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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육영수의 빈자리는 참으로 컸다

등록 2012-06-29 20:02수정 2012-06-30 10:35

1974년 11월20일 법정에 선 박정희 암살미수범 문세광. 1974년 12월17일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고 3일 뒤인 12월20일 사형 집행을 당했다.(왼쪽) 광복절 기념식이 열린 1974년 8월15일 국립극장에서의 저격 순간. <사진으로 보는 한국 반세기> <보도사진연감 1975>
1974년 11월20일 법정에 선 박정희 암살미수범 문세광. 1974년 12월17일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고 3일 뒤인 12월20일 사형 집행을 당했다.(왼쪽) 광복절 기념식이 열린 1974년 8월15일 국립극장에서의 저격 순간. <사진으로 보는 한국 반세기> <보도사진연감 1975>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⑨ 박정희 대통령 저격미수사건
 박정희 정권은 도쿄에서 반유신활동을 하던 김대중을 떠들지 못하게 하면 유신정권에 대한 모든 저항을 완전히 잠재울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김대중 납치사건은 탱크를 앞세운 유신쿠데타의 살벌한 분위기 속에 얼어붙었던 국내의 민주세력을 오랜 잠에서 깨어나게 만들었다. 1973년 10월2일 서울대 문리대생의 데모를 시작으로 민주화운동이 되살아나자 박정희는 긴급조치 1호와 4호를 선포했다.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을 조작하여 1천여명의 학생과 재야인사를 잡아들인 유신정권은 그해 여름 내내 학생운동의 중추세력들에 대해 사형과 무기징역을 제멋대로 구형하고 선고하고 감형하는 짓을 되풀이했다. 박정희는 잡아놓은 고기를 어떻게 요리할까 생각하면서 멀리 미국에서 닉슨 대통령이 부하들이 야당 선거운동본부를 도청하려다 걸린 일로 사임(8월9일)해야 하는 것을 왜 저러나 하는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자칼의 날>과 구멍 뚫린 철통 경호

 1974년 8월15일은 착공 3년 4개월여 만에 서울지하철이 개통되는 날이었다. 박정희 대통령과 부인 육영수씨는 국립극장에서 열리는 29주년 광복절 기념식을 마치고 기쁜 마음으로 청량리역에서 열리는 지하철 개통식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를 읽기 시작한 지 채 10분이 안 되어 “조국 통일은 반드시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이라는 대목에서 갑자기 ‘탕’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은 아무도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던 듯싶다. 박정희는 계속 경축사를 읽고 있는데 단상의 경호실장 박종규가 일어서며 무대 앞으로 달려 나와 총을 뽑아 들었고, 총소리와 비명소리가 뒤섞이며 장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방탄으로 되어 있다는 연단 뒤로 몸을 숨겼고 흔들리던 화면은 무대 아래에서 범인 문세광이 제압당하는 장면을 비추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저격이 발생한 것이다. 한동안 중단되었던 생방송은 곧 재개됐다. 박정희는 큰 박수를 받으며 “하던 얘기를 계속 하겠습니다”라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중단된 지점을 정확하게 찾아 경축사를 읽어나갔다. 육영수 여사가 부상을 입어 병원으로 옮겨졌다는 멘트가 있었지만 박정희가 의연한 것이었는지, 냉혹한 것이었는지 연설을 계속했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큰 부상이 아니겠거니 생각했다. 오후가 되어서 육 여사의 용태가 심각하다는 뉴스가 나오더니 저녁 7시께 하늘이 온통 보기 드문 노란색 노을로 덮인 가운데 육 여사가 운명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의 나이 마흔아홉이었다.

