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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소복 입은 어머니들, 아들딸 영정 안고 거리행진 / 박정기

등록 2012-03-25 19:40

1990년 6월10일 성균관대에서 ‘제1회 전국민족민주열사 합동추모제 및 6월항쟁 계승 국민결의대회’를 끝낸 뒤 유가협 어머니들이 소복 차림으로 자식들 112명의 영정사진을 든 채 평화행진에 나서고 있다. 경찰의 저지로 행진은 중단됐고 청년학생들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0년 6월10일 성균관대에서 ‘제1회 전국민족민주열사 합동추모제 및 6월항쟁 계승 국민결의대회’를 끝낸 뒤 유가협 어머니들이 소복 차림으로 자식들 112명의 영정사진을 든 채 평화행진에 나서고 있다. 경찰의 저지로 행진은 중단됐고 청년학생들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78
1990년 6월9일 박정기와 유가족들은 모두 밤을 꼬박 새웠다. 전국민족민주열사 합동추모제를 위한 제단은 동이 튼 뒤에야 마무리됐다. 모두들 첫 합동추모제의 설렘에 잠이 오지 않았다.

함께 작업을 도운 시민·학생들도 숙연한 자세로 열사들의 영정사진이 걸린 제단을 바라보았다. 박종철·이한열·전태일…, 모두 112명의 열사였다. 지금껏 어느 집회에서도 볼 수 없었던 풍경이었다. 사진만으로도 보는 이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피 어린 시대의 제단이었다.

그동안 사업회가 없어 추모제를 열지 못한 유가족들은 박정기의 손을 잡고 고마움을 전했다. 행사를 기다리는 동안 학생들은 긴 줄에 매단 열사 대자보를 읽었다. 대자보가 너무 많아 다 읽을 수 없었다. 걷다 멈추고 다시 걷다 멈추며 들여다보았다. 열사 대자보는 112명의 열전으로 요약한 민주화운동사였다.

마침내 6월10일 오후 2시, 시민·학생 3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국민연합(민자당 일당독재 분쇄와 민중생존권 쟁취 국민연합)이 주최한 ‘제1회 합동추모제 및 6월항쟁 계승 국민결의대회’가 열렸다. 3년 전 국본(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 주최로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전국 20여개 도시에서 열린 바로 그날이었다. 바로 전날은 이한열이 최루탄에 쓰러진 3주기이기도 했다.

유가협의 유가족들과 전노협 소속 노동자들, 전대협 소속 학생들, 비전향 장기수와 백기완 등 재야 인사들이 참석했다. 대회 도중 수배중인 전대협 의장 송갑석이 등장해 연설을 하고 자리를 빠져나갔다. 시민·학생들은 “민자당 분쇄, 노태우 정권 타도” 구호를 외쳤다. 어머니들은 소복을 입고 무대에 등장했다.

이날 추모제에서 이근혜 어린이가 ‘아빠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었다. 이근혜는 89년 거제도에서 폭력적인 노점상 단속에 분신으로 항거한 이재식 열사의 딸이다. 어린 소녀의 편지 낭독에 금잔디광장이 숨죽였다. 이근혜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동대문의 창신동 언덕배기에서 살았다. 어머니가 일을 나가고 나면 그는 동생 정우와 함께 한울삶에서 살다시피 했다. 남매는 박정기와 유가족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하지만 이후 합동추모제에서 편지 낭독은 식순에서 빠졌다. 유가족들이 심정적으로 힘겨워하고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날 편지를 읽은 이근혜는 몇해 전부터 명동성당 앞에서 티베트 음식점인 ‘포탈라’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 그의 가게는 명동재개발구역으로 지정돼 있다. 아버지에 이어 2대째 강제철거의 위협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어 추모제에서는 살풀이춤과 천을 가르는 의식이 선보였다. 춤꾼은 천 한가운데를 갈랐다. 자본과 정권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는 의식이었다. 추모제의 마지막 순서는 헌화였다. 유가족들은 국화꽃을 한아름 들고 시민·학생들에게 국화를 건네주었다. 시민들은 112개의 영정 앞에 국화를 놓고 묵념을 했다.

유가족들은 영정사진을 가슴에 안고 금잔디광장에서 동대문의 한울삶까지 평화행진에 나섰다. 아버지 어머니들이 앞장서고 학생과 노동자들이 뒤를 따랐다. 이날 거리에선 ‘6월항쟁 계승대회’가 열렸다. 학생과 시민들은 서울 도심 곳곳에서 거리시위를 벌였다. 전국 14개 도시에서도 집회와 시위가 열렸다. 경찰은 ‘6월항쟁 계승 국민결의대회’를 불법 집회로 규정하고 서울에 2만여명, 전국에 3만5000여명의 전경을 배치했다. 이날 경찰은 전국에서 682명을 연행했다.

이날 주최쪽은 87년부터 국민대회가 열린 6월10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할 것을 정부에 요구했다. 17년 뒤 노무현 정부는 6·10 항쟁 20돌인 2007년 6월10일을 ‘6·10 민주항쟁 기념일’로 지정했다.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합동추모제는 90년 이후 지난해까지 꾸준히 열리고 있다. 국가와 자본의 폭력으로 이름 없이 스러져간 열사들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행사였다. 해를 더하면서 확대·개편하는 과정을 거쳐 범국민추모제로 명칭을 바꿔 오늘에 이르렀다. 현재는 열사의 범위를 세상을 떠난 비전향 장기수와 사법살인으로 희생된 인혁당 등의 사형수까지 포함하고 있다.

박정기는 “진정한 민주사회가 완성될 때까지 범국민 추모제는 계속 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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