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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가족 / 부녀간의 전쟁 그 뒤
▶ 지난 1월12일 ‘왕따 아빠’ 보도가 나간 뒤 많은 분들이 “우리 집 얘기 같다”는 전자우편을 보내주셨어요. 그중 한 여고생이 보낸 이메일을 읽다가 가족면 담당 기자의 작은 눈이 확 커졌습니다. 이 여고생은 말도 안 섞던 아버지와 화해한 경험을 토대로 “아버지도 변해야겠지만, 자녀들도 달라져야 한다”고 명쾌하게 ‘해답’을 제시하더군요. “나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인가?” 이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노력, 거기에서부터 진짜 화해가 시작되더군요.
‘불편하고 싫은 존재.’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와 언니들에게 아빠는 그런 존재였다. ‘친구 같은 아빠’, 우리집에 그런 말은 없었다. 고지식한 아빠는 언제나 세 딸에게 엄격하셨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언니들이 아빠에게 혼나는 모습을 보고 자랐다. 아빠는 언니들이 인형놀이를 하다가 사소한 말싸움만 해도 한 시간 넘도록 훈계하셨고, 그때마다 매를 드셨다. 어린 내 눈에도 정도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였다. 그때 기억 때문일까. 지금도 난 ‘체벌’이라면 아주 질색이다. 당연히 우리 세 자매는 놀 때도 아빠의 눈치를 보곤 했다.
사춘기를 거치면서 우리 셋은 아빠와 거의 대화도 안 할 정도로 멀어졌다. 자연 아빠와 ‘충돌’하는 일도 잦아졌다. 언니가 중학교 1학년이던 때 벌어진 ‘사건’은 내게 결정적인 한 장면처럼 잊히질 않는다. 한밤중 갑자기 켜진 불 때문에 잠이 깼던 것 같다. “이제 중학생인데 언제까지 그렇게 연예인만 쫓아다닐 거냐. 공부도 좀 해라.” 아빠가 언니 혼내는 소리를 들었다. 언니의 변명이 이어졌다. 또다시 꾸중, 그리고 변명, 또 꾸중. 대화(?)가 정점에 달했을 때 아빠는 이렇게 소리를 지르셨다. “차라리 나가 죽어!”
초등학교 3학년이던 나는 아빠가 내뱉은 말을 듣고, 말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그 뒤로 무슨 일이 더 벌어졌는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큰 충격이었다. 다음날부터 난 아빠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간밤의 사건을 입 밖으로 꺼냈다간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아 언니에게도, 엄마에게도 아무 말도 못한 채 안절부절못했다. 언니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 일 이후로 나는 언니가 아빠와 얘기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집에 일찍 좀 다녀라.” “벌써 거울만 몇 분을 보는 거니?” 그 이후로도 아빠는 늘 이런 잔소리만 하셨다. 아빠에게 좋은 말을 들은 기억이 거의 없을 정도다. 언니들도 나도, 어느 순간부터인가 아빠의 존재를 아예 외면하고 있었다. 대화가 사라졌고 아빠는 그야말로 혼자였다.
선생님이란 직업병일까
눈만 마주치면 훈계와 꾸중
딸들은 침묵시위로 맞섰고
아빠는 가출을 선언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고백의 시간
“집에 오면 섬이 된 기분이야”
“무서워서 말을 못했어요”
알고보니 집 밖의 아빤 딸바보
표현에 서툴렀음을 깨닫자
벽은 사라지고 평화가 찾아왔다 그런데 아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빠는 최근 전에 없이 학교생활에 대해 물어보는 등 세 딸의 일상에 관심을 보이며 다가오려 했다. 하지만 아빠의 이런 행동이 나와 언니들에게는 반갑기보다 굉장히 당혹스럽기만 했다. “그냥… 뭐…”라는 식으로 짧게 대답하고 말았다. 우리에겐 그게 최선이었다. 세 딸의 무성의한 답변이 반복되자 아빠의 인내심도 한계에 부닥친 듯했다. “아빠가 말할 땐 듣는 척이라도 해라.” 아빠는 예전처럼 불만을 터뜨리며 훈계하기 시작했다. 아빠는 엄마에게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고 하소연을 했다가, “참을 만큼 참았다”며 화를 내기도 했다. 그래도 나와 언니들은 냉담했다. 언제부터인가 아빠는 훈계 대신 “나는 그냥 돈 벌어오는 기계”라는 체념 섞인 말들을 하곤 하셨다. 집안 분위기는 갈수록 어두워졌고, 세 딸과 아빠 사이에 끼인 엄마는 나날이 지쳐갔다. “더는 이렇게 못 살겠다. 조만간 내가 방을 구해서 나가겠다.” 아빠가 ‘폭탄선언’을 한 건 그 무렵이었다. 퇴근한 아빠는 인사도 하지 않는 딸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 안방에선 엄마의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빠와 엄마가 따로 살게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날 밤, 아빠는 딸들에게 서운했던 속내를 털어놓으셨다. “집에 오면 아무도 아는 척도 안 하고, 말에 대답하는 사람도 없어. 