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군이 광주 전남도청을 점령한 1980년 5월27일 낮, 공무원들이 시민군의 주검을 상무관으로 옮기고 있다. 신복진 사진 눈빛 아카이브 제공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40> 광주, 장엄한 패배
<40> 광주, 장엄한 패배
“국군 아니죠? 인민군이죠?”
이런 헛소문은 그때도 있었다
소문의 진원지는 아이들이었다
참혹한 살육을 이해할 수 없어
어른들에게 그렇게 물었던 거다 5월27일 새벽 도청에서
계엄군을 기다리던 그들이
꿈꾼 세상은 무엇이었을까
유신공주가 대통령이 되고
‘폭도’를 넘어 ‘홍어’로
능멸당할 줄 상상이나 했을까 광주는 아프다. 죽도록 아프다. 30년의 세월이 흘러도 오래된 상처가 낫지 않아서가 아니다. 새로운 공수부대가 낯선 흉기로 찌르고 두들겨 팬다. 뒤늦게 트라우마센터 만들어 아픈 상처 토닥여주면 무엇하나. 저렇게 새로운 아픔, 새로운 슬픔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데…. ‘임을 위한 행진곡’이 합창은 돼도 제창은 안 된단다. 합창을 하면 합창단만 부르면 되지만, 제창을 하면 대통령 포함해 참석자 일동이 불러야 하기 때문이었을까? 돌아가신 분들의 관을 임시로 상무관에 모신 것을 두고 ‘홍어 택배 포장완료’ 운운한 것을 보면 저런 정신파탄자들이 우리 사회에 넘쳐난다는 사실이 차라리 그때의 계엄군 만행보다 더 무섭다. 저런 자들은 전두환 같은 자들이 데려다 좌로 굴러 우로 굴러 몇 번 시킨 뒤 곤봉과 대검 쥐여서 광화문에 풀어놓으면 그날 금남로에서 벌어진 일보다 더 끔찍한 일을 서슴없이 저지를 자들이다. 광주를 겪고도 군대에서 시민들에게 발포하라는 상관의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라는 인권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 나라, 아니 발포명령의 실체조차 밝혀내지 못하는 나라에서 재발 방지는 그저 꿈일 뿐이다. “왜 찔렀지? 왜 쏘았지? 트럭에 싣고 어딜 갔지?” 1980년, 새봄이 왔지만 학원가는 유신시대에 사라진 학생회를 재건하는 데 몰두하느라 아직 정치적인 이슈를 전면에 제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통령 최규하도, 국무총리 신현확도, 새로운 실세로 등장한 중앙정보부장 서리 전두환도 모두 유신잔당들이었다. 명확하지 않을 이유가 없던 정치 일정이 안갯속에 빠진 것은 다 유신잔당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해보려고 몸부림친 때문이었다. 제도권이 정당과 국회를 통해 국민들의 에너지를 제대로 수렴하지 못했기 때문에 군과 학생의 대결이 한국 정치의 결정적인 대립 구도를 형성해 왔다. 그것은 1979년 10월 부산·마산에서 시작되어 1980년 5월 광주에서 끝났지만 흔히 ‘서울의 봄’이라는 서울 중심적인 용어로 불리어지는 이 격동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선빵’을 날리는 쪽이 손해를 본 적이 많았던 묘한 역사 때문인지 군과 학생은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거리로 먼저 나온 것은 일사불란한 명령체계를 가진 군이 아니라 학생들이었다. 5월13일 밤에 이어 14일과 15일 이틀간 수만 명의 학생들이 서울 시내를 휩쓸고 다녔지만 학생들의 기대와는 달리 시민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유신 말기 부마항쟁 당시 수백 명의 학생들이 거리에 진출하자 삽시간에 시위대가 수만 명으로 불어났던 때와는 너무나 다른 양상이었다. 시민들의 참여가 거의 없자 학생들은 5월15일 이른바 서울역 회군을 통해 거리에서 학원으로 돌아갔다. 군부는 그 틈을 타서 치고 나왔다. 정부는 5월17일 밤 24시를 기해 비상계엄 선포지역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모든 정치활동은 중단되었고, 대학은 문을 닫았으며, 전국에서 수백 명의 정치인과 재야인사, 학생들이 검거되었다. 3김씨 중에서 김대중은 소요조종의 혐의로, 김종필은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로 연행되었지만, 김영삼은 자택에 연금되었을 뿐 연행은 모면했다. 교활한 신군부는 김대중과 김영삼을 다른 방식으로 처리함으로써 호남과 영남이 손잡고 저항할 가능성을 차단했다. 당시 대학생들은 캠퍼스로 돌아가면서 만약 군부가 치고 나올 경우 학생들이 모일 시간과 장소를 정해두고 있었다. 실제로 학생들이 일부이지만 모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서울역이나 영등포역 등 집결지에 모였던 일부 학생들은 공수부대가 진압봉을 높이 들고 고함을 치며 달려들자 몇 초 버티지도 못하고 그대로 해산되고 말았다. 완벽한 초전박살, 그것이 끝이었다. 광주 한 곳을 제외하고는. 