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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 찾아서] 북 리종혁, 자존심 버린 채 식량난 토로 / 한완상

등록 2012-09-27 18:44

1995년 6월25일 남한의 수해구호용 쌀을 싣고 간 ‘씨 아펙스호’는 북한 청진항에서 하역할 때 사전 합의와 달리 태극기를 내린 채 인공기만 달고 작업을 해야 했다. 이른바 ‘인공기 사건’에 대해 96년 4월 애틀랜타 남북기독학자회의에서 필자와 만난 리종혁 북한 대표는 ‘내부 소통 잘못’ 때문이었다고 해명했다.
1995년 6월25일 남한의 수해구호용 쌀을 싣고 간 ‘씨 아펙스호’는 북한 청진항에서 하역할 때 사전 합의와 달리 태극기를 내린 채 인공기만 달고 작업을 해야 했다. 이른바 ‘인공기 사건’에 대해 96년 4월 애틀랜타 남북기독학자회의에서 필자와 만난 리종혁 북한 대표는 ‘내부 소통 잘못’ 때문이었다고 해명했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100
1996년 4월17일 나는 청와대의 유종하 외교안보수석에게 전화를 했다. 미국 에모리대학 부설 카터센터에서 열리는 남북기독학자회의에 참석한다는 것과 북쪽 대표인 리종혁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을 만나면 ‘4자회담’에 긍정적으로 나올 수 있도록 설득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유 수석은 북쪽에서 4자회담 제의에 긍정적으로 나오지 않으면 미국이 북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확인시켜 주기를 바랐다. 또 북쪽 인사와 대화 때는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의견임을 밝히라고 주문했다. 전형적인 관료적 자세다.

4월24일 애틀랜타의 하얏트호텔에서 박한식 교수(조지아대)의 주재로 남북 세미나 대표의 첫 상견례가 열렸다. 이번 회의의 주관심사는 나와 리종혁 부위원장의 만남과 소통인 만큼 박 교수는 세심하게 일정을 짜놓았다. 25일 오전 10시 리 부위원장이 먼저 내 방(2215호실)으로 예방했고, 오후 5시30분에는 박 교수의 방에서 또 만났다. 다음날 26일에도 둘은 카터센터에서 방 하나 따로 빌려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우며 한 시간 동안 의견을 나눌 수 있었다.

리 부위원장은 북한에서 보기 드문 학자풍으로, 세계 정세를 두루 꿰뚫고 있는 합리적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부친은 벽초 홍명희와 함께 월북한 당대의 작가 이기영으로, 그의 대표작 <두만강>은 <임꺽정>과 쌍벽을 이루는 민족소설로 북에서 꼽힌다.

그는 첫날 만나기 전에 박 교수를 통해 캐주얼한 옷차림으로 자유롭게 대화하자고 제의해왔다. 나도 좋다고 했다. 내 방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이 자리의 대화 내용을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달할 수 있는지를 먼저 확인하고 싶어했다.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는 지금 북한의 어려운 상황을 솔직하게 알려주고 싶다고 했다. 또 그도 평양으로 돌아가면 김용순 위원장은 물론 김정일 장군에게 보고를 할 것이라며 내게 호소하듯 많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나는 주로 듣기만 했다.

“첫째, 4자회담에 대해 북한 노동당에서 공식적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미국 쪽에서도 아무런 설명도 제의도 없어 이번 기회에 워싱턴의 공식 설명을 듣고 싶다. 둘째, 북한의 식량문제는 너무나 심각해서 남쪽에서 신속한 인도주의적 지원을 해준다면 4자회담도 잘될 것이다. 그런데 그 순서가 중요해서 쌀 지원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 미국이 4자회담의 성격과 의제를 잘 설명해주면 북한도 긍정적으로 대응할 것이다.”

그는 이어 동구권과 소련의 몰락 이후 어려워진 경제상황이 지난해 대홍수까지 겹쳐 더욱 악화일로라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는 수첩을 꺼내어 깨알처럼 적힌 통계자료까지 살피면서 설명했다.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식량배급을 제대로 못해서 실제로는 전체 주민 대부분이 하루 두 끼 먹기도 어렵다는 그의 솔직담백한 토로에 나는 적잖이 놀랐다. 북한식 ‘체면’이나 ‘자존심’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리 위원장은 당장 5~6월이 큰 고비라고 했다. “이달 중으로 타이에서 쌀 30만톤을 사오려고 했는데 남쪽에서 타이에 비료를 지원해주는 조건으로 판매를 막는 바람에 무산됐다. 그렇다고 운송비용이 많이 드는 먼 나라에서 쌀을 사올 만한 여유도 없다. 그렇기에 최선은 가장 가까운 남한에서 직접 지원을 받고, 차선은 이웃 중국과 러시아로부터 철도를 통해 차관 담보 방식으로 10만 내지 20만톤을 받는 것이다.”

한완상 전 부총리
한완상 전 부총리
그는 지난해 봄 대홍수 직후 남쪽에서 15만톤의 쌀을 보냈을 때 어떤 포대에 “실컷 먹고 죽어라”라는 욕설이 적혀 있었다며 우스개처럼 얘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순간 나는 부끄러웠다. 또 지난해 6월25일 남에서 보낸 수해구호용 쌀 운반선이 북한 청진항에서 태극기와 인공기를 모두 달기로 한 사전 약속과 달리 인공기만 달고 하역작업을 하면서 “쌀 주고 뺨 맞았다”는 남쪽의 비난 여론이 일어나게 된 것은 소통 부재 탓이었다고 잘못을 시인했다. 베이징에서 열렸던 남북 쌀회담의 합의사항을 현장 실무진에게 신속히 알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남북 최고지도자의 실제적 접촉라인(또는 핫라인) 문제를 논의하게 되었다. 우선 나는 김정일 장군의 주석직 승계 여부를 물었다. 그는 북한 내부 사정과 연관된 절차와 일정의 문제라면서 그가 김 주석이 지녔던 전권을 이미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 이래 노태우 정권 때까지 있었던 남북 핫라인을 복원할 필요가 있다는 데 공감했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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