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6월2일 노무현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참여정부 출범 100일 내외신 기자회견을 갖고 향후 국정운영의 방향을 밝혔다. 보수언론은 참여정부 출범 직후부터 여러 자극적인 용어를 이용해 정부를 공격하는 보도를 이어갔으며, 이에 노 대통령은 언론과 재계의 정부 길들이기에 굴복하지 않겠다며 주변 참모와 장관 등에게 여러차례 원칙적 대응을 강조했다. 불의에 굴하지 않겠다는 신념을 실천해온 그다운 대응이었다. 노무현사료관 제공
참여정부 초기 보수언론은 ‘허니문’(정부비판 보도 자제) 기간도 없이 바로 맹공을 퍼부었다. 참여정부를 아예 인정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경기침체’ ‘경제위기’, ‘경포대’(경제를 포기한 대통령), ‘아마추어 정권’, ‘정책 혼선’ 등등 온갖 단어를 동원해 공격했다. 그즈음 신문고시 개정이 문제가 됐다. 쟁점은 신문 규제를 기존대로 신문사 자율로 두느냐 공정거래위 규제로 하느냐였다.
당시 신문 판촉사원들은 가가호호 누비며 신규 구독자에 몇달간 구독료 면제에 자전거, 선풍기까지 선물로 줬다. 지방에서는 건설 토호가 지방언론을 소유해 비리를 은폐하는 무기로 이용하거나, 심지어 기자 월급을 안 주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민간에 나가 뜯어먹으라는 뜻이니 민폐가 얼마나 컸을까. 이런 언론계의 비리에 당연히 정부 규제가 필요했다.
2003년 4월23일(수) 저녁 6시, 청와대 정책실에 파견나온 공정거래위 김원준 과장이 보고하기를, 규제개혁위원회에서 신문고시 개정을 논의했는데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 이인실 박사는 신문사 자율규제 유지를, 새로 규제개혁위원이 된 경제1분과 제프리 존스 주한 미국상공회의소 회장은 자율규제 폐기를 주장해 대립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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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체·위기·경포대·아마추어… 보수언론들 정권 초부터 ‘맹공’
참여정부 인정 않겠단 태도에 자신들 희망사항 위주로 보도
“언론에 덜 관심을” 참모들 건의 대통령 “꿋꿋이 대처” 요지부동
혼탁한 신문시장 규제 놓고 전경련 쪽 “신문사 자율규제”
제프리 존스 “자율규제 안돼” 노 대통령 “존스는 애국자” 칭찬
5월1일(목) 아침 9시 수석회의에서 이해성 홍보수석이 대통령 방미 홍보에 관해 보고하자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 홍보가 돼서는 안 되고 국가홍보여야 한다. 시장경제 원칙을 천명하고 주한미군 문제 등 불안을 해소할 문안을 외교보좌관과 경제보좌관이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박주현 수석이 신문고시가 규제개혁위 경제1분과에서 어정쩡하게 개정됐다고 보고했다. 공정위에서 다루되 예외조항 세개(초범, 소액, 쌍방협의)를 두는 바람에 다 빠져나가는 엉성한 그물이 되었다. 대통령이 화내며 “판을 깨도 좋으니 새로 고쳐라. 신문고시는 원칙대로 가야 한다. 전력투구해야 한다. 오보에 적극 대응하도록 국무회의에서 이야기하겠다”고 말했다. 회의 뒤 나는 안문석 규제개혁위원장, 규제개혁위원인 김대환, 남궁근 교수와 통화해 신문고시 개정 문제를 의논했다.
5월2일(금) 밤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규제개혁위 회의에서 제프리 존스와 김대환 교수가 활약해 예외조항 세개 중 초범, 소액 두 조항을 폐기해 공정위 원안과 비슷하게 됐다는 얘기였다. 바로 전화로 보고하니 노 대통령이 기뻐하며 “제프리 존스는 애국자다. 표창해야 한다”고 했다. 제프리 존스는 우리말을 꽤 잘했고, 유머가 많았다. 어느 날 회의에서 노 대통령의 발언을 듣더니 “대통령 말씀을 들으니 속이 다 시원합니다”라고 말해 좌중의 폭소를 자아냈다. 이 정도면 우리말의 달인이다.
주한 미국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낸 제프리 존스가 2003년 4월18일 총리실 산하 규제개혁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돼 총리 등 위원들과 회의를 하고 있다. 규제개혁위에서는 혼탁한 신문시장 규제에 관해서도 논의했는데, 재계 등은 기존대로 “신문사 자율규제”를 주장한 반면 제프리 존스는 “자율규제 폐지”를 주장했다. 노 대통령은 그런 그를 “애국자”라고 상찬했다. 연합뉴스
5월6일(화) 아침 8시 관저 회의가 열렸다. 매일 반복되는 언론의 공격에 내가 “언론에 너무 신경쓰지 말고 개혁 청사진을 제시하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니 노 대통령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지 않다. 청사진이 없는 게 문제가 아니다. 청사진은 이미 제시하지 않았느냐. 이정우 정책실장이나 강금실 법무장관을 보면 개혁 의지를 모르겠나. 언론의 태도가 문제다. 정면 대응해야 한다.” 문재인 민정수석도 노 대통령에게 언론에 너무 과민한 게 아닌지 황장엽 문제와 국정원 폐지 문제를 예로 들며 이야기했지만 대통령은 요지부동이었다.
