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이 지난해 3월20일 서울 태평로 한국언론회관에서 장진수 전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주무관의 주장을 반박하는 발표문을 읽은 뒤 기자들의 질문을 외면하며 회견장을 떠나려다 항의하는 기자들에게 떠밀려 바닥에 넘어졌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토요판] 커버스토리
다시 돌아보는 민간인 사찰
다시 돌아보는 민간인 사찰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을 비선으로 지휘했던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이 2012년 3월31일 서울중앙지검 청사 앞에서 카메라 앞에 섰다. 이 전 비서관은 이보다 열흘 전인 3월21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내가 사건의 몸통”이라고 사자후를 토했다. 그는 기자회견문만 읽고 일문일답을 거절한 뒤 어디론가 이동하려다 취재 경쟁에 나선 기자들에게 떠밀려 안경이 벗겨지고 개구리 자세로 바닥에 엎어지는 슬랩스틱 코미디를 연출했지만, 그 와중에서도 이명박 대통령의 지시 여부 등을 묻는 질문에는 사실이 아니라며 격하게 반응했다. 그는 그날의 기자회견으로 확실히 ‘전국구’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이명박 정권의 장세동’이었다.
검찰의 재수사로 다시 검찰청사에 불려나온 이 전 비서관은 열흘 전 기자회견 때보다 훨씬 차분하고 정돈된 모습이었다. 포토라인을 둘러싼 기자들의 질문에 “검찰 조사를 성실히 받겠다”는 준비된 답변을 내놓았다. 의미없는 질문과 응답이 오가던 차에 한 기자는 “(당신이) 자료 삭제의 몸통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이를 지시한 ‘머리’는 누구냐”고 물었다. 허를 찔린 이 전 비서관은 답을 하지 못하고 그저 인상만 쓸 뿐이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은 김종익씨
국가기관이 권한을 넘어서 국민을 감시하고 동향을 탐지하는 ‘민간인 사찰’은 과거에도 있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지원관실)은 이 대통령의 보위기구를 자임했으며, 그 과정에서 파생된 ‘무리수’는 악랄하고 치졸했다.
지원관실의 불법적인 행태는 김종익씨 사건으로 드러나게 됐다. 김씨는 2005년 국민은행에서 퇴직한 뒤 케이비(KB)한마음이라는 국민은행 하청업체의 대표로 일해왔다. 김씨는 2008년 6월 이 대통령의 미국산 쇠고기 협상, 의료 민영화 정책 등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쥐코> 동영상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 본인이 만든 것도 아니고 재미동포가 제작한 작품을 그냥 블로그에 담아놓은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3개월 뒤 김씨에게는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공직자 감찰기구인 지원관실 직원이 국민은행 노무팀장 원아무개씨를 만나 “케이비한마음 대표 김종익씨가 쥐코 동영상의 자막을 입힌 장본인으로 보인다. 김씨가 운영하는 회사 이름에 ‘케이비’가 들어가니 국민은행의 자회사로 보고 있다. 김씨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국민은행장이 다칠 수 있다”고 말했다. 원 팀장은 지원관실의 ‘협박’을 김씨에게 전달했고 놀란 김씨는 사장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일본으로 출국했다. 회사 이름도 케이비한마음에서 뉴스타트한마음으로 바꿨다. 그러나 지원관실은 남아무개 국민은행 부행장을 만나 김씨가 ‘문제인물’이라는 사실을 거듭 알렸고, 김씨가 지분을 완전히 처분하도록 압박에 나섰다. 지원관실 직원들이 뉴스타트한마음 사무실을 찾아가 압수수색영장도 없이 수색을 하고, 회계장부를 제출받았으며 직원들을 카페나 식당으로 불러 조사를 벌였다. 김씨는 서둘러 뉴스타트한마음의 지분을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공직자 감찰기구가 권한을 넘어서 민간인을 수사하고 압박한 것이었다.
김씨에 대한 지원관실의 폭거는 2년 뒤인 2010년 6월 <피디수첩> 보도를 통해 공개됐다. 야당과 언론의 비판여론이 거세지자 총리실은 7월5일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고 검찰은 나흘 뒤인 7월9일 지원관실 압수수색에 나섰다. 그러나 지원관실 직원들은 사무실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압수수색 이틀 전인 7월7일 ‘갈아버렸다’. 하드디스크에 강력한 자성을 흘려보내는 방식으로 데이터 복구를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리는 ‘디가우싱’을 감행한 것이었다. 검찰은 증거인멸 정황이 포착됐다며 진경락 지원관실 기획총괄과장과 장진수 주무관을 기소했다. 검찰은 김종익씨에 대한 강요·직권남용 혐의 등으로 이인규 지원관, 김충곤 점검1팀장 등 4명을 기소했다. 여권 인사들은 일찌감치 이번 사건의 배후로 박영준 총리실 국무차장과 이영호 비서관을 지목했지만, 검찰은 ‘꼬리자르기’로 1차 수사를 마쳤다.
