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시와 자격지심의 원내 제1교섭단체.’ 1973년 6월1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수운회관에서 열린 유정회 현판식에 박정희(왼쪽)가 참여한 모습.
75 보도사진연감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⑪ 유신헌정 원내 보루 ‘유정회’
⑪ 유신헌정 원내 보루 ‘유정회’
1971년 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이 크게 약진한 것은 박정희가 유신이라는 친위쿠데타를 단행한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영구집권을 꿈꾼 박정희에게 강력하고 도전적인 야당이 포진한 국회란 당파 싸움과 국론분열만 일삼는 비능률적인 공간이었다. 박정희는 몰래 유신을 준비하면서 국회를 무력화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박정희가 고심했던 문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국회에서 안정적인 의석을 확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울 등 대도시에서의 참패, 즉 여촌야도 현상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유신헌법에서 대통령이 국회의원 3분의 1을 사실상 임명하도록 해버렸다. 그리고 소선거구제 대신 중선거구제를 도입하여 도시에서도 여당후보가 야당과 동반 당선될 수 있는 길을 터놓아 여권이 언제나 3분의 2에 가까운 안정적인 의석을 확보할 수 있게 만들어 버렸다. 대통령이 국회의원 3분의 1을 임명하게 되면서 비례대표 성격의 전국구의원제도는 사라졌다.
대통령의 명령인 긴급조치로 입법권과 사법권을 통제할 수 있는 상황에서 3권분립이란 무의미한 것이었다. 유신체제에서 국회와 법원의 기능은 극도로 위축되었다. 제3공화국 헌법에서 국회에 관한 조항은 2장 ‘국민의 권리와 의무’에 이어 3장 ‘통치기구’에서 가장 앞에 배치되어 있었다. 유신헌법하에서 국회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통령, 정부 다음의 6장으로 밀려났다. 회기도 정기국회의 회기는 120일에서 90일로 축소되었고, 임시회를 합하여 연 통상 150일을 초과하여 개회할 수 없다는 규정이 신설되었다. 이렇게 하는 게 박정희에게는 “국회를 활짝 열어놓고 떠들어대는 것보다 훨씬 능률적”으로 보였다. 유신쿠데타가 나던 당일도 야당이 열심히 하고 있었던 국정감사권은 유신헌법에서는 사라져버렸다. 국회를 없애지 않은 것만 해도 고맙다고 해야 할 지경이었다.
71년 선거에서 야당이 약진하자
박정희는 국회 무력화를 위해
의원 1/3을 직접 임명해 버렸다
임기는 선출직의 절반인 3년
정당도, 사회단체도 아니었다 원내 제1교섭단체로 뜬 유정회는
여야로부터 모두 경멸당했으나
유신 비판을 막는 방패가 되어
고함과 드잡이로 활약했다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 전화기 앞 감격, 박정희 앞으로 감사전보를 치다 유신헌법 40조는 대통령이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일괄 추천하여 후보자 전체에 대한 찬반을 투표에 부쳐 선출하도록 했다. 형식적으로는 간선의원이지만 사람들은 ‘관선의원’이라 불렀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추천받은 국회의원의 임기는 지역구에서 선거로 선출된 의원 임기 6년의 절반인 3년이었다. 국회는 지역구에서 선거를 거친 ‘민선의원’ 146명과 대통령이 임명한 ‘관선의원’ 73명으로 구성되었다. 유신정우회(약칭 유정회)는 이렇게 선출방식도 다르고 임기도 절반밖에 안 되는 73명의 ‘여권’ 의원들이 모인 교섭단체였다. 유신국회였던 9대와 10대 국회에서 의석수는 원내 제1교섭단체였지만,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편찬한 <대한민국정당사>에는 나오지 않는다. 