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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통일벼로 통일하고 유신벼로 유신하자”

등록 2012-07-13 20:12수정 2012-07-16 13:56

농촌 현장에서 통일벼 재배현황을 점검하는 박정희(왼쪽). 1970년대 식량정책에서 핵심 위치를 차지하는 ‘통일벼’에 대한 인식은 극과 극을 달린다. 오른쪽은 식량증산을 외치며 거리방송에 나선 공무원들. 충북농업기술원
농촌 현장에서 통일벼 재배현황을 점검하는 박정희(왼쪽). 1970년대 식량정책에서 핵심 위치를 차지하는 ‘통일벼’에 대한 인식은 극과 극을 달린다. 오른쪽은 식량증산을 외치며 거리방송에 나선 공무원들. 충북농업기술원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⑩ 식량 증산정책
김일성은 모든 인민이 이밥에 고깃국 먹는 날을 고대하며 “쌀이 곧 공산주의”라고 주장했다. 비슷한 시기 남쪽의 박정희도 주곡인 쌀의 자급자족을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공산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냉전시기에 박정희는 주곡인 쌀의 증산을 경제발전과 국가안보에서 핵심적인 문제로 생각했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리듯이 1970년대 박정희의 식량정책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통일벼’에 대한 인식도 극과 극을 달리고 있다. 어떤 사람들에게 통일벼는 한국 사람들이 ‘보릿고개’를 없앤 ‘기적의 쌀’인 반면, 또 어떤 사람들에게 통일벼는 짓밟힌 못자리의 참담한 기억으로, 갑자기 닥친 변종 도열병에 새빨갛게 타들어간 농민들의 가슴으로, 밥을 지으면 풀풀 날리던 참 밥맛없던 쌀로 기억될 것이다.

중정부장 김형욱은 제2의 문익점?

1960년대 중반 식량증산에 앞장섰던 정부부처는 중앙정보부였다. 중앙정보부는 1964년 멀리 이집트에서 ‘나다’를 밀반입했다.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국회에서 자신의 부하들이 두꺼운 책에서 표지만 남기고 안쪽을 도려낸 뒤 그 속에 볍씨를 채워 외교행랑 편으로 극비리에 공수해온 것을 무용담처럼 떠들어댔다. 김형욱은 자신의 행위가 ‘제2의 문익점’과 같은 것이라며 이 볍씨가 보릿고개를 없앨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박정희는 이 씨앗을 자기의 이름에서 한 글자를 떼어 ‘희농 1호’라 부르게 했다. 박정희는 이 볍씨를 유리 상자에 담아 집무실에 두고 손님들에게 보여주며 자랑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1965년 이 씨앗을 몇몇 곳에서 시험 재배하도록 했다. 박정희는 부진한 시험재배 결과에도 불구하고 ‘희농 1호’를 밀어붙여 1967년부터 일반농가에서 재배하도록 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씨받이마저 하기 어려울 정도의 흉작이 들었다. ‘나다’가 이집트에서는 고수확 품종이었지만 한국의 기후와 토양에는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참담한 실패 덕분인지 박정희는 그 후 여러 차례 이루어진 신품종 개발에서 다시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종자의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과학사학자 선유정은 “희농의 실패는 그것이 다수확 벼라는 것만 믿고 국내 환경을 고려한 과학적 검증 없이 국가의 힘으로 밀어붙이면서 야기된 인재”였다고 평가했다. 희농을 통해서 군사정권의 정당성을 획득해보려던 계획은 일단 좌절되었다.

미국은 당시 제3세계 여러 나라가 받고 있던 인구 압력을 분산시키지 못한다면 공산혁명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 보고 개발도상국의 농업발전을 위해 막대한 지원을 퍼부었다. 미국의 지원으로 1962년 필리핀에는 국제미작연구소(IRRI)가 문을 열게 되었다. 이 연구소가 개발한 키 작은 벼 ‘IR 8’은 기적의 쌀이라 불릴 만큼 수확량이 많았다. 통일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과학사학자 김태호는 “냉전체제에서 녹색혁명이 미국의 국제 전략의 중요한 부분이었다는 점은 통일벼의 연구와 보급 과정에서 한국이 대단히 유리한 조건으로 국제적인 도움을 받았던 것”이라고 말한다.