저기 멀리 혼자 떨어진 섬이 된 기분이야.” 나와 언니들도 그제야 마음을 드러낼 수 있었다. “아빠가 언니한테 죽으라고 했을 때부터, 아빠가 무서워서 말 걸기도 싫었어.” 그 말을 하면서 엉엉 눈물이 터져 나왔다. 언니들도 각자 자신의 마음을 털어놨다. 아빠는 처음으로 “아빠가 다 미안하다”고 했다. 그날 이후 아빠는 달라졌다. 잔소리도, 불평도 없었다. 하지만 그걸로 닫혀 있던 마음이 한꺼번에 열리진 않았다. 그러기엔 그동안의 서운함과 미움들이 너무 컸다. ‘아빠와 우리는 왜 이렇게 된 걸까?’ 그걸 이해하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무뚝뚝하고 무섭다.’ 그 이상으로 내가 아빠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게 없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내가 아빠에 대해 이렇게 아는 게 없었다니!’ 사실 좀 충격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아빠 탐구’에 들어갔다. 우선 집 안에서 아빠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 티브이 시청, 인터넷 검색, 흡연…. 아빠의 일상은 단조로웠다. 아빠의 관심사는 정치 등 세상 돌아가는 얘기에 국한돼 있었다. 이렇다 할 답을 찾지 못한 나는 집 밖의 아빠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다. 아빠는 집 근처에 있는 사립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계셨다. 아빠가 재직중이신 학교에 다니는 친구 등을 통해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듣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들 “무섭지만…”이란 첫마디로 시작했다가 “자신들을 이해해주는 선생님” “믿어주시는 선생님” 또 “티 안 나게 챙겨주시는 선생님”이라고 했다. 그들이 얘기하는 아빠의 모습에 나는 기쁘기도 했고, 처음으로 아빠가 자랑스럽기도 했다.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했던 건 아빠가 “학교에서 딸 자랑을 하신다”는 말이었다. 집에서는 차갑기만 한 딸을 아빠가 항상 자랑스럽게 여기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지금까지 아빠를 외면하고 미워하기만 했던 마음이 모두 무너져 내렸다. ‘아빠가 딸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제대로 건네지 못했던 건 마음이 없었던 게 아니었구나. 그 마음을 전하는 데 서툴렀을 뿐이구나. 밖에서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선생님이지만, 딸들을 대할 땐 그저 서투른 아빠였을 뿐이었구나.’ 오랜 고민 끝에 답을 찾았다. 그 뒤로 나는 내 마음에 아빠가 들어올 수 있는 자리를 만들기로 했다. 우리나라를 넘어 세계를 아우르는, 지루하고 이해할 수도 없었던 아빠의 얘기에 조금씩 관심을 보여드렸다. 아빠와 대화의 물꼬를 트는 게 최우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사이 내가 많이 자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렵기만 하던 얘기들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고, 정치 얘기도 재밌게 느껴졌다. 아빠도 차츰 내게 관심을 보여주셨다. 티브이를 보고 있으면 “쟤네가 언니가 좋아하는 애들이냐? 너는 누굴 좋아하냐” 묻기도 하셨다. “아빠”라고 부르는 것조차 어려웠던 시절을 지나 나는 지금 아빠와 둘만 있는 시간도 어색하지 않다. 요즘은 집에서 학교 기숙사로 돌아갈 때면 아빠와 하이파이브를 하기도 한다. 웃는 법도 모를 것만 같았던 아빠의 표정은 부쩍 밝아지셨다. 나도 이젠 아빠의 웃음소리가 낯설지 않았다. 지금 내 소원은 대학생이 되어 아빠와 둘이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그땐 쑥스럽고 죄송해서 못했던 말을 해야겠다. “아빠, 사랑해요!” 아빠의 막내딸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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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은 사라지고 평화가 찾아왔다 그런데 아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빠는 최근 전에 없이 학교생활에 대해 물어보는 등 세 딸의 일상에 관심을 보이며 다가오려 했다. 하지만 아빠의 이런 행동이 나와 언니들에게는 반갑기보다 굉장히 당혹스럽기만 했다. “그냥… 뭐…”라는 식으로 짧게 대답하고 말았다. 우리에겐 그게 최선이었다. 세 딸의 무성의한 답변이 반복되자 아빠의 인내심도 한계에 부닥친 듯했다. “아빠가 말할 땐 듣는 척이라도 해라.” 아빠는 예전처럼 불만을 터뜨리며 훈계하기 시작했다. 아빠는 엄마에게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고 하소연을 했다가, “참을 만큼 참았다”며 화를 내기도 했다. 