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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내 탓이오

등록 2012-12-21 20:35

이진순  미국 올드도미니언대 교수
이진순 미국 올드도미니언대 교수
[토요판] 엄마의 콤플렉스
남들은 가족이 외출할 때 엄마 때문에 늦어진다고들 하는데 우리 집에선 주로 딸아이가 애를 먹인다. 거울 앞에서 머리핀을 이걸 꽂았다 저걸 꽂았다,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밖이 추우니 겨울 내의를 입어야 한다고 채근해도 모르는 척, 목도리를 두르라고 해도 못 들은 척, 도무지 제 방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외투까지 다 껴입고 현관 앞에서 종종거리다 부아가 나서 아이 방으로 뛰어들어가 보면, 아이는 제 손바닥만한 지갑에 무슨 대단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립글로스와 물티슈, 메모지 같은 물건을 넣었다 뺐다 하고 있다. “뭐 이런 걸로 꾸물대고 있냐”고 서둘러 물건을 쓸어 담으면, 아이는 “엄마가 다 망쳐놨잖아” 발끈하면서 다시 지갑을 털어 하나씩 주워 담는다. 옥신각신 말다툼이 꼬리를 무는 사이 시간은 더 지체되고 집을 나설 때쯤이면 나나 아이나 볼멘 표정이기 일쑤다.

밖에 나가서도 아이와의 신경전은 계속된다. 인파를 헤치고 쉴 새 없이 내가 종종걸음을 치는 동안에도 아이의 정신은 온통 다른 데 쏠려 있다. 지나가는 사람 구경, 반짝이는 트리와 대형 전광판에 넋이 빠져서 잡아끄는 내 손을 놓치기 일쑤다. 겨우 도착한 공원이나 박물관에서도 아이는 “독자행보”를 고집한다. 이것 좀 봐라 하면 저리로 달려가고 저리 갈까 하면 엉뚱한 방향으로 달음박질친다. 이럴 때 남편은 나보다 참을성이 많은 편이다. 그냥 애가 내달리는 대로 놔두자 한다. 크게 심호흡하고 나도 그저 애 하는 양을 지켜보기로 했다. 아이의 관심을 끄는 건 공원 풍경이나 내가 꼭 보여주고 싶었던 박물관의 주요 유물이 아니라 지나다니는 제 또래 아이들, 그 아이들이 들고 있는 솜사탕이나 스티커북이었다. 지붕 빗물받이에 맺힌 고드름, 길바닥 웅덩이의 작은 빙판, 쓰레기통 옆에 쌓인 시커먼 눈덩이 옆에서 아이는 신난다고 깔깔거린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침 일찍 서둘러 멀리 나올 일도 아니었다. 엄마의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볼거리와 즐길 거리는 아이의 눈높이에서 보는 재미난 것과 너무 달랐던 것이다.

내게 중요한 것이 아이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고 아이에게 소중한 것이 내겐 하찮게 보일 수도 있다. 나는 아이에게 새로운 것, 낯선 것을 보여주는 게 유익하리라 믿었지만 아이가 무엇을 왜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같은 눈높이에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못한 게 아닐까. 내가 편안하게 대화할 자세를 가졌더라면 아이도 공연한 심통을 부리진 않았을 텐데. 그랬더라면, 엄마가 관심을 가지는 깨진 기와 조각 따위에 새로운 호기심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생각과 취향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법을 아이에게 가르치기에 나 스스로 부족함을 느낀다. 열정과 기대를 앞세워,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의 바람을 가볍게 여기며 산 건 아닌지 이번 개표 결과를 보며 다시금 뼈아프게 반성한다.

이진순 미국 올드도미니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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