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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끝까지 말 안 듣던 여호와의 증인을 때려잡다

등록 2013-03-01 20:37수정 2013-03-01 21:05

박정희의 강력한 병역기피자 단속방침 아래 병무당국은 개개인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강화했다. 충남 홍성군 어느 농가의 담벼락에는 붉은 페인트로 ‘기피자의 집’이라고 써 놓은 나무판까지 나붙었다. <동아일보> 1974년 7월15일치 기사.
박정희의 강력한 병역기피자 단속방침 아래 병무당국은 개개인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강화했다. 충남 홍성군 어느 농가의 담벼락에는 붉은 페인트로 ‘기피자의 집’이라고 써 놓은 나무판까지 나붙었다. <동아일보> 1974년 7월15일치 기사.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31>조국‘군대화’의 그늘(상)
병역기피 일소로 입영률 99.9%
이것은 한편 군대에 사람이
차고 넘친다는 것을 의미했다
방위와 전경이 만들어졌고
그래도 사람이 남아돌자
산업특례요원을 만들었다

군인 출신 박정희 정권에서
병역기피자는 ‘비국민’이었고
특권층 자식들은 특혜가 아니라
특별관리의 대상이었다
여호와의 증인은 군대 갈 때까지
감옥에서 또 감옥으로 갔다

일부에서는 박정희를 ‘조국근대화’의 기수라 하지만, 나는 박정희 시대의 특징을 ‘조국군대화’라 부르고 싶다. 전쟁이 법적으로 완전히 종결되지 않았고 60만이 넘는 대규모 상주군이 존재하는 한국 사회는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병영이었지만, 민간인인 이승만이 지배했던 시기와 군인인 박정희가 지배한 시기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박정희가 집권했던 18년에서도 후반기인 유신 시절은 군대도 비상이 걸린 군대였다. 역사에서 보면 군대는 꼭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많은 경우 권력자들은 국방에 꼭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만 징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사회를 운영하는 데 적합한 인간형을 육성해내는 교육장으로 군대를 이용했다. 한창 전쟁을 치를 때보다 3배나 많은 병력을 유지해온 한국도 그런 경우였다.

‘단 한명의 열외’도 없는 병영국가화

1950년대와 1960년대의 병역기피자 수를 보면 그 규모가 전체 징병 대상자의 15~20%로 깜짝 놀랄 정도였다. 아직 국가의 행정 능력이 개개인을 철저히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발전하지 못한데다가, 분단과 전쟁으로 호적 등 병사서류가 완비되지 않았던 탓에 매년 수만에서 십수만명의 병역기피자가 나왔던 것이다. 1961년 5·16 군사반란 직후 내각 공고 제1호로 병역의무 불이행자의 자수를 받았는데 1, 2차에 걸쳐 자진신고한 병역기피자가 무려 40만을 넘었다고 한다. 군사정권은 1962년 병역법 개정을 통해 지방의 병무청을 신설하고 병무행정의 책임자를 국방장관으로 일원화했다. 원래 병무행정이란 민간인을 소집하여 군인으로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에 현역입대 후에는 국방부가 관리하지만, 민간인 신분일 때는 내무부나 지방자치단체가 관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냉전의 최전선을 담당했던 대만의 경우도 한국의 병무청에 해당하는 역정사는 국방부 소속이 아니라 내정부 소속이다. 지방병무청이 만들어지고 병무행정이 국방장관 책임으로 일원화되면서 지방병무청장은 병무행정에 관한 한 지방행정부서와 경찰관서에 대한 지휘감독권을 갖게 된 것이다. 1968년 이북 124군부대의 청와대 습격 사건으로 한국 사회가 급속도로 병영국가화의 길을 걷게 되면서 병무행정은 더욱 강화되었다. 1968년에 도입된 주민등록증은 개개인에게 고유번호를 부여한 철저한 감시체제의 확립을 상징했다. 박정희는 “부정과 불신으로 얼룩진 병무행정을 바로잡는다”는 명목으로 1970년 8월 국방부 병무국을 해체하고 국방부의 외청으로 중앙에도 병무청을 창설했다. 1971년 12월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한 박정희는 이듬해 2월 중앙병무사범 방지대책위원회를 열어 국가비상사태에서의 강력한 병역기피자 단속방침을 밝혔다. 그럼에도 병역비리가 발생하자 박정희는 집권당인 공화당 의장 백남억, 산업은행 총재 김민호 등 병역비리 연루자들을 사직시키고, 장성급 10여명을 구속했으며, 병무청장 전부일을 해임한 뒤 자신의 육사 동기인 김재명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유신 직후인 1973년 1월20일 박정희는 국방부를 순시한 자리에서 “앞으로 법을 만들어서라도 병역을 기피한 본인과 그 부모가 이 사회에서 머리를 들고 살지 못하는 사회기풍을 만들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이 지시에 따라 기존의 병역법이나 형법에 비해 처벌 규정을 강화한 것이 ‘병역법 위반 등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이었다. 입영 및 소집 기피자는 기존의 병역법으로는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게 되어 있었으나, 새 법으로는 3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게 되었다. 박정희는 병무비리의 근절을 위해서는 병무청만이 아니라 유관기관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이유로 1973년 2월26일 대통령 훈령 제34호로 ‘병무행정 쇄신에 관한 지침’을 제정했다. 이에 따르면 “병역기피자는 유신과업과 국민총화를 저해하는 ‘비국민’적인 행위자”로 규정되었다. ‘비국민’(히코쿠민)이란 일본군국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전쟁책동에 비협조적인 사람들을 체제로부터 배제하기 위해 즐겨 쓰던 흉포한 언어였다.

