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상사 노조는 유신 시절 중앙정보부의 노조파괴 공작이 어느 정도 치밀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1977년 반도상사 노동자들이 공장 옥상에 올라 임금인상과 노조탄압 중단을 요구하며 농성을 하고 있다. <장현자 수기: 그때 우리들은>에서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25>반도상사 노동조합
<25>반도상사 노동조합
1970년대 노동운동사에서 반도상사는 몇 가지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반도상사는 지금 엘지그룹의 전신인 럭키그룹의 계열사로 그룹의 간판 격인 종합상사로 지정된 곳이었다. 1970년대에 등장했던 몇몇 민주노조 중에서 반도상사가 유일하게 재벌그룹의 계열사에 만들어진 노조였다. 전 회에 최초의 여성지부장으로 소개한 동일방직의 주길자는 역사가 오랜 노조의 24대 지부장이었던 반면, 1974년 4월15일 닻을 올린 반도상사의 한순임은 한국노동운동사에서 신규노조의 출범 때부터 지부장을 맡은 최초의 여성이었다. 반도상사 노조의 사례는 당시 중앙정보부가 주요한 개별노조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얼마만큼 깊이 개입했는지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반도대학’이라고 불리던 근로 조건
장현자가 1969년 반도상사에 처음 입사할 때만 해도 반도상사의 노동조건은 괜찮은 편이었다. 장현자가 반도에 입사하기 전 다녔던 롯데제과에서는 일당이 100원이었는데 반도는 120원이었다. 반도는 임금도 높고 기숙사가 있어 따로 방값이 나가지도 않는 등 근로조건이 좋기로 소문이 나서 입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가발업이 호황이다 보니 종업원은 몇 년 사이에 4000명으로 늘어났고, 기숙사는 다다미방 하나에 10~15명씩 꽉꽉 채워 800명을 수용했다. 그 많은 인원을 수용하는 곳이지만 화장실과 세면장은 모두 4개밖에 없었다. 새로 지었다는 기숙사도 부실공사라 흐린 날이면 천장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자고 나면 몸이 가볍지 않고 여기저기 쑤시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당시에는 잔업과 철야가 빈번했는데, 기숙사생들은 한마디로 ‘봉’이어서 밤낮없이 불러다 일을 시키니 몸이 아파도 어쩔 수 없이 불려나가야 했다. 그래서 많은 기숙사생들은 돈이 좀 들고 출퇴근의 어려움이 있지만 지옥 같은 기숙사를 벗어나 살고 싶어 했다.
이 시기 여성노동자들을 괴롭혔던 것은 ‘검신’이었다. 꼭 안내양만이 아니었다. 당시 유신정권은 봉건적인 충효사상을 강조하면서 근로자를 한 가족처럼 여기고, 근로자들도 공장을 가정으로, 사장이나 높은 간부들을 부모처럼 여기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검신은 노동자들을 잠재적인 도둑놈, 도둑년으로 보는 행위였다. 회사에서는 모든 노동자들을 다 검신 대상으로 삼았지만, 충분한 인력을 배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퇴근시간이면 줄이 길게 늘어서 한 시간도 넘게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음력설 전날 한 어린 여성노동자가 예매해 둔 차 시간이 다 되도록 검신이 끝나지 않자 급한 마음에 새치기를 했다. 그것을 본 경비원이 몽둥이로 내려치자 여성노동자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일부 선진적인 여성노동자들이 노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노조가 만들어지기 전 달인 1974년 3월 반도상사 어느 여성노동자의 월급봉투(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소장)를 보면 ‘기본급 490원×36일(일요일 가산한 듯)=17,640원, 야간급료수당: 2,450원, 연장근로수당: 91.87원×193.5시간=17,777원 등 합계 37,867원이고, 여기서 저금 300원과 식대 3,627원을 공제한 실지급액 33,925원’이었다. 이것이 유신시대, ‘반도대학’이라 불릴 정도로 노동조건이 좋았다던 대기업 계열사 반도상사 여성노동자가 연장근로를 무려 193.5시간이나 하고 받아든 월급봉투였다. 그해 첫 출시된 초코파이는 한 개에 50원이었다.
