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가족
이혼 일기
치밀한 정리작업 마치고…우리는 영원히 이별했다
이혼 일기
치밀한 정리작업 마치고…우리는 영원히 이별했다
▶ 텔레비전 드라마가 이혼을 풀어가는 방식은 두 가지입니다. <사랑과 전쟁>처럼 불륜과 돈 문제로 헤어지는 막장이거나, 이혼 남녀가 다시 사랑에 빠지게 되는 로맨틱코미디물입니다. 이 극단의 설정에는 이혼의 실상보다 판타지가 더 많이 녹아 있습니다. 여기, 갈등을 겪던 부부가 협의와 준비를 거쳐 헤어짐에 이르는 과정을 기록한 이혼 일기가 있습니다. 이혼은 세상의 수많은 이별 가운데 한 종류입니다.
우리 이혼은 이러했다. 헤어짐을 앞두고 등산화와 니트 원피스를 이별 선물로 주고받았다. 서울 근교로 이별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각자의 집에 가져갈 그릇과 가구를 나눴다. 치솟은 전세가 때문에 이 부동산에서 저 부동산으로 집을 알아보는 나를 따라다니며 남편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찐 꽃게에 술을 마시기도 했다. 이혼을 하기 전 약 한달간의 시간, 우린 가끔 싸웠지만 그건 이렇게 헤어질 수밖에 없는 한탄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가 살던 아파트에 다른 가족이 들어오고, 각자의 집으로 이사를 가기로 약속한 그날이 우리의 이혼일이었다.
치욕스러운 이별은 싫었다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었다
선물 주고받고 여행 다녀오고
각자 그릇과 가구를 나눴다
증발한 사랑 앞에 무력했다
아련한 기혼남녀의 헤어짐
“죽을 때까지 안 나타날게”
마지막 전화통화를 했다
이렇게 헤어지기로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서로에게 미쳐 사랑했고 전쟁 같은 결혼생활을 끝내기로 결론을 내린 이상 헤어지는 과정마저 잔인하게 상대를 할퀴고 싶진 않았다. 물론 두 사람이 동시에 이혼에 합의를 한 것은 아니었다. 한쪽이 원했고, 다른 한쪽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돌이킬 수 없는 갈등의 지독한 반복, 지울 수 없는 상처의 주고받음을 신물나게 겪은 그와 나는 적어도 이별을 치욕스럽게 맞고 싶진 않았다. 함께한 5년 가운데 고통스러운 시간을 제외해도 그 끝엔 아름다운 청춘이 있고, 그 청춘에 안녕을 말하고 싶었다. 이별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이혼이란 말이 처음 나왔을 때 상대에게 새로운 이성이 생긴 건지 의심스러워했고, 청춘을 바친 억울함이 분노와 좌절감으로 드러나 악다구니를 퍼부었다. 상대의 이메일과 은행계좌, 휴대전화를 뒤져보았다. 조그마한 재산을 나누는 과정에서도 못미더워했으며, 앞으로 살아갈 경제적 고민을 하기도 했다. 우리는 서로의 바닥, 어둡고 차가운 끝과 끝을 확인했다. 악착같은 나날을 지나 헤어질 수밖에 없겠구나 받아들였고, 돌이킬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른스럽지 못해서, 지혜롭지 못해서 상처를 주고받았는데 포기 상태가 되어서야 너도 참 아팠겠구나 싶었다. 이별여행으로 간 파주에서 무릎을 꿇고 꺽꺽거리고 우는 그 남자의 등을 두드려주다 오래도록 그 남자의 설움을 외면해온 나 자신이 싫어졌다. 가을과 겨울 사이 추운 어느 날, 이혼을 하루 앞둔 날이 다가왔다. 우리는 이사 준비를 하며 라면 상자에 공유하던 물건을 각자 담았다. “에어컨은 더위 못 참는 내가 쓸게.” “그래. 나는 땀 잘 안 흘리니까.” “비데는 니가 해.” “넌 비데 있어도 진짜 안 쓰더라.” “난 비데를 왜 써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어.” “책상은 나 주면 안 돼?” “그건 나도 필요한데.” 지극히 실용적인 대화들이 오갔다. 좋은 그릇을 싸게 구입해 보겠다고 도매시장까지 가서 샀던 것들과 손님상을 치르느라 급하게 장만했던 접시와 컵들을 상자에 담다가 아직 포장을 뜯지도 않은 일본풍 나무젓가락을 발견했다. “이거 예쁘다. 나 가지면 안 돼?” “이건 안 돼. 나중에 혹시, 만약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 젓가락으로 같이 밥 먹자.” 그날 밤, 헤어짐을 몇 시간 앞두고 우리는 동네 술집에 마주 앉았다. 연인과 부부로 5년간 일상을 함께한 우리가 내일이면 타인이 된다는 사실 앞에서 슬프고 안타깝기보다는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결혼만 했을 뿐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으니 법원에 갈 일도 없었다. 