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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참전기념비와 위령비, 그리고 부끄러움

등록 2013-03-15 20:43수정 2013-03-16 10:20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32>베트남 파병이 남긴 것
세계가 반전물결로 뒤덮일 때
남한은 전시체제를 확립했다
인도차이나에서 공산군 탱크가
사이공·프놈펜에 가까워질수록
유신정권은 이성을 잃어갔다

미군 대신 5천명이 죽었지만
그 와중에 일부는 부를 쌓았고
참전군인 전두환은 정권을 잡았다
이후 두 나라는 수교를 맺고
전쟁은 빠르게 잊혀졌다
그러나 베트남 어느 마을에선
여전히 학살의 상처를 안고 산다

1973년 3월20일 서울운동장에서는 파월개선장병환영대회가 성대하게 열렸다. ‘주월군부대 복귀 및 해체에 대한 국방부 일반행정명령 제143호’가 낭독된 뒤 주월한국군 사령관 이세호는 육사 동기인 대통령 박정희에게 주월한국군사령부기를 반납했다. 주월한국군 사령부 귀국신고식 및 해체식을 겸한 이날 대회에는 오색의 애드벌룬에 매달린 “월남에서 싸운 전공 총력안보 초석 되자” “이기고 돌아왔다”는 등의 펼침막이 나부꼈다. 한성여고생들은 주월한국군의 전투 장면과 대민 진료 모습을 카드섹션으로 선보였다. 박정희는 “어제의 평화십자군이 오늘의 유신십자군, 구국의 십자군이 되게 하자”고 당부했다. 귀국한 파월장병들은 환영대회를 마치고 비가 오는 가운데 서울 도심 4㎞를 도보로 행진했다. 그로부터 2년 1개월이 지난 1975년 4월30일, 공산군의 탱크는 남부월남의 수도 사이공의 대통령 관저인 독립궁에 진입했고, 남부월남 정부는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베트남의 입장에서는 마침내 30년 전쟁이 끝난 것이고, 베트남의 대규모 병력을 파병했던 박정희 정권의 입장에서는 ‘월남 패망’의 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수천개의 김일성 허수아비가 불타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공산군의 공세가 강화되고 공산군이 사이공(지금의 호찌민시)이나 프놈펜에 몇 ㎞까지 육박했다는 보도가 거의 매일 신문에 실리던 1975년 초반은 한국에서 반유신 민주화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던 때였다. 베트남뿐 아니라 크메르(캄보디아)와 라오스 등 인도차이나 3국에서 공산군의 탱크가 사이공이나 프놈펜에 가까워질수록 유신정권은 이성을 잃어갔다. 4월8일에는 전날 격렬한 데모가 있었던 고려대학 한 학교만을 대상으로 긴급조치 7호를 발동하여 휴교령을 내리고 군대를 진주시켰다. 대법원은 이날 인혁당 사건 등 관련자 38명에 대한 상고심 판결에서 도예종 등 8명에 대한 사형을 확정했다. 이를 보도한 <동아일보> 4월8일치 기사 바로 밑에는 공산군이 ‘사이공 11㎞ 육박’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형 확정 18시간 만인 새벽 4시부터 사법의 탈을 쓴 그 새벽의 연쇄살인을 시작했다.

4월17일 크메르 정부는 공산 크메르 루주군에 항복을 선언했고, 4월30일 사이공이 함락되자 이웃 라오스의 좌우 연립정부에서 우파는 사실상 몰락했다.(인민공화국 정식 수립은 12월3일) 인도차이나에서 도미노 이론이 현실로 나타나는 가운데 박정희는 모든 긴급조치의 종합판이라는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여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비판과 반대를 금지했다.

