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협정 체결 57돌인 2010년 7월27일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 망배단에서 자유북한운동연합과 납북자가족모임 등의 단체들이 대형 풍선을 북쪽으로 날려 보내는 행사를 하고 있다. 이들은 풍선 안에 대북전단 10만장과 천안함 사건을 알리는 디브이디 300개를 매달았다. 임진각/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토요판] 군사 / 심리전의 세계
▶ 국가정보원의 ‘셀프 개혁안’이 나왔습니다. 문제가 됐던 ‘국내 정치 개입’과 관련해서 국정원은 ‘전직원의 정치 개입 금지 서약을 제도화하겠다’ 정도의 약속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대북심리전은 계속 벌이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대북심리전으로 포장한 대국민심리전을 계속하겠다는 것이냐는 비판이 곧바로 이어졌습니다. 대북심리전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요.
북한을 탈출해서 국내에 정착한 지 20년이 된 탈북자 ㄱ씨는 작년에 황당한 일을 겪었다. 평소 남한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은 글을 필명으로 서울의 한 언론사에 기고한 게 발단이었다. 얼마 뒤 탈북자들이 종편에 나와 “북한 공작원이 사이버 공간에서 대남 심리전을 수행하고 있다”며 그 근거로 이 글을 지목했다. ㄱ씨가 글을 올린 곳이 그가 거주한 제주도였는데 종편에 나온 탈북자들은 이를 추적해서 “북한 공작원이 제주도 통신케이블 회사까지 거점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황당한 해석까지 덧붙였다. 이 때문에 지극히 상식적인 글을 기고했다고 생각하는 ㄱ씨는 졸지에 자신이 북한 공작원으로 둔갑했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했다.
북한과의 사이버 심리전을 수행하는 국가정보원 심리전단이나 국방부 사이버사령부 등은 “북한이 인터넷을 통해 우리 생활 깊숙이 침투하여 대남 선전·선동을 하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 국내 종북 세력과 연계된 북한 공작원이 사이버 심리전을 수행하기 때문에 자신들도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는 항변이다. 남재준 원장은 11월 국정감사에서 “북한 국방위와 노동당 산하에 1700여명으로 구성된 7개의 해킹 조직이 있으며, 프락치를 이용해 남한의 정책을 비방하고 총선·대선 개입 선동 등의 글을 국내에 실시간으로 유포·확산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회색선전’만 채택했던 냉전시대 서독
이제껏 북한 공작원이 직접 야당을 지지하거나 옹호하는 활동이 밝혀진 사례는 없다. 앞서 말한 ㄱ씨와 같이 애꿎은 사람이 북한 공작원으로 지목되는 사례만 있다. 반면 검찰은 대선에 개입한 국정원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거나 퍼 나른 글이 121만건이라고 밝혔다. 민주당 진성준 의원은 국방부 사이버사령부가 심리전 홍보 활동을 총 2300만회 달성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이상하지 않은가? 북한 공작원은 워낙 신출귀몰해서 아무런 흔적이 없는데 우리 정보기관원들은 얼마나 무능하기에 검찰과 야당에 그 행적이 탈탈 털리는가 말이다. 만일 북한이 제3국에서 은밀한 방식으로 사이버전을 준비한다면 우리도 그에 합당한 방식으로 대응해야 이를 차단할 수 있다. 우리는 왜 이렇게 허술할까? 한 정보기관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국정원의 대선·정치 개입이 검찰의 수사 대상이 된 올해 우리 정보기관은 북한이 온라인상에서 야당 후보를 지지한 정황이나 증거를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그마저도 성공하지 못했다. 정보기관에서 말하는 사이버전 대응 논리가 궁색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네이버 사전에 의하면 심리전이란 “명백한 군사적 적대 행위 없이 적군이나 상대국 국민에게 심리적인 자극과 압력을 주어 자기 나라의 정치·외교·군사 면에 유리하도록 이끄는 전쟁”이라고 정의된다. 심리전에는 방송·확성기·언론·전단·물품이 동원되고 직접 상대편을 대면해서 회유·설득·동조시키는 등 다양한 방법이 동원된다. 1990년 통일 당시 서독의 심리전 총책임자로 지난 10월 한국을 방문한 오르트빈 부흐벤더 예비역 대령은 연세대 강연에서 매우 흥미로운 증언을 했다. 냉전 당시에 서독과 동독은 서로 상대방에 대규모의 스파이를 운용했고 1972년까지는 다량의 전단이 살포되었다. 그러나 정부가 실시한 심리전보다 더 큰 효과를 발휘한 것은 다름 아닌 민간 티브이(TV)의 광고였다. 심리전 부대가 살포한 전단에도 주로 서독의 중고차 가격, 식품 종류, 백화점 세일 소식과 같은 생활정보가 대부분이었다. 상대방에 대한 체제 비방이나 정치 지도자의 권위를 훼손하는 내용은 일체 없었다. 오직 서독이 사는 생활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준다는 데 심리전의 초점이 맞춰졌다. 부흐벤더 대령은 “당시에 우리는 심리전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진실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좀 이상하지 않은가?
