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살의 무명 작곡가 정태춘은 데뷔 앨범을 준비하던 1978년 부산에서 올라온 21살의 박은옥을 레코드회사 사장의 소개로 만났다. 1979년 정태춘이 준 곡으로 데뷔한 가수 박은옥은 1980년 정태춘과 결혼했고, 이후 ‘사랑하는 이에게’를 비롯해 오직 정태춘의 노래만 불렀다. 30여년을 부부이자 음악적 동반자로서 산 두 사람은 서로에게 분신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절필’ 10년만에 새 앨범 정태춘·박은옥
‘절필’ 10년만에 새 앨범 정태춘·박은옥
가수 정태춘(58)·박은옥(55) 부부가 앨범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를 냈다.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2002) 이후 10년 만이다. 40~50대에게는 ‘촛불’, ‘떠나가는 배’, ‘사랑하는 이에게’ 등의 대중가수로, 30~40대에게는 변혁운동의 전위에 선 저항가수로 각인돼 있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개념연예인’의 원조였던 정태춘. 30여년간 그의 아내이자 음악적 동지인 박은옥. 그들의 열한번째 앨범에 실린 아홉개의 곡들은 “두 부부의 대화로 이뤄진 한 권의 시집 같은 분위기” 속에서 “분노와 직설을 버리고 다시 관조와 서정, 그리고 새로운 그리움을 안고 어느 먼 물가로 떠나가 버린”(보도자료 중에서) 한 가수의 긴 여정을 떠올리게 했다.
정태춘은 이 앨범이 음악활동의 재개로 이해되는 것을 한사코 마다했다. 그에게 이 앨범은 지난 30여년의 우여곡절과 간난신고를 함께한 아내 박은옥에 대한 감사와 미안함의 표시이다. 박은옥에게는 여전히 비상한 재능의 남편이 다시 음악으로 돌아오는 통로이기를 바라는 마음일 테고. 앨범 발매 기념 공연은 3월6일부터 11일까지 서울 케이티앤지 상상아트홀(삼성동)에서 열린다. 문의. (02)3485-8700.
인터뷰/이인우 기획위원 iwlee21@hani.co.kr
10년 만에 나온 정태춘의 자작곡들은 강렬한 사회시(서울역 이씨)에서 인간과 자연에 대한 사색(저녁 숲 고래여, 강이 그리워, 섬진강 박 시인)과 작가 자신을 은유한 듯한 비극적인 서정(꿈꾸는 여행자, 눈먼 사내의 화원)을 거쳐 시대를 응시하며(바다로 가는 시내버스) 웅혼한 서사의 세계(날자, 오리배)로 나아가고 있었다. 앨범 마지막에는 20년 전 운동의 전위에 서서 부른 <92년 장마, 종로에서>가 두 부부의 듀엣으로 새롭게 불려졌다. 정태춘은 이 노래에 대해 “지금 이 땅의 순정한 진보 활동가들과 젊은 이상주의자들에게 헌정하는 마음으로 다시 녹음했다”는 후기를 남겼다.
노무현정부 즈음 음악활동 접었다
“세상은 더 나빠지고 있는데 다들 너무 명랑…
내 능력의 한계에도 절망했구요” -타이틀 곡 ‘바다로 간 시내버스’는 특별히 아내 박은옥에게 헌정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박은옥에게 잘 맞는 노래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만든 노랩니다.(웃음) 저는 역사적으로 특별한 체험을 한 386세대에게 깊은 연대감을 지니고 있는데 그 노래는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박은옥으로부터 시상을 얻어 결국 내 안의 이야기로 돌아온 느낌도 없지 않지요.” “(박은옥) 내게도 가장 특별한 노래예요. 상투적인 말일지 모르지만 이 노래를 녹음하며 가장 많이 울었어요. 왠지 가장 슬프고 동시에 가장 위안이 되는 노래였습니다.” -개인적으로 ‘눈먼 사내의 화원’이 참 좋았습니다. 정태춘이란 가수의 자전적 냄새가 많이 나는 듯했어요. “(박은옥) 자기 이야기가 가장 많이 담긴 노래지요. 눈먼 남자한테 아름다운 화원이란 얼마나 가혹한 운명인가요? 그런데 정태춘씨가 그러더군요. 눈먼 사내만이 볼 수 있는 화원이라고. 원래는 내가 부르기로 했다가 녹음 날 목이 너무 안 좋아 만든 사람이 불렀는데, 곡을 위해서는 잘된 일이었어요.” -앨범 후기에 여러 이름들이 보이더군요. “개인적으로 친한 이원규·박남준 시인이 지리산 쪽에 사는데 그 사람들 집에 놀러 갔다가 섬진강을 보고 ‘강이 그리워’를, 박남준 시인의 시집에서 좋은 구절을 골라 트로트 곡으로 만든 게 ‘섬진강 박 시인’, 울주에 사는 백무산 시인을 따라 반구대 암각화 구경을 갔다가 고래 이미지에 이끌려 ‘저녁 숲 고래여’를 만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사는 이 반구대 고래 이야기가 가장 맘에 듭니다. 