1972년 박정희가 유신쿠데타를 자행할 때는 결코 위기상황이라 할 수 없었지만, 1975년은 분명 분단 한국에 치명적인 위기상황이 존재했다. 없는 위기도 만들어 악용해온 박정희는 이런 위기상황을 자신의 권력강화 기회로 삼았다. 그는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에 ‘전시체제’가 수립되었던 것처럼, 1975년의 한국에도 전시체제를 확립하려 했다. 유신정권은 전시체제를 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사회안전법안> <민방위기본법안> <방위세법안> <교육공무원법개정안> <전파관리법개정안> 등 이른바 5대 전시입법안을 강행처리했다. 좌익활동을 하다가 전향해 살아남은 박정희의 비전향자에 대한 열등감과 적개심이 강하게 반영된 <사회안전법>은 형기를 다 마쳤어도 전향하지 않은 사람들을 재판 없이 계속 가둬두는 악법 중의 악법이었다. 또 박정희는 1975년 6월7일 ‘자주국방과 총력안보’의 기치 아래 ‘학도호국단 설치령’을 공포하여 전국 대학과 고등학교의 학생회를 해체했다. 학원에 수립된 전시체제를 상징하는 학도호국단의 사단장 생도나 연대장 생도는 학생들이 뽑는 것이 아니라 총장이나 교장이 임명했다.

1975년 5월과 6월 한국 사회에서는-심지어 휴강중인 대학가에서도- 안보궐기대회와 김일성 화형식이 도처에서 열렸다. “때려잡자 김일성, 쳐부수자 공산당, 무찌르자 북괴군, 이룩하자 유신과업!”을 소리 높이 외치는 가운데 전국에서 아마도 수천개의 김일성 허수아비가 불에 탔을 것이다. 이러한 안보궐기대회의 절정은 5월10일 여의도 5·16광장에서 열린 ‘총력안보 서울시민 궐기대회’였다. 무려 140만명(고등학생이었던 나도 물론 동원되었다)이 참가한 이 궐기대회에서는 남녀 20여명이 단상으로 나와 “김일성 야욕 분쇄하자”는 등의 혈서를 썼다. 이런 안보궐기대회 열풍을 문제 삼은 것은 남장 여자로 유명했던 신민당의 김옥선 의원이었다. 김옥선은 10월8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전쟁심리 조성, 사이비민주주의 제도, 안정에 대한 약속 등이 강권통치의 특징이라는 독일의 정치학자 프란츠 노이만의 이론을 소개하면서 최근의 안보궐기대회를 관제 데모라고 주장했다. 그는 “전국을 뒤흔든 각종 안보궐기대회, 민방위대 편성, 학도호국단의 조직, 군가 보급, 부단한 전쟁 위협 경고 발언,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구호 등은 국가안전 보장을 빙자한 정권 연장의 수단”일 뿐이라며 박정희의 1인 통치를 정면 비판하자 국회에는 난리가 났다. 공화당과 유정회가 김옥선의 제명을 추진하자 김영삼은 김옥선을 보호하지 않고 사퇴를 종용했다. 남장 여걸 김옥선이 눈물을 머금고 사퇴하자 신민당에는 예리한 면도날을 담은 항의 편지가 날아들었다고 한다.

잠시 주춤했던 장발단속은 ‘월남 패망’과 더불어 급격히 강화되었다. 문무 양쪽에서 일본식 황민화 교육을 제대로 받은 박정희는 젊은이들의 자유분방한 옷차림과 사고방식을 아주 못마땅해했다. 유신시대 국민의 외모와 사상은 당연히 국가의 통제 대상이었다. 유신공주였던 박근혜 대통령이 처음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처음 다룬 안건이 경범죄처벌법 시행령이라는 사실은 오늘에까지 드리운 유신의 짙은 그림자를 절감하게 한다. 과다노출을 단속하겠다는 것이 꼭 유신시대의 미니스커트 단속의 부활을 의미한다는 뜻이 아니다. 나를 절망케 하는 것은 한반도의 긴장이 극도로 고조되어 있고, 국내외에 난제가 산적해 있는데 대통령이 되어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이 국민에 대한 통제였을까? 그 점에 관한 한 정녕 유신의 적통을 이은 정권임에 틀림없다. 주월한국군이 유신의 십자군, 구국의 십자군이 되라는 박정희의 말을 받아 최태민이 구국십자군을 만들었고, 십자군 알바단은 박근혜의 당선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으니, 십자군 원정은 참 오래 계속되고 있다.