 필자가 다닌 국민학교는 청와대 들어가는 입구에 있었는데 한동안은 박정희가 행차할 때면 큰길로 난 창문을 모두 닫게 하던 때도 있을 만큼 박정희는 경호에 신경을 썼다. 박정희가 참가하는 행사에서는 웬만한 사람들은 식장 근처에 얼씬 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특히 3·1절이나 광복절처럼 늘 대통령이 참석하는 기념식은 테러리스트들의 표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경비가 여간 엄중한 것이 아니었다. 문세광은 드골 암살 기도를 그린 <자칼의 날>이라는 소설을 탐독했는데, 그 소설에서도 암살범 자칼은 드골이 반드시 참석하게 되어 있는 해방기념일을 거사일로 삼았다. 그런데 엄중한 경호는 늘 부작용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해 3·1절 기념식에서는 행사에 참석한 외국대사의 부인들의 핸드백조차 물품보관소에 보관하도록 하다가 대사부인회에서 육영수에게 엄중 항의하는 바람에 경호과장이 2개월간 정직처분을 받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외국인에 대한 경호가 느슨해져 문세광이 일본대사관 직원 행세를 하면서 무사통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일 행사의 경호에는 청와대 경호실의 3개 과 중 경호2과 병력 50명이 동원되었고 경찰은 좌석 곳곳에 배치된 사복근무자 88명 등 총 546명이 동원되었다. 문세광이 총을 쏘며 질주한 B열과 C열 사이의 통로에만 해도 당시 용산경찰서에 근무하던 전두환의 형 전기환을 비롯한 12명의 경찰이 배치되어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문세광을 저지하지 않았다. 문세광의 발을 걸어 넘어뜨린 것은 경호원이 아니라 독립유공자 가족으로 참석한 어느 세무서 직원이었다. 만약 누군가가 문세광을 툭 치기만 했어도 육영수 여사가 변을 당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경찰 40여명의 목이 달아났는데, 시경국장 이건개는 경호실의 지시 없이는 절대 움직이지 말라는 경호실의 강압적인 태도에 경찰이 워낙 주눅 들게 된 점을 경찰이 그토록 무기력해진 이유로 꼽았다.

 문세광 오발탄인가 경호원 오발탄인가

 사건이 발생하고 채 2시간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의 엔에이치케이(NHK) 방송 해설위원 야마무로 히데오는 범인이 북한의 무장간첩이거나 민청학련 계열의 극렬분자일지도 모른다면서 또 하나의 가능성으로 “나치가 1939년 독일의사당에 불을 지른 뒤 국회를 해산하고 정권을 탈취한 예가 있듯이 이번 사건도 한국의 현 정권에 의해 조작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아직 모든 것이 불확실했고 육영수 여사의 용태는 어떠한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공공방송에서 하기에는 무책임한 발언이었다. 조작설은 일파만파로 번져나갔다. 너무나 허술했던 경비 상황과 그 경비 상황보다 더 허술했던 초기 수사 발표는 수많은 허점을 안고 있었다. 수사 발표에서 나타난 허점은 곧 의문점으로 변해갔고 작은 의문들은 눈덩이처럼 뭉쳐지며 엄청난 의혹으로 발전했다. 옛말에 도둑이 들려면 개도 안 짖는다고 했지만 박정희 정권의 철통같은 경호가 문세광이라는 재일동포 청년에게 어이없이 뚫린 것은 사건 당시부터 음모론이 무성하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 일반의 예상과는 달리 문세광을 재판이 끝나자마자 사형에 처한 것도 여러 가지 면에서 음모론을 부추겼다. 어쩌면 문세광 처형 후의 무성한 음모론이 칼(KAL)기 폭파범 김현희의 생명을 연장시켜준 것인지도 모른다.