중정은 노조 지도부를 끌고가
“산업선교회는 빨갱이들이고
너희들은 놀아났다”며 때렸다
회사엔 근로조건 개선 요구했다
중정은 노조를 고사시키기 위해
채찍만이 아니라 당근도 썼다 반도노조 여성지부장 한순임은
동일방직 똥물사건 당시
민주노조 파괴에 개입했고
산업선교회를 비판하는
강연과 기고활동에 앞장섰다
중정 공작의 장기적 효과였다 산업선교회는 1973년 12월부터 3개월 과정으로 ‘부평지역 여성지도자 훈련’을 실시했다. 반도상사의 경우 한순임 등 모두 26명의 여성노동자들이 이 훈련을 받았다. 훈련의 실무책임자는 이화여대를 막 졸업하는 최영희(18대 의원)였다. 최영희와 여성노동자들은 거의 동년배였지만, 최영희는 여성노동자들 사이에서 놀라운 지도력을 발휘했다. 그는 “한번에 근로조건 개선을 이룰 수는 없기 때문에 지속적인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서는 노조가 있어야 하며 노조건설을 위해서는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이때 여성노동자들 중에서 단연 눈에 띈 사람은 학습능력이 뛰어나고 언변이 탁월한 21살의 한순임이었다. 한순임은 장현자, 옥판점, 김복순 등과 함께 회사나 관리자로부터 부당하게 당해 온 사실들을 중심으로 1) 폭행 사원을 처벌하라 2) 중식 차별 문제 해결하라 3) 기숙사 시설 개선하라 4) 강제 잔업 철폐하라 5) 취업규칙 내걸어라 6) 임금인상 60% 지급하라 7) 이 문제들은 사장이 직접 해결하라는 내용의 호소문을 작성했다. 이들은 1974년 2월26일을 디데이로 잡았다. 호소문에는 한순임이 여자들이 고무줄놀이 할 때 많이 부르는 ‘무찌르자 오랑캐’ 노래에 “찾읍시다! 인권을, 피의 대가를, 불굴의 의지를 꺾지 않겠다! 싸우자! 싸워! 승리를 위해 해결이 될 때까지 투쟁하겠다!”는 가사를 바꿔 붙인 내용도 들어갔다. 이들은 호소문을 복사해 기숙사와 현장에 은밀하게 배포했다. 늘 노동자들의 동태를 감시하던 사감들도, 그 당시로서는 최첨단인 시시티브이(CCTV)를 통해 현장을 감시하던 회사도 어린 여공들이 이런 일을 꾸미는 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노조준비위원장에 공장장, 지부장에 경비원 2월26일 아침 8시 반 영하 15도의 혹한 속에 여성노동자들은 농성을 시작했다. 농성이 시작되자 회사도 놀랐지만, 한번도 데모나 농성이란 걸 해보지 않았던 순종적이었던 어린 여성노동자들이 농성의 주역이 되어 처절하게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는 자신들의 모습에 놀라워했다. 서울의 언론사에 농성 사실을 알리러 갔다가 노동청 간부들과 함께 회사로 돌아온 장현자는 농성에 합류하여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온몸이 떨리면서 오싹해지더니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고 한다. 노동자들은 점심도 저녁도 거른 채 ‘사장 나오라’를 외치며 농성을 계속했다. 밤 11시가 되어서야 섬유노조의 개입으로 회사 쪽과 한순임 등 노동자 대표 사이에 노조 결성, 강제잔업 금지, 작업장 환경과 기숙사 시설 개선, 폭행 사원의 사과, 오늘의 일에 대한 처벌 금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합의서가 작성되었다. 어린 여성노동자들이 어쩌면 저렇게 당차게 농성을 진행할 수 있을까 놀라웠지만, 그들은 아직 참 순진했다. 그들은 노조를 만드는 것도 회사와 협의해야 하는 줄 알았다. 