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가족/나 오늘부터 그대를 포기해도 될까요
여섯달간 250명 여성들에게
전보를 받았습니다
만나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설에 만난 부모님은
네가 짠하다고 하십니다 얼마전 오랜 친구의 아내가
암 말기라는 소식을 듣고
결혼도 참 공허하다 싶더군요
노래 한 곡을 들어봅니다
유리상자의 ‘사랑해도 될까요’ ▶ 지난해 가족면을 통해 ‘한가위 공개구혼장’을 띄웠던 ‘노총각’을 기억하시나요? 여전히 혼자인 채, 그는 서른아홉번째 설 명절을 보냈답니다. 이번 설, 그의 부모님께선 그저 그가 “짠하다”고만 하셨다네요. 외로움을 떨쳐줄 인연 찾기에 분주했던 가을을 지나, 결혼도 독신도 공허해 보이는 메마른 겨울을 지나고 있는 그. 어쩌면 인생은 착잡한 이 노총각의 마음처럼 제각각 꾸역꾸역 외로움을 밀어내며 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이곳으로 올지 모른다” → 오지 않습니다. 곁에 있던 이들마저 떠나는 판입니다. 모두가 등을 돌리겠다는 마법의 해. 신이시여, ‘계사년’은 제 입에서 불현듯 튀어나온 욕이었던가요? “구시월 달빛에/ 드리운 여인의 그림자로/ 발없이 닻없이/ 맨살치도 못채는 가을로/ 수염이 난 뒤부터/ 부랴 길 내거나 치장할 사치가 없다” → 봄 이기는 겨울이 없다더니 겨울 버텨 막아설 가을도 없네요. 입동 전, 가식도 포장도 없이 맨몸에 내리꽂는 벼락처럼 당신을 만나겠다는 상상은 망상으로 부서져 눈에 갇혔습니다. “빗방울 투툭툭 해일이 되어/ 꿈꾸던 항해마다 침몰할지언정/ 산은 산에 이고/ 물은 물로 지니/ 마도로스 또 담뱃불 붙이고 섰다” → 후까시라고요? ㅜ_ㅜ 눈치채셨군요. 나는 참으로 의연하지 못한 노총각입니다. 이것이 팔자인가 싶어 연말 난생처음 점집을 수소문했고, 10만원을 달래 관뒀으니까요. “찬바람 불어 저마다 방문을 걸어닫는대도/ 고샅길 말뚝박힌 소처럼/ 눈이나 꿈뻑일 것이다/ 그러니 그러나/ 등돌리며 운명을 묻는 이에게/ 들리려는가, 눈가에 서린 말 ; ” → 아니 이건 스토킹이라니요? ㅠ_ㅠ “기다렸습니다./ 기다려주세요.” → 이제 당신 선 곳에 내 기다림이 먼저 당도하리라 작정하였으나…서른아홉의 삭월, 자장면 한그릇도 기다릴 체력이 내게는 없던가 망연해집니다. 지난해 9월 ‘한가위 공개구혼장’이란 제목으로 실렸던 글을 올해 설이 지나 리뷰해보니 처지가 이렇습니다. <가을의 전보>가 아니라 ‘가을의 허세’였던 셈입니다. 기억하세요? 한가위 달빛에 가위라도 눌릴라치면 전보를 쳐달라던 176㎝, 64㎏의 서울 노총각입니다. 몇몇 지인들이 충고하더군요. “요즘 여성들은 시나 편지 별로 안 좋아해.” 난 따졌습니다. “시는 누굴 유혹하기 위한 게 아냐. 주체 못한 감정이 재채기처럼 그냥 뿜어진 것일 뿐이야.” 어쩜 다들 주둥아리가 닮았다고, 비슷한 말들을 합니다. “그러니까 정성 들여 시를 써서 하얀 종이에 적어 옮기고 곱게 접어. 그러고선 명품 가방에 넣어서 주란 말이야.” 나는 더 비뚤어진 노총각이 됩니다. 버림받거나 고백할 기회조차 거부당한 많은 노총각들이 내뱉은 욕들이 닳고닳아 2013년은 ‘계사년’이 되었다 믿게 되는 것입니다. 앞서 전보 교신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한겨레>에 글을 쓴 뒤 지금껏 250명가량의 여성분들 타전이 있었습니다. 20대부터 40대까지, 돌싱이 계셨고 여대생이 있었고, 처지가 같다는 남성도 두분 계셨고, 가보지 못한 호주 시드니와 아시아, 유럽의 어느 도시들이 발신처가 되기도 했습니다. 어떤 여성의 언니가, 동생이, 친구가, 후배나 고등학생 조카(둘 다 “저는 넘보지 마세요”라며)가 유쾌하게, 진지하게 절박함을 알려왔고, 옛 여자친구의 이름을 지닌 분을 포함해 홀로 간직하던 아픈 사연을, 더 깊은 외로움과 시련을 힘내어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이 가운데 어떤 분도 결국엔 만나보질 못했으나, 한두해는 투정해선 안 될 만큼의 응원과 위로까지 받았으므로 나는 사납던 신세가 비로소 청안해지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제 운명은 제 의지보다 모질고 강한 모양입니다. 