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6월8일 치러진 총선에서 박정희 정권은 노골적인 부정·불법 선거운동으로 또다시 대학생·고교생을 비롯한 전국적인 규탄시위를 불러일으켰다. 사진은 그해 7월10일 공화당이 단독 개원을 강행하자 야당인 신민당의 의원 당선자와 당원들이 서울 태평로 당시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서 ‘선거 무효’를 주장하며 연좌농성을 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27)
한일회담에 대한 학생세력, 야당 정치인, 각계 지식인의 격렬한 반대를 미국의 후원으로 돌파한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의 베트남전쟁 파병 요청에 적극 호응함으로써 미국의 지지를 확신했다. 그 여세로 1967년 5월3일의 ‘제6대 대통령 선거’를 자신 있게 맞았다.
당시 야당은 한일회담 비준 파동으로 분당되었다가 다시 윤보선·유진오·백낙준·이범석이 민중당과 신한당의 합당에 합의해 신민당으로 통합한 뒤 대통령 후보에 윤보선이 나서고, 유진오가 당수를 맡아 대선에 임했다. 하지만 116만표 차로 지고 말았다.
윤보선은 60~7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바가 실로 컸으나, 61년 박정희 군사쿠데타 당시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으로서 이를 용납한 점, 6대 대선에서 박정희 후보를 용공세력으로 몰아 오히려 영호남에서 표를 대거 잃은 점은 최대 실책으로 꼽힌다.
박정희는 6대 대선에서 승리하자, 본격적인 장기집권 공작에 돌입했다. 첫번째 장기집권 프로젝트는 당장 67년 6월8일의 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공화당이 “개헌선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당시 3공화국 헌법에서는 대통령에게 임기 4년, 중임만 허용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연임을 할 수 있는 개헌이 필요했던 것이다.
박 정권은 공무원·정치군인·중앙정보부·검찰·경찰·공화당 등 모든 공조직을 동원해 지역개발공약·고무신·막걸리 등으로 공공연한 매수를 하고 공개투표·대리투표·올빼미표·무더기표·환표를 자행했다. 이승만 정권 때 못지않은 부정·불법 투표를 감행한 것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공무원의 선거운동을 문제 삼자, 박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선거법 시행령’을 고쳐 대통령·국무총리·국무위원 등 별정직 공무원들이 선거운동을 할 수 있도록 했고, 그 자신 전국을 돌면서 “관광도시 개발”, “공장 건설”, “도로와 교량 건설” 등을 약속하고 다녔다.
관권선거·금권선거가 얼마나 노골적이었던지, 공화당은 국회의원 재적 171석의 개헌선인 117석을 넘어 129석(지역구 102석, 전국구 27석)을 휩쓸었고, 신민당은 45석(지역구 28석, 전국구 17석), 대중당은 겨우 1석을 확보했다.
신민당은 즉각 “선거 쿠데타”라고 반발하며 ‘6·8 부정선거’ 규탄운동에 들어갔다. 67년 여름 당시 군 복무 중이던 나는 이번에도 학생들이 앞장서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불과 2~3년 전 한일회담 반대운동 과정에서 학생운동세력은 얼마나 많은 출혈을 했던가. 나는 “학생운동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마르지 않는 샘이로구나” 내심 찬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67년 6월12일 서울대 법대생 500여명은 “공무원을 사병화하고, 국민을 매수·사기·협박·기만함으로써 이루어진 ‘6·8 선거’는 빛나는 ‘4·19 정신’의 모독이다”, “정부와 여당은 6·8 선거가 부정선거였음을 자인하고 국민적 재심판을 받고 즉각 사퇴하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서울 이화동을 거쳐 명륜동 입구로 나아가다 경찰과 대치 끝에 165명이 연행되었다. 학교로 되돌아와 농성을 하던 이들은 연행 학생들을 석방한 뒤에야 해산했고, 대학 당국은 6월17일까지 임시휴교령을 내렸다.
하지만 6월13일부터 학생들의 규탄 시위는 더 확산되었다. 서울대 문리대와 법대생들은 이날 ‘서울대 민주수호투쟁위원회’(위원장 이현배·사학과 64학번)를 결성하고 오전 11시 시위에 들어갔다. 상대생 250명, 공대생 500명, 사대생 200명, 농대생 700명, 미대생들도 휴교령 속에서 부정선거 성토대회를 열었다.
같은 날 고려대에서도 3000명이 규탄대회를 열고 ‘민권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안암동 네거리까지 나왔다 학교로 되돌아갔지만 일부는 오후 1시 반 다시 시청 앞까지 진출했다가 300명이 연행당했다. 연세대생들 2000여명도 ‘막걸리 선거 웬 말이냐?’라는 펼침막을 들고 신촌 교차로로 나왔고, 성균관대 300명도 성토대회를 했다.
6월14일에는 시위가 전국으로 번졌다. 동국대생 1500명, 경희대생 1000명, 고려대생 600명, 연세대생 2000명, 한양대생 1700명, 중앙대생 1500명, 부산대생 1000명이 거리로 나섰다.
이에 많은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지만, 6월15일부터는 고교생들까지 가세해 사흘 만에 전국의 수많은 고교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규탄의 함성이 울렸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박정희도 ‘6·8 선거의 과열 현상과 부정’을 일부 인정하는 시늉을 했다. 화성, 수원, 평택, 군산·옥구, 영천, 고창, 서천·보령 등 7개 지구 공화당 당선자를 제명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물론 서울대·고려대·연세대·성균관대·건국대 등은 부정선거 무효운동을 계속 전개할 것을 다짐했지만, 7월 초를 고비로 전국이 조기 여름방학에 들어가면서 시위는 멎었다. 정치권의 부정선거 규탄도 ‘김종필-유진오 협상’에 따라 11월27일 야당 당선자들이 의원 등록을 하고 11월29일 국회에 등원함으로써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필자/성유보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도움/강태영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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