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순 미국 올드도미니언대 교수
[토요판] 엄마의 콤플렉스
친구 아이들과 함께 가족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목적지에 도착하는 데만 꼬박 1박2일이 걸리는 장거리 노선이라 오고 가는 코스를 어떻게 잡을지, 어디서 쉬고 어디 묵을지, 중간에 들러 구경할 만한 것들은 무엇이 있는지, 몇날 며칠 동안 친구와 머리를 맞대고 궁리했다. 이왕이면 애들이 좋아하는 바다도 볼 겸 노선을 우회하자, 같은 값이면 수영장이 딸린 호텔을 찾아보자, 중간에 민속 박물관도 들러보자…. 기뻐할 애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 엄마는 흐뭇하고 뿌듯했다. 차에서 먹을 간식과 음료수까지 준비하고 이른 새벽 아이들을 흔들어 깨워 설레는 마음으로 출발했다. 거기까지는 순조로웠다.
두어 시간 지나자 끝말잇기와 수수께끼 놀이에 진력이 난 아이들이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는 거야?” “얼마나 남았는데?”를 세 아이가 30분 간격으로 번갈아 물어댔다. 그때마다 우리는 “응, 지금 점심 먹으러 ○○에 들를 거야.” “응, 한 시간 후쯤 휴게소에 들르자” 답해가며 애들을 달랬지만 잠시 뒤, 출발부터 시원찮던 구형 내비게이터가 작동을 멈추면서 우리도 난감해졌다. 평소 ‘내비’에 의지해 운전을 하다 보니 지금 지나는 곳이 어딘지 동서남북 방향을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내비만 믿고 큰 지도를 준비 못한 나의 불찰이었다. “내비는 이래서 문제야. 방향감각을 잃게 만들어.” 친구와 푸념을 하는 사이에도 세 아이는 “어디로 가는 거야, 얼마나 남았는데?”를 시위구호처럼 외쳐댔다. 내비게이션 안에서 길을 잃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어쩜 애들도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었다. 엄마라는 이름의 내비게이터 안에서 길을 잃은 아이들.
엄마들끼리만 들떠서 행선지를 잡고 일정을 짰지, 정작 애들한테는 4박5일 동안 무엇을 어떻게 하고 싶은지 물어보지 않았다. 다음 행선지는 ○○식당, 그다음은 ○○박물관, 우리는 내비게이터처럼 애들에게 단거리 정착지만 얘기해 줬을 뿐, 처음부터 아이들과 큰 지도를 펼쳐놓고 ‘함께 여행’을 계획한 것이 아니었다. 애들의 반복된 질문은 자신들을 짐짝처럼 싣고 가는 엄마들에 대한 항의의 표현이었다는 것도 그때야 깨달았다.
그 뒤로 가끔씩 “나는 내비 엄마가 아닌가?” 자문해 볼 때가 있다. 나는 언제까지 아이한테 “지금 우회전해라, 직진해라” 방향지시를 할 것인가.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지도를 주는 편이 아이에게 좋은 엄마가 되는 길이 아닐까. 아니 차라리 아이 스스로 완성해 나갈 미완성의 지도가 좋겠다. 1박2일 거리를 3박4일 걸려 당도한들 무슨 상관이랴. 길을 놓쳐 헤매고 동서남북을 가늠하는 사이 그만큼 아이도 배우고 성장할 것이다… 잠시 득도한 엄마가 된 기분이 들 때도 있다. 문제는 그 호기가 오래가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러다 아이가 막다른 길로 가면 어쩌지? 그래도 동서남북은 알려줘야 하지 않나? 내 가슴속의 내비는 시한폭탄처럼 때가 되면 작동을 개시한다. 아이를 기른다는 건 엄마에게 내장된 내비 본능과의 질긴 싸움임에 틀림없다.
이진순 미국 올드도미니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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