부처를 수호한다는 나라연금강처럼 백만마리 코끼리의 힘으로 날 지키는 척 되레 날 휘두르고 있습니다. 최근 정반대의 두가지 소회를 경험했습니다. 몇주 전 퇴근길 오랜 친구의 전화를 받고 울었습니다. 친구는 아내가 암 말기라고, 무엇이 어쩌다 이리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지하철 문에 이마를 박고 종착역을 돌아도 녀석에게 해줄 말은 찾을 수 없겠다는 막막함으로, ‘그래 애써 사랑한들 뭐 있겠니’란 맹랑함으로 눈물이 맺혔습니다. 어쩌면 혼자될 친구도 여전히 혼자인 나도 가여웠고, 결혼도 독신도 공허해 보였습니다. 누군가 떠날 나이에, 누구와 인연을 바라며 몇달간 마음만 분주했던 처지가 비루했습니다. 친구는 수술을 시도해볼지 이달 내 추가 정밀검진 결과로 결정하겠답니다. 살던 집을 내놓았고, 공기 좋은 산자락 아내가 머물 새집을 구합니다. 그러나 집은 나가지 않고, 아내와 직장 사이, 아이들을 돌봐줄 부모님 사이는 어찌 오갈지 저 혼자 저 혼자 고민중입니다. 이런 사실을 아들 둘은 전혀 모르듯, 나보다 의연한 친구 또한 “모르겠다”는 게 많습니다. 친구는 설에 만날 수 없었습니다. 집도 편하지 않았습니다. 5~6년가량 “결혼해라”에서, 2년여 전부터 “애라도 먼저 데려와라” 떠밀던 부모님께선 설부터 “네가 너무 짠하다”로 말버릇을 바꾸신 모양입니다. 설 내내 “결혼해라” 대신 “다들 가족을 꾸려 오붓이 다니는데 네가 불쌍하다”고만 하십니다. 나는 ‘짠하다’가 결혼을 떠미는 말 가운데 가장 견디기 어려운 말인 걸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제 자식이 불쌍한 부모는 스스로 얼마나 더 불행해지는가 싶습니다. 목례로 새해인사를 드리고 서울로 가겠다던 나를, 아버지는 말없이 배웅하며 문 닫혀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창 아래서 지워질 때까지 내려다보셨습니다. 그때, 그러니까 내 몸에선 화산처럼 죄의식이 솟았습니다. 나는 늘상 농하던 ‘마흔전야 사춘기’에 진정 갇힌 듯합니다. 결혼도 독신도, 어쩌면 삶도 죽음도 공허하다 싶은 자리에, 케빈(영화 <케빈에 대하여>)도 없던 부모님에 대한 죄의식이, 케빈도 낳아보지 않은 내게, 케빈이 쏜 화살처럼 박힌 겁니다. 남편이 떠난 옥희 엄마(소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도 고작 24살에 새 인연 맺길 포기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나이에 쳐들어온 죄의식은 어쩌자는 건가 했습니다. 39살 사랑방 손님…도 봤니, 옥희야? 밸런타인데이인 14일 연차를 내고 충남 예산에서 가욋일을 마친 뒤 수덕사에 들렀습니다. 경내 눈 녹아가는 진창길을 한참 밟았습니다. 그곳엔 ‘내가 그것을 원하면 그것은 내 것이다’라는, 언뜻 ‘불교’답지 않은 화두가 적혀 있었습니다. “삼십대 여성은 물정을 따지니 얻기 어렵고, 이십대는 (내) 나이를 볼 테니 어렵다”는 지인의 저주는 고사하고서라도, 수삼년 아무렴 원하니 내 것이어 본 적이 없습니다. 서울로 차를 모는 밤길, 유리상자의 ‘사랑해도 될까요’가 라디오에서 흘렀습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얘기할래요, 용기내 볼래요, 나 오늘부터 그대를 포기해도 될까요?”라고 웅얼대고 있었습니다. 버리려 할 때 혹 내 것이 될까 싶은 저열한 역발상이었습니다. 붙임. 공개구혼의 후기도 전해달라는 요청이 많았으나 그건 저의 얘기면서도, 250여분의 이야기라 더 전할 수 없겠습니다. 글을 보게 될지 모르는 친구와 부모님께 죄송합니다. demianism@gmail.com