유신정권이 병역기피 일소 방침을 강력히 밀고 나가고, 또 이 무렵부터 행정의 전산화가 급속히 진전된데다가, 정전 이후 남쪽에서 출생한 사람들이 징집연령에 도달하면서부터 병역기피자 수는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병무청에 따르면 1970년 13.2%에 달하던 병역기피율은 1973년 3월 특별조치법 발효 이후 0.3%로 급감했으며, 1974년에는 0.1%가 되었다. 5·16 직후의 병역기피자 수가 40만을 넘었던 것에 비한다면 10여년 뒤 병역기피자가 0.1% 이하인 200여명으로 떨어졌다는 것은 사실상 병역기피가 근절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박정희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유신체제는 ‘단 한 명의 열외’도 없는 총화단결을 원했던 것이다. 박정희는 공무원들을 달달 볶았다. 병역기피자가 발생할 때에는 “지방병무청과 구·시·군·읍·면·동에 있어서는 기피자 색출 책임자를 지정하고 철저한 색출 고발과 고발지연 또는 누락이 있을 때에는 관계 직원을 엄중 문책”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검찰 및 경찰서 단위로 병무사범 전담 검사 및 경찰관을 지명하고 각 경찰서 단위로 색출책임을 부여하여 그 검거 실적을 지검 검사에게 보고하는 제도”가 확립되었다.

붉은 페인트로 쓴 ‘기피자의 집’

병무사범단속 전담반의 활동 실적을 살펴보면 1974년 6월1일부터 7월15일까지 한달 반 동안 단속반은 관의 허가를 필요로 하는 업소 1만2584개를 조사하여 병역기피자를 고용한 6개 업소의 허가를 취소했고, “6284곳의 직장에서 539명의 병역기피자를 색출, 17개 업체는 병역기피자 고용 금지 위반 혐의로 사직 당국에 고발”했다. 이때 고발된 업체는 국제화학, 대성연탄 등 재벌급 대기업에서부터 동네 이발소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크고 작은 업체들이 망라되었다고 한다. 한 신문은 사설을 통해 “기피자 539명을 색출하기 위해 1만2500여개의 관허업소와 6200여개의 직장을 뒤졌다 하니 이에 동원된 조사관의 수와 쓰여진 경비가 어느 정도일지는 가히 짐작이 간다”고 꼬집었다. 이와 같은 강력한 단속이 이루어진 시점은 바로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은 영장 없이 체포해서 군사법원에서 최고 사형에 처할 수 있다는 서슬 푸른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된 직후였다. 유신체제는 병역기피자 단속을 명목으로 개개인에 대한 검문검색과 직장과 마을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강화했다. 박정희는 이런 식으로 ‘사회기강 확립’을, 다시 말해서 사회를 길들여갔다.