하미마을 위령비에는 왜 비문이 없나

베트남 파병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하게 한국 사회를 변화시켰다. 어쩌면 베트남 파병은 이남보다 이북에 더 극단적인 변화를 강요했는지도 모른다. 1967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4기 15차 전원회의 이후 이북의 유일체제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버렸다. 1968년 1·21 청와대 습격사건이나 울진 삼척에 대규모 무장공작원을 파견한 무모한 공세는 김일성판 베트남 파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쿠바를 떠나기 전 체 게바라는 “둘, 셋, 보다 많은 베트남을 만들자”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를 베트남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고, 김일성은 한반도를 베트남의 제2전선으로 만들기 위해 이북 사회가 조금이나마 유연성을 견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포기했다.

베트남 파병은 한국의 외교관계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한국은 미군을 대신하여 5000명의 젊은이를 머나먼 이국땅에서 희생시켰지만, 한-미 관계는 베트남 파병을 거치면서 최악의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전세계가 반전평화의 물결로 뒤덮였던 1968년을 한국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보냈다. 제3세계에서, 아니 제3세계뿐만 아니라 미국의회에서조차 베트남 전쟁에 파병된 한국군이 ‘용병’ 소리를 들어야 했던 상황에서 이른바 비동맹국가와의 관계 또한 파탄을 면할 수 없었다. 1975년 8월의 비동맹 외상 회의에서 남북이 같이 비동맹회원국으로 가입을 신청했다가 북의 신청은 받아들여졌지만 남의 신청은 거부당한 일은 한국 외교 사상 최악의 참사였다.

베트남 파병은 한국의 정치사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위로는 전두환·노태우·정호용·황영시·유학성·장세동·안현태 등 신군부의 주요 인물들이, 아래로는 광주에 투입되었던 공수부대의 장교나 하사관들 상당수가 베트남에 파병된 자들이었다. 또한 물자가 풍부했던 베트남에서 부와 경력을 쌓은 일부 장교들은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하나회와 같은 사조직으로 똘똘 뭉쳤다.

베트남 전쟁이 계속되었더라면 국민배우 안성기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힘들었던 아역배우 생활을 청산한 안성기는 열심히 공부하여 그 당시 잘나간다던 외국어대 월남어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가 군복무를 마쳤을 때 베트남 전쟁은 끝났고 갈데없는 처지가 된 그는 어쩔 수 없이 영화판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전두환은 자신이 백마부대 연대장으로 베트남에 다녀왔지만, 집권 후 군 출신들의 단체를 재향군인회로 통합하면서 월남참전전우회 등 38개 단체를 해체했다. 한때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의 흥겨운 가락과 같이 선망의 대상이던 베트남 참전군인들은 국가로부터도 사회로부터도 빠르게 잊혀졌다. 한국군의 철수 당시 한 신문은 “우리 사상 최초의 해외파병을 기록한 주월국군의 승전보는 전화에 시달린 베트남인들에게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십자군의 신화로 남을 것”이라고 했지만, 5000명의 전사자를 남긴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오랫동안 베트남에서도 ‘잊힌 전쟁’이 되고 말았다. 대다수의 베트남 사람들은 베트남이 미국과 싸워 이겼기 때문에 그 ‘용병’이었던 한국군의 존재는 무시하거나 아예 알지 못하고 있다. 단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던 중부지방은 사정이 다르다. 그곳 사람들에게 거의 50년 전에 벌어진 민간인 학살은 여전히 살아있는 고통과 슬픔을 주고 있다. 바로 지난 3월5일 청룡부대에 의해 135명이 학살당한 하미마을의 45주년 위령제에 참석한 필자는 학살의 상처를 아물게 하기에는 50년의 세월도 어림없게 짧은 기간이란 것만 절감했다. 하미마을에는 한국의 월남참전전우복지회라는 단체가 돈을 내어 만든 비문 없는 위령비가 서 있다. 비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마을 사람들이 쓴 비문을 한국 정부와 참전군인 쪽에서 문제 삼아 갖가지 압력을 가해 수정을 요구한 것이다. 주민들은 강력히 반발했지만 결국 베트남 정부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러나 주민들은 비문 자체는 수정할 수 없다면서 비문을 커다란 연꽃무늬 돌로 덮어 버렸다. 진실은 또다시 묻혔지만, 결코 지울 수 없는 진실은 마을 사람들의 가슴속에 새겨져 있다.