전보를 받았습니다
만나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설에 만난 부모님은
네가 짠하다고 하십니다 얼마전 오랜 친구의 아내가
암 말기라는 소식을 듣고
결혼도 참 공허하다 싶더군요
노래 한 곡을 들어봅니다
유리상자의 ‘사랑해도 될까요’ ▶ 지난해 가족면을 통해 ‘한가위 공개구혼장’을 띄웠던 ‘노총각’을 기억하시나요? 여전히 혼자인 채, 그는 서른아홉번째 설 명절을 보냈답니다. 이번 설, 그의 부모님께선 그저 그가 “짠하다”고만 하셨다네요. 외로움을 떨쳐줄 인연 찾기에 분주했던 가을을 지나, 결혼도 독신도 공허해 보이는 메마른 겨울을 지나고 있는 그. 어쩌면 인생은 착잡한 이 노총각의 마음처럼 제각각 꾸역꾸역 외로움을 밀어내며 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이곳으로 올지 모른다” → 오지 않습니다. 곁에 있던 이들마저 떠나는 판입니다. 모두가 등을 돌리겠다는 마법의 해. 신이시여, ‘계사년’은 제 입에서 불현듯 튀어나온 욕이었던가요? “구시월 달빛에/ 드리운 여인의 그림자로/ 발없이 닻없이/ 맨살치도 못채는 가을로/ 수염이 난 뒤부터/ 부랴 길 내거나 치장할 사치가 없다” → 봄 이기는 겨울이 없다더니 겨울 버텨 막아설 가을도 없네요. 입동 전, 가식도 포장도 없이 맨몸에 내리꽂는 벼락처럼 당신을 만나겠다는 상상은 망상으로 부서져 눈에 갇혔습니다. “빗방울 투툭툭 해일이 되어/ 꿈꾸던 항해마다 침몰할지언정/ 산은 산에 이고/ 물은 물로 지니/ 마도로스 또 담뱃불 붙이고 섰다” → 후까시라고요? ㅜ_ㅜ 눈치채셨군요. 나는 참으로 의연하지 못한 노총각입니다. 이것이 팔자인가 싶어 연말 난생처음 점집을 수소문했고, 10만원을 달래 관뒀으니까요. “찬바람 불어 저마다 방문을 걸어닫는대도/ 고샅길 말뚝박힌 소처럼/ 눈이나 꿈뻑일 것이다/ 그러니 그러나/ 등돌리며 운명을 묻는 이에게/ 들리려는가, 눈가에 서린 말 ; ” → 아니 이건 스토킹이라니요? ㅠ_ㅠ “기다렸습니다./ 기다려주세요.” → 이제 당신 선 곳에 내 기다림이 먼저 당도하리라 작정하였으나…서른아홉의 삭월, 자장면 한그릇도 기다릴 체력이 내게는 없던가 망연해집니다. 지난해 9월 ‘한가위 공개구혼장’이란 제목으로 실렸던 글을 올해 설이 지나 리뷰해보니 처지가 이렇습니다. <가을의 전보>가 아니라 ‘가을의 허세’였던 셈입니다. 기억하세요? 한가위 달빛에 가위라도 눌릴라치면 전보를 쳐달라던 176㎝, 64㎏의 서울 노총각입니다. 몇몇 지인들이 충고하더군요. “요즘 여성들은 시나 편지 별로 안 좋아해.” 난 따졌습니다. “시는 누굴 유혹하기 위한 게 아냐. 주체 못한 감정이 재채기처럼 그냥 뿜어진 것일 뿐이야.” 어쩜 다들 주둥아리가 닮았다고, 비슷한 말들을 합니다. “그러니까 정성 들여 시를 써서 하얀 종이에 적어 옮기고 곱게 접어. 그러고선 명품 가방에 넣어서 주란 말이야.” 나는 더 비뚤어진 노총각이 됩니다. 버림받거나 고백할 기회조차 거부당한 많은 노총각들이 내뱉은 욕들이 닳고닳아 2013년은 ‘계사년’이 되었다 믿게 되는 것입니다. 앞서 전보 교신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한겨레>에 글을 쓴 뒤 지금껏 250명가량의 여성분들 타전이 있었습니다. 20대부터 40대까지, 돌싱이 계셨고 여대생이 있었고, 처지가 같다는 남성도 두분 계셨고, 가보지 못한 호주 시드니와 아시아, 유럽의 어느 도시들이 발신처가 되기도 했습니다. 어떤 여성의 언니가, 동생이, 친구가, 후배나 고등학생 조카(둘 다 “저는 넘보지 마세요”라며)가 유쾌하게, 진지하게 절박함을 알려왔고, 옛 여자친구의 이름을 지닌 분을 포함해 홀로 간직하던 아픈 사연을, 더 깊은 외로움과 시련을 힘내어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이 가운데 어떤 분도 결국엔 만나보질 못했으나, 한두해는 투정해선 안 될 만큼의 응원과 위로까지 받았으므로 나는 사납던 신세가 비로소 청안해지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제 운명은 제 의지보다 모질고 강한 모양입니다. 