이 농성의 결과 노조창립준비위원회가 만들어졌는데, 위원장은 공장장이었다! 약 일주일 후인 3월5일 오후 5시30분 노조창립준비위원회의 주최로 노동조합 창립총회가 회사식당에서 열렸다. 사회는 반도상사 노조의 상급노조가 될 섬유노조 쟁의부장이 맡았다. 그는 회사의 각본대로 임원은 전형위원이 선출하자고 했고, 전형위원들은 엉뚱한 경비원을 지부장으로 한 임원명단을 발표했다. 2월26일의 농성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한 사람으로는 한순임 한 명만이 부지부장 명단에 들어 있었다. 이 명단이 발표되자 총회장은 난리가 났다. 자신들이 우롱당했다는 사실에 극도로 분노한 여성노동자들은 “쟁의부장 죽여라, 저놈이 우리를 속였다!”며 아우성을 쳤다. 억울함과 분에 못 이긴 여성노동자 3명이 거품을 물고 쓰러져 구급차에 실려 갔고, 창립총회는 자연히 2차 농성으로 이어졌다. 마이크를 잡은 한순임은 “이제부터는 더이상 우롱당하지 말고 우리들이 힘을 모아 더는 속지 말자”고 호소했다. 노동자들이 구호를 외치며 시멘트 바닥에서 꼬박 밤을 지새우고 난 새벽 5시, 저벅저벅하는 군홧발 소리가 다가왔다. 수백의 전경이 몽둥이를 들고 다가왔다. 노동자들은 처음 보는 전투경찰 모습에 비명을 지르면서도 스크럼을 짰지만, 전경들은 팔과 팔 사이에 몽둥이를 넣어 한 명씩 떼어냈다. 한순임을 비롯한 열성 노동자 21명을 연행했다. 자신들의 대표를 빼앗긴 노동자들은 해산하지 않았다. 농성장에 남은 노동자들은 서로를 눈물로 위로하며 대표들이 돌아와야만 일을 할 수 있다며 자연스럽게 파업에 돌입했다. 회사가 경찰에 잡혀간 노동자들의 석방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고, 노동자들은 3일 만에 풀려났다. 이들이 풀려나 회사로 들어왔을 때, 노동자들은 여전히 운동장에 모여 노래를 부르며 농성을 하고 있었다. 풀려난 이들과 운동장에 있던 이들이 한데 엉켜 엉엉 울면서 단결만이 살길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학교를 못 다닌 노동자들은 이렇게 속으며 배웠고, 얻어터지며 배웠고, 울면서 배웠다. 마침내 4월15일 노조결성대회가 속개되었고, 한순임을 지부장으로 하는 ‘섬유노동조합 반도상사지부’가 결성되었다. 노조가 결성되기 전, 경찰서에서 풀려난 한순임, 장현자 등이 현장에 복귀하여 일하고 있을 때, 회사관리자가 경비실에 친구가 면회 왔다고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다. 평소에 면회는 거의 허용되지 않는데 웬일일까 하고 나가 보니 함께 호소문을 만들었던 옥판점과 김복순도 불려나와 있었다. 공단 입구에는 까만 승용차 2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그 무시무시한 남산, 즉 중앙정보부에서 온 것이다. 정보부에 끌려간 이들은 “네년들 머리로 호소문을 직접 썼을 리가 없다”며 “산업선교회의 조화순 목사와 실무자 최영희 등이 간첩이고 빨갱이이고 지금까지 너희들은 빨갱이들의 지시에 놀아났다”며 마구 때렸다. 자신들이 맞는 것도 힘들었지만, 옆방에서 동료들이 매 맞는 소리, 비명 소리는 더 견디기 힘들었다. 주동자로 몰린 한순임이 제일 많이 얻어터져 온몸에 시커멓게 멍이 들었다고 한다. 당시 정보부가 조화순 목사나 최영희를 건드리지 않은 것이나, 노동조합 결성 자체를 막지 않은 것을 보면 정보부의 계획은 산업선교회와 반도상사 노동조합의 분리에 있었다. 한순임은 풀려난 뒤 처음 최영희와 자신을 연결해준 친구를 찾아가 “은인을 배신해야 할지, 조국을 배반해야 할지 미치겠다”며 펑펑 울었다고 한다. 