김태호는 이런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작용했지만, 통일벼의 탄생과 보급은 한국 과학자와 ‘증산체제’라는 시스템이 결합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한국에서 ‘희농’의 실험이 참담한 실패로 돌아갈 무렵, 서울농대 교수인 허문회는 국제미작연구소에서 연구할 기회를 얻었다. 허문회의 꿈은 한국의 기후와 토양에 맞는 기적의 쌀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1920년대의 일본 육종학자들이 벼를 크게 인도계인 인디카와 일본계의 자포니카 둘로 나눴다. 우리가 먹는 차지고 낱알의 길이가 짧은 쌀은 자포니카 계열이고, 흔히 안남미라고 부르는 길이가 길고 밥을 하면 푸석푸석 날리는 쌀이 더운 지방에서 선호하는 인디카 계열이다. 인디카는 자포니카에 비해 수확량이 월등히 많았다. 일본의 육종학자들은 자포니카와 인디카의 교잡을 통해 자포니카의 맛에 인디카의 생산량을 가진 새로운 품종을 만들어내고자 노력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인디카와 자포니카의 교잡은 유전적으로 거리가 먼 종끼리의 교잡으로 교배기술도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암말과 수탕나귀 사이에서 태어난 노새가 새끼를 낳을 수 없는 것처럼 ‘잡종불임’의 문제에 봉착하게 마련이다. 허문회는 인디카와 자포니카의 ‘원연교잡’으로 탄생한 잡종이 불임성을 보일 때 제3의 품종과 다시 교배(삼원교잡)했더니 불임 현상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IR 667’이고 이 새로운 종의 한국 이름이 ‘통일’이다. ‘통일벼’란 통일과 마찬가지로 인디카 계의 형질을 지닌 통일의 개량종을 통칭하는 말이다. 통일벼는 수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김태호가 지적했듯이 한국의 농학과 농업의 발전사에 한 획을 그은 업적으로, 1999년 과학자들 설문조사에서 한국 과학의 10대 성취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1977년 통일계 품종으로 밥맛을 개선한 ‘유신’의 재배 현장. 그러나 ‘마디썩음병’ 등으로 1년 만에 거의 사라져버렸다. 한홍구 제공
1977년 통일계 품종으로 밥맛을 개선한 ‘유신’의 재배 현장. 그러나 ‘마디썩음병’ 등으로 1년 만에 거의 사라져버렸다. 한홍구 제공
“가난한 농민의 아들”
박정희 정부의 야심작 ‘통일’
일반벼 못자리까지 짓밟아가며
재배를 늘렸으나 실패였다
일단 맛이 없고 돈이 들었다

유신·노풍·래경 등
신품종 개발은 계속됐으나
재해 등으로 모두 죽을 쑤었다
박정희의 ‘녹색혁명’은
79년 그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

기적의 쌀 ‘통일’의 탄생과 성취, 좌절

새로운 품종을 만들었다고 해서 바로 재배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10여년씩 걸리는 통상적인 육종의 시간표는 그들에게는 너무 긴 것”이었다. 그것은 좋게 보면 하루빨리 식량의 자급자족을 이뤄야 한다는 절박한 사명감에서 기인한 것이었고, 냉정하게 평가하면 예견된 인재로 가는 고속도로를 닦는 일이었다. 다수확이나 병에 잘 안 걸리는 품종을 만들기 위해서는 특정한 유전적 성질을 강화할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사람의 손을 탄 신품종은 유전적 다양성을 자연히 상실하게 마련이다. 또한 사람이 병충해에 강한 신품종을 개발해도 병원체도 끊임없이 변이를 일으키기 때문에 신품종이 병충해로부터 재해를 입게 되는 것은 결국은 시간문제일 수밖에 없다.

