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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염치를 가르쳐주오

등록 2013-02-01 20:45수정 2013-02-01 20:48

이진순 미국 올드도미니언대 교수
이진순 미국 올드도미니언대 교수
[토요판] 엄마의 콤플렉스
미국 아이들은 발랄하고 당당해 보인다. 내가 아이에게 “하지 마, 그건 안 돼”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때 미국 엄마들이 “그건 괜찮지 않은데”(It’s not OK)라고 완곡하게 말하는 걸 보면 나만 나쁜 엄마인 것 같아 낯 뜨겁고 당혹스럽다. 단순한 언어습관의 차이인지 양육문화의 차이인지, 유년시절 나를 가르친 부모와 선생님의 화법이 자연스레 몸에 밴 내게, 미국 부모들의 참을성과 여유는 낯설고도 부러운 것이었다. 애들이 괴발개발 쓴 작문이나 엉성하게 미완성으로 남긴 그림에 대해서도 교사들의 첫 코멘트는 한결같다. “멋지다. 재밌다. 잘했다….” 지적할 게 있어도 일단은 칭찬과 격려로 시작한다. 이젠 나도 제법 익숙해져서 학생들이 쓴 C학점짜리 페이퍼에도 “이건 굉장히 재미있는 아이디어야. 그런데…”로 말문을 열 줄 안다. 아이의 자존감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칭찬하고 격려하는 것이 교육적으로 효과가 크다는 걸 우리는 잘 안다. 문제는, 아이의 자존감을 지켜준다는 미명하에 아이를 끼고돌면서 의미 없는 칭찬과 격려로 오염시키는 데 있다.

미국에서 교직 경력이 30년 가까운 선배 교수 하나는 대학에서 개강을 하고 첫 시험을 보기까지 한달 남짓한 기간을 학생과 교수 사이의 “허니문” 기간이라고 부른다. 학점을 둘러싼 “시비와 전투”가 없는 유일한 평화기라는 것이다. 수업을 오래 빼먹었거나 시험을 엉망으로 쳐놓고는 교수를 찾아와 자기가 왜 A를 못 받았는지 따지는 학생이 최근 10여년 사이 눈에 띄게 늘었다는 게 이 양반 주장이다. 자기가 왜 낮은 학점을 받았냐며 구구절절 장문의 이메일을 스팸 수준으로 쏴 보내는 학생이 내게도 학기마다 두어명은 꼭 있다. 학점에 대해 불평을 토로할 수는 있지만, 그 친구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난 잘했다고 생각해요. 난 최선을 다했어요”라는 게 난 놀랍다.

“갈수록 학생-교수 관계가 고객-세일즈맨 관계로 바뀌고 있는 것 같아”라고 선배 교수는 씁쓸히 말한다. 학생들이 원하는 건 칭찬으로 도배된 교수의 추천서이지 고까운 충고 따위가 아니라는 뜻일까. 한국의 지인들 얘기를 들어보면 우리나라 대학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돈을 주고 취업에 필요한 학점을 사는 고객과 그 고객의 요구에 발맞춰야 하는 지식판매자. A학점 받기가 수월치 않다고 소문나면 바로 그 과목을 취소해 버리는 학생들. 치열한 취업전쟁으로 아이들을 내모는 경제 환경이 문제지만, 함께 사는 이들에 대한 배려나 염치는 가르치지 못하면서 “너 잘한다”만 반복한 부모들의 잘못도 크다. 염치를 모르는 자존감은 어리석은 교만일 뿐이다. 인사청문회 파동이나 임기말 사면을 보면서 박완서 선생의 소설 제목이 떠올랐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세상에 국·영·수, 심지어 논술과 리더십을 가르치는 학원과 교재는 차고 넘치는데, ‘염치’를 가르치는 선생님, 참 찾기 어렵다.

이진순 미국 올드도미니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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