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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가족
남편에게 꿈을 양보한 아내
남편에게 꿈을 양보한 아내
통계청이 최근 3만7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사회 조사 결과를 보니, 부부 관계에 대한 남녀간의 만족도가 다르더군요. 남편 10명 중 7명(71.8%)은 부인에게 만족한다고 응답했지만, “내 남편에게 만족한다”고 답변한 아내는 10명 중 6명(59.2%)뿐이라는 거예요. 적어도 10명의 남편 중 1명꼴로 아내 속을 모르고 있단 얘기지요. 이런 차이는 왜 벌어지는 걸까요?
“여보, 나 중국으로 발령났어.”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남편의 목소리는 무척 들떠 있었다. 1년여에 걸친 파견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지 채 한달도 안 된 시점이었다. 그런데 또다시 국외 발령? 남편은 이전에 파견 갔던 지역에 다시 4년 주재원으로 선발된 것이었다. 갑작스레 상부에서 의사를 타진해, 내 의견을 물어볼 틈도 없이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아니, 의견을 물었다 해도 어쩌면 결론은 똑같았을지도. 경쟁이 치열한 주재원 자리는 회사원의 로망이 아니던가. 그야말로 ‘넝쿨째 굴러온 기회’였다. 결혼 직후부터 몇년간 회사 적응 때문에 힘들어하던 남편을 보아온 나였다. 과연 반대를 할 수 있었을까? 집으로 돌아와 기뻐하는 남편 앞에서 차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럼, 나는?’
결국 남편은 혼자 떠났다. 당시 나는 퇴사를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몇년간 준비해 뒤늦게 얻은 직장이었기에, 그리고 첫아이 육아 때문에 적응이 늦었던 직장이었기에 그만둘 수 없었다. 입사 동기들과의 업무 경력 격차도 계속 벌어지고 있어 더 초조했다. 그러던 차에 둘째 아이 임신 사실을 알게 됐다. 지금 생각하면 미안하지만, 당시 둘째의 임신은 나에게 축복이라기보다는 충격이었다. 며칠 밤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누군가는 말했다. 만약 둘째를 낳는다면 결국 회사를 그만두게 된다고. 남편이 한국에 없었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 도움을 줄 만한 이도 없었다. 친정어머니는 건강이 좋지 않았고, 시어머니는 본인의 친정 부모를 부양하고 계셨다. 그러나 나는 아이를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임신한 몸으로 혼자 큰아이를 키우며 일을 계속했다. 남편과 매일 전화 통화를 했다. 남편은 자신감이 넘쳤다. 일에 대한 자부심도 커져가는 듯했다. 그러나 하루하루 홀로 육아에 허덕이는 나의 어깨 위엔 피로만 커져갔다.
둘째 출산 후 3개월의 출산휴가와 1년의 육아휴직을 받았다. 둘째 아기가 4개월에 접어들 무렵 나는 드디어 중국으로 왔다. 무려 2년 만의 재회였다. 함께 살자 가장 큰 변화를 보인 것은 큰아이였다. 예전에도 한달에 한번씩 아빠를 보기는 했지만, 돌 지난 뒤부터 아빠와 2년간 떨어져 있었던 큰아이였다. 그래서인지 남편과의 관계에서 불안감을 보이는 듯했다. 지나칠 정도로 아빠에게 집착을 하며, 단 한순간도 아빠와 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화장실까지 따라가 볼일 보는 아빠 옆에 꼭 붙어 앉아 있었다. 반년여가 지나며 아이는 안정을 찾아갔다. 아빠와의 유대관계도 공고해져갔다. 불안감도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육아휴직이 끝나 한국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올수록 나의 불안감은 커져갔다. 아이와 아빠가 함께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볼 때 행복하면서도 슬펐다. 회사에 매달려보기로 했다. 회사에서는 인력난과 형평성을 이유로 6개월의 말미를 주었다. 그러나 6개월이 늘어나더라도 남편과 아이들이 또다시 떨어져 있어야 하는 시간은 1년8개월이었다. 큰아이의 입장에서는 학교 입학 전 유년의 절반을 아빠와 떨어져 지내야 하는 셈이 되었다. 또 하나. 한국 돌아간 뒤의 상황도 무척 두려웠다. 혼자 2살, 5살의 어린 두 아이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해낼 자신이 없었다. 당시 시어머니께서는 치매 진단을 받은 당신의 친정아버지를 돌보고 계셨다. 뿐만 아니라 올해 초 결혼한 시누이가 임신을 하면 그 아이들을 키워줘야 하기에 나에게 도움을 주실 수 없다고 못박아 놓으신 상황이었다. (실제로 시누이는 얼마 전에 임신을 했다.) 더군다나 나의 연봉은 남편에 비해 꽤 낮았다. 가계 사정을 고려할 때 남편에게 사직서를 내라고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내가 사표를 냈다.
