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2월 ‘양김씨’의 분열 속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의 패배로 절망에 빠졌던 민주화운동 진영은 새 언론 <한겨레신문> 창간운동을 통해 새로운 희망과 재기의 동력을 찾을 수 있었다. 사진은 88년 5월14일 밤 서울 양평동 한겨레신문사 윤전실에서 막 찍혀 나온 ‘한겨레신문’ 창간호를 들고 기뻐하는 창간 주역들로, 왼쪽 뒤부터 심채진 편집부장, 이효재 교수, 홍성우 변호사, 성유보(필자) 초대 편집위원장, 리영희 논설고문의 모습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97)
■ 87년 대선 패배와 희망의 아이콘 ‘한겨레’
1988년 5월15일 <한겨레신문>이 창간되었다. 한겨레신문은 87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5·17 군사쿠데타’ 주역이자 전두환의 친구인 노태우가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민주 진영이 패배한 뒤 공황상태에 빠져 있던 수많은 시민들에게 내일의 민주화를 위한 희망의 새 아이콘으로 등장했다.
고 송건호 초대 사장은 창간사에서 “한겨레신문은 시종일관 이 나라의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 나라의 민주화는 남북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 특히 동족간의 군사대결을 지양하고 통일을 이룩하는 데 있어 절대적 조건이 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초대 편집위원장을 맡은 나는,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을 강렬하게 이미지화하기 위해 창간호 1면 오른쪽에 백두산 천지 사진을 크게 싣고 “6천만 그리움의 끝이자 희망의 시작 백두산 천지”라는 설명을 달았다.
앞서 87년 7월 새 신문 창간을 준비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은 자본금 마련이었다. 당시 언론계에서는 전국적 일간신문을 창간하려면 최소한 200억원 이상이 들 것이라고 추산했다. 그런데 ‘조선투위’의 정태기가 “50억원만 있으면 새 신문 창간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인쇄기술 혁명 등으로 편집·제작·인쇄 비용이 엄청나게 낮아졌다는 것이었다. 정태기는 우선 고 송건호, 고 리영희 선생, 고 이병주, 고 김태홍, 임재경, 권근술 등과 뜻을 모은 뒤, 여러 해직기자들과 새 언론 창설에 대한 꿈을 나누면서 그해 7월 말부터 자본금 모금에 나섰다. ‘새 언론 창설 연구위원회’를 꾸리고 발기인 모집 운동을 시작했다.
이어 8월31일 정태기와 권근술은 대전 근교의 어느 연수원에서 열린 ‘민통련 임시 대의원 총회’에 찾아와, 민통련과 가맹단체 간부들에게 새 언론 창설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그날 그 자리에서 나도 언론인으로 되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이어 9월 해직기자들 중심으로 196명이 새 신문 창간을 발의했고, 10월30일 전국 각계각층의 3317명이 참여한 가운데 서울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강당에서 창간 발기인대회가 열렸다.
그러나 창간 자본금 모금은 기대만큼 여의치 않았다. 12월16일 대선 직전까지 모은 자금은 10억원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대선 패배 이후 불과 두 달 만인 88년 2월25일 50억원 목표가 달성됐다. 특히 그때 광고대행사 대홍기획 국장으로 근무하던 동아투위 출신의 강정문이 퇴근하면 곧장 한겨레 창간준비위에서 출근하다시피 하며 열성을 다했다. 하지만 그는 ‘한겨레’에 입사하지 않고 끝까지 밖에서 도왔다. 그는 훗날 대홍기획의 대표이사가 되어 광고대행사의 스타가 되었으나 99년 54살의 한창나이로 먼저 떠났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었다.