북한 공작원은 흔적이 없다
국정원은 얼마나 무능하기에
검찰과 야당에 그 행적이
탈탈 털리는가 말이다 불안심리에서 오는 심리전은
자신 구속하는 족쇄만 될 뿐
상대방 긍정성에 다가가서
태도의 변화를 유도해야
종북프레임 심리전은 실패 서독군에 의한 심리전은 대성공이었다. 1963년부터 1989년까지 장벽과 지뢰, 기관총으로 무장한 감시망을 뚫고 총 2064명의 동독군이 서독으로 탈출했다. “접근에 의한 변화”라고 불리는 1972년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과 방송매체에 의한 심리전이 병행되었기에 가능했다. 여기에서의 비결은 정치 논리를 배제하고 오직 신뢰와 진실로 동독군과 주민에게 접근했다는 점이다. 서독의 심리전의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원칙은 자신의 존재와 정보 출처를 숨기는 ‘흑색선전’을 일체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대신 심리전 수행기관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회색선전’만 채택했다. 부흐벤더 대령은 2000년 베를린 훔볼트대학에서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대북 햇볕정책을 발표할 때 이를 직접 듣고는 “지금도 그 감동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한 대북 접근 정책과 진실에 기초한 심리전이 일관되게 진행되지 않으면 북한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랬던 그가 한국에 와서 북한의 퍼스트레이디인 리설주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북한 주민에게 알리는 대북 전단이 살포되는 걸 보고 “이렇게 하면 무슨 성과가 있을까?”라며 의문을 표시했다. 탈북자 출신으로 북한 관련 언론 기고 활동을 하는 김형덕씨에 의하면 “우리의 대북 심리전은 북한 주민의 선호체계, 가치체계를 완전히 무시하고 상대방의 정치체제를 흔드는 목적으로 수행되기 때문에 효과가 전혀 없다”고 단언한다. 그것은 북한 공작원이 우리 대선에 개입하는 사이버 선전·선동이 효과가 없는 것과 동일한 이치다. 더불어 그는 “북한 주민의 관심은 역시 잘사는 것, 가치 있게 사는 것에 있다”며 “우리가 그 관심에 부합하는 유용한 정보나 소식을 전해주는 것이어야 하는데, 북한 주민의 선호체계에 대한 지식이나 모델도 없이 정치 논리로 심리전이 수행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제대로 심리전이 수행되려면 북한을 포용하려는 정치적 의지가 밑바탕이 되고 그 위에서 북한 주민의 관심을 고려한 진실하고 친절한 접근이어야 하는데, 우리 심리전은 북한에 대한 적개심을 근거로 수행되는 정치적 구호에 불과하다. 이런 방식으로는 절대 북한 주민을 변화시킬 수 없다. 우리 군 장교단이 갖고 있는 집단편견 북한 체제를 좀더 창의적으로 모욕하면서 우리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방식의 심리전은 심리전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북한체제 흔들기’에 해당된다. 이것은 심리전의 변종인 ‘폭동 일으키기’ 또는 사보타주 시도다. 그래서 그런지 북한 주민이 우리 정부가 주체가 된 심리전으로 인해 동요했다거나 변화하고 있다는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다. 반면에 남한의 영화나 라면, 초코파이가 더 효과적이다. 김형덕씨는 “가장 효과적인 심리전 수단은 라디오”라고 말한다. 한편 북한 사이버 공작원의 실체가 모호한 가운데 국내의 종북 세력이라고 군이 주장하는 국민을 대상으로 한 심리전의 경우는 어떤가? 군의 사이버 심리전은 군이 고수하고 있는 ‘종북 세력과의 전쟁’이라고 하는 신념체계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그런데 군의 종북 프레임에는 몇 가지 중요한 가정이 있다. 첫째, “국가는 항상 실패하고 파멸할 수 있다”는 비관적 국가관이다. 작년에 반유신,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종북 행위라고 규정하여 말썽이 된 육군 교육사령부가 제작한 <나의 조국!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에서는 “월남과 중국은 극소수의 이적 세력에 의해 공산화가 되었다”는 표현이 자주 구사되고 있다. 그런데 이 대목은 보수단체에 의해서 거의 예외 없이 인용되는데, 주로 신문 광고에서 “우리 사회는 월남 패망 직전과 거의 유사”하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여기에는 국가가 아주 미묘하고 사소한 사건, 또는 극소수의 세력에 의해 안보에 실패할 수 있다는 비관적 가정이 있다. 