한 가지 흥미있는 점은 당시 박정희는 사회 저명인사나 특권층, 부유층의 자식들에 대해서 열외를 인정하지 않고 엄격하게 관리했다는 점이다. 1973년 병무당국은 “일반국민들로부터 주목의 대상이 되는 사회 저명인사 특권 및 부유층 인사들의 자제 942명과 연예인 및 체육인 708명을 선정”하여 특수병역관리 대상자로 삼고 명단을 관리했다. 중앙정보부는 특수병역관리 대상자의 친권자에 대해 배경을 조사하여 이를 각 부처에 통보했다. 박정희는 이 계획에 대한 보고를 받고는 결재란에 자필로 “착안이 양호함”이라고 써 넣었다. 병무청은 이듬해인 1974년도에도 특수병역관리 대상자 1288명 전원에 대하여 현역입영 577명, 방위소집 201명, 징병검사 510명 등 병역의무 이행을 감독했고, 1975년에도 특수병역 관리대상자 2708명에 대한 명부를 작성했다.

이렇다 보니 유신시대에는 고위공직자나 재벌, 언론사 사주, 국회의원 등 상류층 자식들의 병적기록표에는 ‘특’이라는 도장이 찍혀 별도의 관리를 받았다. 박정희의 특별한 관심사이다 보니 ‘특’자가 찍힌 사람들도 머리 깎고 군대에 가야 했다. 박정희의 감시는 딱 거기까지였다. 일단 군대에 입대한 뒤 의병제대나 의가사제대를 하거나 ‘빵실’한 보직으로 빠지는 것은 적당히 눈감아 주었다. 특권층 자식들에 대한 특별관리에 대해 특권을 가진 자들은 불만이 많았다. 특권을 가진 자들은 자기 자식들에 대한 특별관리가 역차별이라고 주장하여 마침내 1996년 국방부로 하여금 특수층 자제에 대한 특별관리를 폐지하게 만들었다.

특권층 자식들조차 예외 없이 군대에 끌려가야 하는 상황에서 병무당국은 평범한 집 자식들이 병역기피를 할 경우 그들의 인권을 조금도 고려해주지 않았다. 한 예로 충남 홍성군 광천읍의 병사담당 직원은 어느 병역기피자의 집에 가로 30㎝ 세로 1m40㎝ 크기의 나무판에 흰색 바탕에 붉은 페인트로 “기피자의 집”이라고 써 붙였다. 그 집 아들이 10년 전 17살 때 돈 번다고 가출한 죄였다.

이렇게 열심히 병역기피자를 없앤 것은 뜻하지 않은 부작용을 낳았다. 상당한 비율의 병역기피자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징병제도가 운영되다가 갑자기 병역기피자가 일소되었다는 것은 군대에 사람이 차고 넘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군사정권은 방위제도를 만들고 전투경찰을 만들어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소집된 청년들을 정권유지를 위해 써먹었다. 그래도 사람들이 남았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기업에 배치되어 병역의 의무를 대신하는 산업특례요원들이었다. 기업이 자격을 취소하면 당장 현역으로 끌려가야 하는 산업특례요원은 군대라는 목줄로 죄어 맨 현대판 노예노동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군인들이 장악한 국가는 자본에 이렇게 베풀 줄 알았다.

