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가족
타짜, 우리 할머니
타짜, 우리 할머니
▶ 다른 정치적 성향과 말투로 이해하기 어려운 가족 구성원이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입니다. 함께 살다 보면 그런 가족도 그러려니 받아들여지는 순간이 있지요. 화투판에서 돈을 잃고 돌아오면 딸들의 머리를 쥐어박던 ‘타짜’ 박보옥 할머니는 구십 평생 불평불만과 맥락 없는 이야기로 가족들을 당황하게 합니다. 그래도 일주일에 세번은 모이는 박 할머니네 3대 가족의 진득한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1926년 평양에서 태어난 박보옥 할머니는 ‘타짜’다. 한번 화투패를 잡으면 한자리에서 3시간을 일어나지 않는다. 그에겐 60여년간 화투판에서 세월을 함께 보낸 친구들이 있다. 교회 노인 모임인 ‘안나회’에서 고운 옷을 입고 경건한 얼굴로 찬송가를 부르는 박 할머니와 타짜 박씨는 같은 인물이다. 1960년대부터 가족 생계를 위해 집집이 돌며 ‘코티분’(코티 파우더)이나 밀수입 화장품을 팔던 박씨는 장사를 하며 화투를 배웠다. 그가 도매상에서 물건을 받아오는 날은 박씨 일가가 사는 한옥에 긴장감이 흘렀다. 화장품 밀수업자, 판매상들은 일주일치 월급을 두고 노름을 벌였고 박씨가 화투판에서 돈이라도 잃는 날이면 얼굴이 벌게져 집에 들어왔다. 하이힐을 신었는데도 쿵쿵쿵, 발소리와 꽥 내지르는 고함이 한옥을 울렸다. “집안 꼴이 이게 뭐가! 니년들이 이 모양으로 퍼질러 있으니 재수가 없어 돈을 잃디!” 화난 박씨의 손에 딸들의 책이 찢겨 나가고, 머리가 쥐어박혔다.
1960년대부터 가족생계 위해
통금시간까지 화장품을 팔며
화투를 배웠던 박보옥 할머니
돈 잃는 날 집에 비상 걸렸지
전쟁과 가난속에 낳은 다섯 딸
일주일에 세번은 한자리 모여
옛이야기 논하다 눈물과 울화통
그래도 꽤 진득한 가족 아닌가 박씨가 구십년을 사는 동안 평생 읽은 책은 다섯권이 안 된다. 박씨 스스로 그렇게 말을 하는데 사실 가족들은 그보다 적을 거라고 예상한다. 박씨가 존경하는 위인은 주로 시대의 권력자요, 착취자다. 박씨의 어머니는 일제 강점기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일본 순사에게 끌려가 죽다 살아났고 그때부터 다리를 절게 됐다고 한다. 그걸 알면서도 박씨는 입이 마르고 닳도록 일본을 예찬한다. “일본 사람은 말이디, 그렇게 깔끔하고 청결해. 꼭 화장실 변기 앉을 땐 휴지를 깔고 앉는데 너들도 휴지를 깔고 앉으라우.” “일본 사람들의 밥상머리 예절을 배워야 해.” 박씨가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은 박정희다. 1960~70년대 고위직 부인에게 밀수입 화장품을 팔았는데 “내가 이거 위에 찌르면 박씨 너, 어떻게 되는지 알지?”라고 말할 때면 무릎을 꿇고 부인에게 빌었다. 통금 시간에 집집이 돌며 화장품을 팔다 걸리면 형사들에게 뺨을 맞거나 물건과 돈을 뺏겼다. 경제적으로 능력이 없는 남편을 대신해 악착같이 돈을 버느라 성찰 같은 사치를 부릴 여유는 없었다. 사실 국가로부터 혜택받은 것도 크게 없지만, 박씨는 늘 믿을 건 정부밖에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텔레비전에 야당 의원이 나올 때면 “빨갱이들!”이라고 했다. 박씨의 화법은 예나 지금이나 그만의 특징이 있다. 과장스럽고 때로 비장하다. 문제는 조금 맥락이 없다는 점이다. 어느 날이었다. 손자의 취업을 축하하는 날, 박씨 일가는 꽤 호사스러운 한정식집에 모였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나이 오십에 행복이란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박씨는 얼굴을 찡그리며 갑작스레 큰 소리로 슬픔을 뱉어 냈다. 딸들은 또 시작됐구나 하는 표정으로 서로 눈빛을 교환할 뿐 입을 다물었다. “니들 애비 사업 망하고, 내 나이 마흔에도 친척 집 아쌔끼 밥해 먹였다. 난 갈비만 보면 그때 생각이 난다.” 그날 가족 모임은 어색하게 끝이 나고야 말았다. 