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가족관계 증명서
서울 한강 뚝섬 유원지에 조그마한 중국집이 있었다. 6년 전 큰누나와 매형이 운영하던 이 중국집은 규모는 작지만 열심히 일하는 만큼 벌이가 제법이었다. 누나네 가게에서 배달을 하던 나는 3년 전부터 이들과 연락을 끊고 산다. 가족끼리 돈거래를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듯, 같은 공간에서 함께 일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연탄 장사를 도왔던 나는 가난이 싫고 배우지 못함이 무서웠다. 세상 사람들은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상대방의 직업을 갖고 멸시와 천대의 눈길을 보낸다는 사실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지역 대학에서 석사를 마치고 한 회사에 입사했다. 그러나 요령만 피우며 남을 험담하는 회사 사람들이나, 대기업 직원이 협력업체 직원을 함부로 대하는 분위기가 싫었다.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서른일곱살에 큰누나의 중국집에서 배달을 시작했다. 작은 가게였지만 가족과 일을 하며 규모를 키워나가는 기쁨이 있을 것 같았다.
중국집은 개업한 지 6주일 만에 토·일요일 매출이 일일 100만원을 넘을 만큼 번창했다. 큰매형과 누나 그리고 내가 매일 전단지를 돌리고 바쁘게 움직이던 노력의 결과였기에 우리는 행복했다. 중국집이 1년을 넘기자 평일 50만원이던 매출도 80만원을 넘어섰고 배달원과 주방보조원도 1명씩 더 두었다. 다른 중국집보다 25% 저렴한 가격으로 동네에서는 ‘양심가게’로 입소문이 났다. 그만큼 다른 중국집보다 힘들게 뛰어다녀야 했고 배달을 하다 교통사고를 여러 번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를 ‘짱깨’로 보는 차가운 시선과 마주하는 일은 매번 쉽지 않았다. 배달을 가다 갖고 있는 지번도가 흐릿해서 근처 택배회사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잠깐 도면 좀 보고 갈게요”라고 말하자 택배회사 직원은 “어이, 짱깨 아저씨! 그게 도면이 아니라 지번도지”라고 대답하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내가 돌아서자 택배회사 직원은 “짱깨!”라고 외치며 또다시 웃음보를 터뜨렸다. 중국집에서 배달을 하기 전 설계를 했기 때문에 ‘도면’이란 말이 입에 붙어 나온 실수였다. 중국집에서 일하며 이보다 더 무례한 사람들을 자주 만났지만 단골손님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참고 또 참았다.
매출이 오를수록 큰누나와 매형과도 갈등이 쌓여갔다. 함께 고생을 하면서도 서로 격려하지 못했고, 가족이라서 그랬는지 작은 행동과 말투에도 상처를 주고받았다. 내 눈에는 장사가 잘될수록 큰누나가 ‘명품 아줌마’를 닮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매형은 때로 대책 없이 남 탓을 하거나 욕설을 내뱉었다. 결국 중국집에서 일한 지 3년이 지난 어느 날, 서로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중국집에서 돌아서고야 말았다.
지금도 나는 큰누나, 매형과 전화 한 통 하지 않는다. 풀지 못하는 감정이 세상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연락을 끊고 산 시간들이 쌓이다 보니 남남이 된 관계를 돌이키기 어려웠다. 하지만 혈육이라 그런지 연락 한번 안 하고 사는 큰누나가 늘 잘되길 바라는 마음이 남아 있다. 만약 용기를 내어 다시 전화한다면 이렇게 한번 외쳐보고 싶다. “여기 짜장면 하나 배달해 주세요!”라고.<끝>
몇년째 짜장면을 주문하지 못한 남동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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