맥주 한 잔을 나누는 것으로 우리는 이별 행사를 치렀다. “부부라는 이유만으로 살고 있는 거였잖아.” “우리가 그랬었나….” 술집에서 집으로 밤길을 터벅터벅 걸었다. 자려고 침대에 누웠지만 뺨 위로 눈물이 흘렀다. 옆에 누운 그 남자도 눈으로 마음으로 울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날 우리는 서로를 불쌍하게 여기며 잠이 들었다. 아침이 오고, 예약해둔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집에 찾아왔다. 우리는 이사 가는 부부인 척했다.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왜 한 아파트에 있는 물건이 두 장소로 나뉘어 옮겨지는지 물었지만, 남편은 대충 얼버무렸다. 남편은 내가 살 집에 찾아와 가스레인지에 불은 잘 들어오는지, 창은 안전한지 이것저것 보았다. 그 남자는 우리가 함께 살던 아파트로 돌아가 나머지 짐을 쌌고, 자신만의 집으로 떠났다. 우리의 공식적인 이혼이었다. 홀로서기는 어려웠다. 함께 살던 기간에 서로의 생활과 물건과 엉켰는데 그걸 한순간에 정리하기는 쉽지 않았다. 집안 곳곳에서 그 사람의 물건이 튀어나왔고 상자 하나에 가득 찼을 때쯤 전남편의 직장 주소로 부쳤다. 아무 생각 없이 옷장에서 잘 입지 않던 재킷을 꺼냈는데 옷 안쪽에서 그 남자의 이름과 함께 살던 아파트 동·호수가 적힌 세탁소 마크를 발견할 때는 한동안 망연자실했다. 주말에는 할 일 없이 시간이 많아졌고 누구를 만나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 남자도 그랬다. 간장, 참기름, 깨소금을 넣고 계란비빔밥을 만들어 몇 숟가락 뜨다 부엌 하수구에 그릇을 쏟아버렸다. 함께 살던 여자가 만들던 그 비빔밥 맛이 나질 않아서, 그 맛을 기억하고 그것과 다름에 반응하는 혀가 징그러워졌다고 했다. 우리는 이혼하고도 서너번 더 만났고, 안부를 물으며 서로 미안해했다. 1년 몇 개월이 지나 마지막 전화 한 통을 끝으로 우리는 다시 연락을 하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을게.” 시간이 흘러 그와 나는 주소를 알 수 없는 곳으로 각자 이사를 갔고 전화번호를 바꾸며 타인으로서 마침표를 찍었다. 이혼도 이별의 한 종류일 뿐인데 세상에 설명하는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이혼했다”는 말을 “이별했다”는 말로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불륜, 소송, 돈 문제, 성적으로 맞지 않음…. 이혼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이미 각인돼 있었다. 인공호흡기를 대고 법률적 사망선고를 유예한 채 생명을 유지하느니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인공호흡기를 제거해 부부라는 관계를 안락사시켰다. 열렬히 사랑했으나 증발한 사랑 앞에 무력했다. 세상의 모든 여자와 남자의 이별처럼 기혼 남녀의 헤어짐도 아프고 아련하다. 어느 날 문득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었다
선물 주고받고 여행 다녀오고
각자 그릇과 가구를 나눴다
증발한 사랑 앞에 무력했다
아련한 기혼남녀의 헤어짐
“죽을 때까지 안 나타날게”
마지막 전화통화를 했다
이렇게 헤어지기로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서로에게 미쳐 사랑했고 전쟁 같은 결혼생활을 끝내기로 결론을 내린 이상 헤어지는 과정마저 잔인하게 상대를 할퀴고 싶진 않았다. 물론 두 사람이 동시에 이혼에 합의를 한 것은 아니었다. 한쪽이 원했고, 다른 한쪽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돌이킬 수 없는 갈등의 지독한 반복, 지울 수 없는 상처의 주고받음을 신물나게 겪은 그와 나는 적어도 이별을 치욕스럽게 맞고 싶진 않았다. 함께한 5년 가운데 고통스러운 시간을 제외해도 그 끝엔 아름다운 청춘이 있고, 그 청춘에 안녕을 말하고 싶었다. 이별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이혼이란 말이 처음 나왔을 때 상대에게 새로운 이성이 생긴 건지 의심스러워했고, 청춘을 바친 억울함이 분노와 좌절감으로 드러나 악다구니를 퍼부었다. 상대의 이메일과 은행계좌, 휴대전화를 뒤져보았다. 조그마한 재산을 나누는 과정에서도 못미더워했으며, 앞으로 살아갈 경제적 고민을 하기도 했다. 우리는 서로의 바닥, 어둡고 차가운 끝과 끝을 확인했다. 악착같은 나날을 지나 헤어질 수밖에 없겠구나 받아들였고, 돌이킬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른스럽지 못해서, 지혜롭지 못해서 상처를 주고받았는데 포기 상태가 되어서야 너도 참 아팠겠구나 싶었다. 