밥 한그릇을 먹고서도 “소화가 안 돼 쬐~끔 먹었다”고 했고, 불리한 이야기만 나오면 “귀가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옆방에서 통화하는 소리를 듣고도 큰 소리로 참견하는 것을 보면 박씨의 청력이 심각하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박씨의 아침은 자조로 시작된다. “무릎이 굳어서 안 펴지네. 늙으면 죽어야지.” 화장실 문턱을 밟을 때도, 틀니를 들어 잇몸에 끼우면서도 큰 소리로 불만을 표출했다. 머리가 아플 때는 이렇게 외쳤다. “머리가 망치로 쿵! 쿵! 치는 것처럼 울린다. 누구 아스피린 없네?” 박씨가 전쟁과 가난 속에 낳은 다섯 딸은 일주일에 세번은 모인다. 첫딸은 박씨가 휴전선을 넘던 그해에 태어났고, 한국전쟁으로 길에 주검이 쌓이던 시절에 둘째 딸이 세상에 나왔다. 박씨도 가끔 셋째부터 다섯째 딸까지 어떻게 낳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다섯 딸들과 박씨는 그렇게 만나고도 매일 전화를 하는데 박씨가 첫째에게, 둘째가 넷째에게, 다섯째가 넷째에게 이야기를 전하는 식이다. 이들은 만날 때마다 지겹지도 않은지 40년도 더 지난 과거를 논한다. 그때 박씨에게 몇째 딸이 맞았고 무슨 옷을 입었으며 다른 딸들은 왜 보고서도 말리지 않았는지 등 시시콜콜한 쟁점들이다. 신기한 것은 동일 사건에 대한 기억이 다르다는 점이다. 한 사건에 대한 동일 진술자가 셋 이상 확보될 때는 그래도 이야기에 결론이 난다. 박씨가 옛날이야기를 하다 눈물을 쏟아내거나, ‘타짜’ 박씨에게 맞았던 딸들도 세월 지난 일에 울화통을 터뜨린다. 그래도 주구장창 모이니 꽤 진득한 가족이라 할 수 있겠다. 변덕스러운 박씨에게도 일관된 것이 있으니 바로 화투다. 딸, 손녀들과 어울려 맛집을 찾았다가도 박씨는 식당 명함을 챙기고, 버스나 기차를 타고 이곳에 어떻게 오는지 식당 주인에게 길을 묻는다. 60여년간 화투를 친 할매들과 오기 위해서다. “왜 또 화투판에 명함 내밀려고?” 딸들은 맛있는 걸 먹고 가족이 아니라 ‘화투 할매’를 생각하냐며 눈을 흘긴다. 박씨는 수군거리는 딸들의 목소리를 귓등으로 흘려버린 채 식당 주인에게 음식이 맛있었다며 칭찬하고 명함을 챙긴다. 식당 문을 나와 차로 가는 길, 박씨는 큰 소리로 중얼거린다. “지 에미한테 날겨드는 년들.” 박씨와 함께 사는 막내딸이 입을 씰룩거리며 목소리를 흉내 내다가 웃음을 터뜨린다. 박씨를 부축하던 손녀도 입꼬리를 아래로 쭉 내리고 억지로 웃음을 참는다. 사실 1920년대부터 지금까지 질곡의 근현대사를 겪은 박씨의 몸에 균형적인 지식 같은 것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귀엽거나, 고집스럽거나. 그게 또 박씨의 매력이다. 이해하기 힘들긴 하지만. 박씨의 외손녀
통금시간까지 화장품을 팔며
화투를 배웠던 박보옥 할머니
돈 잃는 날 집에 비상 걸렸지
전쟁과 가난속에 낳은 다섯 딸
일주일에 세번은 한자리 모여
옛이야기 논하다 눈물과 울화통
그래도 꽤 진득한 가족 아닌가 박씨가 구십년을 사는 동안 평생 읽은 책은 다섯권이 안 된다. 박씨 스스로 그렇게 말을 하는데 사실 가족들은 그보다 적을 거라고 예상한다. 박씨가 존경하는 위인은 주로 시대의 권력자요, 착취자다. 박씨의 어머니는 일제 강점기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일본 순사에게 끌려가 죽다 살아났고 그때부터 다리를 절게 됐다고 한다. 그걸 알면서도 박씨는 입이 마르고 닳도록 일본을 예찬한다. “일본 사람은 말이디, 그렇게 깔끔하고 청결해. 꼭 화장실 변기 앉을 땐 휴지를 깔고 앉는데 너들도 휴지를 깔고 앉으라우.” “일본 사람들의 밥상머리 예절을 배워야 해.” 박씨가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은 박정희다. 1960~70년대 고위직 부인에게 밀수입 화장품을 팔았는데 “내가 이거 위에 찌르면 박씨 너, 어떻게 되는지 알지?”라고 말할 때면 무릎을 꿇고 부인에게 빌었다. 통금 시간에 집집이 돌며 화장품을 팔다 걸리면 형사들에게 뺨을 맞거나 물건과 돈을 뺏겼다. 