 음모설의 수준도, 음모의 동기도 가지가지였다. 당시 합동수사본부의 요원이었던 서울시경 감식계장 이건우 경감은 1989년 월간 <다리>에서 행한 증언을 통해 육영수 여사는 문세광이 쏜 탄환에 맞아 숨진 것이 아니라는 충격적인 주장을 폈다. 2005년 초에는 문화방송(MBC)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 에스비에스(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가 비슷한 시기에 각각 2부작으로 육영수 여사 피살사건의 의혹을 다뤘다. 여기서도 로스앤젤레스(LA) 타임스 도쿄특파원 샘 제임슨은 그동안 한국 텔레비전에서 방영되었던 흑백 영상이 아닌 다른 각도에서 촬영한 새로운 컬러 영상을 공개하면서 이를 토대로 육영수를 쏜 것은 무대 오른쪽에서 뛰어들어온 경호원이었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이건우는 31년간 경찰에 봉직했고 사건의 합동수사본부에 직접 참가했다는 무게감으로, 샘 제임슨은 엘에이 타임스의 후광과 새로운 영상의 힘으로 나름 주목할 만한 주장을 폈다. 여기에서 지면의 부족으로 일일이 검토할 수 없지만 그들의 주장은 튼튼하지 못한 가설에 입각해 있거나 많은 허점(위조 번호판 문제, 경호실의 공모설, 피격 부위, 총격 시의 섬광 등)을 갖고 있다. 다만 문화방송과 에스비에스는 각각 당시의 녹음자료를 음향전문가에게 분석을 의뢰하였는데, 두 기관의 분석이 조금 다르지만 문세광의 총이 아닌 제3의 총에서 발사된 총성이 발견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 가설에 따르면 문세광의 왼쪽 후방에 있던 경호원이 문세광을 향해 발사한 총이 빗나가 육영수 여사를 맞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B열 후방에는 백상규와 김용완 두 경호원이 배치되었는데 이들은 문세광이 첫 발을 오발했을 때 총성을 인식하지 못했고 범인이 뛰어나가는데도 범인을 제지하거나 소리조차 지르지 않는 등 아무런 경호조치를 취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난을 받았다.

 1974년 당시 수사본부는 정밀한 음향 분석과 영상 프레임별로 육영수 여사의 반응을 분석하는 일 없이 현행범 문세광의 총격에 육 여사가 변을 당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문세광이 육영수 여사를 직접 조준했다기보다는 박정희가 연단 뒤로 숨은 뒤 무대 앞으로 튀어나온 박종규를 향해 총을 쏜 것이 빗나가 육 여사를 맞혔을 가능성이 크지만, 새로운 의혹이 제기되어 있는 상황이니만큼 의혹 해소 차원에서 모든 기록을 공개하고 재조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문화방송과 에스비에스가 의혹을 제기했을 당시 국정원 과거사위원회가 활동중이었지만, 위원회는 시간과 역량 부족으로 이 사건을 조사할 수 없었다.

 문세광이 박정희의 저격을 시도한 타이밍이 참으로 절묘했다. 사건 발생 하루 전인 8월14일 한국 정부는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한 수사를 중지한다고 일본 정부에 정식 통보했다. 다음날 일본 정부가 위조된 신청서류를 걸러내지 못하고 잘못 발행해준 여권을 들고 일본 경찰에서 훔친 권총으로 일본에서 나서 자란 젊은이가 한국의 퍼스트레이디를 저격하여 절명케 한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 정부는 즉각적으로 문세광이 조총련 간부 김호룡의 지령을 받고 범행을 저질렀다며 조총련에 대한 단속을 주장했다. 한국 정부는 강경했다.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김동운 일등서기관이 남긴 지문 때문에 1년 내내 일본 정부의 시달림을 받아온 한국 정부는 역공의 찬스를 맞이한 것이다.

진해 벚꽃길에서 육영수의 뒷모습. 박정희가 찍은 사진이다.  <박정희 11-마탄의 사수>
진해 벚꽃길에서 육영수의 뒷모습. 박정희가 찍은 사진이다. <박정희 11-마탄의 사수>
광복절 경축사 10분만에 “탕!”
어이없이 경호가 뚫린 것은
무성한 음모론의 텃밭이 됐다
재판이 끝나자마자 문세광을
처형한 것도 음모론을 부추겼다

어머니의 비극적 죽음과
퍼스트레이디의 중압감…
박근혜는 자칭 ‘태자마마’라는
최태민 목사에게 의존했다
뒷날 김재규는 최태민 문제를
박정희 저격의 요인으로 꼽았다

