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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1대3 ‘왕따 아빠’…“차라리 집을 나가자”

등록 2013-01-11 15:29수정 2013-01-12 11:15

[토요판] 가족 / 왕따 남편
입맛이 쓰다.

일요일, 임병만(가명·48)씨가 홀로 식탁에 앉아 늦은 아침 겸 점심 식사를 하고 있다. 혀끝에 닿는 밥알이 까끌까끌하다. 물에 만 밥을 꾸역꾸역 입으로 밀어넣고 있자니 신세가 처량하다. 가족들은 이제 ‘같이 밥 먹자’고 임씨를 깨우지도 않는다. “당신이 언제 일어날 줄 알고 기다려. 당신이야 늘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밥 먹고 싶을 때 밥 먹고 하는 사람이잖아. 냉장고에 반찬 다 있으니까 이젠 당신이 알아서 좀 챙겨 먹어!” 아내가 ‘두번 밥상은 안 차리겠다’고 선언한 이후 임씨의 나홀로 밥상은 일상이 됐다. 어쩌다 때가 맞아 네 식구가 한 상에 둘러앉았을 때도 숟가락, 젓가락 부딪치는 소리뿐이다.

이미 자기들끼리 식사를 마친 아내와 아이들은 거실에서 티브이(TV)를 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임씨도 식탁을 대충 정리하고 소파 한켠에 앉는다. 무슨 비밀모의라도 했던 건가. 임씨가 들어서자 가족들은 약속이나 한 듯, 대화를 중단해버린다. 어색한 침묵. 거실에선 티브이만 혼자 떠든다.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임씨가 밖에서 들은 얘기를 화제로 아들에게 말을 붙여본다. “됐어요. 아빠가 뭘 안다고 그래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들의 냉랭한 반응에 머쓱해져 할 말이 없다. ‘괘씸한 녀석, 아빠 알기를 아주 우습게 알아.’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제 엄마가 만날 아빠에 대해 안 좋은 얘기만 하니까 아이들이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어 아내까지 괘씸하다. 임씨는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티브이만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이내 방으로 들어가 누워버린다. 집에 있으면 편해야 하는데 이건 뭐, 집에 있는 게 더 가시방석이다. ‘다음주엔 골프 약속이라도 잡아야겠다’고 생각한다. 밖에선 끊겼던 대화가 다시 시작된 듯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밖에 나가면 유능한 사업가고, 호탕한 사나이란 소리도 듣지만 집에서 나는 그냥 왕따일 뿐이다. 돈 벌어오는 기계일 뿐이다.” 착잡해진다.

나 잠든 새 가족들은 밥 먹고
나 밥 먹는 새 가족들은 대화중
집에선 그저 돈버는 기계일 뿐
괘씸하다, 차라리 나가자!

남편은 아이들 잠들 때 들어와
아이들 눈뜨기 전 출근했다
쉬는 날엔 자거나 티브이만 봤다
신경 끊었다, 나가든 말든!
 

‘이제 와서 웬 아빠 노릇?’ 아내 유희정(가명·46)씨는 아들에게 말을 붙였다가 무안만 당한 남편이 “전혀” 측은하지 않다. ‘다 자기가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란 생각에 고소하기까지 하다.

유씨는 그동안 “자웅동체처럼” 살아왔다. “가족들 먹여 살리느라 바쁘다”며 남편은 밖으로만 나돌았다. 바쁜 건 평일-주말을 따로 가리지 않았다. 집에는 두 아이와 유씨만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남편은 애들 잘 때 귀가했다가, 애들이 눈을 뜰 때면 이미 출근하고 집에 없기 일쑤였다. 어쩌다 쉬는 날에는 하루 종일 자거나 티브이만 봤다. “말이 좋아 가장이지 까다로운 하숙생하고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피곤한 모습으로 잠시 쉬고 있는 아빠. 정용일 기자
피곤한 모습으로 잠시 쉬고 있는 아빠. 정용일 기자
남편은 돈 벌어오는 일을 제외하면, 애들 문제나 집안 문제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남편에게 어떤 문제를 상의하려고 하면 늘 “당신이 알아서 잘하잖아. 나는 사업 신경쓰는 것도 힘들어”라고 얘기한다. 애들 진학 문제부터 이사 결정까지, 전부 유씨 혼자 고민하고 결정했다. 심지어 애들 어린 시절에도 가족이 다 함께 놀이공원에 가 본 게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주로 유씨 혼자 애들을 데리고 놀러 다녔다. 그러다 보니 아빠와 함께 찍은 사진이 별로 없다. 어쩌다가 큰 인심이라도 쓰듯 남편이 나들이에 나선 날에도 남편은 그냥 멀뚱멀뚱 따라다니기만 했다. “애를 무등 태우고 잘 놀아주는 남편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남편은 애들하고도 거의 대화를 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티브이 좀 뒤로 가서 봐라’ 등 이런 거 하지 마라, 저런 거 하지 마라 ‘지적질’뿐이니 애들도 아빠를 가깝게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아이들 곁에 채워지지 못한 아빠의 빈자리는 유씨를 늘 가슴 아프게 한다.

“당신한테는 가족이 뭐냐”며 처음엔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남편은 매번 “내가 누굴 위해 이렇게 뼈가 빠지게 일을 하는데 그러냐”고 화를 냈다. 유씨가 바라는 건 “그냥 일주일에 몇번은 저녁에 좀 일찍 들어와서 가족끼리 함께 밥 먹고 오손도손 얘기나 나누자는 것뿐”이었다. 남편에겐 이 정도 일도 큰 마음을 먹어야 하는 일인가. 유씨는 남편을 원망도 하고, 보약까지 지어 먹이며 정성을 다하기도 했다. ‘내가 잘하면 남편도 달라지겠지…, 사업이 안정되면 좀 나아지겠지…, 내년엔 좀 좋아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이젠 그런 기대는 아예 접었다. “남편이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한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솔직히, 매일 일만 하느라 바쁘겠나. 친구 만나 술도 마시고 그러겠지. ‘결국, 남편에게 가족은 우선순위 밖이란 얘기가 아닐까?’ 유씨는 생각한다. 하긴, 남편은 이따금씩 일찍 들어오는 날이면 자기가 먹고 싶은 메뉴를 불러주며 상을 차리라고 요구하는 사람이다. 부부 관계도 자기가 원할 때만 한다. ‘어쩌면 이 남자에게 가족은 자기 인생에 필요한 부품 정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내 반쪽은 요구하면서 자기 반쪽은 내어주지 않는 남편. 이제 유씨는 남편이 들어오면 들어오나 보다, 나가면 나가나 보다 하며 신경을 끊고 산다. ‘언제 들어올 거야?’ 전화도 걸지 않는다. 밖에서 뭘 하고 다니는지, 누굴 만나고 다니는지도 관심 없다. ‘괜히 사고 쳐서 아이들과 내가 사는 울타리를 부수지나 말아줬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이정애 기자 hongby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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