경제적으로 능력이 없는 남편을 대신해 악착같이 돈을 버느라 성찰 같은 사치를 부릴 여유는 없었다. 사실 국가로부터 혜택받은 것도 크게 없지만, 박씨는 늘 믿을 건 정부밖에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텔레비전에 야당 의원이 나올 때면 “빨갱이들!”이라고 했다. 박씨의 화법은 예나 지금이나 그만의 특징이 있다. 과장스럽고 때로 비장하다. 문제는 조금 맥락이 없다는 점이다. 어느 날이었다. 손자의 취업을 축하하는 날, 박씨 일가는 꽤 호사스러운 한정식집에 모였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나이 오십에 행복이란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박씨는 얼굴을 찡그리며 갑작스레 큰 소리로 슬픔을 뱉어 냈다. 딸들은 또 시작됐구나 하는 표정으로 서로 눈빛을 교환할 뿐 입을 다물었다. “니들 애비 사업 망하고, 내 나이 마흔에도 친척 집 아쌔끼 밥해 먹였다. 난 갈비만 보면 그때 생각이 난다.” 그날 가족 모임은 어색하게 끝이 나고야 말았다. 밥 한그릇을 먹고서도 “소화가 안 돼 쬐~끔 먹었다”고 했고, 불리한 이야기만 나오면 “귀가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옆방에서 통화하는 소리를 듣고도 큰 소리로 참견하는 것을 보면 박씨의 청력이 심각하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박씨의 아침은 자조로 시작된다. “무릎이 굳어서 안 펴지네. 늙으면 죽어야지.” 화장실 문턱을 밟을 때도, 틀니를 들어 잇몸에 끼우면서도 큰 소리로 불만을 표출했다. 머리가 아플 때는 이렇게 외쳤다. “머리가 망치로 쿵! 쿵! 치는 것처럼 울린다. 누구 아스피린 없네?” 박씨가 전쟁과 가난 속에 낳은 다섯 딸은 일주일에 세번은 모인다. 첫딸은 박씨가 휴전선을 넘던 그해에 태어났고, 한국전쟁으로 길에 주검이 쌓이던 시절에 둘째 딸이 세상에 나왔다. 박씨도 가끔 셋째부터 다섯째 딸까지 어떻게 낳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다섯 딸들과 박씨는 그렇게 만나고도 매일 전화를 하는데 박씨가 첫째에게, 둘째가 넷째에게, 다섯째가 넷째에게 이야기를 전하는 식이다. 이들은 만날 때마다 지겹지도 않은지 40년도 더 지난 과거를 논한다. 그때 박씨에게 몇째 딸이 맞았고 무슨 옷을 입었으며 다른 딸들은 왜 보고서도 말리지 않았는지 등 시시콜콜한 쟁점들이다. 신기한 것은 동일 사건에 대한 기억이 다르다는 점이다. 한 사건에 대한 동일 진술자가 셋 이상 확보될 때는 그래도 이야기에 결론이 난다. 박씨가 옛날이야기를 하다 눈물을 쏟아내거나, ‘타짜’ 박씨에게 맞았던 딸들도 세월 지난 일에 울화통을 터뜨린다. 그래도 주구장창 모이니 꽤 진득한 가족이라 할 수 있겠다. 변덕스러운 박씨에게도 일관된 것이 있으니 바로 화투다. 딸, 손녀들과 어울려 맛집을 찾았다가도 박씨는 식당 명함을 챙기고, 버스나 기차를 타고 이곳에 어떻게 오는지 식당 주인에게 길을 묻는다. 60여년간 화투를 친 할매들과 오기 위해서다. “왜 또 화투판에 명함 내밀려고?” 딸들은 맛있는 걸 먹고 가족이 아니라 ‘화투 할매’를 생각하냐며 눈을 흘긴다. 박씨는 수군거리는 딸들의 목소리를 귓등으로 흘려버린 채 식당 주인에게 음식이 맛있었다며 칭찬하고 명함을 챙긴다. 식당 문을 나와 차로 가는 길, 박씨는 큰 소리로 중얼거린다. “지 에미한테 날겨드는 년들.” 박씨와 함께 사는 막내딸이 입을 씰룩거리며 목소리를 흉내 내다가 웃음을 터뜨린다. 박씨를 부축하던 손녀도 입꼬리를 아래로 쭉 내리고 억지로 웃음을 참는다. 사실 1920년대부터 지금까지 질곡의 근현대사를 겪은 박씨의 몸에 균형적인 지식 같은 것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귀엽거나, 고집스럽거나. 그게 또 박씨의 매력이다. 이해하기 힘들긴 하지만. 박씨의 외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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