운명의 5월18일 아침 10시 7공수 33대대가 지키고 있던 전남대 정문 앞에도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모여든 학생이 200~300에 이르자 학생들은 용기를 내어 “비상계엄 해제하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공수부대는 곧 진압을 시작했다. 공수부대의 진압은 경찰의 진압과는 차원이 달랐다. 공수부대도 부마항쟁을 진압할 당시의 공수부대가 아니었다. 당시 보안사가 작성한 ‘부마지역 학생소요사태 교훈’이라는 보고서나 부마항쟁 당시 부산지역 보안부대장이었던 5공 핵심 권정달에 따르면 “부마사태 진압작전에 대한 평가과정에서 시위의 대규모 확산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초동단계부터 공수부대 등을 투입해 강경진압을 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반성론이 제기”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신군부 수뇌부들은 현장의 공수부대에 공식·비공식 루트를 통하여 “소요자는 최후의 1인까지 추격하여 타격 및 체포”하는 등 강경진압 할 것을 거듭 지시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공수부대는 “시위학생을 잡으면 먼저 곤봉으로 머리를 때려 쓰러뜨리고는 서너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군홧발로 으깨버리고” “얼굴을 위로 돌리게 해놓고는 안면을 군홧발로 뭉개고 곤봉으로 쳐서 피 곤죽을 만들었다.” 공수부대는 피투성이가 된 희생자들의 발과 머리를 맞들고 좌우로 하나, 둘 흔들다 셋 하고 트럭으로 던졌다. 쓰러진 사람 위에 사람들이 겹겹이 쌓였다. 누군가가 프랑스 노래 ‘누가 할머니를 죽였나’에 곡을 붙여 ‘오월가’를 만들었다. 그 시절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를 떠올리며 목 놓아 부르던 그 노래가 던진 의문을 우리는 아직 풀지 못했다. “왜 찔렀지? 왜 쏘았지? 트럭에 싣고 어딜 갔지?” 군이 이럴 수는 없었다. 사실 저들은 국군이 아니라 인민군이라는 얘기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그때도 있었다. 그때 그 소문의 진원지는 어린아이들이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군인들의 살육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어린이들은 선생님이나 부모님께 ‘저 사람들 국군 아니죠? 인민군이죠?’라고 애타게 물었던 것이다. 팔에 흰 완장을 두른 위생병이라면 적군도 치료해주는 것이 마땅하건만, 진압봉을 높이 쳐들어 피 흘리는 부상자를 치고 또 쳤다. 광주는 1977년 7월 뉴욕과 어떻게 달랐나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학살에 시민들은 처음에는 공포에 떨며 도망갔지만 어느 지점에선가 그야말로 ‘겁대가리’를 상실했다. 공수부대에 쫓길 때는 그저 무서운 생각뿐이었지만, 일단 몸을 피하고 나면 계엄군이 사람들을 때리고 죽이던 모습이 떠올라 엄청난 분노를 억제할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같이 시위를 구경하던 사람, 조금 전까지 같이 구호를 외치던 사람, 조금 전까지 같이 도망치던 사람이 픽픽 쓰러지는 것을 보니 죽고 사는 것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계엄군의 만행에 몸서리를 치며 발을 구르던 시민들이 공수부대를 몰아내자며 저항에 나섰다. 계엄군은 겁먹고 도망쳐야 할 시민들이 장년, 노년층까지 나서 저항하자 크게 당황하였다. 마침내 5월21일 오후 1시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퍼질 때 계엄군은 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를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이제 시민들도 외곽의 파출소 무기고를 부수고 무장을 갖추기 시작했다. 시민군이 등장한 것이다. 저녁 8시 시민군이 마침내 도청을 점령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도청소재지가 민중들에게 넘어간 것은 왕조의 끝물에 전봉준의 동학군이 전주 감영을 점령한 것 딱 한 번뿐이었다. 이런 오합지졸 혁명군은 역사에 다시 없었다. 아무 준비도 없이, 아무 계획도 없이, 아무 조직도 없이 시민군은 얼떨결에 도청소재지를 해방시켰다. 시민들에 대한 집단 발포 직후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서울에서 담화문을 발표하여 ‘광주사태’는 ‘불순분자’나 ‘고첩’들의 선동에 넘어간 깡패, 불량배 등 소수의 폭도들에 의한 것이라고 왜곡했다. 