교재에서도 베트남 공산 세력의 수는 인구의 0.6%에 지나지 않았고, 중국의 경우는 불과 13명에서 공산주의 운동이 시작되었으나, 이 적은 수의 공산주의자가 마치 바이러스처럼 일순간에 국가 전체를 오염시키고 붕괴시키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둘째, 민주주의 체제는 전체주의와의 대결에서 불리하다는 가정이다. 물론 이러한 가정은 군 교재에서 언급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 논리’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교재에서도 지적하듯이 자유민주주의는 전체주의에 비해 ‘우월’한 것이지 ‘유리’한 것은 아니다. 전체주의는 잘 단결되어 있는 반면에 민주주의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전체주의에 비해 불리한 점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 약점을 보완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는데, 그것이 바로 군대라는 집단적 힘이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논리적 근거가 된다. 국가의 적인 종북 세력을 상대로 군이 ‘사상전’, ‘심리전’을 전개하고 이겨야 한다는 이유로 발전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불안은 남북한의 평화통일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이 점은 정신교육을 경험한 많은 장병들의 증언으로도 확인되는데, 그 주된 논리는 만일 남북한이 합의에 의해 통일이 된다면 북한은 유일당이고 남한은 다당제이기 때문에 선거를 하면 북한 노동당이 승리하게 되어 있다고 본다. 셋째, 법률주의와 도덕주의의 결합이다. 이것은 미국에서 수입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미국은 2차대전을 겪으면서 전체주의 체제의 완전 종식과 무조건적 항복을 요구하는 대량전을 수행했다. 전쟁의 목표는 나의 법률과 도덕을 상대방에게 관철시키는 것이고, 이것은 상대방 체제의 완전 붕괴와 국가의 파멸, 다수의 민간인 피해를 정당화했다. 이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라면 어쩌면 종족 말살까지 불사해야 한다는 무한 목표이기 때문에 이후 미국 내에서도 ‘과도한 대외문제 개입’이라는 부작용을 초래했고 많은 비판에 직면했다. 국가라는 존재는 정치체제를 불문하고 생존과 안보를 추구하는 데 있어 동일하다는 현실주의 사상이 2차대전 이후에 등장하면서 이러한 법률주의와 도덕주의 결합은 대외문제 해결에 있어 위험한 사상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유독 북한에 대해 강한 법률적·도덕적 접근법을 고수하고 있는데, 이렇게 되면 우리가 북한에 대해 가부장적인 지도력을 발휘하여 체벌하고 교화시켜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까지 진다. 반면 북한이라는 적을 인정하고 타협하는 것은 불온시되며, 공존과 협력은 불가능하거나 위험한 것으로 치부된다. 그러나 이러한 불안 심리는 우리 군의 장교단이 갖고 있는 집단 편견이다. 이런 식의 편견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의사는 언젠가 신종 바이러스 출현으로 인류가 전염병에 멸망할 것이라고 믿는다. 천문학자는 언젠가 혜성이 지구와 충돌하여 인류가 멸망할 것으로 믿는다. 성직자는 신의 심판으로 인류가 불과 유황불로 멸망할 것으로 믿는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 군 장교단의 상당수는 “결정적 시기에 북한과 종북 세력에 의해 3일 만에 대한민국이 공산화된다”고 실제로 믿는다. 올해 3월에 북한 김정은은 “우리 식 전면전”을 표방하고 “3일 전쟁계획”을 공개한 것을 거의 그대로 믿는다. 이런 사고는 잘못된 것이라기보다 직업적 편견에 가깝다. 미 국방장관 제임스 포레스털을 기억하라 군사적 편견이 잘못 적용됨으로써 냉전이 태동한 구체적 사례가 있다. 1947년에 미국 초대 국방장관에 취임한 제임스 포레스털이다. 당시 미국은 소련이라는 새로운 정체불명의 세력이 미국에 대한 위협인지를 둘러싸고 일대 혼란을 겪고 있었다. 포레스털은 그가 재임한 2년 동안 온통 “소련이 곧 쳐들어온다”는 생각뿐이었다. 그와 결혼한 조지핀 오그던 역시 포레스털이 재직하는 동안 “빨갱이들이 자신과 가족을 미행하며 암살할 것”이라는 편집증에 시달렸다.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는 그녀의 정신을 분열시켰으며, 알코올 중독에 빠지게 했다. 1949년에 국방장관직에서 퇴임한 포레스털은 신경쇠약에 걸려 강제로 병원에 입원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지하 외딴방에서 목을 매 자살한다. “국가가 곧 파멸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소련에 유화적인 미국 내의 적을 향한 전쟁으로 비화되어 이것이 1950년대 초에 미국 내 가장 수치스러운 ‘매카시 광풍’으로 이어진다. 