박정희가 죽고 물거품처럼 사라진 유정회에 관한 연구는 놀라울 정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973년 2월27일 유신헌법에 따른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공화당은 73개 선거구에서 전원이 당선되었고, 신민당은 52석, 무소속은 19석, 신민당에서 선명야당을 표방하며 떨어져 나간 통일당은 겨우 2석을 얻었다. 구조적으로 야당과 야당 성향의 무소속을 합쳐 보아야 임시국회 소집요구 정족수인 3분의 1 의석조차 갖지 못하는 상황에서 신민당이 제 역할을 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선거 일주일 뒤인 3월5일 박정희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한 국회의원 후보자 73명과 예비 후보자 14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백두진, 김진만, 구태회, 김재순, 최영희, 현오봉 등 공천에서 탈락했던 공화당의 중진들 상당수가 구제되었고 국무총리 김종필도 비서실장 이영근 등 측근들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 73명의 후보자를 청와대에서 직능별로 분류한 것을 보면 정치인 20명, 예비역 장성 8명, 전현직 고위공직자 16명, 여성 8명, 언론계 7명, 학계 7명, 교육계 3명, 기타 사회 각계 인사 4명 등으로 되어 있다. 유신헌법을 만드는 데 기여한 한태연과 갈봉근도 이름을 올렸다. 청와대 대변인 김성진은 1)범국민적 차원에서 여야를 초월 2)유신이념이 투철한 인사 3)국가관이 투철한 각계각층의 직능대표 4)전문지식을 대의정치에 생산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신진 및 중견 인사 5)농촌개발과 지역사회 발전에 모범이 되는 새마을지도자 6)국민교육에 헌신한 교육계 지도자 7)성실하고 능력 있는 각급 여성 지도자 등을 후보자로 정했다고 밝혔다. 후보의 선정은 청와대 비서실과 중앙정보부, 공화당이 각각 추천한 인물들을 비서실이 통합 정리하여 유력인사 100여명의 명단을 작성한 뒤 박정희가 직접 낙점했다고 한다. 청와대는 극도의 보안을 유지해 가며 대상자에게 개별적으로 통보했다. 대상자에게 통보가 가던 2월 말에는 여권 인사 상당수가 전화기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렸으며, 후보 명단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통보받은 사람들 중에는 감격에 겨워 우체국으로 달려가 박정희에게 감사전보를 친 사람들도 꽤 되었다고 한다. 박정희는 유신쿠데타를 단행한 뒤 “구태의연한 국회 운영, 비능률적인 정당운영 방식을 지양해야 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동아일보>는 유정회 의원 선출에 대한 해설기사에서 “이제 국회는 정당 성격을 띠지 않는 유정회가 견인차 역할을 하고 기성 정당들이 객차 역을 맡는 새로운 형태로 운영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유정회는 국회의원 73명을 가진 원내 제1교섭단체였지만 정당도 아니었고 정강정책도 없었다. 그런 점에서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에서 이른바 ‘신체제’를 표방하면서 여러 정당들이 해산한 뒤 통합되어 출현한 대정익찬회와 유사하다. 물론 전국의 지방행정 구역에 상응하는 지부를 갖고 거대 ‘국민조직’을 표방한 대정익찬회와 회원의 자격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된 국회의원’으로 제한된 유신정우회를 동일한 차원에서 비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박정희가 표방한 ‘한국적 민주주의’에 깔려 있는 정당과 의회에 관한 지독한 편견은 1940년대 초반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이 정당과 의회정치를 비효율적이고 비일본적인 방식이라고 깔아뭉개던 모습 그대로이다.