앵무새 언론은 광주는 폭도들의 약탈과 방화와 파괴가 넘치는 무법천지 난장판이라고 떠들어댔다. 그러나 시민들이 주인이 된 광주는 너무나 질서가 잡히고 평온했다. 1977년 7월 핵발전소에 벼락이 떨어져 미국 뉴욕시가 12시간 동안 정전이 되었을 때, 수천 건의 약탈 사고가 일어나 현장에서 체포된 자만 3800명에 달했다 하지만 총기가 수천 정 풀린 광주는 단 한 건의 강도 사고도 없이 너무나 평온했다. 광주엔들 도둑놈, 양아치, 강도가 없었겠는가. 그들조차 상중이었고 도시 전체가 거대한 상갓집으로 변한 광주에서는 모두가 상주였던 것이다. 5월 광주는 거대한 슬픔의 공동체이자 나눔의 공동체였다. 계엄군이 소비도시 광주의 외곽을 차단하여 물자가 들어오지 않았지만 물가는 오르지 않았고 매점매석도 없었다. 양동시장과 대인시장의 상인들은 거리에 솥단지를 걸어놓고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을 먹였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시민들은 너무너무 외로웠다. 공수부대를 몰아냈을 때의 기쁨도 잠시, 하루하루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감이 몰려왔다. 광주 외곽을 철저히 봉쇄한 계엄군의 시내진입은 다가오고 있었고 사태 해결의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광주의 유지와 재야인사들이 중심이 된 시민수습대책위원회는 무기를 반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차 대전이나 한국전쟁 때 쓰던 M1이나 카빈총을 갖고 중무장한 계엄군이 작심하고 쳐들어올 때 광주를, 아니 도청이라도 지켜낸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할 것 아닌가. 총을 내려놓자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러나 그날 모두가 총을 내려놓았다면 광주는 우리 가슴에 오늘과는 다른 모습으로 남았을 것이다. 끝까지 총을 내려놓을 수 없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승패가 문제가 아니었다. 왜 총을 내려놓을 수 없다는 것인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걍’ 내려놓을 수 없었다. 텅 빈 도청에 전두환과 그 졸개들이 씩 웃으며 들어온다면 지금까지 죽은 사람은 뭐가 되고 지금까지 싸운 건 또 뭐가 되느냐는 것이다. “산 사람을 더 생각하는 자들은 총을 내려놓자고 했고, 죽은 이들을 더 생각하는 자들은 총을 놓을 수 없었다.” 5월26일 오후에도 도청 앞 분수대에서 3만 여 명의 시민이 참가한 가운데 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시민들이 광주를 해방한 이후 매일 열리는 궐기대회였다. 그날의 분위기는 여느 때와는 달랐다. 그날 밤 계엄군의 진입은 확실했다. 계엄군은 이미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 3만 명이 모두 다 도청에 남았다면 계엄군은 진압작전을 펼 수 있었을까? 계엄군을 몰아냈던 위대한 광주시민들은 비장한 침묵 속에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99퍼센트의 시민들이 집으로 돌아갔고, 1퍼센트 남짓한 300여 명이 도청에 남았다. 학생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가방끈 긴 사람들보다는 가방끈 짧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다. 몇몇은 우리 죽고 나면 돌봐줄 사람도 없을 거라며 목욕하고 새 속옷으로 갈아입었다. 밤은 지는 싸움을 피하지 않고 자리를 지킨 이들의 처연함을 삼키며 깊어만 갔다. 1980년 5월27일 새벽 4시55분의 역사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신애가 마이크를 잡고 울면서 호소한 것이 바로 이 밤이었다. “광주 시민 여러분, 우리를 기억해주십시오. 우리는 폭도가 아닙니다.” 몇 시간 전까지 도청 앞 분수대에 있다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밤이 깊었다고 잠들 수 있었을까? 차라리 도청에 남은 사람들이 극도의 중압감을 주체하지 못해 꾸벅꾸벅 졸았다고 한다. 도청에 남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덜덜 떨며 잠 못 이루던 사람들은 신애의 호소를 가슴으로 들어야 했다. 새벽 3시30분 계엄군은 광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4시엔 도청을 포위했다. 4시10분께 계엄군의 일제 사격이 시작되었다. 총성은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계엄군의 상황일지에는 “04:55, 도청 완전 점령”이라고 쓰여 있었다. 