불안 심리에서 나오는 심리전은 어느새 상대방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구속하는 족쇄가 된다. 우선 심리전을 수행하는 당사자 자신이 인간의 보편적 이성과 양심, 불굴의 용기, 자기결정능력에 대한 경외심을 상실한다. 오직 인간은 나약하고 공포에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 나약함을 보완해주는 집단이나 조직의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고 간편하게 결론을 내린다. 이럴 경우 국가는 개인의 한계를 극복해주는 신성한 권위가 된다. 우리 사회의 종북 프레임과 우파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는 바로 그러한 불안 심리의 변종이자, 부정적 인간관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이렇게 되면 심리전을 수행하는 주체가 바로 심리전에 스스로 걸려든다. 이러한 집단 불안의 히스테리와 광기가 내부의 적에게 공격적인 우파 사회운동으로 확산된다. 지금 국정원과 국방부의 심리전은 바로 그런 방향으로 왜곡된 셈이다. 따라서 국정원과 국방부 사이버사령부는 심리전을 수행하기에 앞서 심리전의 원래 의미, 즉 프로토타입(원형)을 회복해야 한다. 진정한 심리전이란 상대방의 긍정성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상대방을 설득·회유·응종·복종시키는 ‘태도의 변화’를 유도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러한 성과를 북한으로부터 거두지 못하고 우리 국민을 불신하게 하는 자기파괴적인 심리전을 자행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불법적인 댓글로 상대방을 모욕하고 거짓 선전을 퍼뜨리며 편향된 정치 논리를 확산시켰다면 그 자체로 실패한 심리전이다. 아무리 종북 세력과의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포장해도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김종대 <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북한 공작원은 흔적이 없다
국정원은 얼마나 무능하기에
검찰과 야당에 그 행적이
탈탈 털리는가 말이다 불안심리에서 오는 심리전은
자신 구속하는 족쇄만 될 뿐
상대방 긍정성에 다가가서
태도의 변화를 유도해야
종북프레임 심리전은 실패 서독군에 의한 심리전은 대성공이었다. 1963년부터 1989년까지 장벽과 지뢰, 기관총으로 무장한 감시망을 뚫고 총 2064명의 동독군이 서독으로 탈출했다. “접근에 의한 변화”라고 불리는 1972년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과 방송매체에 의한 심리전이 병행되었기에 가능했다. 여기에서의 비결은 정치 논리를 배제하고 오직 신뢰와 진실로 동독군과 주민에게 접근했다는 점이다. 서독의 심리전의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원칙은 자신의 존재와 정보 출처를 숨기는 ‘흑색선전’을 일체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대신 심리전 수행기관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회색선전’만 채택했다. 부흐벤더 대령은 2000년 베를린 훔볼트대학에서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대북 햇볕정책을 발표할 때 이를 직접 듣고는 “지금도 그 감동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한 대북 접근 정책과 진실에 기초한 심리전이 일관되게 진행되지 않으면 북한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랬던 그가 한국에 와서 북한의 퍼스트레이디인 리설주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북한 주민에게 알리는 대북 전단이 살포되는 걸 보고 “이렇게 하면 무슨 성과가 있을까?”라며 의문을 표시했다. 탈북자 출신으로 북한 관련 언론 기고 활동을 하는 김형덕씨에 의하면 “우리의 대북 심리전은 북한 주민의 선호체계, 가치체계를 완전히 무시하고 상대방의 정치체제를 흔드는 목적으로 수행되기 때문에 효과가 전혀 없다”고 단언한다. 그것은 북한 공작원이 우리 대선에 개입하는 사이버 선전·선동이 효과가 없는 것과 동일한 이치다. 