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가족
‘좋은 엄마’의 눈물
‘좋은 엄마’의 눈물
‘어머니’ 하면 ‘헌신’이란 단어부터 떠오릅니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헌신은 때로 자식들의 숨통을 조이기도 합니다. 자식들로부터 이 헌신을 부정당할 때 어머니는 큰 배신감을 느끼게 되고요. 김미영 서울가정문제상담소 소장은 그래서 “사랑에는 균형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엄마라고 늘 ‘아낌없이 주는 나무’일 수만은 없다는 거예요. 그는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선, 누구의 엄마라는 이름보다 먼저 자신의 욕구를 들여다봐야 한다”고 얘기했습니다.
“엄마 때문에 내가 진짜 못 살겠어! 제발 내 멋대로 하게 좀 놔두란 말야!”
몇달 전, 큰딸의 ‘폭탄 발언’에 이혜숙(가명·55)씨의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사춘기 때도 크게 속을 썩인 일이 없던 큰딸의 때아닌 반항은 이씨에겐 당혹스러움 그 자체였다. 대학교 4학년, 곧 졸업을 앞둔 큰딸을 앉혀놓고 여기저기서 얻어온 취업 정보를 얘기하던 참이었다. 못마땅하다는 듯, 일자 입을 한 채로 한참을 듣고만 있던 아이가 전에 없이 짜증을 냈다. “내가 엄마 꼭두각시야?” 이게 무슨 소리인가. 큰딸은 “엄마가 자꾸 다 해주려고 하니까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청년 실업률이 하늘을 찌른대지, 딸내미는 취업을 앞두고 이래저래 고민이지, 그런데 엄마가 가만히 보고 있으란 말이야?’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한번 터지더니 큰딸은 불만을 봇물처럼 쏟아냈다. “요새 대학생들 중에 나처럼 밤 10시 통금시간을 지켜야 하는 애가 있는 줄 알아?” “제발 좀 늦게 들어왔다고 동네방네 친구들에게 전화 좀 하지 마. 창피해 죽겠어” “얘는 되고 쟤는 안 된다는 식으로 남자친구들을 허락받고 사귀라고 하는 것도 싫어” “이제 내 옷은 내가 직접 사 입을래” 등등. 큰딸의 말들이 가시가 되어 콕콕 이씨의 가슴팍에 박혔다. “물론 의욕이 넘치다 보니 지나쳤을 수도 있다”는 걸 이씨도 인정한다. 그렇지만 그게 어디 나 좋자고 한 일인가. 자식들 잘되라고 한 소리지? 큰딸은 그마저도 부정하려 들었다. “엄마는 우리를 위해서 한 일이라지만, 결국은 엄마가 원하는 대로 우리를 조정하려 했을 뿐이야”라며. 둘째 딸내미마저 맞장구를 쳤다. “솔직히 우리 엄마가 좀 극성이라 힘든 건 사실이지.”
엄마없이 자란 유년의 기억
“나중에 내 자식들은…”
다짐 속에 헌신하며 살아왔다 어느날 비수처럼 꽂힌 한마디
“내가 엄마 꼭두각시야?”