모두 다 죽기를 각오하고 도청에 남았지만 워낙 화력 차이가 커 순식간에 제압당한 탓인지 꽤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았다. <오월의 사회과학>의 저자 최정운 교수는 “살고 싶었던 사람은 다 살았고, 죽기로 작정한 사람도 한 반은 살았다”고 썼다. 어쩌면 반보다 훨씬 많이 살아남은 그들은 등에 ‘악질 극렬’ ‘실탄 10발 소지’ ‘권총 소지’ 등의 분류기준이 매직으로 쓰인 채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갔다. 지금까지 계속되는 광주의 트라우마, 살아남은 자의 고통이 시작되었다. 지금은 망월동 묘역이 으리으리한 국립묘지가 되었지만, 도청에서 희생된 분들이 한 분 한 분 꽃상여 타고 그곳에 모셔진 것이 아니었다. 영구차도 아니었다. 그분들은 쓰레기차에 관이 포개져 실렸다. 무척이나 더웠던 5월의 날씨 탓에 포개져 실린 관 위에 뿌옇게 소독약이 뿌려졌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 윤상원도 그렇게 실려 갔다. 처절한 패배였다. 그러나 장엄한 패배였다. 때로 역사에서는 잘 지는 것이 구차하게 이기는 것보다 훨씬 중요했다. 80년 5월에서 87년 6월까지는 한 호흡이었다. 5월27일 새벽이 없었으면 6월은 올 수 없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간직한 80년대의 젊은이들은 자기 삶을 온전히 살 수 없었다. 강풀의 <26년>에서 실어증에 걸렸던 미진이 아버지가 죽기 전 딸에게 남긴 한마디, “미진아, 너는 너의 삶을 살아라”는 너무나 절절한 말이었다. 80년대는 살아남은 자들이 먼저 간 이들의 삶을 대신 살아야 했던 무거운 시대, 한마디로 죽음을 끼고 산 시대였다. 2010년 출간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2012년 대선 때까지 무려 120만부가 넘게 팔렸다고 한다. 지하철 역을 나왔을 때 군복 입은 청년들이 지나가던 여학생을 곤봉으로 패고 대검으로 찌르고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걸 누가 말려야 하나. 그런 상황에서 정의가 무엇인지 꼭 하버드대학 교수에게 물어보아야 하나? 5월 광주만 돌아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광주가 아프다. 광주의 트라우마로 너무나 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유공자’나 그 가족들을 보면 공수부대의 행패를 보아도 잘났다고 말리겠다고 나서는 것이 아니라 못 본 척 돌아가야 한다. 도청이 진압당한 뒤 6월1일 처음 나온 <전남매일>은 1면에 김준태 시인의 시 <무등산은 알고 있다>를 실었다. 말이 필요 없었다. 제목만 보고도 시민들은 눈물을 흘렸다. 그래, 무등산은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서울의 남산은? 부산의 금정산은? 대구의 팔공산은? 대전의 계룡산은? 요즘 말로 “알랑가 몰라”다. 아니, 알아도 모르는 척했다. 그래서 광주는 많이 아팠다. 무등산만 알았다. 그 무등산이 낮아졌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모두 다 가진 자들이 ‘살아남은 자의 권력’을 휘두르며 무등산 등골을 파먹어 무등산이 낮아졌다. 광주와 아무런 연고를 갖지 않았던 대한민국 도처에 널려 있던 ‘광주의 자식들’이 모두 입을 모아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로 불렀던 광주는 어느새 지방의 작은 도시로 찌그러졌다. 일베의 모욕은 그다음에 왔을 뿐이다. 그 모욕을 받고도 분해하지도 않으니 모욕이 증폭될 뿐이다. 광주민중항쟁은 박정희 없는 유신체제를 이어가려던 유신잔당과의 싸움이었다. 그로부터 33년이 지난 지금 유신체제의 핵심 박근혜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우리 역사에서 광주만큼은 승리한 투쟁이라고 여겼던 믿음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오늘이다. 5월27일 새벽 도청에 남은 사람들이 계엄군을 기다리며 어두운 창문 너머로 꿈꾸던 30년 뒤의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33년 뒤의 대한민국이 유신공주가 대통령이 되고, 가난한 집 아이들의 장래희망은 겨우 ‘정규직’이고, 자신들과 함께했던 동료들이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면 그날 밤 죽겠다고 도청에 남는 것이 아니라 집에 가는 것이 옳았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고, 역사는 끊임없이 다시 쓰여져야 한다. 유신이 부활한 오늘, 도청의 그들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광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광주의 역사를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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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공주가 대통령이 되고