“어떻게 그 딸을 대통령으로 뽑았죠?”

일부는 베트남에서 돈도 벌고 출세도 했지만, 훨씬 더 많은 참전군인들은 전쟁의 상처로 고통받고 있다. 뮤지컬 <블루사이공>에는 김병장이 월남에서 쏜 총알은 그의 일생을 꿰뚫었다라는 기막힌 대사가 나온다. 비단 고엽제가 남긴 육체적 고통만이 아니다. 참혹했던 전쟁의 섬광 같은 기억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나이 들어가는 마음을 후벼놓는다. 1999년 9월부터 1년이 넘게 거의 매주 <한겨레21>에 실린 베트남에서의 민간인 학살과 그의 대한 사죄운동인 ‘미안해요 베트남’에 관한 기사는 참전군인들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용병과 학살이라는 비난에 맞서 그들은 자신들의 베트남 참전을 정당화하는 기념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예산을 지원받아 전국 곳곳에 100개가 넘는 참전기념비가 최근 5~6년 사이에 들어섰다. 희생된 병사들을 기리는 추모비나 위령비가 아니라 베트남 참전 자체를 ‘평화의 십자군’이자 국위선양이요 조국번영의 초석을 놓은 것으로 찬양하는 거대한 기념물을 곳곳에 세운 것이다. 그 결정판은 맹호부대와 백마부대가 훈련을 받았던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오음리에 건립된 베트남 참전용사 만남의 장이다. 이곳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곳은 베트남 해방전사들이 사용했던 구치터널을 관광자원이라고 재현해놓은 곳이다. 터널이 끝나는 곳에는 한국군이 베트콩으로 보이는 두 명의 베트남 사람들을 무릎 꿇려 놓고 총을 겨누고 있는 실물 크기의 인형을 세워놓았다. 이 인형들은 그 후 누군가가 부숴버려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지만 참으로 부끄러운 물건이 아닐 수 없다. 입장을 바꿔놓고 일본이 과거 조선에 출병한 병사들의 훈련지에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 기념관을 짓고 오늘의 일본의 번영을 가져온 초석이 된 사건이라고 찬양하면서 바지저고리를 입은 조선인에게 총이나 칼을 겨누고 있는 일본군을 세워 놓았다면 우리의 심경은 어떨까?

베트남 파병 당시 한국은 참 가난한 나라였다. 그 무렵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낸 유창순(나중에 전경련 회장과 국무총리를 역임)은 <사상계> 좌담에서 파병을 하면 다리도 놓을 수 있고, 항만도 건설하고, 뭐 좀 생기는 게 있다는 이야기를 굉장히 민망해하면서 했다. 남의 나라 전쟁에 젊은이들을 보내 돈을 버는 일은 미래의 전경련 회장에게도 차마 할 짓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40년 세월이 흘러 대한민국이 아주 부자나라가 되어 다시 이라크 파병을 논할 때, 국익이란 말은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서조차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직후에 민간인 학살이 있었던 마을에는 하늘에 닿을 한국군의 죄악을 천대에 걸쳐 기록하리라는 ‘증오비’가 섰다. 조금 세월이 지나며 베트남 사람들은 증오비 대신 위령비를 세웠다. 베트남과 한국은 1992년 수교를 했고, 지금 수많은 베트남 새댁이 한국에 와 살고 있지만, 한국과 베트남의 거리는 참전군인들이 한국에 세운 기념비와 민간인 학살의 생존자와 유가족들이 참사의 현장에 세운 위령비만큼이나 먼 것일지도 모른다. 한 살 때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로 부모도 잃고 두 눈도 잃은 어느 피해자의 삶을 다큐로 찍고 있던 베트남의 한 기자는 내게 물었다. 어떻게 한국 사람들은 박정희의 딸을 대통령으로 뽑을 수가 있냐고, 그러면서 베트남과 한국이 친구가 될 수 있겠냐고! 일본도 A급 전범 기시의 손자를 수상으로 뽑지 않았냐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미안해요 베트남. 정말 미안해요 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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