중국 발령을 선택한 남편
어린 두 아이는 아빠가 필요했다
그럼, 나는? 가족이 함께 떠나온 지 1년반
그사이 전업주부가 됐다
후회는 없지만 불안은 깊어간다
한국 돌아가면 서른일곱살
난 다시 직장을 구할 수 있을까 가족이 함께 산 지 이제 1년6개월. 가족 간의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공고해졌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행복한 시간도 늘었다. 그러나 나의 마음 한편에 자리잡은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이제 돌아갈 곳이 없어진 건가. 다시 출구를 찾기 위해 또 얼마나 먼 길을 가야 할까.’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한 결정이었기에 후회는 말자고 수없이 다짐했다. 살면서 내가 나 스스로에게 이렇게 수많은 격려를 보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우선 중국어 공부에 더 매진했다. 중국에 오면서부터 배웠던 중국어지만, 사표를 낸 뒤 더욱 열심히 학원을 다녔다. 실력은 늘었지만 불안은 줄지 않았다. 매일 한국에서 쏟아지는 취업난 뉴스와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30대 후반의 무게가 나를 눌렀다.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는 그해, 나는 37살이다. 타국에서의 생활은 외로웠다. 외국이기에 한인 공동체 규모는 크지 않다. 소문은 그야말로 날개를 단다. 누구에게도 쉽게 속내를 드러내기 힘들었다. 사람을 사귈 시간도 넉넉지 않았다. 여기선 함께 밥 먹고 차를 마시며, 골프를 다니거나 쇼핑을 다니는 것 등이 친분관계 유지의 정석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아직 어린 탓에 내게 주어지는 여유 시간은 그저 한 줌. 중국어 학원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집안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오후 아이들이 유치원과 놀이방에서 돌아온다. 주변에는 친지도, 오래된 친구도 없었다. 긴밀하게 소통을 하는 이는 그저 남편뿐이었다. 모든 생활의 중심에 남편과 아이들이 놓였다. 남편에 대한 나의 정서적 의지도가 이전에 비해 훨씬 높아졌다. 물론 남편 역시 퇴근 뒤 대부분의 시간을 가정에 할애했다. 그러나 남편이 늦게 들어오는 날이 잦을 때는 심한 우울함에 시달리기도 했다. 부부관계의 균형추가 남편 쪽으로 기운 듯했다. 얼마 전엔 내가 “이제 나에겐 사회생활은 아예 없다”고 한탄하자 남편은 “다른 전업주부도 다 그래. 당신이라고 특별할 건 없어”라고 말했다. 그저 나의 답답함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한 말에 대한 남편의 퉁명스러운 반응. 남편은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한다”고는 했지만, 왠지 무시당한 느낌에 오래도록 서운한 감정이 남았다. 나는 한국에 돌아가면 당연히 다시 직업을 찾을 생각을 하고 있다. 한번 끊긴 길을 다시 잇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날 나의 노력과 꿈을 그대로 포기하기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혹시, 혹시라도 만에 하나 귀국하고 몇 년 뒤 남편이 다시 국외발령이 나면 어쩌지? 그때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꿈을 유보한 아내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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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돌아가면 서른일곱살
난 다시 직장을 구할 수 있을까 가족이 함께 산 지 이제 1년6개월. 가족 간의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공고해졌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행복한 시간도 늘었다. 그러나 나의 마음 한편에 자리잡은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이제 돌아갈 곳이 없어진 건가. 다시 출구를 찾기 위해 또 얼마나 먼 길을 가야 할까.’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한 결정이었기에 후회는 말자고 수없이 다짐했다. 살면서 내가 나 스스로에게 이렇게 수많은 격려를 보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우선 중국어 공부에 더 매진했다. 중국에 오면서부터 배웠던 중국어지만, 사표를 낸 뒤 더욱 열심히 학원을 다녔다. 실력은 늘었지만 불안은 줄지 않았다. 매일 한국에서 쏟아지는 취업난 뉴스와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30대 후반의 무게가 나를 눌렀다.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는 그해, 나는 37살이다. 타국에서의 생활은 외로웠다. 외국이기에 한인 공동체 규모는 크지 않다. 소문은 그야말로 날개를 단다. 누구에게도 쉽게 속내를 드러내기 힘들었다. 사람을 사귈 시간도 넉넉지 않았다. 여기선 함께 밥 먹고 차를 마시며, 골프를 다니거나 쇼핑을 다니는 것 등이 친분관계 유지의 정석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아직 어린 탓에 내게 주어지는 여유 시간은 그저 한 줌. 중국어 학원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집안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오후 아이들이 유치원과 놀이방에서 돌아온다. 주변에는 친지도, 오래된 친구도 없었다. 긴밀하게 소통을 하는 이는 그저 남편뿐이었다. 모든 생활의 중심에 남편과 아이들이 놓였다. 남편에 대한 나의 정서적 의지도가 이전에 비해 훨씬 높아졌다. 물론 남편 역시 퇴근 뒤 대부분의 시간을 가정에 할애했다. 그러나 남편이 늦게 들어오는 날이 잦을 때는 심한 우울함에 시달리기도 했다. 부부관계의 균형추가 남편 쪽으로 기운 듯했다. 얼마 전엔 내가 “이제 나에겐 사회생활은 아예 없다”고 한탄하자 남편은 “다른 전업주부도 다 그래. 당신이라고 특별할 건 없어”라고 말했다. 그저 나의 답답함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한 말에 대한 남편의 퉁명스러운 반응. 남편은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한다”고는 했지만, 왠지 무시당한 느낌에 오래도록 서운한 감정이 남았다. 나는 한국에 돌아가면 당연히 다시 직업을 찾을 생각을 하고 있다. 한번 끊긴 길을 다시 잇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날 나의 노력과 꿈을 그대로 포기하기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혹시, 혹시라도 만에 하나 귀국하고 몇 년 뒤 남편이 다시 국외발령이 나면 어쩌지? 그때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꿈을 유보한 아내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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