‘폭도’를 넘어 ‘홍어’로
능멸당할 줄 상상이나 했을까 광주는 아프다. 죽도록 아프다. 30년의 세월이 흘러도 오래된 상처가 낫지 않아서가 아니다. 새로운 공수부대가 낯선 흉기로 찌르고 두들겨 팬다. 뒤늦게 트라우마센터 만들어 아픈 상처 토닥여주면 무엇하나. 저렇게 새로운 아픔, 새로운 슬픔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데…. ‘임을 위한 행진곡’이 합창은 돼도 제창은 안 된단다. 합창을 하면 합창단만 부르면 되지만, 제창을 하면 대통령 포함해 참석자 일동이 불러야 하기 때문이었을까? 돌아가신 분들의 관을 임시로 상무관에 모신 것을 두고 ‘홍어 택배 포장완료’ 운운한 것을 보면 저런 정신파탄자들이 우리 사회에 넘쳐난다는 사실이 차라리 그때의 계엄군 만행보다 더 무섭다. 저런 자들은 전두환 같은 자들이 데려다 좌로 굴러 우로 굴러 몇 번 시킨 뒤 곤봉과 대검 쥐여서 광화문에 풀어놓으면 그날 금남로에서 벌어진 일보다 더 끔찍한 일을 서슴없이 저지를 자들이다. 광주를 겪고도 군대에서 시민들에게 발포하라는 상관의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라는 인권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 나라, 아니 발포명령의 실체조차 밝혀내지 못하는 나라에서 재발 방지는 그저 꿈일 뿐이다. “왜 찔렀지? 왜 쏘았지? 트럭에 싣고 어딜 갔지?” 1980년, 새봄이 왔지만 학원가는 유신시대에 사라진 학생회를 재건하는 데 몰두하느라 아직 정치적인 이슈를 전면에 제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통령 최규하도, 국무총리 신현확도, 새로운 실세로 등장한 중앙정보부장 서리 전두환도 모두 유신잔당들이었다. 명확하지 않을 이유가 없던 정치 일정이 안갯속에 빠진 것은 다 유신잔당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해보려고 몸부림친 때문이었다. 제도권이 정당과 국회를 통해 국민들의 에너지를 제대로 수렴하지 못했기 때문에 군과 학생의 대결이 한국 정치의 결정적인 대립 구도를 형성해 왔다. 그것은 1979년 10월 부산·마산에서 시작되어 1980년 5월 광주에서 끝났지만 흔히 ‘서울의 봄’이라는 서울 중심적인 용어로 불리어지는 이 격동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선빵’을 날리는 쪽이 손해를 본 적이 많았던 묘한 역사 때문인지 군과 학생은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거리로 먼저 나온 것은 일사불란한 명령체계를 가진 군이 아니라 학생들이었다. 5월13일 밤에 이어 14일과 15일 이틀간 수만 명의 학생들이 서울 시내를 휩쓸고 다녔지만 학생들의 기대와는 달리 시민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유신 말기 부마항쟁 당시 수백 명의 학생들이 거리에 진출하자 삽시간에 시위대가 수만 명으로 불어났던 때와는 너무나 다른 양상이었다. 시민들의 참여가 거의 없자 학생들은 5월15일 이른바 서울역 회군을 통해 거리에서 학원으로 돌아갔다. 군부는 그 틈을 타서 치고 나왔다. 정부는 5월17일 밤 24시를 기해 비상계엄 선포지역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모든 정치활동은 중단되었고, 대학은 문을 닫았으며, 전국에서 수백 명의 정치인과 재야인사, 학생들이 검거되었다. 3김씨 중에서 김대중은 소요조종의 혐의로, 김종필은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로 연행되었지만, 김영삼은 자택에 연금되었을 뿐 연행은 모면했다. 교활한 신군부는 김대중과 김영삼을 다른 방식으로 처리함으로써 호남과 영남이 손잡고 저항할 가능성을 차단했다. 당시 대학생들은 캠퍼스로 돌아가면서 만약 군부가 치고 나올 경우 학생들이 모일 시간과 장소를 정해두고 있었다. 실제로 학생들이 일부이지만 모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서울역이나 영등포역 등 집결지에 모였던 일부 학생들은 공수부대가 진압봉을 높이 들고 고함을 치며 달려들자 몇 초 버티지도 못하고 그대로 해산되고 말았다. 완벽한 초전박살, 그것이 끝이었다. 광주 한 곳을 제외하고는. 운명의 5월18일 아침 10시 7공수 33대대가 지키고 있던 전남대 정문 앞에도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모여든 학생이 200~300에 이르자 학생들은 용기를 내어 “비상계엄 해제하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공수부대는 곧 진압을 시작했다. 