통일벼 이야기를 하려면 세 명의 주역을 꼽아야 할 것이다. 먼저 개발자인 허문회 교수가 있고, 두 번째로 무려 12년간 농촌진흥청장으로 있으면서 통일벼의 보급과 증산 시스템의 구축과 운영을 책임진 김인환, 그리고 유신체제의 총수 박정희가 있다. 통일벼에서 늘 문제가 됐던 것은 자포니카 계열의 일반미에 비해 맛이 없다는 것이다. IR 667이 개발된 뒤 1971년 2월5일 열린 정부각료와 경제계 인사들이 참석한 시식 겸 평가회에서 박정희는 무기명으로 작성하게 된 설문지의 밥맛 평가란에 ‘좋다’에 동그라미를 치고 크게 자기 이름을 적어 넣었다. 적어도 정부 내에서 누구도 통일벼 밥맛을 거론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통일벼의 또다른 문제는 재배법이 까다롭다는 점이다. 기존의 자포니카 품종은 전통적인 물못자리에서 모를 키웠지만, 통일벼는 비닐로 덮은 보온 못자리에서 모를 키워야 냉해를 막을 수 있었고 비료와 농약도 많이 쳐야 했다. 통일벼 덕에 논에서 메뚜기와 미꾸라지가 사라졌다는 얘기도 많이 나왔다. 1972년 추수를 앞두고 닥친 냉해 때문에 통일은 대흉작을 기록했다. <조선일보>는 10월11일자에서 “미숙품종에 겹친 천재”라며 정부도 재배면적을 성급히 확대했다고 성토했다. 그러나 유신의 힘은 막강했다. 10월17일 유신이 선포되고 또 박정희가 통일벼에 대해 신앙에 가까운 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조선일보>가 10월31일자에 “통일벼 다수확성 판명”이라는 기사를 게재하는 등 대부분의 언론은 통일벼에 대한 우호적인 보도를 쏟아냈다. 유신 첫해인 1973년 가을 박정희는 통일벼의 성과에 매우 흡족해했다. 통일벼의 단위면적당 생산량은 자포니카에 비해 37퍼센트나 높았다. ‘통일’의 개발로 “박정희 정부는 오랫동안 찾으려 애썼던 기적의 쌀을 드디어 확보”한 것처럼 보였다. 1974년부터 1977년까지 쌀 생산량도 개별 농가의 명목소득도 모두 크게 증가했다. 통일벼는 맛이 없어 시장에서의 경쟁력은 떨어졌지만, 정부는 추곡수매와 이중곡가제를 통하여 통일벼 재배 농가에 확실한 인센티브를 부여했다. 1974년에는 쌀 생산량이 3천만석을 돌파했고, 3년 후인 1977년에는 4천만석을 돌파했다. 이때 한국의 단위면적당 쌀 생산량은 세계 최고를 기록했다. 박정희는 이를 녹색혁명의 성취로 자랑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통일벼의 성공은 역설적으로 통일벼의 몰락을 재촉했다. 공무원들은 증산목표 달성을 위해 일반벼의 못자리까지 짓밟아가며 통일벼 재배면적 확대를 추진했는데, 예상을 웃도는 증산 실적은 정부에게 이중곡가제에 따른 막대한 양특적자를 남겼다. 박정희는 밥맛을 따지는 것을 사치라고 여기며 증산만을 위해 달려갔지만, 통일벼를 심는 농민들조차 통일벼는 추곡수매용이고 자가에서 소비할 쌀은 아키바레로 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정부는 남아도는 통일벼를 처치하기 위해 1977년 12월 14년 만에 다시 쌀 막걸리의 제조를 허용했다. 통일벼와 추곡수매를 통해 농민들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 속으로 빨려 들어갔지만, 이 시장경제는 어찌된 영문인지 1974년 이후 해마다 사상 최대의 풍년이 들었다는데 농민들의 수익구조는 계속 악화되어갔다.

해마다 풍년, 이상하게 농민들은 가난해졌다

농민들에게 통일벼 추곡수매가 보장해주는 현금수입은 나름 매력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증산시스템이 갖는 관성이 증산확대를 위해 일반벼 못자리를 짓밟는 등 강제농정으로 나타나면서 분위기는 변화했다. 더구나 중화학공업 과잉투자에 석유파동이 겹치고 정부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쌀 생산이 늘자 정부는 고미가정책을 폐지하고 농산물 시장을 개방하여 도시노동자의 저임금을 유지하려 했다. 이제 농민들은 아무런 완충장치 없이 농산물 시장 개방이라는 폭풍을 만나게 된 것이다.