이별여행으로 간 파주에서 무릎을 꿇고 꺽꺽거리고 우는 그 남자의 등을 두드려주다 오래도록 그 남자의 설움을 외면해온 나 자신이 싫어졌다. 가을과 겨울 사이 추운 어느 날, 이혼을 하루 앞둔 날이 다가왔다. 우리는 이사 준비를 하며 라면 상자에 공유하던 물건을 각자 담았다. “에어컨은 더위 못 참는 내가 쓸게.” “그래. 나는 땀 잘 안 흘리니까.” “비데는 니가 해.” “넌 비데 있어도 진짜 안 쓰더라.” “난 비데를 왜 써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어.” “책상은 나 주면 안 돼?” “그건 나도 필요한데.” 지극히 실용적인 대화들이 오갔다. 좋은 그릇을 싸게 구입해 보겠다고 도매시장까지 가서 샀던 것들과 손님상을 치르느라 급하게 장만했던 접시와 컵들을 상자에 담다가 아직 포장을 뜯지도 않은 일본풍 나무젓가락을 발견했다. “이거 예쁘다. 나 가지면 안 돼?” “이건 안 돼. 나중에 혹시, 만약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 젓가락으로 같이 밥 먹자.” 그날 밤, 헤어짐을 몇 시간 앞두고 우리는 동네 술집에 마주 앉았다. 연인과 부부로 5년간 일상을 함께한 우리가 내일이면 타인이 된다는 사실 앞에서 슬프고 안타깝기보다는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결혼만 했을 뿐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으니 법원에 갈 일도 없었다. 맥주 한 잔을 나누는 것으로 우리는 이별 행사를 치렀다. “부부라는 이유만으로 살고 있는 거였잖아.” “우리가 그랬었나….” 술집에서 집으로 밤길을 터벅터벅 걸었다. 자려고 침대에 누웠지만 뺨 위로 눈물이 흘렀다. 옆에 누운 그 남자도 눈으로 마음으로 울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날 우리는 서로를 불쌍하게 여기며 잠이 들었다. 아침이 오고, 예약해둔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집에 찾아왔다. 우리는 이사 가는 부부인 척했다.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왜 한 아파트에 있는 물건이 두 장소로 나뉘어 옮겨지는지 물었지만, 남편은 대충 얼버무렸다. 남편은 내가 살 집에 찾아와 가스레인지에 불은 잘 들어오는지, 창은 안전한지 이것저것 보았다. 그 남자는 우리가 함께 살던 아파트로 돌아가 나머지 짐을 쌌고, 자신만의 집으로 떠났다. 우리의 공식적인 이혼이었다. 홀로서기는 어려웠다. 함께 살던 기간에 서로의 생활과 물건과 엉켰는데 그걸 한순간에 정리하기는 쉽지 않았다. 집안 곳곳에서 그 사람의 물건이 튀어나왔고 상자 하나에 가득 찼을 때쯤 전남편의 직장 주소로 부쳤다. 아무 생각 없이 옷장에서 잘 입지 않던 재킷을 꺼냈는데 옷 안쪽에서 그 남자의 이름과 함께 살던 아파트 동·호수가 적힌 세탁소 마크를 발견할 때는 한동안 망연자실했다. 주말에는 할 일 없이 시간이 많아졌고 누구를 만나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 남자도 그랬다. 간장, 참기름, 깨소금을 넣고 계란비빔밥을 만들어 몇 숟가락 뜨다 부엌 하수구에 그릇을 쏟아버렸다. 함께 살던 여자가 만들던 그 비빔밥 맛이 나질 않아서, 그 맛을 기억하고 그것과 다름에 반응하는 혀가 징그러워졌다고 했다. 우리는 이혼하고도 서너번 더 만났고, 안부를 물으며 서로 미안해했다. 1년 몇 개월이 지나 마지막 전화 한 통을 끝으로 우리는 다시 연락을 하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을게.” 시간이 흘러 그와 나는 주소를 알 수 없는 곳으로 각자 이사를 갔고 전화번호를 바꾸며 타인으로서 마침표를 찍었다. 이혼도 이별의 한 종류일 뿐인데 세상에 설명하는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이혼했다”는 말을 “이별했다”는 말로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불륜, 소송, 돈 문제, 성적으로 맞지 않음…. 이혼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이미 각인돼 있었다. 인공호흡기를 대고 법률적 사망선고를 유예한 채 생명을 유지하느니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인공호흡기를 제거해 부부라는 관계를 안락사시켰다. 열렬히 사랑했으나 증발한 사랑 앞에 무력했다. 세상의 모든 여자와 남자의 이별처럼 기혼 남녀의 헤어짐도 아프고 아련하다. 어느 날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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