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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배고파~

등록 2012-11-23 20:38

이진순  미국 올드도미니언대 교수
이진순 미국 올드도미니언대 교수
[토요판] 엄마의 콤플렉스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어머니한테 제일 많이 들은 말은 “먹어라”다. 궁핍한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어린 나이에 전쟁을 겪고 원조 밀가루로 수제비를 끓여 먹으며 자란 어머니에게는 그 세대 어른들이 대개 그렇듯 굶주림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경제성장기에 태어나 자란 나는 크게 배를 곯아본 기억이 없는데도 어머니는 뭘 더 먹이지 못해 평생 안달이시다. 병이 나서 입맛이 없을 때도 일단은 꾸역꾸역 뭐든 먹어야 낫는다는 게 어머니의 지론이다. 의학적으로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한다는데도 막무가내. 힘든 일을 겪어 낙심할 때나 큰 좌절을 겪을 때는 평소보다 더 많이 먹어야 한다고 성화를 부리신다. 어머니에겐 밥이 약이요 용기요 의지의 원천인 셈이다.

어머니가 경치 좋은 교외에 살고 계신 덕에, 내 가까운 친구나 직장 동료들과 바람을 쐬고 싶을 때나 만만한 엠티 자리가 필요할 때 그들을 데리고 엄마 집으로 가곤 했다. 한번은 직장 동료들과 퇴근을 하고 어머니 댁으로 가는데, 전화가 왔다. “예, 지금 가고 있어요… 네명이에요. 우리 저녁 먹었어요. 뭐 차리지 마세요.” 실상 우리는 다섯명이었고 급히 출발한 터라 모두 빈속이었다. 의아해하는 동료들에게 “가보면 알아…” 했다. 동료들의 의문은 우리 집에 들어서자마자 풀렸다.

저녁을 먹고 간다고 했는데도 어머니는 가마솥에 닭을 서너 마리나 고아 두고 떡과 고구마까지 잔뜩 올려놓은 밥상을 준비했다. “밥 먹고 왔다니까 이거나 들어 봐.” 그러곤 옆에 지키고 앉았다 그릇이 비기가 무섭게 퍼서 먹이는 통에 우리는 모두 배가 터지기 직전까지 먹어야 했다. 밥을 다 먹고 나서도 삼십분 간격으로 “이제 과일 먹어야지” “약식 있는데…” 하면서 불쑥불쑥 나타나 문을 두드리는 어머니를 보고 후배 하나가 말했다. “언니, 여기 귀곡산장 같아요.” 그날 이후 나는 귀곡산장집 딸이 되었다.

귀곡산장의 저주일까. 한국에 와서 휴대폰을 장만했는데 시차가 안 맞아 뒤척이다가 겨우 잠든 새벽녘, 아이 소리에 화들짝 놀라 깨었다. 내 귓가에 분명히 “배고파…” 하는 딸아이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벌떡 일어나서 딸애 방문을 열어보니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이게 무슨 환청일까, 아이 잠꼬대일까. 잠꼬대라도 하필 배고프다는 말을 했을까. 한달이나 지나서야 그 미스터리가 풀렸다. 휴대폰 배터리가 다 되어갈 때 자동으로 나오는 알람음. “누가 철딱서니없이 이따위 알람음을 만든 거야!” 화가 치밀어 전화기를 부숴버릴 뻔했다.

아이의 “배고프다”는 말보다 세상에 안타깝고 절박한 소리가 또 있을까. 어머니 세대가 겪었던 전후의 궁핍을 벗어나 고속성장을 이뤘다는 나라. 이제는 국민소득 이만불 시대라는데 우리 아이들은 여전히 배고프다. 방학 중에 밥을 굶는 아이가 전국에 백만이 넘는다는데 정부는 지원 예산을 전액 삭감하고 지자체에 책임을 떠넘겼다. 이 잔인한 경제논리가 우리 모두를 허기지게 한다.

이진순 미국 올드도미니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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