훗날 “포용정책”이었다고 주장한 한순임 중앙정보부는 한순임이 주도한 2월26일이나 3월5일의 농성에서 어린 여성노동자들이 보여준 치밀함과 단호함을 보고, 그 배후에 산업선교회 등 불순세력이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중앙정보부는 먼저 한순임 등 반도상사 노조의 지도부를 최영희나 산업선교회와 떼어내고, 일정한 냉각기를 거쳐 체제 내로 포섭해 들이는 방침을 세웠다. 회사는 회사대로 노조간부들이 산업선교회에 가면 노조와는 아예 교섭을 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한순임은 노조 상무집행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산업선교회에 가지 말자고 말했다. 장현자에 따르면 간부들도 회사와 살벌하게 대치하는 것이 마음속으로 많이 힘들었기 때문에 지부장의 이야기에 협력하는 마음과 회사와의 관계를 원만히 하기 위해 산업선교회에 가지 않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흥미있는 것은 노조 결성 즈음에 중앙정보부가 은밀하게 취한 공작이다. 중앙정보부가 한순임 등을 잡아다가 협박한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정보부가 채찍을 휘두르는 것 말고 어떤 당근으로 한순임 같은 명석하고 자존심 강한 노동운동가를 유혹했는지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당시 혜성과 같이 등장했던 노동자 출신의 지도자 권용목이 나중에 뉴라이트로 전락했다가 쓸쓸하게 세상을 뜬 것처럼, 한순임은 동일방직 똥물사건 당시 민주노조의 파괴에 깊이 개입했고, 산업선교회를 비판하는 강연과 교육 기고활동에 앞장섰다. 이 문제는 노동운동 내부의 노노갈등, 산업선교회가 한국노동운동에 남긴 빛과 그림자 등과도 관련된 문제이지만, 중앙정보부의 차원 높은 공작의 장기적인 효과가 미친 영향에 대한 고찰을 포함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 한순임이 중앙정보부에서 풀려난 직후인 1974년 3월25일자 ‘노사분규 시정방안 보고서 제출 의견’이란 중앙정보부 문건을 보면 중앙정보부는 반도상사로부터 대표이사 구자승을 비롯하여 구자경,구자두,황인일,김석구,허준구,구철회,구정회 이사 전원의 인감 날인이 첨부된 노동자들의 요구사항에 대한 회사의 구체적인 이행계획 및 시정방안을 받아냈다. 구자경은 럭키그룹 창업자인 구인회의 장남으로 1969년 구인회의 사망 이후 럭키금성그룹의 총수가 되었고, 구철회와 구정회는 구인회의 동생이고, 구자두는 구자경의 동생이고, 허준구는 사돈으로 중앙정보부는 럭키금성그룹의 실세인 반도상사 이사진 전원의 도장을 받아내 노동자들의 요구를 들어주도록 압박한 것이다. 처음 9개항이던 개선사항의 내용은 5월14일, 5월28일의 보고서를 거치면서 작업장 시설,기숙사, 식당시설,전문건강관리자 배치,재해보상금 지급,동사자와 병자 치료, 퇴직금 지급,징계해고자 수당 지급,도급근로자의 임금 보장,연소자친권자 동의서 접수 및 교육시설,연차유급휴가 실시,야간작업 및 잔업,법정휴식시간 제공,유급휴일 실시,신입자 건강진단 실시,관계법규 고시 등 16개항으로 늘어났다. 중앙정보부는 이들 각각에 대해 개선 내용과 완료예정 월일,진도에 대한 세부설명을 요구했고 이를 일일이 부장에게 보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조가 출범한 뒤 회사는 부산에서 올라온 비노조원들로 ‘봉선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노조의 활동을 방해해왔고, 이는 한순임 집행부의 큰 골칫거리였다. 