공수부대의 진압은 경찰의 진압과는 차원이 달랐다. 공수부대도 부마항쟁을 진압할 당시의 공수부대가 아니었다. 당시 보안사가 작성한 ‘부마지역 학생소요사태 교훈’이라는 보고서나 부마항쟁 당시 부산지역 보안부대장이었던 5공 핵심 권정달에 따르면 “부마사태 진압작전에 대한 평가과정에서 시위의 대규모 확산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초동단계부터 공수부대 등을 투입해 강경진압을 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반성론이 제기”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신군부 수뇌부들은 현장의 공수부대에 공식·비공식 루트를 통하여 “소요자는 최후의 1인까지 추격하여 타격 및 체포”하는 등 강경진압 할 것을 거듭 지시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공수부대는 “시위학생을 잡으면 먼저 곤봉으로 머리를 때려 쓰러뜨리고는 서너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군홧발로 으깨버리고” “얼굴을 위로 돌리게 해놓고는 안면을 군홧발로 뭉개고 곤봉으로 쳐서 피 곤죽을 만들었다.” 공수부대는 피투성이가 된 희생자들의 발과 머리를 맞들고 좌우로 하나, 둘 흔들다 셋 하고 트럭으로 던졌다. 쓰러진 사람 위에 사람들이 겹겹이 쌓였다. 누군가가 프랑스 노래 ‘누가 할머니를 죽였나’에 곡을 붙여 ‘오월가’를 만들었다. 그 시절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를 떠올리며 목 놓아 부르던 그 노래가 던진 의문을 우리는 아직 풀지 못했다. “왜 찔렀지? 왜 쏘았지? 트럭에 싣고 어딜 갔지?” 군이 이럴 수는 없었다. 사실 저들은 국군이 아니라 인민군이라는 얘기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그때도 있었다. 그때 그 소문의 진원지는 어린아이들이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군인들의 살육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어린이들은 선생님이나 부모님께 ‘저 사람들 국군 아니죠? 인민군이죠?’라고 애타게 물었던 것이다. 팔에 흰 완장을 두른 위생병이라면 적군도 치료해주는 것이 마땅하건만, 진압봉을 높이 쳐들어 피 흘리는 부상자를 치고 또 쳤다. 광주는 1977년 7월 뉴욕과 어떻게 달랐나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학살에 시민들은 처음에는 공포에 떨며 도망갔지만 어느 지점에선가 그야말로 ‘겁대가리’를 상실했다. 공수부대에 쫓길 때는 그저 무서운 생각뿐이었지만, 일단 몸을 피하고 나면 계엄군이 사람들을 때리고 죽이던 모습이 떠올라 엄청난 분노를 억제할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같이 시위를 구경하던 사람, 조금 전까지 같이 구호를 외치던 사람, 조금 전까지 같이 도망치던 사람이 픽픽 쓰러지는 것을 보니 죽고 사는 것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계엄군의 만행에 몸서리를 치며 발을 구르던 시민들이 공수부대를 몰아내자며 저항에 나섰다. 계엄군은 겁먹고 도망쳐야 할 시민들이 장년, 노년층까지 나서 저항하자 크게 당황하였다. 마침내 5월21일 오후 1시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퍼질 때 계엄군은 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를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이제 시민들도 외곽의 파출소 무기고를 부수고 무장을 갖추기 시작했다. 시민군이 등장한 것이다. 저녁 8시 시민군이 마침내 도청을 점령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도청소재지가 민중들에게 넘어간 것은 왕조의 끝물에 전봉준의 동학군이 전주 감영을 점령한 것 딱 한 번뿐이었다. 이런 오합지졸 혁명군은 역사에 다시 없었다. 아무 준비도 없이, 아무 계획도 없이, 아무 조직도 없이 시민군은 얼떨결에 도청소재지를 해방시켰다. 시민들에 대한 집단 발포 직후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서울에서 담화문을 발표하여 ‘광주사태’는 ‘불순분자’나 ‘고첩’들의 선동에 넘어간 깡패, 불량배 등 소수의 폭도들에 의한 것이라고 왜곡했다. 앵무새 언론은 광주는 폭도들의 약탈과 방화와 파괴가 넘치는 무법천지 난장판이라고 떠들어댔다. 그러나 시민들이 주인이 된 광주는 너무나 질서가 잡히고 평온했다. 1977년 7월 핵발전소에 벼락이 떨어져 미국 뉴욕시가 12시간 동안 정전이 되었을 때, 수천 건의 약탈 사고가 일어나 현장에서 체포된 자만 3800명에 달했다 하지만 총기가 수천 정 풀린 광주는 단 한 건의 강도 사고도 없이 너무나 평온했다. 