더불어 그는 “북한 주민의 관심은 역시 잘사는 것, 가치 있게 사는 것에 있다”며 “우리가 그 관심에 부합하는 유용한 정보나 소식을 전해주는 것이어야 하는데, 북한 주민의 선호체계에 대한 지식이나 모델도 없이 정치 논리로 심리전이 수행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제대로 심리전이 수행되려면 북한을 포용하려는 정치적 의지가 밑바탕이 되고 그 위에서 북한 주민의 관심을 고려한 진실하고 친절한 접근이어야 하는데, 우리 심리전은 북한에 대한 적개심을 근거로 수행되는 정치적 구호에 불과하다. 이런 방식으로는 절대 북한 주민을 변화시킬 수 없다. 우리 군 장교단이 갖고 있는 집단편견 북한 체제를 좀더 창의적으로 모욕하면서 우리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방식의 심리전은 심리전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북한체제 흔들기’에 해당된다. 이것은 심리전의 변종인 ‘폭동 일으키기’ 또는 사보타주 시도다. 그래서 그런지 북한 주민이 우리 정부가 주체가 된 심리전으로 인해 동요했다거나 변화하고 있다는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다. 반면에 남한의 영화나 라면, 초코파이가 더 효과적이다. 김형덕씨는 “가장 효과적인 심리전 수단은 라디오”라고 말한다. 한편 북한 사이버 공작원의 실체가 모호한 가운데 국내의 종북 세력이라고 군이 주장하는 국민을 대상으로 한 심리전의 경우는 어떤가? 군의 사이버 심리전은 군이 고수하고 있는 ‘종북 세력과의 전쟁’이라고 하는 신념체계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그런데 군의 종북 프레임에는 몇 가지 중요한 가정이 있다. 첫째, “국가는 항상 실패하고 파멸할 수 있다”는 비관적 국가관이다. 작년에 반유신,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종북 행위라고 규정하여 말썽이 된 육군 교육사령부가 제작한 <나의 조국!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에서는 “월남과 중국은 극소수의 이적 세력에 의해 공산화가 되었다”는 표현이 자주 구사되고 있다. 그런데 이 대목은 보수단체에 의해서 거의 예외 없이 인용되는데, 주로 신문 광고에서 “우리 사회는 월남 패망 직전과 거의 유사”하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여기에는 국가가 아주 미묘하고 사소한 사건, 또는 극소수의 세력에 의해 안보에 실패할 수 있다는 비관적 가정이 있다. 교재에서도 베트남 공산 세력의 수는 인구의 0.6%에 지나지 않았고, 중국의 경우는 불과 13명에서 공산주의 운동이 시작되었으나, 이 적은 수의 공산주의자가 마치 바이러스처럼 일순간에 국가 전체를 오염시키고 붕괴시키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둘째, 민주주의 체제는 전체주의와의 대결에서 불리하다는 가정이다. 물론 이러한 가정은 군 교재에서 언급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 논리’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교재에서도 지적하듯이 자유민주주의는 전체주의에 비해 ‘우월’한 것이지 ‘유리’한 것은 아니다. 전체주의는 잘 단결되어 있는 반면에 민주주의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전체주의에 비해 불리한 점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 약점을 보완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는데, 그것이 바로 군대라는 집단적 힘이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논리적 근거가 된다. 국가의 적인 종북 세력을 상대로 군이 ‘사상전’, ‘심리전’을 전개하고 이겨야 한다는 이유로 발전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불안은 남북한의 평화통일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이 점은 정신교육을 경험한 많은 장병들의 증언으로도 확인되는데, 그 주된 논리는 만일 남북한이 합의에 의해 통일이 된다면 북한은 유일당이고 남한은 다당제이기 때문에 선거를 하면 북한 노동당이 승리하게 되어 있다고 본다. 셋째, 법률주의와 도덕주의의 결합이다. 이것은 미국에서 수입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미국은 2차대전을 겪으면서 전체주의 체제의 완전 종식과 무조건적 항복을 요구하는 대량전을 수행했다. 전쟁의 목표는 나의 법률과 도덕을 상대방에게 관철시키는 것이고, 이것은 상대방 체제의 완전 붕괴와 국가의 파멸, 다수의 민간인 피해를 정당화했다. 이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라면 어쩌면 종족 말살까지 불사해야 한다는 무한 목표이기 때문에 이후 미국 내에서도 ‘과도한 대외문제 개입’이라는 부작용을 초래했고 많은 비판에 직면했다. 