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은 중앙신경계가 없어 고통을 느낀다고 보기 힘들다. 공리주의적 시각에서 봤을 때, 채식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잘못이 아니다. 일상에서 채식을 즐기는 사람들은 많다. 박승화 <한겨레21> 기자 eyeshoot@hani.co.kr
[토요판] 생명
김성한 교수의 동물철학 강의 (2)
김성한 교수의 동물철학 강의 (2)
▶ 인간은 먹이 피라미드의 최상위에 있기 때문에 동물을 먹어도 된다, 채식을 하는 사람이라면 식물도 같은 생명체이니 먹지 말아야 할 것 아니냐? 동물권과 동물복지론을 말하면 흔히 듣게 되는 반론입니다. <동물해방>을 한국어로 번역·소개한 김성한 숙명여대 교수(철학)가 두번째 동물철학 강의를 보내왔습니다. 공리주의적 접근을 통해 이런 문제들을 차근차근 검토해봅니다.
지난번에는 공리주의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동물들에게 도덕적 지위가 부여되며, 여기에는 반려동물뿐만 아니라 실험동물과 식용동물까지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는 반려동물이 식용동물과 실험동물과 다를 바 없으니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게 아니라 반려동물 외에 식용동물과 실험동물까지도 우리가 배려하고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윤리적 기준을 자기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특정 대상에게만 적용해서는 안 되고, 모든 대상에 일관성 있게 적용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반려동물이 더욱 고통을 받고 있으면 반려동물을, 식용동물이나 실험동물이 더 고통을 받고 있으면 그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해야 하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공리주의에서 말하는 공평무사성입니다.
동물도 권리가 있다
오늘은 동물, 특히 식용동물을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잘못되었으며, 이의 귀결로 채식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고기를 먹는 것이 개인의 권리이며, 이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고기를 먹겠다는데 이에 대해서 누가 무엇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점은 권리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을 경우에 한해 허용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에게는 아무런 이유 없이 폭행을 행사할 권리가 없습니다. 이것이 허용되지 않는 이유는 이와 같이 할 경우 사람들이 피해를 입게 되기 때문이죠. 이와 유사하게 내가 육식을 할 경우 동물들에게 간접적이라고 하더라도 심각한 고통이 야기된다면 이 또한 권리로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동물에게는 권리가 없으며, 때문에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말하지 마세요. 물론 동물들은 현재 법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권리라는 단어는 오직 법적인 의미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며, 설령 동물들에게 법적인 권리가 없다고 해도 윤리적 의미에서의 권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권리를 말한다면 공리주의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동물들은 윤리적 의미의 권리를 지녔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동물을 먹는 것이 권리라는 주장과 유사한 것으로 인간이 먹이 피라미드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보다 아래에 위치하는 동물들을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는 전형적인 강자의 논리인데요.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힘이 센 사람이 힘이 세다는 이유로 약한 사람들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까요. 만약 우리가 동물에 비해 약자의 입장에 놓여 있다면 약육강식, 혹은 강자의 지배 논리가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데에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예를 들어 우리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한 외계인이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방문했고, 이들이 인간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공장식 농장을 만들어 인간을 사육하면서 인육을 즐겨 먹게 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외계인의 인간에 대한 처우나 태도가 도덕적으로 옳은 것은 아닌데요. 특히 피해자인 인간의 입장에서는 이를 크나큰 잘못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생각에 고개를 끄덕인다면 우리는 동물들에 대한 태도에서도 마찬가지의 입장을 견지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동물을 마음대로 대해선 안 된다면, 우리가 먹을거리를 선택할 때에도 이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결국 채식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요.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들은 왜 식물은 배려의 대상에서 제외하느냐고 항변합니다. 그러면서 많은 경우 식물 또한 생명체가 아니냐고 지적을 하죠. 하지만 우리가 따져보아야 하는 것은 식물이 ‘고통’을 느끼는지의 여부지 ‘생명체’인지의 여부가 아닙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공리주의는 쾌락과 고통을 각각 선과 악으로 생각하는 이론입니다. 따라서 어떤 생명체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생명체는 관심이나 고려의 대상이 아닙니다. 거꾸로 생명이 없는 존재라고 하더라도 그 존재가 쾌락과 고통을 느낀다면 마땅히 배려를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미래에 사이보그가 탄생했고, 그 사이보그가 쾌락과 고통을 느낀다면 공리주의자들은 마땅히 그를 배려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동물도 쾌락과 고통 느낀다면
법적 권리 없어도 윤리적 권리 있어
고통 통해 키운 동물 먹는 것보다
채식이 더 윤리적이다 식물도 ‘생명’이니 먹지 말아야?