박정희가 한 사람의 열외도 없는 강력한 병영국가 건설을 꿈꿀 때 ‘공공의 적’으로 등장한 것은 감히 양심적 병역거부를 실천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이었다. 일본군국주의자들에 의해 ‘비국민’으로 몰려 옥에 갇혔던 여호와의 증인들은 박정희 체제하에서 또다시 수난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병역기피자 일소를 외치는 박정희의 뜻에 맞추어 병무청은 1974년을 ‘병역기피자 일소의 해’로 정하였다. 병무청의 방침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물론 여호와의 증인들이었다. 한 예로 병무청은 1974년 7월 “올 들어 발생한 병역기피자는 모두 78명으로 이 중엔 종교적 양심을 빙자하여 병역을 기피한 여호와의 증인이 87.2%인 68명”이라고 발표했다. 여호와의 증인들만 아니면 병역기피율은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1974년 병무청의 단속실적을 보고받으면서 여호와의 증인 문제를 해결하라는 특별지시를 내렸다. 병무청은 1974년 12월12일부터 1975년 1월11일에 걸쳐 여호와의 증인대표 210명과 입영 간담회를 개최한 결과, 증인들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그릇된 소행’임을 인정하고 병역의무를 수행하겠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허위 보고를 올렸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결정은 어디까지나 성서에 입각하여 개인 개인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단 차원에서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병무당국으로서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병무청의 설득에 따라 병역의무를 적극적으로 이행하기로 했다고 청와대에 허위 보고를 했기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 중에서 다수의 병역기피자가 발생하는 것을 방치할 수도 없었다. 그 결과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에 대한 병무당국의 불법적인 연행과 강제입영이었다.

의대생 정춘국은 왜 7년10개월을 복역했나

1975년 3월9일, 부산지검 검사 박철언이 이끄는 부산시 병무사범단속반은 가야왕국회관 등 19개의 여호와의 증인 집회소를 급습하여 예배중인 청년 63명을 구타하는 등 강제연행했다. 평화적인 종교행사를 치르고 있는 신자들을 공권력을 동원하여 연행한 것은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를 중대하게 침해한 것이었다. 병무당국은 여호와의 증인들의 종교집회뿐만 아니라 신도들의 집까지 찾아가 영장 없이 불법연행하거나 병무소집에 불응하면 여동생을 잡아가 고문하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병무청이 여호와의 증인들의 종교행사까지 습격하는 등 가혹하게 나선 것은 ‘병역법 위반 등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갖고 있는 문제점 때문이기도 했다. 현재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은 1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으면 더이상 영장이 발부되지 않는다. 그러나 특별조치법은 병역거부자들이 실형을 살고 나와도 또다시 영장을 발부하여 몇번이고 반복해서 처벌하도록 되어 있었다. 의대생이었던 정춘국이 4차례에 걸쳐 7년10개월을 복역한 것도 특별조치법 ‘덕분’이었다. 스물한살 때인 1969년 병역기피죄로 10개월 형을 받으며 시작된 정춘국의 고난은 그의 나이 서른셋, 박정희가 죽고 2년이 흐른 뒤에야 끝이 났다. 여호와의 증인들도 사람인지라 젊은 나이에 또다시 징역살이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여호와의 증인들 중에는 다시 영장이 나올 것을 알고 집에 돌아가지 않고 피해 다니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병무당국은 신심이 좋은 이들이 집에는 안 들어와도 예배에는 나올 것으로 보고 왕국회관 등을 습격한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종교집회뿐 아니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끌려갔다. 징역을 살고 나온 정춘국은 교도소 앞에서 다시 끌려갔고, 결혼식장에서 곧바로 잡혀간 새신랑도 있었다.

박정희의 강력한 의지에 부합하여 기피율 제로를 꿈꾸던 병무청은 불법적인 강제연행을 통해 여호와의 증인들을 군대로 끌고 갔다. 이제 병역기피율은 사실상 제로에 가까워졌다. 그러나 이것은 ‘눈 가리고 아웅’에 불과했다. 징병 연령대에 해당하는 남성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은 국가의 강력한 단속에 아랑곳없이 양심의 명령에 따랐다. 이들은 민간인으로 병역법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 강제로 군대로 끌려와 항명죄를 저지른 것이 되었을 뿐이다. 이제 여호와의 증인 문제를 처리하는 국가기관의 최일선에는 병무청이 아니라 군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그 결과는 김종식(1975년 11월13일), 이춘길(1976년 3월19일) 등 여호와의 증인 신도 5명이 군대에서 맞아 죽는 사태가 벌어졌다. 참으로 슬픈 일이지만, 군대에서 죽어간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들만은 아니었다. 박정희가 국민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던 유신 시절, 참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져갔다.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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