황망하게 주변을 돌아봤을 땐
자신의 삶을 즐기고 있는 남편과
껍데기만 남은 내가 보였다 이씨는 밥을 먹다가도, 자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이 일만 떠올리면 눈물이 쏟아진다. ‘내가 너희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니?’ 분이 누그러지지 않아 아이들한테 자꾸 서먹한 마음만 든다. 이씨의 어린 시절은 ‘결핍’의 연속이었다.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의 빈자리는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티가 났다. 엄마가 예쁘게 땋아준 머리를 한 친구들이 늘 부러웠다. 어린 시절, 이씨는 늘 깡총한 단발머리였다. 동그란 얼굴에 어울려서가 아니라, 그냥 한번 빗으로 쓱쓱 빗으면 되는, 관리가 쉬운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학교 끝나고 집에 가면 엄마가 기다려주는 친구의 집은 늘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 시절엔 다들 비슷했지만, 집안 형편도 그닥 넉넉하지 않았다. “뭐든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없었고 늘 허기진 기분이었다. 책 한권을 사려고 해도 늘 아등바등해야 했다.” 이씨는 “나중에 엄마가 되면 나는 내 아이들이 부족한 것 하나 없이 행복하게 살게 해줄 것”이라고 다짐하곤 했다. 그래서 소원은 늘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었다. 완벽한 현모양처가 되기 위해 이씨는 “남들보다 배로 열심히 살았다.” 든든한 백이랄 게 없으니 아이들에게 안락한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진짜 코피 터지게 살았다.” 덕분에 회사에선 능력을 인정받았고, 동기들보다 승진도 빠른 편이었다. “일을 좋아하고 일에서 느끼는 만족감도 컸지만, 그만큼 남에게 아이들을 맡겨 놓고 일을 한다는 데서 오는 죄책감도 커져갔다.” 동료들과 어울리거나 친구를 만나는 시간도 아까워 사생활이란 건 아예 생각지도 않고 살았다. 퇴근하고 들어오면 곧장 집으로 돌아왔고, 아이들이 잠들 때까지 늘 함께 놀아줬다. 아이들을 옆에 앉혀놓고 직접 숙제며 공부를 챙겼고, 아이들이 잠들면 영재교육 등 각종 교육 서적들을 챙겨 읽었다. 그뿐인가. 사 먹이는 음식이 못 미더워 과자며 빵이며, 간식까지 일일이 만들어 챙겨 먹였다. “결혼하면 어차피 할 일, 미리 고생해봐서 좋을 게 뭐가 있냐”며 딸들에겐 방 청소나 설거지 한번 안 시켰다. 이씨의 옷은 재래시장에 가서 고르고 골라서 사면서도, 아이들 옷은 기죽지 않게 백화점에서 좋은 것만 사 입혔다. 큰딸이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땐 여러 사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회사에 사표를 냈다. “아쉬웠지만 애들을 위해선 꼭 필요한 결정”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차로 아이들 등하교를 시켜줬고, 아이들이 학교 간 시간에도 대학 입학설명회 등을 찾아다니며 정보 수집에 바빴다. 덕분에 두 딸 모두 무난히 소위 ‘스카이’(SKY)라고 부르는 명문대에 입학시킬 수 있었다. 똑똑하고 예쁘게 자란 딸들은 이씨 삶의 자랑이고 보람이었다. 그 딸이 이제 감사하기는커녕 “엄마 때문에 숨이 막힌다”고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가족에게 헌신한 인생 전부를 부정당한 기분”을 남편도 헤아려주지 않는다. 아내가 아이들에게 올인하는 동안 바깥일에만 몰두했던 남편은 은퇴 뒤에도 여전히 밖으로만 나돈다. 남편이 은퇴하면 팔짱 끼고 해외여행을 다니겠다던 계획은 그저 이씨만의 계획이었던 듯싶다. 남편은 동호회다, 동창회다 각종 모임에서 ‘회장님’이란 감투를 쓰며 “즐거운 제2의 삶” 운운하고 있다. 가끔씩 모임에서 만난 여자들에게서 회장님을 찾는 문자가 오는 걸 이씨도 모르지 않는다. 젊어서야 일하느라 어쩔 수 없다곤 해도, 은퇴 뒤에도 집안일은 뒷전인 남편을 보면 울컥해진다. 이씨가 가끔씩 싫은 기색이라도 보이면 남편은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 뼈 빠지게 일만 했는데 이제 나도 내 맘대로 좀 살고 싶다”고만 했다. 이씨는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난다. “제2의 인생을 즐기겠다는 남편,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딸내미. 이제 이 집안에 내 자리는 없는 것 같다. 돌아보니 고민을 호소할 친구 하나 없다. 나는 무얼 위해 살았나. 빈껍데기만 남은 것 같다.” 이정애 기자 hongbyul@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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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십니까 노종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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