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일 미국 예일대 수학과에 첫 여교수로 부임하는 오희 브라운대 교수는 지난달 30일 공동연구교수(스칼러)로 방문한 고등과학원에서 기자와 만나 “수학을 하는 데 중요한 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는 용기”라고 강조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예일대 수학과 312년 금녀의 벽 깬 오희 교수
예일대 수학과 312년 금녀의 벽 깬 오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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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석 교수, 예일대에 강력 추천 -수학과를 2지망으로 한 이유는? “대학원을 다니고 있던 큰오빠가 권유해서다. 오빠 얘기로는 당시 교수님이신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가 ‘수학을 하고 나서 경제학을 하는 것도 괜찮다’고 말씀하셔서 수학과를 쓰라고 했다더라. 의대를 못 간 건 운명인 것 같다. 국어시험을 잘 봤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 내가 피를 못 본다. 아들이 사고로 수술받을 때도 다리가 후들거렸다.(웃음)” -많은 사람들이 수학자 하면 외골수를 떠올린다. 스스로 자신을 평가한다면? “대학 때도 과학 하는 아이들이 별난 척하는 게 싫었다. 수학은 사람이 하는 거지 이상한 성격인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공부할 때면 나도 괴팍해진다. 집중해야 하기에 누구나 괴팍해질 수 있다. 유치원에 다니는 딸이 내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엄마 또 수학 해?’ 하고 물으며 한숨을 푹 쉰다.(웃음)” -수학은 어떤 학문인가? “정답이 있는, 추구해야 하는 방향이 확실하고 명백한 학문이다. 증명을 하려면 왜 A에서 B로 넘어가는지 철저하게 이유가 있어야 한다. ‘우리 이렇게 하자’는 동의가 아니다. 수학적 사고방식은 논리적 사고방식이다. 사회 전체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에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 수학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이 잡히면 질서가 있고 대화를 하는 데도 존중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대학 시절 1년 동안의 학생운동은, 수학만 했다면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난 좋은 시간이었지만, 사회과학을 내가 잘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기도 했다. 사회과학은 정답이 없지 않은가.” -대학 3학년 때 학생운동에 ‘편입’한 계기는? “언니가 전남대 신문기자 하면서 학생운동을 해 어머니가 앓아눕고 아버지가 딸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심각했다. 고등학교 때 그 모습을 본데다 대학에 와서 운동권 친구들이 고뇌하고 찌들어 있고 술 마시는 모습을 보고 ‘옳은 가치를 위한 거라면서 이건 아니지 않나’ 생각했다. 2학년 추석 때 총학생회가 마련한 귀향버스를 탔다. 버스에는 의식화를 담당하는 선배가 한명씩 함께 탔다. 우리 버스에는 법대 총학생회장 오빠가 탔는데 얼굴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고뇌하고 슬퍼하는 게 아니라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저 안에 뭔가 있겠구나 궁금해졌다. 이후 내 발로 철학 공부하는 서클을 찾아가고 자연대 학생회에 가입하면서 운동권 학생이 돼 갔다.” 수학을 하는 데 있어 중요한 건