국가라는 존재는 정치체제를 불문하고 생존과 안보를 추구하는 데 있어 동일하다는 현실주의 사상이 2차대전 이후에 등장하면서 이러한 법률주의와 도덕주의 결합은 대외문제 해결에 있어 위험한 사상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유독 북한에 대해 강한 법률적·도덕적 접근법을 고수하고 있는데, 이렇게 되면 우리가 북한에 대해 가부장적인 지도력을 발휘하여 체벌하고 교화시켜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까지 진다. 반면 북한이라는 적을 인정하고 타협하는 것은 불온시되며, 공존과 협력은 불가능하거나 위험한 것으로 치부된다. 그러나 이러한 불안 심리는 우리 군의 장교단이 갖고 있는 집단 편견이다. 이런 식의 편견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의사는 언젠가 신종 바이러스 출현으로 인류가 전염병에 멸망할 것이라고 믿는다. 천문학자는 언젠가 혜성이 지구와 충돌하여 인류가 멸망할 것으로 믿는다. 성직자는 신의 심판으로 인류가 불과 유황불로 멸망할 것으로 믿는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 군 장교단의 상당수는 “결정적 시기에 북한과 종북 세력에 의해 3일 만에 대한민국이 공산화된다”고 실제로 믿는다. 올해 3월에 북한 김정은은 “우리 식 전면전”을 표방하고 “3일 전쟁계획”을 공개한 것을 거의 그대로 믿는다. 이런 사고는 잘못된 것이라기보다 직업적 편견에 가깝다. 미 국방장관 제임스 포레스털을 기억하라 군사적 편견이 잘못 적용됨으로써 냉전이 태동한 구체적 사례가 있다. 1947년에 미국 초대 국방장관에 취임한 제임스 포레스털이다. 당시 미국은 소련이라는 새로운 정체불명의 세력이 미국에 대한 위협인지를 둘러싸고 일대 혼란을 겪고 있었다. 포레스털은 그가 재임한 2년 동안 온통 “소련이 곧 쳐들어온다”는 생각뿐이었다. 그와 결혼한 조지핀 오그던 역시 포레스털이 재직하는 동안 “빨갱이들이 자신과 가족을 미행하며 암살할 것”이라는 편집증에 시달렸다.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는 그녀의 정신을 분열시켰으며, 알코올 중독에 빠지게 했다. 1949년에 국방장관직에서 퇴임한 포레스털은 신경쇠약에 걸려 강제로 병원에 입원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지하 외딴방에서 목을 매 자살한다. “국가가 곧 파멸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소련에 유화적인 미국 내의 적을 향한 전쟁으로 비화되어 이것이 1950년대 초에 미국 내 가장 수치스러운 ‘매카시 광풍’으로 이어진다. 불안 심리에서 나오는 심리전은 어느새 상대방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구속하는 족쇄가 된다. 우선 심리전을 수행하는 당사자 자신이 인간의 보편적 이성과 양심, 불굴의 용기, 자기결정능력에 대한 경외심을 상실한다. 오직 인간은 나약하고 공포에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 나약함을 보완해주는 집단이나 조직의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고 간편하게 결론을 내린다. 이럴 경우 국가는 개인의 한계를 극복해주는 신성한 권위가 된다. 우리 사회의 종북 프레임과 우파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는 바로 그러한 불안 심리의 변종이자, 부정적 인간관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이렇게 되면 심리전을 수행하는 주체가 바로 심리전에 스스로 걸려든다. 이러한 집단 불안의 히스테리와 광기가 내부의 적에게 공격적인 우파 사회운동으로 확산된다. 지금 국정원과 국방부의 심리전은 바로 그런 방향으로 왜곡된 셈이다. 따라서 국정원과 국방부 사이버사령부는 심리전을 수행하기에 앞서 심리전의 원래 의미, 즉 프로토타입(원형)을 회복해야 한다. 진정한 심리전이란 상대방의 긍정성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상대방을 설득·회유·응종·복종시키는 ‘태도의 변화’를 유도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러한 성과를 북한으로부터 거두지 못하고 우리 국민을 불신하게 하는 자기파괴적인 심리전을 자행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불법적인 댓글로 상대방을 모욕하고 거짓 선전을 퍼뜨리며 편향된 정치 논리를 확산시켰다면 그 자체로 실패한 심리전이다. 아무리 종북 세력과의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포장해도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김종대 <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