중앙정보부 경기지부는 반도상사 쪽에 압력을 가해 ‘봉선회 활동을 일절 지원하지 말 것’, ‘노조 상근인원을 증가시킬 것’, ‘노조의 사무실과 비품을 지원할 것’, ‘노조활동에 지장을 초래할 우려가 있는 기숙사 인원감축을 보류할 것’ 등을 지시하고, 이를 노사협의회를 통해 발표하도록 강제했다. 이와 같은 점검은 1974년 11월까지 계속되었다. 산업선교회가 노동자들에게 제시한 방향은 ‘옳은 노선’이었을지는 모르나, 회사와 한 치의 타협도 없는 극한 대결로 치닫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노동현장에서 산업선교회를 고립시켜 체제에 포섭되지 않는 노동조합을 고사시키기 위해 중앙정보부는 채찍만이 아니라 당근도 내줄 줄 알았다. 중앙정보부가 한순임을 탄압하거나 돈으로 매수하려 했다면 한순임은 이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순임 체제의 출범을 용인하고 한순임 집행부의 주요 요구사항을 재벌기업에 압력을 가해 보이지 않게 성사시켜주는 방식으로 중앙정보부는 산업선교회와 일정한 선을 긋는 것이 노동자들에게 편하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을 주입시켰다. 한순임은 국정원 과거사위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산업선교회에 대해서 자주성을 추구했고 회사나 섬유노조를 적으로만 돌리지 않는 ‘포용정책’을 적극적으로 썼다고 주장했다. 약자가 쓴 포용정책의 결과는 참담했다.
“산업선교회는 빨갱이들이고
너희들은 놀아났다”며 때렸다
회사엔 근로조건 개선 요구했다
중정은 노조를 고사시키기 위해
채찍만이 아니라 당근도 썼다 반도노조 여성지부장 한순임은
동일방직 똥물사건 당시
민주노조 파괴에 개입했고
산업선교회를 비판하는
강연과 기고활동에 앞장섰다
중정 공작의 장기적 효과였다 산업선교회는 1973년 12월부터 3개월 과정으로 ‘부평지역 여성지도자 훈련’을 실시했다. 반도상사의 경우 한순임 등 모두 26명의 여성노동자들이 이 훈련을 받았다. 훈련의 실무책임자는 이화여대를 막 졸업하는 최영희(18대 의원)였다. 최영희와 여성노동자들은 거의 동년배였지만, 최영희는 여성노동자들 사이에서 놀라운 지도력을 발휘했다. 그는 “한번에 근로조건 개선을 이룰 수는 없기 때문에 지속적인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서는 노조가 있어야 하며 노조건설을 위해서는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이때 여성노동자들 중에서 단연 눈에 띈 사람은 학습능력이 뛰어나고 언변이 탁월한 21살의 한순임이었다. 한순임은 장현자, 옥판점, 김복순 등과 함께 회사나 관리자로부터 부당하게 당해 온 사실들을 중심으로 1) 폭행 사원을 처벌하라 2) 중식 차별 문제 해결하라 3) 기숙사 시설 개선하라 4) 강제 잔업 철폐하라 5) 취업규칙 내걸어라 6) 임금인상 60% 지급하라 7) 이 문제들은 사장이 직접 해결하라는 내용의 호소문을 작성했다. 이들은 1974년 2월26일을 디데이로 잡았다. 호소문에는 한순임이 여자들이 고무줄놀이 할 때 많이 부르는 ‘무찌르자 오랑캐’ 노래에 “찾읍시다! 인권을, 피의 대가를, 불굴의 의지를 꺾지 않겠다! 싸우자! 싸워! 승리를 위해 해결이 될 때까지 투쟁하겠다!”는 가사를 바꿔 붙인 내용도 들어갔다. 이들은 호소문을 복사해 기숙사와 현장에 은밀하게 배포했다. 