 공수 바뀐 한일관계…‘도쿄 폭격론’까지 등장

 일본도 처음에는 강경하게 대응했다.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해 한국 정부가 일방적으로 수사 중단을 통보한 것은 몹시 불쾌한 일이었다. 더구나 한국에서 문세광 사건의 수사를 실제로는 김대중 납치사건을 저지른 중앙정보부가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었던 것도 일본으로서는 큰 불만이었다. 일본은 일본 경찰이 도난당한 권총으로 한국의 대통령 부인이 사망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법적으로는 한국 국적의 재일한국인이 한국 땅에서 한국인을 살해한 사건에 대해 일본 정부가 법적 책임을 질 이유가 없다고 버텼다. 또 일본 정부는 한국 쪽의 주장과는 달리 이 사건은 문세광의 개인 범행이라며 조총련 배후설을 일축했다. 한국 쪽은 거칠게 반응했다. 일본통 인사들은 서울의 분위기가 ‘도쿄 폭격론’이 나올 정도로 격앙돼 있다고 열을 올렸고, 박정희는 일본대사를 직접 불러 ‘단교’까지 거론해가며 일본 정부의 사죄와 조총련에 대한 단속을 요구했다. 이 뜻밖의 사건으로 한-일 관계가 파탄이 날 것을 우려한 미국은 보채는 한국 정부에 대해 “미국이 할 것은 다 했으니 좀 가만히 있어라”라고 면박을 주면서도 일본이 적당한 선에서 한국에 사죄하도록 개입했다. 일본은 1965년 한-일 교섭 당시 일본 외상이자 만주인맥의 거물이었던 자민당 부총재 시나 에쓰사부로를 ‘진사사절’로 파견했다. 박정희는 시나에게 일본에 대한 불만을 작심하고 퍼부었고, 시나는 청와대를 나서며 이런 모욕은 평생 처음이라고 고개를 저었다고 한다.

 역사에 원인과 결과가 없는 사건이 없다지만, 이 사건만큼 유신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연쇄반응을 낳은 사건도 드물다. 박정희는 아내의 장례식을 치르고 난 뒤 처남 육인수에게 “납치사건이 없었더라면 이런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라며 대단히 비통해했다고 한다. 김대중 납치사건 이후 한국이 납치국가로 낙인찍히면서 한국 국적의 재일동포 청년들은 깊은 모멸감과 좌절감에 시달려야 했다. 문세광 역시 김대중의 연설 녹음을 10번 넘게 반복 청취할 정도로 김대중 구출 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그는 박정희 1인독재를 타도하는 것이 한국 혁명에 가장 중요한 일이라면서 자신은 “죽음이냐 승리냐의 혁명전쟁에 나선다”고 유서에 썼다.

 광복절 저격사건으로 박정희는 부인을 잃었다. 박정희는 사건 직전인 8월12일 야당의 긴급조치 해제 건의안을 부결시켰지만, 사건 후인 23일 긴급조치를 해제하는 등 잠시 유화적인 태도를 취했다. 국민들은 육영수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했으나, 그 슬픔 때문에 박정희의 독재를 용인하지는 않았다. 국민들의 저항이 계속되자 박정희는 평정심을 잃고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8인에 대한 사법살인을 자행했다. 광복절 저격사건의 좀더 직접적인 결과는 권력구조의 변화였다.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이후락이 물러난 데 이어 저격사건으로 경호실장 박종규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5·16 이후 최측근에서 박정희를 떠받치던 윤필용, 이후락, 박종규가 차례로 물러났고 그 빈자리를 메운 것은 차지철과 김재규였다. 유신체제 몰락의 인적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육영수의 빈자리를 메운 것은 프랑스에 유학 가 있던 23살의 박근혜였다. 1917년생 박정희의 나이는 58살, 1~2년쯤 지난 뒤 새장가를 들었어야 할 나이였으나 본인은 아직 시집보내지 않은 딸들이 있다는 이유로, 주변의 권력자들은 새로운 대통령 부인의 탄생으로 인한 권력지형의 변화에 대한 우려로 박정희의 재혼을 적극 추진하지 않았다. 대신 대연회, 소연회 등 여자 문제를 놓고 별의별 소문이 떠돌았다. 어머니의 비극적인 죽음과 어린 나이에 퍼스트레이디 역할의 중압감에 시달리던 박근혜는 자칭 ‘태자마마’라던 최태민이라는 종잡을 수 없는 목사에게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박정희조차 어쩌지 못한 최태민 문제는 박근혜를 제외한 유신정권 핵심 인사 모두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뒷날 김재규는 법정에서 박정희를 쏘게 된 요인의 하나로 최태민 문제를 꼽았다. 인간 박정희에게, 나아가 박정희 체제에 육영수의 빈자리는 참으로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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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수의 빈자리는 참으로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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