■ 창간 4개월만에 바닥난 자본금 50억원
그렇게 기적처럼 자본금을 모아 새 신문을 창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운영자금이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창간 지사와 판매지국들의 적자가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본사 역시 쪼들린 까닭에 사납률을 높게 책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 고통은 고스란히 창간 지사와 지국에 전가되었다. 창간 초기 기꺼이 지사나 지국을 맡았다가 소중한 가산을 탕진한 이들이 속출했다. 내가 아는 분만 해도 김자동 선생, 문재인 부산지사장, 고 송광영 열사의 모친, 석규관 선생, 이주형 영동지국장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운영난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다. 문제의 핵심은 광고 수입의 절대 부족이었다. 한국의 광고시장은 예나 지금이나 재벌들의 손에 들어 있다. 그런데 ‘한겨레’가 창간하자마자 유가 부수 40여만부로 <조선>, <중앙>, <동아>에 이은 4위의 발행부수를 기록하고 있음에도 당시 재벌들은 “왜 우리가 ‘재벌의 적’인 한겨레에 실탄을 대주어야 하는가?”라면서 광고를 내주지 않았다. 기업의 홍보 담당자나 광고대행사로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어서, 광고국 사원들이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실적은 제자리걸음이었다.
‘한겨레’는 궁여지책으로 발전기금 모금운동에 나섰다. 88년 9월 이사회에서 70억원 증자를 결의했다. 처음에는 모금 실적이 괜찮았다. 첫 한 달 만에 10억원이, 11월에는 8억원 정도, 12월에는 6억원이 걷혔다. 그런데 해가 넘어가면서 모금 동력이 거의 사라져 버렸다.
89년 1월17일 36차 이사회에서 나는 “모금운동이 새로운 동력을 얻으려면 국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줘야 한다. 신문에 모금 광고 캠페인과 더불어 ‘모금특별위원회’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이사진들은 “그런 제안을 할 때는 무슨 복안이 있을 것 아니냐?”며 내게 모금특별위원회를 맡아서 해 달라고 결의했다. 마침 그때 나는 88년 8월 처음 도입된 ‘편집위원장 직선제 선거’에서 장윤환 선배에게 져서 ‘농업 담당 논설위원’을 맡고 있던 중이었다.
평생 돈에 대한 개념 없이 살아오던 내가 모금특위 위원장 자리를 수락한 것은, 이대로 만약 한겨레가 파산한다면 창간에 참여한 해직기자 전체가 “새 시대 새 언론의 사도”가 아니라 “사기꾼”으로 전락할 판이었기 때문이었다.
■ 밤잠 설치며 마음 졸인 ‘모금특위’ 위원들
89년 1월 말 나를 비롯해 황윤미·김선주·홍수원·고희범·윤석인·박준철·박상진 등 8명으로 ‘발전기금 모금 특별위원회’를 꾸리고, 2월 초부터 새로운 기금 모금운동에 나섰다. 모금특위는 세 가지 전략을 세웠다. 그 하나는 모금 광고를 통해 ‘한겨레’의 미래 발전 비전을 제시한다는 것, 그 둘째는 ‘특위’ 위원들이 적극적으로 투자 권유 대상자들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이 일환으로 신문 광고가 나가는 날 오후와 저녁 투자 희망자들을 위한 ‘투자설명회’도 열었다. 셋째는 한겨레 전 사원들을 모금운동에 참여시키는 것으로, 이를 위해 모금운동에 성공하면 일정한 수고비를 지급하기로 했다.
모금운동은 일상 업무 외에 가외로 하는 활동인데다, 투자를 권유하려면 상대방에게 최소한 차 한잔, 막걸리 한잔은 대접해야 할 것 아닌가? 초기에 몇 사람이 모금에 성공해서 받은 수고비로 동료들에게 한턱내기 시작하자, 임직원들의 모금운동이 순식간에 전 사원들에게 번졌다. 특위 위원들은 오후부터 밤까지는 약속된 사람들과 만나고자 곳곳을 돌아다녔고, 오전에는 다음 신문 광고 콘셉트를 무엇으로 할까를 두고 몇 시간씩 토론을 했다.
