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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지하실에 숨을 자유, 그것도 민주주의

등록 2013-12-13 19:47수정 2013-12-15 19:13

10일 낮 12시 서울 압구정동 구현대아파트 74동 지하실 입구, 비닐문에 뚫어놓은 고양이 전용 출입문 안에서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녹색 눈을 뜨고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12일 아파트는 철문을 닫아 고양이들의 출입을 다시 막았다. 최우리 기자
10일 낮 12시 서울 압구정동 구현대아파트 74동 지하실 입구, 비닐문에 뚫어놓은 고양이 전용 출입문 안에서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녹색 눈을 뜨고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12일 아파트는 철문을 닫아 고양이들의 출입을 다시 막았다. 최우리 기자
[토요판] 생명 / 압구정동 길고양이들의 수난
▶ 지난 6월 서울 압구정동 구현대아파트 74동 지하실에서 10여마리의 고양이 사체가 발견됐습니다. 겨울철 수도관 동파 우려 때문에 문을 닫아뒀다가 벌어진 사고였지요. 7년 전인 2006년 지하실 철문에 용접을 해 고양이를 가두었던 ‘용산 한강맨션’ 사건의 재현이라며, 한동안 인터넷과 SNS에서 시끄러웠습니다. 74동 길고양이 감금 사건을 보며 생각해보았습니다. 길고양이의 역사는 진보하고 있나요? 길고양이 해방 세상은 언제쯤 도래할까요?

7일 저녁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지하철 압구정역 1번 출구 앞, 50여명의 사람들이 손에 촛불을 들고 모였다. 세모난 귀가 앙증맞은 머리띠를 한 사람, 검은 × 표시가 돼 있는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 모두 손마다 푯말을 들었다. 푯말에는 ‘길고양이는 법적 보호 대상 동물입니다’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도심에서는 민주주의 수호 비상시국대회가 도심에서 열리고 물대포가 날아들고 있었다. ‘길고양이 생존권’을 둔 작은 민주주의도 시험대에 올라 있는 걸까.

‘길고양이의 해방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의 시작은 지난해 겨울이었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구현대아파트 74동 주민들이 지하실 문을 닫았다. 예전처럼 단순한 길고양이 혐오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겨울 추위에 수도관이 동파될 수 있다는 이유가 더해졌다. 추위를 피하고 잠을 자기 위해 지하실 문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길고양이는 엄동설한에 방을 빼거나 방에 갇힐 위기에 놓였다.

‘민주 수호 비상시국대회’ 날
캣맘 50명이 압구정역에서
‘길고양이는 법적 보호 동물’
팻말 들고 촛불집회를 열었다

지난해 길고양이들 머무는
한 아파트 지하실 문을 잠가
추위 피하던 고양이들 떼죽음
문을 닫자는 입주자 대표들과
열자는 캣맘의 계속되는 실랑이

이 소식을 들은 캣맘 박영주(52)씨와 김미영(가명·60)씨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들은 아파트 71~74동 사이 공원에서 길고양이들에게 매일 밥을 주고 중성화수술(TNR)을 시키며 개체수를 조절하는 일도 도맡아 하고 있었다. 동대표들과의 협상에 길고양이들을 대신해 나섰다. 7일 아파트 단지에서 만난 박씨가 말했다.

“2~3년 전에 다른 동 지하실은 이미 다 막혔어요. 74동 지하실 3개의 문 중에서 가운데 문 하나만 열어뒀던 거예요. 겨울이면 추우니까 고양이가 지하실에 들어가서 지내곤 했죠.”

문은 겨우내 닫혀 있었다. 봄이 되자 동대표들과 캣맘의 갈등은 ‘고양이 전용 문’을 뚫는 방법으로 해결책을 찾는 듯 보였다. 중재에 나선 정제택(66)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장이 관리소에서 지하실로 들어가는 철문에 벽돌 크기의 구멍을 뚫은 것이다. 7일 정 회장이 하소연하듯 말했다.

“74동이랑 72동 사이 공원 가운데에 고양이 집 3채, 공원 끝 쪽에 고양이 집 2채를 지어줬어요. 지하실의 고양이 출입을 반대하는 의견이 있으니 나름 밖으로 내보내려고 노력했습니다.”

주민들의 유인책에도 길고양이들은 익숙하게 아파트 지하실에 머물렀다. 그리고 지난 6월, 문이 닫힌 겨울부터 전용문이 뚫린 봄 사이 약 3개월 동안 갇혀 있다 죽은 길고양이 사체가 뒤늦게 십여마리 발견됐다. 대부분 새끼고양이였다.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일부 주민들은 고양이 사체 썩는 냄새를 길고양이의 배설물 냄새라며 오해했고, 캣맘들은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사라졌을 길고양이 생각을 하며 마음 아파했다.

겨울은 또다시 찾아왔다. 지난 11월 말부터 캣맘과 동대표들은 지하실 문 폐쇄를 두고 협상을 진행했다. 가을까지는 문을 열어두었지만, 동파 가능성이 있는 겨울에는 절대 문을 열어둘 수 없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봄에 뚫어 놓았던 전용문(벽돌 크기의 구멍)도 해결책이 되지 않았다. 그 문도 결국 막아버렸다. 일부 주민들이 ‘소방법 위반’이라며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강남소방서 건축과 건축담당자의 말이다.