광주엔들 도둑놈, 양아치, 강도가 없었겠는가. 그들조차 상중이었고 도시 전체가 거대한 상갓집으로 변한 광주에서는 모두가 상주였던 것이다. 5월 광주는 거대한 슬픔의 공동체이자 나눔의 공동체였다. 계엄군이 소비도시 광주의 외곽을 차단하여 물자가 들어오지 않았지만 물가는 오르지 않았고 매점매석도 없었다. 양동시장과 대인시장의 상인들은 거리에 솥단지를 걸어놓고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을 먹였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시민들은 너무너무 외로웠다. 공수부대를 몰아냈을 때의 기쁨도 잠시, 하루하루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감이 몰려왔다. 광주 외곽을 철저히 봉쇄한 계엄군의 시내진입은 다가오고 있었고 사태 해결의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광주의 유지와 재야인사들이 중심이 된 시민수습대책위원회는 무기를 반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차 대전이나 한국전쟁 때 쓰던 M1이나 카빈총을 갖고 중무장한 계엄군이 작심하고 쳐들어올 때 광주를, 아니 도청이라도 지켜낸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할 것 아닌가. 총을 내려놓자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러나 그날 모두가 총을 내려놓았다면 광주는 우리 가슴에 오늘과는 다른 모습으로 남았을 것이다. 끝까지 총을 내려놓을 수 없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승패가 문제가 아니었다. 왜 총을 내려놓을 수 없다는 것인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걍’ 내려놓을 수 없었다. 텅 빈 도청에 전두환과 그 졸개들이 씩 웃으며 들어온다면 지금까지 죽은 사람은 뭐가 되고 지금까지 싸운 건 또 뭐가 되느냐는 것이다. “산 사람을 더 생각하는 자들은 총을 내려놓자고 했고, 죽은 이들을 더 생각하는 자들은 총을 놓을 수 없었다.” 5월26일 오후에도 도청 앞 분수대에서 3만 여 명의 시민이 참가한 가운데 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시민들이 광주를 해방한 이후 매일 열리는 궐기대회였다. 그날의 분위기는 여느 때와는 달랐다. 그날 밤 계엄군의 진입은 확실했다. 계엄군은 이미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 3만 명이 모두 다 도청에 남았다면 계엄군은 진압작전을 펼 수 있었을까? 계엄군을 몰아냈던 위대한 광주시민들은 비장한 침묵 속에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99퍼센트의 시민들이 집으로 돌아갔고, 1퍼센트 남짓한 300여 명이 도청에 남았다. 학생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가방끈 긴 사람들보다는 가방끈 짧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다. 몇몇은 우리 죽고 나면 돌봐줄 사람도 없을 거라며 목욕하고 새 속옷으로 갈아입었다. 밤은 지는 싸움을 피하지 않고 자리를 지킨 이들의 처연함을 삼키며 깊어만 갔다. 1980년 5월27일 새벽 4시55분의 역사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신애가 마이크를 잡고 울면서 호소한 것이 바로 이 밤이었다. “광주 시민 여러분, 우리를 기억해주십시오. 우리는 폭도가 아닙니다.” 몇 시간 전까지 도청 앞 분수대에 있다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밤이 깊었다고 잠들 수 있었을까? 차라리 도청에 남은 사람들이 극도의 중압감을 주체하지 못해 꾸벅꾸벅 졸았다고 한다. 도청에 남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덜덜 떨며 잠 못 이루던 사람들은 신애의 호소를 가슴으로 들어야 했다. 새벽 3시30분 계엄군은 광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4시엔 도청을 포위했다. 4시10분께 계엄군의 일제 사격이 시작되었다. 총성은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계엄군의 상황일지에는 “04:55, 도청 완전 점령”이라고 쓰여 있었다. 모두 다 죽기를 각오하고 도청에 남았지만 워낙 화력 차이가 커 순식간에 제압당한 탓인지 꽤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았다. <오월의 사회과학>의 저자 최정운 교수는 “살고 싶었던 사람은 다 살았고, 죽기로 작정한 사람도 한 반은 살았다”고 썼다. 