실패 두려워않고 도전하는 용기 -어떤 활동을 했나? “어려워서 이해는 잘 못했지만 자본론에서부터 볼셰비키혁명론, 체 게바라에 이르기까지 사회과학 서적들을 읽었다. 3학년 때 총학생회 노동분과장을 맡아 구로공단을 내 집 드나들듯 했다. 공장에서 파업하면 학생 대표로 찾아가 파업 이유 들어주고 함께 파업 투쟁이나 데모를 하기도 했다. 전경과 대치할 때 사실 너무 무서워 다리가 후들후들했지만 데리고 간 후배들 때문에 내색도 못했다.(웃음)” -부모님은 알고 있었나? “모르셨다. 나중에 성적이 떨어져 장학금을 못 받게 돼 초등학교 교사인 아버지에게 경제적 부담을 드린 것이 죄송했다. 하지만 광주 부모님들은 운동은 반대할지언정 대의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는다.” -학생운동은 왜 그만뒀나? “1~2학년 때 수학이 어렵지 않았다. 수학은 하면 되는 것이고 유학 가서 박사학위를 하고 교수가 되는 길이 너무 뻔한 것 같았다. 학생운동을 하게 된 것도 남을 돕는 일이 의미있는 삶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졸업할 때가 되니 친구들 가운데 노동운동을 한다며 공장에 들어가기도 하는데 그렇게는 못하겠고 갈 데가 없었다. 수학을 다시 하고 싶은데 운동권 친구들을 배신하는 것 같아 한동안 울면서 갈등을 했다. 어느 날 친구가 ‘너는 그냥 공부를 해라’라고 말해줘 용기를 얻었다.” -유학은 어떻게 가게 됐나? “(수학과에서) 공부를 계속하고 싶으면 유학을 가는 게 당시 추세였다. 학생운동을 하며 수업을 거의 들어가지 않아 중간고사 때 시험을 볼 수가 없었다. 답안지에 정답 대신 수업에 들어오지 못한 이유와 함께 ‘이런 저를 자랑스러운 제자로 여겨주시면 감사하겠다’는 글을 빼곡히 써 냈다. 예일대 박사과정에 지원할 때 당시 답안지를 받으셨던 이인석 교수(서울대 수학과)께서 강력한 추천서를 써주셨다. 선생님이 뒤에 그 답안지를 미국으로 보내주셔서 깜짝 놀랐다.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내가 봐도 제법 잘 썼더라.(웃음) 너무나 절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에게 노는 시간 주지않으면
오래 생각해야하는 일 잘 못하게돼 -수학계에서 여성 차별을 느낀 적이 있나? “안 느끼는 여성 수학자는 없을 것이다. 아이비리그가 여학생을 받기 시작한 것도 얼마 안 됐다. 물론 예일대가 여자 교수를 뽑겠다고 해서 나를 임용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성 연구자가 발표 논문이 1.5배 많아야 비슷한 처우를 받는다는 <뉴욕 타임스> 보도나, 똑같은 이력서에 ‘존’과 ‘제니퍼’를 썼을 때 존을 훨씬 많이 선택했다는 예일대의 실험 결과는 현실을 잘 보여준다. 물론 많은 대학들이 차별을 개선하려 노력하고는 있다.” -필즈상(수학계의 노벨상으로 4년마다 만 40살 이하 수학자에게 수여) 수상 대상에선 벗어났다. “핑계가 생겨서 다행이다.(웃음) 가까이 잘 아는 사람들이 상을 받는 것을 보고 좀더 수학을 일찍 시작했다면 하는 아쉬움은 있었다. 시간과 시기 문제를 얘기하는 것은 아니고, 어렸을 때는 어려운 문제를 두려워했던 것 같다. 노벨상이든 필즈상이든 어려운 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핵심은 도전할 수 있는 용기다. 내가 어떤 문제를 건드릴 만큼 그릇이 돼 있을까, 능력이 있는 건가 하는 정신적 장벽을 극복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용기와 자신감, 실패를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는 사고방식을 갖는 데 오래 걸렸다.” -한국 학생들의 수학 평가점수가 높고 수학올림피아드에 대한 열기도 뜨겁다. “평균적으로 아시아 학생들이 수학을 잘하기는 하는데 자유롭게 사유하고 덤벼드는 게 부족하다. 너무 체계적으로 잘 배워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 같다. 올림피아드 문제는 어떤 특별한 방식의 문제들이다. 올림피아드 나가서 잘 못한다고 수학자 자질이 없다고 볼 수 없다. 많은 수학 문제는 정해진 시간에 풀 수 있는 문제를 푸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 부모들은 수학을 잘해야 좋은 대학을 간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모든 학생들이 수학 사교육을 한다. 수학 강국에 도움이 될 수 있지는 않나? “유학 오는 학생들 보면 뛰어난 아이들이 많아졌다. 전체적으로 평균이 높아졌겠지만 그만큼 잘하기 위해 얼마나 투자를 많이 했겠나. 하지만 한국 교수들한테서 대학 와서도 과외 받으려는 학생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개인적 생각에는 아이들이 노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머리가 비어 있어야 이 생각 저 생각 하면서 사고능력이 생긴다. 아이들에게 쉴 틈을 안 주면 금방 끝내야 하는 것은 잘할 수 있지만 오랜 시간 사고하는 일에는 능력이 떨어질 것이다.”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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