7일 저녁 한 여성이 서울 압구정동 구현대아파트 74동 앞에서 74동 지하실에 길고양이들의 출입을 허용할 것을 요구하는 촛불시위를 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7일 저녁 한 여성이 서울 압구정동 구현대아파트 74동 앞에서 74동 지하실에 길고양이들의 출입을 허용할 것을 요구하는 촛불시위를 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주민들이 문의를 해오셨는데, 정식으로 민원이 접수된 것은 아니었어요. 만약 아파트가 방화문 설치 대상에 적용되는 규모라면 위반사항이 될 수 있다고 말씀드렸죠. 구체적으로 적용해 본 것은 아닙니다.”

74동 동대표는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지하실 문을 폐쇄할 것을 요청하는 주민들의 서명을 접수해 이를 관철시켰다. 7일 오후 3시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열린 임시 입주자대표회의에서 최종적으로 ‘지하실 문을 닫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지자체가 중재에 나섰다. 9일 오전 강남구청은 아파트 관리소장 앞으로 ‘길고양이는 동물보호법에 해당되는 동물이므로 길고양이 안전에 만전을 다해달라’는 내용의 팩스를 보냈다. 같은 날 서울시 동물보호과에서도 길고양이 학대 여부를 판단하려고 현장을 방문했다. 그날 관리소는 오후 철문을 열고 비닐문을 치고 고양이가 다닐 벽돌 크기의 네모난 문을 뚫었다. 그러나 3일 만인 12일 다시 문이 닫혔다. 74동 동대표가 변심했다며 캣맘들은 속상해하고 있다.

캣맘과 주민 사이의 갈등은 여러 곳에서 반복되고 있다. 동물보호법에서는 길고양이가 주거지나 도심에서 인간과 공존해야 하는 동물임을 인정한다. 길고양이는 동물보호법 8조가 보호하는 보호동물이다. 동시에 시행규칙 13조에 따라 ‘포획 후 중성화수술해 다시 자연에 방사해야 하는 동물’로 따로 지정돼 있다. ‘도심지나 주택가에서 자연적으로 번식해 자생적으로 살아가는 고양이’인 길고양이와 인간의 공존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서울시 담당자는 “이런 일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 주민의 재산권과 관련된 부분이 있어 동물 학대 여부가 확인되지 않는 한 지자체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주민 자치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권장할 뿐”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길고양이와의 공존이란, 작은 민주주의를 학습하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7년 전인 2006년 서울 용산 한강맨션 사건은 ‘길고양이 해방 역사’의 시발점으로 기록된 사건이었다. 길고양이에 대해 불만을 가진 일부 주민들이 지하실 철문을 용접해 고양이들이 나오지 못하게 봉쇄해버렸고, 캣맘들은 철문을 뜯어내 길고양이들을 구출해냈다. 싸움은 그해 연말까지 지난하게 이어졌다. 한 동네에 사는 주민들을 동물학대 혐의로 고발하기도 했다. 결국 고양이는 다 내보내고 문을 닫는 쪽으로 결정됐지만 이 사건을 통해 캣맘들은 힘을 모았다. 고양이를 싫어하는 주민들의 의사를 존중해 중성화수술을 실시하고 조직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현재도 꾸준히 길고양이와의 공존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압구정동 길고양이와 관련한 갈등 해결에도 동참하고 있는 용산구 한강맨션 차명임(53)씨의 말이다.

“아직 세상은 길고양이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아요. 7년 전에는 길고양이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식 자체가 없었어요. 이런 일을 자주 겪으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동물보호에 대해 알게 되고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타협해가야 하는지, 지자체는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배우는 것 같아요.”

길고양이를 둘러싼 주민들간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대화와 타협’이 중요하다. 길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함께 사는 세상에서는 서로 양보하며 타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때로는 동물보호법에서 인정하는 동물 학대 행위에 대한 법적 제재 수단도 활용할 수 있다. 지자체에서 둘 사이를 중재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고경원의 길고양이 통신>의 저자이자 10년 이상 길고양이들을 만나온 작가 고경원씨는 조언했다.

“길고양이로 시작한 일이지만, 결국 사람과 사람의 문제예요.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마녀사냥을 당하는 경우도 여러번 봤어요. 개인적으로 부딪히려 하지 말고 뜻이 같은 사람끼리 연대하는 것도 좋아요. 서로 비난만 해서는 반발심이 생길 수 있으니, 법의 테두리 안에서 서로 타협을 이루는 것이 필요해요. 아직까지는 길고양이가 법적 보호 동물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두 사이를 중재하는 지방자치단체의 역할이 중요해 보여요.”

비구름이 걷히고 하늘은 맑게 개었다. 10일 낮 12시 74동 뒤쪽 지하실 출입구, 검은 철창 안 양쪽으로 난 문에 은색 비닐이 늘어져 있었다. 철문이 잠시 열려 있던 날이었다. 손주를 등에 업은 한 할머니가 하는 말이 철창 앞까지 들렸다.

“추워서 고양이들이 지하실에 숨었나 보다. 안 보이네.”

할머니와 아기의 말을 들었는지, 잠시 뒤 고양이 한마리가 철창 안에 서 있었다. 왼쪽 귀 끝이 잘린 노란 줄무늬의 고양이었다. 잠시 상념에 잠겼다가 철창문 밖으로 나온 녀석은 바로 앞 공원으로 사뿐사뿐 걸어갔다. 은행나무 낙엽색을 보호색 삼아 금세 사라졌다. 몇 분이 지나지 않고, 이번에는 네 발만 하얀 검은 고양이 한마리가 네모난 구멍 사이로 영롱한 눈빛을 보내왔다. 길고양이들은 묻는다. 역사는 과연 얼마나 진보했을까.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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