부처를 수호한다는 나라연금강처럼 백만마리 코끼리의 힘으로 날 지키는 척 되레 날 휘두르고 있습니다. 최근 정반대의 두가지 소회를 경험했습니다. 몇주 전 퇴근길 오랜 친구의 전화를 받고 울었습니다. 친구는 아내가 암 말기라고, 무엇이 어쩌다 이리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지하철 문에 이마를 박고 종착역을 돌아도 녀석에게 해줄 말은 찾을 수 없겠다는 막막함으로, ‘그래 애써 사랑한들 뭐 있겠니’란 맹랑함으로 눈물이 맺혔습니다. 어쩌면 혼자될 친구도 여전히 혼자인 나도 가여웠고, 결혼도 독신도 공허해 보였습니다. 누군가 떠날 나이에, 누구와 인연을 바라며 몇달간 마음만 분주했던 처지가 비루했습니다. 친구는 수술을 시도해볼지 이달 내 추가 정밀검진 결과로 결정하겠답니다. 살던 집을 내놓았고, 공기 좋은 산자락 아내가 머물 새집을 구합니다. 그러나 집은 나가지 않고, 아내와 직장 사이, 아이들을 돌봐줄 부모님 사이는 어찌 오갈지 저 혼자 저 혼자 고민중입니다. 이런 사실을 아들 둘은 전혀 모르듯, 나보다 의연한 친구 또한 “모르겠다”는 게 많습니다. 친구는 설에 만날 수 없었습니다. 집도 편하지 않았습니다. 5~6년가량 “결혼해라”에서, 2년여 전부터 “애라도 먼저 데려와라” 떠밀던 부모님께선 설부터 “네가 너무 짠하다”로 말버릇을 바꾸신 모양입니다. 설 내내 “결혼해라” 대신 “다들 가족을 꾸려 오붓이 다니는데 네가 불쌍하다”고만 하십니다. 나는 ‘짠하다’가 결혼을 떠미는 말 가운데 가장 견디기 어려운 말인 걸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제 자식이 불쌍한 부모는 스스로 얼마나 더 불행해지는가 싶습니다. 목례로 새해인사를 드리고 서울로 가겠다던 나를, 아버지는 말없이 배웅하며 문 닫혀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창 아래서 지워질 때까지 내려다보셨습니다. 그때, 그러니까 내 몸에선 화산처럼 죄의식이 솟았습니다. 나는 늘상 농하던 ‘마흔전야 사춘기’에 진정 갇힌 듯합니다. 결혼도 독신도, 어쩌면 삶도 죽음도 공허하다 싶은 자리에, 케빈(영화 <케빈에 대하여>)도 없던 부모님에 대한 죄의식이, 케빈도 낳아보지 않은 내게, 케빈이 쏜 화살처럼 박힌 겁니다. 남편이 떠난 옥희 엄마(소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도 고작 24살에 새 인연 맺길 포기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나이에 쳐들어온 죄의식은 어쩌자는 건가 했습니다. 39살 사랑방 손님…도 봤니, 옥희야? 밸런타인데이인 14일 연차를 내고 충남 예산에서 가욋일을 마친 뒤 수덕사에 들렀습니다. 경내 눈 녹아가는 진창길을 한참 밟았습니다. 그곳엔 ‘내가 그것을 원하면 그것은 내 것이다’라는, 언뜻 ‘불교’답지 않은 화두가 적혀 있었습니다. “삼십대 여성은 물정을 따지니 얻기 어렵고, 이십대는 (내) 나이를 볼 테니 어렵다”는 지인의 저주는 고사하고서라도, 수삼년 아무렴 원하니 내 것이어 본 적이 없습니다. 서울로 차를 모는 밤길, 유리상자의 ‘사랑해도 될까요’가 라디오에서 흘렀습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얘기할래요, 용기내 볼래요, 나 오늘부터 그대를 포기해도 될까요?”라고 웅얼대고 있었습니다. 버리려 할 때 혹 내 것이 될까 싶은 저열한 역발상이었습니다. 붙임. 공개구혼의 후기도 전해달라는 요청이 많았으나 그건 저의 얘기면서도, 250여분의 이야기라 더 전할 수 없겠습니다. 글을 보게 될지 모르는 친구와 부모님께 죄송합니다. demianis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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