중앙신경계 가지고 있지 않아
고통 느낀다고 보기 힘들어
공리주의자는 채식 선택 과학과 윤리 그렇다면 식물은 어떨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식물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며, 이에 따라 그 자체로는 배려의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이 때문에 공리주의자는 우리가 채식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고통을 느낄 수 있는지의 여부는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이나 행동을 통해, 신경생리학적 변화를 통해, 그리고 중앙신경계를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식물에게는 이 세 가지 기준을 적용해 보았을 때 고통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증거가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에 따라 식물은 생명이 있지만 배려의 목록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죠. 이러한 입장에 반대해 일부 사람들은 실험을 통해 식물도 고통을 느낄 수 있음이 밝혀졌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이와 같은 실험이 얼마만큼 설득력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이 실험이 잘못되지 않았을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그와 같은 주장에 답한다면,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라는 측면에서 비교해 보면 동물이 식물에 비해 훨씬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발달해 있습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식물과 동물이 모두 고통을 느낄 수 있다고 해도, 우리는 아무것이나 선택해서 먹어도 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부득이하게 생존을 위해 어떤 존재에게 고통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면 상대적으로 고통을 최소한으로 야기하는 선택을 해야 하죠. 그리고 이러한 기준에서 보자면 우리는 동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식물을 선택해서 먹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식물이 고통을 느낄 가능성이 있다면 부득이한 경우에 한해서 식물의 생명을 빼앗아야 하지 식물을 마치 물건 다루듯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겠죠. 그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미래에 식물이 고통을 더욱 크게 느끼는 존재임이 밝혀질 가능성은 열려 있습니다. 그리하여 위에서 말한 세 가지 기준 외에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에 대한 또 다른 평가 기준이 채택되어 확인해 보니, 혹은 새로 발명된 고통 측정 기구를 이용해 측정해 보니 동물보다 식물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더욱 잘 발달되어 있음이 밝혀질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채식이 아닌 육식으로 전환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과학’이라는 기준으로 보았을 때 동물이 쾌락과 고통을 더욱 크게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적으로 합당하며, 따라서 이러한 입장을 받아들여 현재 상황에서 채식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잘못이 아니죠. 식물에 대한 이러한 처우가 차별일 수 없는 것은 동물 이상으로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식물이 있다면 공리주의자들은 그 식물을 배려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동물 종에 속해 있지 않다고 해서 식물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 잘못입니다. 하지만 공리주의자가 식물을 배려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지, 동물 종에 속하지 않았다고 해서 배려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는 차별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채식을 할 경우의 건강 문제 등 더 논의해야 할 문제들을 다루지 못해 아쉽지만 지면 관계상 이제 마무리해야 할 시점이네요. 동물의 도덕적 지위 문제에 대한 검토는 단지 우리에게 동물을 배려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데에 그 효용이 머물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가 갑의 입장에 있을 때 얼마나 을의 입장을 무시하려 하는지, 그리고 자신과 무관한 일에는 비교적 객관성을 견지하다가도 막상 자신의 이익이 걸려 있을 경우 우리가 얼마나 자기 위주로 생각하려 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우리가 입장을 바꾸어 보면서 일관성 있게 생각하고 행동하고자 할 경우 동물을 포함한 약자들이 훨씬 살아가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우리 함께 그런 세상을 만들어 봐요!!! 김성한 숙명여대 교수(철학)
법적 권리 없어도 윤리적 권리 있어
고통 통해 키운 동물 먹는 것보다
채식이 더 윤리적이다 식물도 ‘생명’이니 먹지 말아야?
중앙신경계 가지고 있지 않아
고통 느낀다고 보기 힘들어
공리주의자는 채식 선택 과학과 윤리 그렇다면 식물은 어떨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식물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며, 이에 따라 그 자체로는 배려의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이 때문에 공리주의자는 우리가 채식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고통을 느낄 수 있는지의 여부는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이나 행동을 통해, 신경생리학적 변화를 통해, 그리고 중앙신경계를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식물에게는 이 세 가지 기준을 적용해 보았을 때 고통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증거가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에 따라 식물은 생명이 있지만 배려의 목록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죠. 이러한 입장에 반대해 일부 사람들은 실험을 통해 식물도 고통을 느낄 수 있음이 밝혀졌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이와 같은 실험이 얼마만큼 설득력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이 실험이 잘못되지 않았을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그와 같은 주장에 답한다면,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라는 측면에서 비교해 보면 동물이 식물에 비해 훨씬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발달해 있습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식물과 동물이 모두 고통을 느낄 수 있다고 해도, 우리는 아무것이나 선택해서 먹어도 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부득이하게 생존을 위해 어떤 존재에게 고통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면 상대적으로 고통을 최소한으로 야기하는 선택을 해야 하죠. 그리고 이러한 기준에서 보자면 우리는 동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식물을 선택해서 먹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식물이 고통을 느낄 가능성이 있다면 부득이한 경우에 한해서 식물의 생명을 빼앗아야 하지 식물을 마치 물건 다루듯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겠죠. 그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미래에 식물이 고통을 더욱 크게 느끼는 존재임이 밝혀질 가능성은 열려 있습니다. 그리하여 위에서 말한 세 가지 기준 외에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에 대한 또 다른 평가 기준이 채택되어 확인해 보니, 혹은 새로 발명된 고통 측정 기구를 이용해 측정해 보니 동물보다 식물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더욱 잘 발달되어 있음이 밝혀질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채식이 아닌 육식으로 전환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과학’이라는 기준으로 보았을 때 동물이 쾌락과 고통을 더욱 크게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적으로 합당하며, 따라서 이러한 입장을 받아들여 현재 상황에서 채식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잘못이 아니죠. 식물에 대한 이러한 처우가 차별일 수 없는 것은 동물 이상으로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식물이 있다면 공리주의자들은 그 식물을 배려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동물 종에 속해 있지 않다고 해서 식물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 잘못입니다. 하지만 공리주의자가 식물을 배려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지, 동물 종에 속하지 않았다고 해서 배려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는 차별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채식을 할 경우의 건강 문제 등 더 논의해야 할 문제들을 다루지 못해 아쉽지만 지면 관계상 이제 마무리해야 할 시점이네요. 동물의 도덕적 지위 문제에 대한 검토는 단지 우리에게 동물을 배려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데에 그 효용이 머물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가 갑의 입장에 있을 때 얼마나 을의 입장을 무시하려 하는지, 그리고 자신과 무관한 일에는 비교적 객관성을 견지하다가도 막상 자신의 이익이 걸려 있을 경우 우리가 얼마나 자기 위주로 생각하려 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우리가 입장을 바꾸어 보면서 일관성 있게 생각하고 행동하고자 할 경우 동물을 포함한 약자들이 훨씬 살아가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우리 함께 그런 세상을 만들어 봐요!!! 김성한 숙명여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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