늘 노동자들의 동태를 감시하던 사감들도, 그 당시로서는 최첨단인 시시티브이(CCTV)를 통해 현장을 감시하던 회사도 어린 여공들이 이런 일을 꾸미는 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노조준비위원장에 공장장, 지부장에 경비원 2월26일 아침 8시 반 영하 15도의 혹한 속에 여성노동자들은 농성을 시작했다. 농성이 시작되자 회사도 놀랐지만, 한번도 데모나 농성이란 걸 해보지 않았던 순종적이었던 어린 여성노동자들이 농성의 주역이 되어 처절하게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는 자신들의 모습에 놀라워했다. 서울의 언론사에 농성 사실을 알리러 갔다가 노동청 간부들과 함께 회사로 돌아온 장현자는 농성에 합류하여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온몸이 떨리면서 오싹해지더니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고 한다. 노동자들은 점심도 저녁도 거른 채 ‘사장 나오라’를 외치며 농성을 계속했다. 밤 11시가 되어서야 섬유노조의 개입으로 회사 쪽과 한순임 등 노동자 대표 사이에 노조 결성, 강제잔업 금지, 작업장 환경과 기숙사 시설 개선, 폭행 사원의 사과, 오늘의 일에 대한 처벌 금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합의서가 작성되었다. 어린 여성노동자들이 어쩌면 저렇게 당차게 농성을 진행할 수 있을까 놀라웠지만, 그들은 아직 참 순진했다. 그들은 노조를 만드는 것도 회사와 협의해야 하는 줄 알았다. 이 농성의 결과 노조창립준비위원회가 만들어졌는데, 위원장은 공장장이었다! 약 일주일 후인 3월5일 오후 5시30분 노조창립준비위원회의 주최로 노동조합 창립총회가 회사식당에서 열렸다. 사회는 반도상사 노조의 상급노조가 될 섬유노조 쟁의부장이 맡았다. 그는 회사의 각본대로 임원은 전형위원이 선출하자고 했고, 전형위원들은 엉뚱한 경비원을 지부장으로 한 임원명단을 발표했다. 2월26일의 농성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한 사람으로는 한순임 한 명만이 부지부장 명단에 들어 있었다. 이 명단이 발표되자 총회장은 난리가 났다. 자신들이 우롱당했다는 사실에 극도로 분노한 여성노동자들은 “쟁의부장 죽여라, 저놈이 우리를 속였다!”며 아우성을 쳤다. 억울함과 분에 못 이긴 여성노동자 3명이 거품을 물고 쓰러져 구급차에 실려 갔고, 창립총회는 자연히 2차 농성으로 이어졌다. 마이크를 잡은 한순임은 “이제부터는 더이상 우롱당하지 말고 우리들이 힘을 모아 더는 속지 말자”고 호소했다. 노동자들이 구호를 외치며 시멘트 바닥에서 꼬박 밤을 지새우고 난 새벽 5시, 저벅저벅하는 군홧발 소리가 다가왔다. 수백의 전경이 몽둥이를 들고 다가왔다. 노동자들은 처음 보는 전투경찰 모습에 비명을 지르면서도 스크럼을 짰지만, 전경들은 팔과 팔 사이에 몽둥이를 넣어 한 명씩 떼어냈다. 한순임을 비롯한 열성 노동자 21명을 연행했다. 자신들의 대표를 빼앗긴 노동자들은 해산하지 않았다. 농성장에 남은 노동자들은 서로를 눈물로 위로하며 대표들이 돌아와야만 일을 할 수 있다며 자연스럽게 파업에 돌입했다. 회사가 경찰에 잡혀간 노동자들의 석방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고, 노동자들은 3일 만에 풀려났다. 이들이 풀려나 회사로 들어왔을 때, 노동자들은 여전히 운동장에 모여 노래를 부르며 농성을 하고 있었다. 