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가족관계 증명서
엄마, 미안해. 올해는 기필코 결혼할 거라던 그 남자랑 사실 헤어졌어. 꽤 됐어. 게다가 차였어. 엊그제 오후, 방바닥에 나란히 누워 “올해는 결혼하겠냐”는 엄마의 말에 “누구나 다 하는 결혼, 내가 왜 못 해? 난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라고. 걱정 마. 올해는 할 거야”라고 장담했지. 하지만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 맞아. 엄마가 실망하고 걱정할까봐 남자친구랑 헤어진 거 말 못 하고 사귀고 있는 척했어. 무려 일년 가까이 말이야.
태어난 지 100일부터 한시도 나랑 떨어져본 적 없는 화상 흉터들. 그나마 옷으로 가릴 수 있는 부위에 흉터가 있어 다행이지만 누군가 내게 다가오면 항상 먼저 얘기해야만 했어. 사실 내 몸엔 흉터가 있다고. 물론 지금까지 이 말을 해서 나를 떠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어. 오히려 위로해주고 감싸주었지. 그런데도 이 말을 꺼내기가 두렵고 힘들어. 엄마, 어른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난 흉터가 부끄러워.
그래서 더욱 떠나간 그 남자를 놓지 못하는 거 같아. 한여름, 10년 지기 친구들 앞에서조차 꽁꽁 싸두었던 내 흉터를 그 사람 앞에선 거리낌 없이 보일 수 있었어. 반들반들한 오른손이 아닌 울퉁불퉁 떡진 왼손을 잡고 거리를 거닐었던 남자도 그 사람이 처음이었어. 이것이 내가 그 사람에게 차이고도 못 잊는 가장 큰 이유겠지.
5년 전 “네 결혼 자금이다”라며 통장을 내밀던 엄마. 엄마는 내 흉터가 자신의 잘못으로 여겨졌는지 다른 형제들보다 나를 더 애틋하게 여겼어. 장마철엔 비 새고 겨울엔 물탱크가 꽁꽁 얼어버려 물이 안 나오는 집에 살면서도 컴퓨터며 피아노며 미술이며 배우고 싶은 거 다 배우게 해줬고, 별로 잘난 머리도 아닌데 가고 싶어한단 이유만으로 유학까지 보내줬어.
나, 이미 늦은 나이인 거 아는데 조금만 더 그 사람 기다릴게. 아무리 노력해도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사람 마음인 것 같아. 이번에도 안 되면 그땐 정말 정신 차리고 멀쩡하게 내 자리로 돌아갈게. 차마 직접 말하지 못했지만 이렇게라도 글을 쓰면 진심이 엄마에게 닿을 수 있을까.
아, 맞다. 아빠가 엄마 선물로 준 저금통 말이야. 심심해서 한번 세어봤는데 10만원이 넘더라. 엄마는 지폐 한 장 없이 죄다 동전뿐이라며 어이없어했지만 그 동전들이 대부분 500원짜리더라고. 그러니 아빠 용돈 좀 올려줘! 엄마, 이번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고맙고 미안해.
일년 만에 진실을 고백하는 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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