89년 2월 초부터 5월 말까지 1~2주마다 바꿔 나간 신문 광고 내용은 우리 특위 위원들의 고심의 흔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 민주화를 다지던 시대, 엄마는 무얼 하셨나요, 뒷날 우리 자식이 묻습니다” “일일 16면 ‘한겨레’를 내년부터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고속윤전기가 필요합니다” “일일 16면 ‘한겨레’를 내년부터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윤전기 설치에 사옥은 필수적입니다” “도약을 향한 제2의 도전…고속윤전기 도입 사옥 건립 위한 ‘개발본부’ 발족” “당신은 관객일 뿐입니까? 지금부터 당신과 제가 이 민주사회의 주인입니다” “한겨레의 눈으로 지구촌을 바라보지 않으시렵니까?” “바야흐로 다가오는 민족자주와 통일시대를 열어가도록 적극 성원 바랍니다” “민주화와 통일로, 세계로 뻗어나갈 ‘한겨레’, 한겨레신문을 버팀목 삼아 주십시오” “모집 총액 100억 돌파, 알찬 경영 꿋꿋한 신문, 한겨레신문에 출자하십시오. 5월15일에 마감합니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흔들리지 않는 한겨레! 어떠한 탄압에도 이겨내고 꿋꿋하게 일어서는 한겨레! 온 국민과 함께 43만 구독자, 5만여 주주가 함께하는 한겨레신문! 지금 출자하십시오. 작은 돈 모아 큰일 하는 한겨레신문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모금운동을 초과달성한 한겨레는 89년 5월21일 송건호 사장 명의로 국민들과 신규 주주들에게 감사 인사를 드릴 수 있었다. 그리하여 6월 현재 한겨레 총 자본금은 169억원으로 늘어났다. 창간 자본금 50억원, 1차 모금 24억원, 모금특위가 모금한 돈이 95억원이었다. 이로써 한겨레는 89년 하반기부터 독자배가운동, 해외 상주특파원제 도입, 자체 땅 구입과 새 사옥 건립, 새 윤전기 도입 등에 나설 수 있었다.
대선 패배 뒤 두달만에 50억 모금
기적같은 창간 뒤에도 자금난 지속 ‘사도’ 아닌 ‘사기꾼’ 전락 우려에
돈 개념 없는데도 모금특위 맡아
리영희 고문 구속 뒤 가속도 붙어 4년뒤 창간 30주년 맞는 한겨레
있으면 더 나은 신문 아니라
없어서는 안될 신문 우뚝 서야 ■ 또다시 옥에 갇힌 리영희 논설고문의 희생 모금운동 과정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사건은 고 리영희 논설고문이 방북 취재를 계획했다가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사건이었다. 리영희 고문은 89년 1월 방북 취재를 기획했다가 고 문익환 목사가 먼저 방북하는 바람에 취소했는데, 노태우 정권은 뒤늦게 4월15일 리영희 고문을 구속하였다. 수많은 시민들이 한겨레에 리 고문 구속에 항의하는 격려광고를 내었고, 발전기금 모금에 폭발적 호응해 주었다. 4월21~27일 한 주간만 모금 총액이 무려 17억2천만원에 이르렀다. 또 하나 생각나는 게 있다. 회사가 특위 위원들 부부에게 설악산 3박4일 위로 휴가를 마련해 주었는데 공교롭게도 우리가 떠나려던 이틀 전 리영희 선생이 1심 선고공판에서 유죄선고를 받았다. 이 침통한 분위기 속에서 휴가를 떠날 수 없어 우리는 연기 요청을 한 바 있는데, 회사는 그 이후 아무런 후속 대책을 마련해 주지 않아 위로 휴가는 유야무야되었다. 나는 이 점, 늘 당시의 특위 위원들과 그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신문” 나는 역마살이 많은가 보다. 나는 91년 2월 한겨레를 떠났다. 88년 2월부터의 3년 동안 한겨레에서 맡은 직책만도 1기 편집위원장, ‘한겨레 발전기금 특위’ 위원장, 관리담당 이사, 광고담당 이사 겸 광고국장, 총괄담당 이사, 4대 편집위원장을 맡아 정신없이 보냈다. 내가 4대 편집위원장을 끝으로 한겨레를 떠난 데는 몇 가지 사연이 있었지만, 한 10년 지나 되돌아보았더니, 내가 갓 마흔두살 때인 85년 ‘민언협’ 초대 사무국장을 맡은 이래, ‘민통련’ 사무처장, 두 차례 한겨레 편집위원장을 맡으면서 “나도 모르게 자만심과 엘리트 의식에 깊이 빠져들어 있었기 때문이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반성 이후 나의 마음은 늘 한겨레와 함께하고 있다.