풀려난 이들과 운동장에 있던 이들이 한데 엉켜 엉엉 울면서 단결만이 살길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학교를 못 다닌 노동자들은 이렇게 속으며 배웠고, 얻어터지며 배웠고, 울면서 배웠다. 마침내 4월15일 노조결성대회가 속개되었고, 한순임을 지부장으로 하는 ‘섬유노동조합 반도상사지부’가 결성되었다. 노조가 결성되기 전, 경찰서에서 풀려난 한순임, 장현자 등이 현장에 복귀하여 일하고 있을 때, 회사관리자가 경비실에 친구가 면회 왔다고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다. 평소에 면회는 거의 허용되지 않는데 웬일일까 하고 나가 보니 함께 호소문을 만들었던 옥판점과 김복순도 불려나와 있었다. 공단 입구에는 까만 승용차 2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그 무시무시한 남산, 즉 중앙정보부에서 온 것이다. 정보부에 끌려간 이들은 “네년들 머리로 호소문을 직접 썼을 리가 없다”며 “산업선교회의 조화순 목사와 실무자 최영희 등이 간첩이고 빨갱이이고 지금까지 너희들은 빨갱이들의 지시에 놀아났다”며 마구 때렸다. 자신들이 맞는 것도 힘들었지만, 옆방에서 동료들이 매 맞는 소리, 비명 소리는 더 견디기 힘들었다. 주동자로 몰린 한순임이 제일 많이 얻어터져 온몸에 시커멓게 멍이 들었다고 한다. 당시 정보부가 조화순 목사나 최영희를 건드리지 않은 것이나, 노동조합 결성 자체를 막지 않은 것을 보면 정보부의 계획은 산업선교회와 반도상사 노동조합의 분리에 있었다. 한순임은 풀려난 뒤 처음 최영희와 자신을 연결해준 친구를 찾아가 “은인을 배신해야 할지, 조국을 배반해야 할지 미치겠다”며 펑펑 울었다고 한다. 훗날 “포용정책”이었다고 주장한 한순임 중앙정보부는 한순임이 주도한 2월26일이나 3월5일의 농성에서 어린 여성노동자들이 보여준 치밀함과 단호함을 보고, 그 배후에 산업선교회 등 불순세력이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중앙정보부는 먼저 한순임 등 반도상사 노조의 지도부를 최영희나 산업선교회와 떼어내고, 일정한 냉각기를 거쳐 체제 내로 포섭해 들이는 방침을 세웠다. 회사는 회사대로 노조간부들이 산업선교회에 가면 노조와는 아예 교섭을 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한순임은 노조 상무집행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산업선교회에 가지 말자고 말했다. 장현자에 따르면 간부들도 회사와 살벌하게 대치하는 것이 마음속으로 많이 힘들었기 때문에 지부장의 이야기에 협력하는 마음과 회사와의 관계를 원만히 하기 위해 산업선교회에 가지 않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흥미있는 것은 노조 결성 즈음에 중앙정보부가 은밀하게 취한 공작이다. 중앙정보부가 한순임 등을 잡아다가 협박한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정보부가 채찍을 휘두르는 것 말고 어떤 당근으로 한순임 같은 명석하고 자존심 강한 노동운동가를 유혹했는지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당시 혜성과 같이 등장했던 노동자 출신의 지도자 권용목이 나중에 뉴라이트로 전락했다가 쓸쓸하게 세상을 뜬 것처럼, 한순임은 동일방직 똥물사건 당시 민주노조의 파괴에 깊이 개입했고, 산업선교회를 비판하는 강연과 교육 기고활동에 앞장섰다. 