 화성과 금성이라는 다른 별로 근원을 나누지 않아도 되는, 우리는 지구에서 함께 몇백만년을 살아온 같은 별 출신의 동지다. 하울을 진정 빛나게 하는 것은 그의 마법사로서의 뛰어난 재주만이 아니다. 나약함과 공존하는 용기와 배려, 세상의 고통에 반응하는 공감능력, 어리석은 실수를 반복하면서도 종국에는 온전한 세계관을 지지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아름답고 자유로운 세계 그 자체이면서 존재 전부로 바깥세상과 사람을 끌어안는 남자, 그리고 이러한 설명은 여주인공 소피에게도 해당하는 묘사이다. 마녀의 저주로 아흔살 할머니의 몸으로 살아가는 그녀에게는, 저주와 함께 집을 나와서야 비로소 인생 여정을 제힘으로 시작했다는 아이러니 또한 있다. 길을 떠난 그녀의 고단함은 아흔의 신체가 주는 피로함으로 배가 되지만, 겹겹의 고단함은 인생 자체가 우리에게 내린 여정의 축소판일지도 모른다. 그 켜켜이 싸인 막을 뚫고 18살 소녀인 자신을 알아봐주는 누군가가 있었음을 깨달았을 때 얻었을 위안이 얼마나 황홀한 것이었을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아직 연애를 시작하지 못한 딸들과 연애의 설렘을 잠시 잊은 엄마는 잠깐의 영화감상으로 더 많은 소통의 계기를 누렸다. 같은 별 출신이라는 건 나이와 성별을 뛰어넘어 멋진 일이 분명했다. 여러모로 로맨스는 필요하다.
11년차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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