장진수의 입을 막으려 했던 5000만원
정권이 힘으로 꾹 누르고 있었던 진실의 단초는 정권 말에 와서야 드러나기 시작했다. 증거인멸 혐의로 기소돼 항소심에서도 공무원 복직이 불가능한 집행유예형을 선고받은 장진수 주무관이 2012년 3월 “하드디스크 삭제를 지시한 건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실 최종석 행정관”이라고 폭로하고 나선 것이다. 총리실 소속의 지원관실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이 지휘했다는 그간의 의혹을 뒷받침하는 주장이었다. 장 주무관은 또 “항소심 직후인 2011년 4월 류충렬 총리실 공직복무관리관이 ‘장석명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이 마련한 돈’이라며 5000만원을 건넸다”고 추가 폭로했다. 장 주무관의 입을 막기 위해 청와대가 ‘돈질’을 했다는 얘기였다. 충격적인 폭로가 이어지자 검찰은 서울중앙지검에 특별수사팀을 꾸리고 재수사에 착수했다. “사즉생의 각오로 성역 없이 수사하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대통령이라는 성역은 존재했다. 이 대통령에게 법조계 최측근 참모인 권재진 법무부 장관은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1차 수사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일하면서 지원관실의 비선 지휘와 전횡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던 권 장관은 사건의 열쇠를 쥔 진경락 과장을 총선 이후에 조사하라는 식의 지시까지 하면서 수사에 개입했다. 최재경 대검 중수부장은 수사의 핵심 물증을 틀어쥐는 방식으로 수사를 방해해, 수사검사가 사표를 내기도 했다는 내부 증언까지 나왔다. 수사검사들은 집단적으로 사의를 표명하는 방식으로 저항했지만, ‘판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한 검찰 수뇌부는 이들의 저항을 조용히 진압했다.
그렇지만 재수사팀은 검찰 수뇌부의 방해에도 압수수색을 통해 지원관실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방대한 물량의 문건을 확보했다. 2008년 8월 진경락 과장이 작성한 ‘공직윤리지원관실의 업무추진 지휘체계’(이른바 ‘일심 충성’ 문건)에서는 “통상적인 공직기강 업무는 총리가 지휘하되, 특명사항은 브이아이피(VIP)께 절대 충성하는 친위조직이 비선에서 총괄지휘”하고 “브이아이피 보고는 ‘공직윤리지원관실→비에이치(BH·청와대) 비선→브이아이피(또는 대통령실장)’로 한다”고 명시됐다.
그 보고서, MB는 밤새워 재밌게 읽었다?
또 이 대통령의 원활한 국정수행을 뒷받침하기 위해 지원관실은 사회 각계각층에 촉수를 뻗쳤던 사실도 확인됐다. 이용훈 대법원장,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의사, 보선 스님, 백원우 의원 등이 사찰 대상이었다. 검찰은 “단순한 동향파악 정도로 이를 형사처벌할 수는 없다”며 넘어갔다.
이영호 비서관이 청와대 경제수석실과 마찰을 빚는 등 전횡이 심해지자 지원관실에 대한 그의 비선 지휘를 끊으려는 시도가 이 대통령에 의해 좌절됐다는 메모도 발견됐다. 2009년 10월29일 민정수석실이 이 대통령에게 지원관 교체를 건의하자 인사비서관에게 “내 특명이 별도로 있을 때까지는 당장 공직윤리지원관 인사를 중지하라. 이런 사람들이 원래 목소리가 좀 큰데다 업무 열정이 있어서 협의 과정에서 시끄럽게 했다는 것을 밖(언론)에 퍼나르면서 중상모략하고… 몸 던지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바꾸려고 인사공작을 하는 것은 한심한 일”이라고 일축했다는 것이다. 이 대통령이 이 비서관의 ‘비선 보고’에 힘을 실어준 것으로, “김종익씨 사건이 언론을 통해 공개된 뒤에야 민간인 사찰 사건의 실체를 알게 됐다”는 이 대통령의 해명은 거짓말일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이 대통령이 지원관실에서 직보된 보고서를 밤을 새워 읽었다”는 여권 관계자의 설명이 더 진실에 가까워 보인다.
이영호 비서관이 민간인 사찰 사건의 몸통이라면, 몸통을 움직인 ‘머리’는 이 대통령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머리는 머리를 써서 처벌을 피했지만, 그 잔머리가 언제까지 통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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