이 문제는 노동운동 내부의 노노갈등, 산업선교회가 한국노동운동에 남긴 빛과 그림자 등과도 관련된 문제이지만, 중앙정보부의 차원 높은 공작의 장기적인 효과가 미친 영향에 대한 고찰을 포함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 한순임이 중앙정보부에서 풀려난 직후인 1974년 3월25일자 ‘노사분규 시정방안 보고서 제출 의견’이란 중앙정보부 문건을 보면 중앙정보부는 반도상사로부터 대표이사 구자승을 비롯하여 구자경,구자두,황인일,김석구,허준구,구철회,구정회 이사 전원의 인감 날인이 첨부된 노동자들의 요구사항에 대한 회사의 구체적인 이행계획 및 시정방안을 받아냈다. 구자경은 럭키그룹 창업자인 구인회의 장남으로 1969년 구인회의 사망 이후 럭키금성그룹의 총수가 되었고, 구철회와 구정회는 구인회의 동생이고, 구자두는 구자경의 동생이고, 허준구는 사돈으로 중앙정보부는 럭키금성그룹의 실세인 반도상사 이사진 전원의 도장을 받아내 노동자들의 요구를 들어주도록 압박한 것이다. 처음 9개항이던 개선사항의 내용은 5월14일, 5월28일의 보고서를 거치면서 작업장 시설,기숙사, 식당시설,전문건강관리자 배치,재해보상금 지급,동사자와 병자 치료, 퇴직금 지급,징계해고자 수당 지급,도급근로자의 임금 보장,연소자친권자 동의서 접수 및 교육시설,연차유급휴가 실시,야간작업 및 잔업,법정휴식시간 제공,유급휴일 실시,신입자 건강진단 실시,관계법규 고시 등 16개항으로 늘어났다. 중앙정보부는 이들 각각에 대해 개선 내용과 완료예정 월일,진도에 대한 세부설명을 요구했고 이를 일일이 부장에게 보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조가 출범한 뒤 회사는 부산에서 올라온 비노조원들로 ‘봉선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노조의 활동을 방해해왔고, 이는 한순임 집행부의 큰 골칫거리였다. 중앙정보부 경기지부는 반도상사 쪽에 압력을 가해 ‘봉선회 활동을 일절 지원하지 말 것’, ‘노조 상근인원을 증가시킬 것’, ‘노조의 사무실과 비품을 지원할 것’, ‘노조활동에 지장을 초래할 우려가 있는 기숙사 인원감축을 보류할 것’ 등을 지시하고, 이를 노사협의회를 통해 발표하도록 강제했다. 이와 같은 점검은 1974년 11월까지 계속되었다. 산업선교회가 노동자들에게 제시한 방향은 ‘옳은 노선’이었을지는 모르나, 회사와 한 치의 타협도 없는 극한 대결로 치닫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노동현장에서 산업선교회를 고립시켜 체제에 포섭되지 않는 노동조합을 고사시키기 위해 중앙정보부는 채찍만이 아니라 당근도 내줄 줄 알았다. 중앙정보부가 한순임을 탄압하거나 돈으로 매수하려 했다면 한순임은 이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순임 체제의 출범을 용인하고 한순임 집행부의 주요 요구사항을 재벌기업에 압력을 가해 보이지 않게 성사시켜주는 방식으로 중앙정보부는 산업선교회와 일정한 선을 긋는 것이 노동자들에게 편하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을 주입시켰다. 한순임은 국정원 과거사위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산업선교회에 대해서 자주성을 추구했고 회사나 섬유노조를 적으로만 돌리지 않는 ‘포용정책’을 적극적으로 썼다고 주장했다. 약자가 쓴 포용정책의 결과는 참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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