통일벼가 갖고 있는 문제는 보온 못자리, 비료와 농약 등 때문에 일반벼에 비해 생산비가 많이 든다는 것이다. 신품종을 재배하는 데 필요한 설비와 자재는 모두 농협 융자금, 다시 말해 빚이었다. 농가부채는 1971년 가구평균 2만9500원에서 1980년에는 80만8400원으로 급증했다. 10년 사이에 농가부채가 27배나 증가한 것이다. 정부는 고미가정책을 포기했지만 사실 높게 책정되었다는 추곡수매가가 실제 생산비에 미치지 못한다는 주장이 강력히 제기되었다. 가톨릭농민회는 정부수매가와 실제 생산비의 차이가 매년 누적된 것을 농가부채의 급증 원인으로 꼽았다.

육종학자들은 열심히 통일벼 계열의 새로운 품종을 개발했다. 핵심은 밥맛이었다. 높은 수확에도 불구하고 밥맛이 없었던 기적의 쌀 통일은 1978년이 되면서 사실상 자취를 감추었다. 1977년에는 통일계 품종으로 밥맛을 개선한 ‘유신’이 새로이 나왔다. “통일벼로 통일, 유신벼로 유신”이라는 구호 속에 유신의 재배면적을 늘리기 위한 충성경쟁이 벌어졌다. 1977년은 사상 최대의 풍작을 기록했다고 하지만, 유신을 심은 경기도 일대의 농민들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 볏짚 첫 마디 부분이 까맣게 썩어 들어가면서 벼 포기들이 급격하게 주저앉는 ‘마디썩음병’이 발생한 것이다. 통일이 사라진 자리를 메울 것으로 기대되던 유신도 1978년에는 거의 사라져버리고 새로운 품종이 등장했다. 박정희는 1977년 1월21일 농수산부 연두순시에서 “앞으로는 신품종이 개발되면 개발 품종에 연구원 학자 이름을 붙여 대대손손 영예가 지속될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1977년에 새로 등장한 이리 327호는 육종책임자인 호남작물시험장장 박노풍의 이름을 따 ‘노풍’으로, 밀양 29호는 영남작물시험장장 박래경의 이름을 따 ‘래경’으로 불리게 되었다. 정부는 유신의 실패를 가리기 위해 새로 개발된 노풍을 대대적으로 재배하게 했다.

원래 열대성 인디카 계열의 통일벼는 도열병에 강했다. 그러나 1978년 한반도를 강타한 변종도열병은 노풍을 쭉정이로 만들어버렸다. 정부의 권유를 믿고 노풍을 심었던 농민들은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 정부의 너무 성급한 신품종 보급으로 열정적인 육종학자의 이름은 농민들의 원한의 상징이 되었다. 노풍 피해가 덮친 1978년에는 무려 78만명이 농촌을 떠나 대부분 도시빈민 신세로 전락했다. 1978년 12월12일 10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예상을 뒤엎고 신민당이 공화당보다 득표율에서 1.1퍼센트 앞설 수 있었던 데에는 노풍의 역할도 상당했다. 박정희는 노풍사태가 발생했을 때 조카사위인 농수산부 장관 장덕진은 경질했지만 농촌진흥청장 김인환은 유임시켜 변함없는 신임을 과시했다. 그러나 박정희 자신이 1979년을 넘기지 못했고 통일벼는 1979년과 1980년에도 연달아 죽을 쑤었다.

통일벼의 몰락은 자연재해나 병충해 때문은 아니었다. 통일벼를 가능케 했던 증산시스템 자체가 한계에 달했고 그 시스템의 정점에 섰던 박정희가 시민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사망하게 되면서 통일벼라는 새로운 품종과 통일벼 재배를 강요했던 강제농정도 사라지고 말았다. 비슷한 시기 김일성도 통일벼의 증산에 자극받아 단위면적당 생산량을 높이는 데 주력하여 80년대 초반 이북도 한때 단위면적당 생산량에서 세계최고를 기록했다. 그러나 약탈농법이 가져온 결과는 참담했다. 남과 북에서 식량 자급을 위한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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