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아프기 전 여름 가족여행에서.
[토요판] 가족관계 증명서
엄마, 엄마…. 요즘 나는 엄마라는 단어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눈물을 쏙 뽑아내게 됐어. 엄마는 나이 마흔에 나를 낳아 다른 친구 엄마보다 적어도 열 살은 더 나이가 많았지. 게다가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다섯 남매를 먹이며 키우느라 언제나 억척스럽게 살았던 거친 엄마의 모습이 어렸을 때는 부끄럽기도 했다는 걸 처음으로 고백할게.
내 나이도 이제 벌써 40대 중반이야. 막내딸이 이렇게 나이 들어 가는 동안 엄마는 안에 있는 것 다 자식들에게 내주고, 풍선에서 바람 빠지듯 한없이 쪼그라져 슬픈 껍데기만 남아버렸네. 더 서러운 건 몸뿐 아니라 머릿속 기억조차 하나둘 내보내고서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는 엄마를 보게 된 현실이야.
치매라는 진단을 받고서 무기력해진 엄마의 눈물샘은 더욱 차오르는 듯해. 강인하고 억세던 엄마가 걸핏하면 눈물바람 하시는 통에 엄마와 전화 통화만 하고 나면 화장을 다시 해야 할 만큼 울음보가 터지곤 하잖아.
같은 이야기를 수없이 반복해도 짜증내지 말걸. 얼굴에 로션을 바르고 나서 다시 돌아와 로션을 달라고 할 때, 아까 발랐다고 냉정하게 말하지 말고 그냥 얼굴 위에 로션을 한번 더 발라드릴걸. 자식들이 보내준 용돈을 아까워서 꺼내 쓰지도 못하고 모아놓은 통장을 꽁꽁 감춰놓고, 내놓으라고 억지를 부릴 때 도대체 왜 그러냐고 화내지 않을걸. 대신 “그 돈 잠시 빌려 갔다 다시 가지고 왔다”고 용돈을 쥐여드릴걸. 이렇게 후회되는 일만 하는 나는 정말 못난 딸이다. 그렇지?
다섯 남매를 남편도 없이 키우면서 잿빛으로 타들어가는 가슴을 홀로 어루만지며 많이 외롭고 고단했을 엄마. 이제 후회보다는 즐겁고 행복한 기억들만 지워지지 않고 새록새록 떠오를 수 있도록 내가 더 노력할게.
새벽 밤낮 구분 없이 전화기를 붙들고 보고 싶다고, 보고 싶다고 어린아이처럼 울먹이시는 엄마의 목소리에 오늘 다시 가슴이 미어지네. 엄마가 머물고 계신 언니네 집으로 곧 달려갈게. 누구 만나거든 잘해주지도 못한 내 손 잡아끌고 “안 낳으려다가 나이 마흔에 낳은 딸인데 휴대전화도 사주고 용돈도 많이 주고 말도 잘 들어주는 더없이 예쁜 막내딸”이라고 허풍투성이 자랑 좀 또 해줘. 허풍인 거 알면서도 시치미 뚝 떼고 서서 듣고 있는 허풍쟁이 엄마의 좀 뻔뻔한 막내딸이잖아. 내가 이제 엄마의 머릿속 지우개 대신 행복을 채워줄게.
엄마의 막내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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