그래도 나와 언니들은 냉담했다. 언제부터인가 아빠는 훈계 대신 “나는 그냥 돈 벌어오는 기계”라는 체념 섞인 말들을 하곤 하셨다. 집안 분위기는 갈수록 어두워졌고, 세 딸과 아빠 사이에 끼인 엄마는 나날이 지쳐갔다. “더는 이렇게 못 살겠다. 조만간 내가 방을 구해서 나가겠다.” 아빠가 ‘폭탄선언’을 한 건 그 무렵이었다. 퇴근한 아빠는 인사도 하지 않는 딸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 안방에선 엄마의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빠와 엄마가 따로 살게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날 밤, 아빠는 딸들에게 서운했던 속내를 털어놓으셨다. “집에 오면 아무도 아는 척도 안 하고, 말에 대답하는 사람도 없어. 저기 멀리 혼자 떨어진 섬이 된 기분이야.” 나와 언니들도 그제야 마음을 드러낼 수 있었다. “아빠가 언니한테 죽으라고 했을 때부터, 아빠가 무서워서 말 걸기도 싫었어.” 그 말을 하면서 엉엉 눈물이 터져 나왔다. 언니들도 각자 자신의 마음을 털어놨다. 아빠는 처음으로 “아빠가 다 미안하다”고 했다. 그날 이후 아빠는 달라졌다. 잔소리도, 불평도 없었다. 하지만 그걸로 닫혀 있던 마음이 한꺼번에 열리진 않았다. 그러기엔 그동안의 서운함과 미움들이 너무 컸다. ‘아빠와 우리는 왜 이렇게 된 걸까?’ 그걸 이해하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무뚝뚝하고 무섭다.’ 그 이상으로 내가 아빠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게 없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내가 아빠에 대해 이렇게 아는 게 없었다니!’ 사실 좀 충격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아빠 탐구’에 들어갔다. 우선 집 안에서 아빠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 티브이 시청, 인터넷 검색, 흡연…. 아빠의 일상은 단조로웠다. 아빠의 관심사는 정치 등 세상 돌아가는 얘기에 국한돼 있었다. 이렇다 할 답을 찾지 못한 나는 집 밖의 아빠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다. 아빠는 집 근처에 있는 사립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계셨다. 아빠가 재직중이신 학교에 다니는 친구 등을 통해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듣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들 “무섭지만…”이란 첫마디로 시작했다가 “자신들을 이해해주는 선생님” “믿어주시는 선생님” 또 “티 안 나게 챙겨주시는 선생님”이라고 했다. 그들이 얘기하는 아빠의 모습에 나는 기쁘기도 했고, 처음으로 아빠가 자랑스럽기도 했다.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했던 건 아빠가 “학교에서 딸 자랑을 하신다”는 말이었다. 집에서는 차갑기만 한 딸을 아빠가 항상 자랑스럽게 여기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지금까지 아빠를 외면하고 미워하기만 했던 마음이 모두 무너져 내렸다. ‘아빠가 딸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제대로 건네지 못했던 건 마음이 없었던 게 아니었구나. 그 마음을 전하는 데 서툴렀을 뿐이구나. 밖에서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선생님이지만, 딸들을 대할 땐 그저 서투른 아빠였을 뿐이었구나.’ 오랜 고민 끝에 답을 찾았다. 그 뒤로 나는 내 마음에 아빠가 들어올 수 있는 자리를 만들기로 했다. 우리나라를 넘어 세계를 아우르는, 지루하고 이해할 수도 없었던 아빠의 얘기에 조금씩 관심을 보여드렸다. 아빠와 대화의 물꼬를 트는 게 최우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사이 내가 많이 자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렵기만 하던 얘기들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고, 정치 얘기도 재밌게 느껴졌다. 아빠도 차츰 내게 관심을 보여주셨다. 티브이를 보고 있으면 “쟤네가 언니가 좋아하는 애들이냐? 너는 누굴 좋아하냐” 묻기도 하셨다. “아빠”라고 부르는 것조차 어려웠던 시절을 지나 나는 지금 아빠와 둘만 있는 시간도 어색하지 않다. 요즘은 집에서 학교 기숙사로 돌아갈 때면 아빠와 하이파이브를 하기도 한다. 웃는 법도 모를 것만 같았던 아빠의 표정은 부쩍 밝아지셨다. 나도 이젠 아빠의 웃음소리가 낯설지 않았다. 지금 내 소원은 대학생이 되어 아빠와 둘이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그땐 쑥스럽고 죄송해서 못했던 말을 해야겠다. “아빠, 사랑해요!” 아빠의 막내딸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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