4년 뒤면 한겨레가 창간 30돌을 맞는다. 온갖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지금까지 살아남은 한겨레의 저력이 참으로 대단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겨레에 들려주고 싶은 말이 한 가지 있다. 즉 한겨레는 앞으로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더 나은 신문”이 아니라 “한국의 민주주의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신문”으로 우뚝 서 있기를 바란다는 점이다. 정리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도움 강태영
국민주 모금 방식의 새 신문 <한겨레신문> 창간 작업은 1987년 7월 시작해 10월30일 발기인대회를 열면서 본격 궤도에 올랐다. 사진은 서울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대강당에서 열린 이날 대회에서 송건호 당시 창간위원장이 창간사를 하고 있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1988년 5월15일 창간 뒤 자본금 50억원이 바닥날 지경에 이르자 한겨레신문사는 70억원 증자를 결의하고 모금 운동에 나섰고 필자는 89년 초 ‘모금특위’ 위원장을 맡았다. 사진은 88년 10월15일 열린 제2차 창간위원회에서 정태기 이사가 증자 관련 설명을 하고 있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기적같은 창간 뒤에도 자금난 지속 ‘사도’ 아닌 ‘사기꾼’ 전락 우려에
돈 개념 없는데도 모금특위 맡아
리영희 고문 구속 뒤 가속도 붙어 4년뒤 창간 30주년 맞는 한겨레
있으면 더 나은 신문 아니라
없어서는 안될 신문 우뚝 서야 ■ 또다시 옥에 갇힌 리영희 논설고문의 희생 모금운동 과정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사건은 고 리영희 논설고문이 방북 취재를 계획했다가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사건이었다. 리영희 고문은 89년 1월 방북 취재를 기획했다가 고 문익환 목사가 먼저 방북하는 바람에 취소했는데, 노태우 정권은 뒤늦게 4월15일 리영희 고문을 구속하였다. 수많은 시민들이 한겨레에 리 고문 구속에 항의하는 격려광고를 내었고, 발전기금 모금에 폭발적 호응해 주었다. 4월21~27일 한 주간만 모금 총액이 무려 17억2천만원에 이르렀다. 또 하나 생각나는 게 있다. 회사가 특위 위원들 부부에게 설악산 3박4일 위로 휴가를 마련해 주었는데 공교롭게도 우리가 떠나려던 이틀 전 리영희 선생이 1심 선고공판에서 유죄선고를 받았다. 이 침통한 분위기 속에서 휴가를 떠날 수 없어 우리는 연기 요청을 한 바 있는데, 회사는 그 이후 아무런 후속 대책을 마련해 주지 않아 위로 휴가는 유야무야되었다. 나는 이 점, 늘 당시의 특위 위원들과 그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신문” 나는 역마살이 많은가 보다. 나는 91년 2월 한겨레를 떠났다. 88년 2월부터의 3년 동안 한겨레에서 맡은 직책만도 1기 편집위원장, ‘한겨레 발전기금 특위’ 위원장, 관리담당 이사, 광고담당 이사 겸 광고국장, 총괄담당 이사, 4대 편집위원장을 맡아 정신없이 보냈다. 내가 4대 편집위원장을 끝으로 한겨레를 떠난 데는 몇 가지 사연이 있었지만, 한 10년 지나 되돌아보았더니, 내가 갓 마흔두살 때인 85년 ‘민언협’ 초대 사무국장을 맡은 이래, ‘민통련’ 사무처장, 두 차례 한겨레 편집위원장을 맡으면서 “나도 모르게 자만심과 엘리트 의식에 깊이 빠져들어 있었기 때문이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반성 이후 나의 마음은 늘 한겨레와 함께하고 있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