1940년대 일본의 ‘대정익찬회’와 유사
공화당과는 별도의 교섭단체로 등록하기로 한 유정회는 “강령이나 정강정책 등을 나름대로 마련할 것을 구상하였으나 유정회의 조직상 성격이 정당이나 사회단체가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여 ‘유신정우회의 정치적 성격’이라는 ‘준강령’을 작성했다. 이 문건은 공식 기구에서 확정하지는 않은 시안이었지만, 소속의원 전원에게 배포되어 활동의 지침이 되었다고 한다. 이 문건 역시 정당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정당은 “자체의 경직성에 개발도상국가에서 요청하고 있는 국가기능의 능률화”를 저해하고, “근시적 당리당략에 얽매인 정쟁의 폐습으로 국익을 역행”할 뿐이었다. 이 문건은 “유신헌정의 원내 보루”인 유정회의 기본 성격을 대통령이 “정당정치의 폐습을 탈피”하여 초정당적으로 국정을 다룰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이 문건은 또 유정회와 “집약된 국민의 일반의사와 유신이념과의 발전적 조화점”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정회 소속으로 국회 부의장을 지낸 구태회는 “유정회는 어느 정당에도 귀속될 수 없는 일반의지의 집결체”라며 “파당으로 금을 그을 수 있는 어떤 계층이나 또는 어떤 지역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보통의사를 대변한다고 주장했다. 루소가 일반의지는 대표될 수 없고 인민의 대의원은 인민의 사용인에 지나지 않으며 일반의지의 대표자가 될 수도 없다고 말한 것은 유신체제에서는 통용될 수 없었다. 유신체제에서는 박정희의 뜻이 곧 일반의지였다.
유정회는 원내에서 의석수가 제일 많았지만, 단 한번도 제1교섭단체의 위상을 스스로 주장하지도, 인정받지도 못했다. 상임위원장 12자리를 배분할 때 신민당은 임명직인 유정회에 상임위원장 자리가 돌아가는 것을 반대했다. 유정회는 공화당보다 의석수가 많았음에도 공화당이 8석을 차지하고 유정회는 그 절반인 4석만을 배분받았다. 공화당 의원들 상당수는 낙하산을 타고 왔으며 언제 자신의 지역구로 치고 들어올지 모를 유정회 의원들을 경계했고 능멸했다. 때로 공화당 의원들은 유정회 의원들에 대해 같은 여권이라는 동류의식을 느끼는 것보다 야당인 신민당 의원들에 대해 치열한 선거전을 치르고 당선된 것에 더 동질감을 느끼는 듯 보였다. 유정회에 관한 거의 유일한 공식기록인 <유신정우회사>는 9대 국회의 상임위원장 선출 당시 유정회가 상임위원장 자리에 집착한 것은 “감투싸움이라기보다는 원내에서 유정회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고 쓰고 있다.
공화당은 3년 임기의 유정회를 멸시하는 데서 위안을 얻었지만 국회와 정당정치의 위상이 한없이 추락한 유신체제하에서 공화당의 존재감이 살아날 수는 없었다. 공화당은 김종필, 백두진, 김진만, 구태회, 김재순 등 거물급이 유정회로 자리를 옮겼을 뿐 아니라, 여권 내에서의 무게중심이 확연히 청와대 비서실과 중앙정보부로 옮겨감에 따라 창당 이후 최악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이미 공화당도 유정회도 국회도 권력의 핵심에서 멀어져 있었다. 1974년 8월 신민당이 긴급조치 해제 건의안을 국회에 제출하자 공화당과 유정회는 긴급조치라는 성역을 사수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여 해제 건의안을 법사위원회에서 부결시켰다. 비록 육영수 여사의 피격이라는 큰 사건이 있었지만 며칠 안 돼 박정희가 긴급조치를 전격 해제하자 유정회와 공화당은 참으로 머쓱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정일형에게 욕설 퍼붓고 김영삼은 잘라버려
유정회의 위상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떨어졌음에도 그 자리를 노리는 사람은 많았다. 청와대 비서실장 김정렴에 따르면 유정회 의원을 시켜준다고 했을 때 “단 한 사람도 거절하는 이는 없었다”고 한다. 박정희는 관료들과 지식인들, 특히 가장 시끄러운 반대세력인 교수나 언론인들을 제어하는 데 유정회 국회의원 자리를 적절히 활용했다. 예컨대 박정희는 조선일보에서 이종식, 김윤환, 동아일보에서 최영철, 한국일보에서 임삼, 경향신문에서 정재호, 서울신문에서 이진희, 주영관, 이자헌, 박형규, 동양통신에서 문태갑, 대한공론에서 서인석, 김봉기, 문화방송에서 함재훈, 김영수, 케이비에스(KBS)에서 김진복 등 주요 언론사의 정치부장, 논설위원, 편집국장이나 부국장급 인사들을 유정회 의원으로 대거 발탁했다. 이런 자리를 노리는 권력지향적인 언론인들은 언론사 내에서 자발적으로 유신에 협조하고 혹여라도 반체제적인 기사가 나갈까 내부검열관 노릇을 했다.
