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순 미국 올드도미니언대 교수
[토요판/가족] 엄마의 콤플렉스
미국 생활을 접고 귀국했다. 가까운 학교로 아이도 전학시켰다. 고맙게도 아이는 새 환경에 즐겁게 적응하는 중이다. 자라온 환경이 달라 행여 따돌림을 당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전학 첫날부터 친구들이랑 수다 삼매경에 빠진 걸 보고 안심을 했다. 다행이다. 걱정하던 아이의 적응엔 큰 문제가 없는데, 정작 곤경에 빠진 건 엄마인 나다. 엔아이이(NIE) 숙제가 무슨 말인지 몰라 오밤중에 선생님께 전화를 걸고 스팀(STEAM) 교육이란 말을 이해 못해 혼자 인터넷을 뒤지기도 했다. 물어볼 게 많은 신입 학부모로서, 같은 반 엄마들 모임이 있다는 소식은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 덕에 나도 새 친구가 생기겠구나, 설레는 맘으로 참석했다.
생각보다 많은 엄마가 와 있었다. 옆에 앉은 한 엄마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건넨다. “전학생 엄마라 하시니 기초체력 테스트부터 해볼게요. 학과 공부에 세 등급이 있어요. 아세요?”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그 답은 “원리, 응용, 심화”라고 친절히 일러준다. 수학 공부를 할 때도 3단계에 해당하는 참고서가 따로 있는데, 웬만한 엄마들은 “원리”는 방학 중에 선행학습으로 떼게 하고 더 열성적인 엄마는 “응용” “심화”에 “사고력”까지 시킨다 하더라. 요즘 사고력이 중요해서 누구는 얼마짜리 과외를 시킨다 하고 누구는 방학마다 국외연수를 시킨다 하더라…. “나”는 아니지만 “남들”은 그렇게 한다 하더라는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도 없이 이어진다.
얼핏 듣기엔 교육현실에 대한 개탄 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남들이 이렇게 하니 나는 그 반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자기합리화의 변이다. 카더라 괴담은 그런 극성엄마 덕에 그 집 아이가 영재반을 가고 아이비리그에 갔다는 대목에서 절정에 이르고 순식간에 동경의 대상, 감동적 본보기로 둔갑한다. 그런 엄마 따라가려다 집안이 풍비박산 난 경우, 아이가 엇나간 경우도 있을 텐데 이런 사례는 “카더라 전도사”들의 관심 밖에 있는 걸까. 토끼 굴에 빠진 앨리스처럼 얼떨떨하게 듣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한마디 내뱉었다. “앞으로 그런 얘긴 옮기지 말죠. 그런 얼빠진 부모가 다른 사람까지 오염시켜요.” 순간 대화가 뚝 끊기고 잠시 정적…. 아차! 엄마가 튀면 엄마 왕따가 되고 그 아이도 따돌림 당하니 조심하라던 친구 말이 생각났다.
그날 밤, 딸아이를 불러 앉혔다. “오늘 엄마가 입바른 소리 하다가 좀 이상한 사람으로 찍혔는지도 모르겠다. 나 때문에 혹 네가 힘들어지더라도 주눅 들지 말고 꿋꿋이 이겨내라.” 독립투사 유언하듯 자못 비장하게 얘길 하니 아이는 “뭐, 난 괜찮아요” 한다. 아이의 “쿨”한 응답에 용기백배, “다신 엄마들 모임에 가지 말까” 흔들리던 맘을 다잡았다. 빠지지 않고 참석해서 할 말은 해야지. 카더라 괴담에 흔들리지 않고 아이의 행복을 지켜나가는 소신파 엄마들이 더 많을 거야. 이제부터 그런 엄마들을 찾아봐야겠다.
이진순 미국 올드도미니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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