5월26일(월) 9시 수석회의에서 노 대통령이 다시 언론에 불만을 표출했다. “대통령더러 말 줄이라, 나서지 말라고 하는데 1주일간 입 닫고 있어 볼까요”하며 참모들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라고 주문했다.
5월27일(화) 9시 국무회의에서 강금실 장관이 언론의 비판이 위험 수위에 이르렀다고 말하자 노 대통령이 장관들을 격려했다. “교육장관은 오래 같이 가겠다고 약속했고 모든 장관을 신임하니 소신껏 일하시오. 현 상황에 대한 언론보도가 아주 나빠 공직자들 사기를 떨어뜨린다. 경기가 하락했고 민생이 나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다. 노조의 춘투에 정부가 양보했다고 비판하지만 대체로 순조롭다. 전교조 교사 수백명이 파업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취임 초 북핵위기가 심각했으나 지금은 전쟁 위험이 낮아졌다. 자만은 금물이지만 심각한 위기는 아니니 흔들리지 말라. 언론관계 정상화를 위해 꿋꿋이 대처해 달라.”
5월29일(목) 9시 수석회의에서 노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다. “가장 부탁하고 싶은 것은 마음을 열고 나가서 설득하는 것이다. 언론 바람은 세고 내부 동력은 약하다. 그러나 언론의 의도적 공격에 흔들리지 말라. 동으로 간다고 비판하고, 서로 가면 또 비판한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장에 팔러 가는 당나귀’ 비슷하다.” 반기문 외교보좌관이 “지도자는 말로써 지휘한다고 합니다. 말을 자유롭게 하되 대통령답게(presidential) 나아가야 합니다”라며 레이건, 클린턴 대통령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2003년 5월30일 노무현 대통령은 연합뉴스를 비롯한 각 언론사 편집·보도국장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함께 했다. 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경기부양 논란과 관련, “정부가 경기부양책을 함부로 써서는 안된다”면서 “그러나 투자 분위기가 중요한 만큼 경제기반을 약화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규제를 과감히 없애겠다”고 밝혔다. 노무현사료관 제공
5월30일(금) 12시부터 2시까지 대통령이 연합뉴스 박정찬 국장 등 언론사 편집국장 25인을 초청해 오찬을 함께 했다. 돌아가며 한마디씩 하는데 그 중 두명이 대통령더러 (노 대통령이 듣기 싫어하는) 말 줄이라는 얘기를 했다. 노 대통령은 “신문 보면 괴롭다. 제발 좀 도와달라”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조선일보의 아무개 편집국장은 대통령 바로 옆좌석을 안준다고 며칠 동안 실랑이를 벌였다고 한다. 보수는 이런 데 관심이 많다.
6월2일(월) 9시 수석회의에서 노 대통령은 “우리가 ‘토론정부’를 표방하는데 국민적 공론화가 잘 되고 있는지, 교단 갈등과 나이스 사태를 보면서 ‘토론과 대화’ 방식을 정비할 필요를 느낀다. 언론과의 관계를 정상화해야 하고 장기적으로 원칙적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11시 노 대통령의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 배석하고, 춘추관 기자실 곳곳을 둘러보며 기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6월3일(화) 12시 몇몇 수석들의 오찬 모임(백악실)에서 노 대통령이 비공식 언론대책 모임(홍보수석, 정무수석, 외부 전문가)을 만들겠다고 하기에 내가 반대했다. “지지율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꾸준히 가면 됩니다. 역사에 남을 큰일을 한 루스벨트 대통령의 지지율도 50%에 불과했습니다.”
6월 13일(금) 7시 관저 조찬, 2주간 일정 계획을 짜는 8인 회의. 노 대통령이 무려 40분간 언론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이어서 9시 수석회의에서 대통령은 언론, 재계의 참여정부 공격을 ‘정권 길들이기’로 규정하고 맞서 싸울 것을 주문했다. “언론과 재계가 계속 청와대를 흔들고 참모 바꾸라고 요구하는데, 수석, 보좌관 바꿀 사람 없어요. 정책실장, 정책수석, 경제보좌관, 과기보좌관 누구 한명 바꿀 사람 없어요.”
7월28일(월) 오전 수석회의 뒤 서갑원 비서가 “신계륜, 대통령 만나 박범계(당시 민정수석실 법무비서관, 나중에 법무장관) 경질을 요구했다”는 중앙일보 기사를 보이며 사실인지 묻자 대통령은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말이 난 김에 내가 7월26일(토) 중앙일보 1면 톱 ’대통령이 부총리에게 법인세 인하 등 경제살리기 지시’ 보도가 사실인지 질문하니 “전혀 그런 사실 없다. 그러나 해롭지 않은 오보라서 그냥 두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취임 초기 김진표 부총리의 법인세 인하 돌출 발언(
10화 초기 경제팀 참조)은 대통령 뜻과 달랐다. 이처럼 언론에 오보가 많고 희망사항을 사실인 양 보도하는 경우도 많았다. 노 대통령은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이라 언론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일전불사 태도였는데, 장관, 참모들이 소극적이어서 불만이 많았다.
필자 이정우: 1950년 대구에서 나고 자랐다. 1974년 서울대 경제학과 학·석사를 마친 뒤 1983년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2015년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한 뒤 명예교수를 맡고 있다. 2003~05년 참여정부 초대 정책실장, 정책기획위원장 겸 정책특보를 지냈다.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끊임없이 공부하는 경제학자를 자임하고 있다. ‘참여정부 천일야화’ 제목은 그의 친필이다. opini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