3년짜리 비정규직이었던 유정회 의원들 자신이 재임명에 목을 걸었다. 1976년 3년 임기가 끝나고 2기 의원을 추천할 때 1기 중 3분의 1에 가까운 23명이 탈락했다. 또 3년 후 3기 의원을 추천할 때는 2기 때의 두 배인 48명이 탈락하고 25명만 살아남았다. 한 언론인은 “체제의 방패역을 자임했던 유정회는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추악한 정치행태들을 연출해 보였다”고 평가했다. 첫 임기 2년차가 끝나갈 무렵인 1974년 12월 발생한 정일형 의원 발언 파동 때나 3년을 거의 채운 시점인 1975년 10월에 발생한 김옥선 의원 발언 파동 때 유정회 의원들은 맹활약을 했다. 이들은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발언이 나오면 고함과 야유를 보내는 데 그치지 않고 단상으로 달려나가 발언자와 몸싸움을 벌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정일형 의원이 고향 땅 선산에서 쟁기질하고 있는 전직 대통령의 모습은 자라나는 젊은이들에게 귀감이 될 거라며 박정희 대통령은 하야 용의가 없는가라는 발언을 하자 유정회의 지종걸은 원내 최고령 최다선인 정일형을 향해 “저런 ×새끼 봐라”고 욕설을 퍼부었고, 현역 육군중장에서 유정회 의원으로 옷을 바꿔 입은 송호림은 정일형을 떠밀었다. 유정회 의원 중 가장 빨리 단상으로 돌진한 정재호는 ‘정비호’라 불리게 되었다. 야당 의원들은 “유정회 임기 3년이 가까워 오니까 볼만하구먼”이라며 혀를 찼다. 유정회 의원 중 혹시라도 소신발언을 하는 경우 청와대의 뜻이라는 표시로 총무단이나 누군가가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면 머쓱하게 발언을 중단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1978년 12월의 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은 의석수에서는 공화당에 뒤졌으나 득표율에서는 1.1% 앞섰다. 야당의 기세가 오르자 유신정권은 국회에서 신민당의 도전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을 원 구성에서부터 밀어붙였다. 국회의장으로 유정회의 백두진을 내정한 것이다. 신민당은 지역구 출신을 제쳐두고 임명직인 유정회 의원이 국회의장을 맡는다는 사실에 격렬히 반발했다. 9대 국회 때는 유정회가 제1교섭단체였음에도 공화당의 정일권이 국회의장을 맡았기에 이런 갈등을 피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여권은 “원내 제1교섭단체가 내정한 의장후보를 비토했다는 것은 유정회의 생성모태인 유신헌법에 대한 모욕적인 도전장과 같은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 등이 중심이 된 강경파들은 국회해산도 불사한다는 설을 흘렸고, 유정회나 공화당은 이러한 강경 기류를 전혀 걸러내지 못했다. 백두진이 의장이 된 유신국회는 신민당 총재 김영삼 의원의 국가관을 문제 삼아 국회의원을 제명하는 폭거를 자행했다. 이것은 유신의 종말을 재촉했고 박정희가 죽은 뒤 유정회는 전두환의 5공헌법이 완성될 때까지 1년에 걸친 긴 장례절차 끝에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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