어쩌면 반보다 훨씬 많이 살아남은 그들은 등에 ‘악질 극렬’ ‘실탄 10발 소지’ ‘권총 소지’ 등의 분류기준이 매직으로 쓰인 채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갔다. 지금까지 계속되는 광주의 트라우마, 살아남은 자의 고통이 시작되었다. 지금은 망월동 묘역이 으리으리한 국립묘지가 되었지만, 도청에서 희생된 분들이 한 분 한 분 꽃상여 타고 그곳에 모셔진 것이 아니었다. 영구차도 아니었다. 그분들은 쓰레기차에 관이 포개져 실렸다. 무척이나 더웠던 5월의 날씨 탓에 포개져 실린 관 위에 뿌옇게 소독약이 뿌려졌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 윤상원도 그렇게 실려 갔다. 처절한 패배였다. 그러나 장엄한 패배였다. 때로 역사에서는 잘 지는 것이 구차하게 이기는 것보다 훨씬 중요했다. 80년 5월에서 87년 6월까지는 한 호흡이었다. 5월27일 새벽이 없었으면 6월은 올 수 없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간직한 80년대의 젊은이들은 자기 삶을 온전히 살 수 없었다. 강풀의 <26년>에서 실어증에 걸렸던 미진이 아버지가 죽기 전 딸에게 남긴 한마디, “미진아, 너는 너의 삶을 살아라”는 너무나 절절한 말이었다. 80년대는 살아남은 자들이 먼저 간 이들의 삶을 대신 살아야 했던 무거운 시대, 한마디로 죽음을 끼고 산 시대였다. 2010년 출간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2012년 대선 때까지 무려 120만부가 넘게 팔렸다고 한다. 지하철 역을 나왔을 때 군복 입은 청년들이 지나가던 여학생을 곤봉으로 패고 대검으로 찌르고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걸 누가 말려야 하나. 그런 상황에서 정의가 무엇인지 꼭 하버드대학 교수에게 물어보아야 하나? 5월 광주만 돌아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광주가 아프다. 광주의 트라우마로 너무나 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유공자’나 그 가족들을 보면 공수부대의 행패를 보아도 잘났다고 말리겠다고 나서는 것이 아니라 못 본 척 돌아가야 한다. 도청이 진압당한 뒤 6월1일 처음 나온 <전남매일>은 1면에 김준태 시인의 시 <무등산은 알고 있다>를 실었다. 말이 필요 없었다. 제목만 보고도 시민들은 눈물을 흘렸다. 그래, 무등산은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서울의 남산은? 부산의 금정산은? 대구의 팔공산은? 대전의 계룡산은? 요즘 말로 “알랑가 몰라”다. 아니, 알아도 모르는 척했다. 그래서 광주는 많이 아팠다. 무등산만 알았다. 그 무등산이 낮아졌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모두 다 가진 자들이 ‘살아남은 자의 권력’을 휘두르며 무등산 등골을 파먹어 무등산이 낮아졌다. 광주와 아무런 연고를 갖지 않았던 대한민국 도처에 널려 있던 ‘광주의 자식들’이 모두 입을 모아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로 불렀던 광주는 어느새 지방의 작은 도시로 찌그러졌다. 일베의 모욕은 그다음에 왔을 뿐이다. 그 모욕을 받고도 분해하지도 않으니 모욕이 증폭될 뿐이다. 광주민중항쟁은 박정희 없는 유신체제를 이어가려던 유신잔당과의 싸움이었다. 그로부터 33년이 지난 지금 유신체제의 핵심 박근혜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우리 역사에서 광주만큼은 승리한 투쟁이라고 여겼던 믿음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오늘이다. 5월27일 새벽 도청에 남은 사람들이 계엄군을 기다리며 어두운 창문 너머로 꿈꾸던 30년 뒤의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33년 뒤의 대한민국이 유신공주가 대통령이 되고, 가난한 집 아이들의 장래희망은 겨우 ‘정규직’이고, 자신들과 함께했던 동료들이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면 그날 밤 죽겠다고 도청에 남는 것이 아니라 집에 가는 것이 옳았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고, 역사는 끊임없이 다시 쓰여져야 한다. 유신이 부활한 오늘, 도청의 그들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광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광주의 역사를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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