사진가 김홍희 후배의 몽골 사진전에서 본 모래바람이 ‘꿈꾸는 여행자’를 낳았고, ‘날자, 오리배’는 박민규의 단편소설 ‘아, 하세요 펠리컨’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이런 분들이 정태춘의 노래를 “재촉하고 기다려준 사람들”인가요? “시인 곽재구·도종환, 판화가 이철수 등이 동갑내기 친구들인데 자주 그랬죠. 가수가 말로만 떠들지 말고 노래를 하라고. 그러면 내 말을 듣기 싫은 사람들이 노래라고 듣겠냐, 고 나는 뻗대고. 허허.” -2002년 이후 사실상 절필하고 곡을 만들지 않았는데, 새로 앨범을 만든 것은 마음이 바뀐 것인가? “이번 앨범은 오로지 박은옥을 위한 겁니다. 노래를 녹음하면서는 오랫동안 새 앨범을 기다려준 벗들에게 감사하는 마음도 담았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이 부부가 전하는 사연은 이랬다. 음악활동을 중단한 지 7~8년쯤 된 2010년 어느날 밤 두 부부의 대화는 심각했다. 음악을 다시 하자, 안 한다. 그러면 적어도 나를 위한 노래는 만들어줄 수 있지 않으냐. 싫다. 박은옥을 위해 만들어도 결국은 내 마음이 담기는데 나는 내 마음을 남에게 내보이기 싫다. 그날 밤의 부부싸움은 결국 박은옥의 항복으로 끝났다. 더는 내 욕심 때문에 이 남자를 힘들게 하지 말자. 그런데 다음날 아침 정태춘이 불쑥 말을 꺼냈다. 좋다. 이번 한번만이다. “(박은옥) 왜 하룻밤새 마음이 바뀌었는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희한했어요. 7~8년 채근하다가 비로소 내가 마음을 접으니까, 이 사람 마음이 돌아선 게….” 기자가 짐작건대 전적으로 미안함이었을 것이다. 고집을 부리던 정태춘은 그날 밤 뒤척이는 꿈결에서 자기 곁에서 세월을 흘려버린 한 젊고 아리따운 가수를 만났던 게 아닐까.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 보지요. 활동을 중단한 무렵이 노무현 정권 등장 전후인데 어떤 설명이 가능할까요? “저는 인간의 삶은 자기를 둘러싼 세계와의 투쟁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예술은 더 그렇죠. 그런데 나를 둘러싼 상황이 변하면서 내 투쟁 방식이 별로 의미 없는 것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내 투쟁이 너무 이상적이랄까, 원론적이고, 남들에게도 그렇게 비쳤던 것 같구요. 이라크 파병이라든가, 한-미 에프티에이 추진이라든가 하는 문제들에 대해 박수를 치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정치가 바꿔놓은 세상 속으로 슬쩍 편입하기는 더욱 싫었고.” 한때 노무현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나 정작 대선에서는 민노당의 권영길 후보를 지지했던 정태춘은 어떤 점에서는 “완고한 이상주의자”였다. 그의 이상은 어쩌면 순수한 의미의 사회주의 혹은 무정부주의적인 것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그런 그에게 현실 정치에서의 승리만으로 진보의 목표를 이룬 양하는 일부 운동 세태가 용납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정권이 군부독재에서 김대중과 노무현으로 넘어왔지만, 자본에 대한 종속은 오히려 더 악화되고 있다는 현실에 그는 좌절감과 분노를 느낀 듯했다. “나를 진보쪽으로 세우고 싶어하지만
제대로 고민 않고 있으니 해줄 말 없어
가장 유효한 경멸은 노래 부르지 않는 것” “결국 문제는 자본인데, 사람들이 그걸 읽지 못하는 건지, 일부러 외면하는 건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미 산업주의자들의 식민지가 되어버렸고, 문예·문학·철학·담론이 사라졌습니다. 세상은 시장과 상품이 밀림처럼 그 자리를 점령해버렸구요. 나는 이걸 정당하다고, 어쩔 수 없다고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세상은 더 나빠지고 있는데 다들 너무 명랑해졌어요. 나는 그게 싫었습니다. 문제를 알면서도 달라진 상황에 대응하지 못하는 내 능력의 한계에도 절망했구요. 그래서 뛰어내린 거죠, 뭐. 제가 그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변화된 세계라는 열차에서 뛰어내리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그건 결국 그가 관계 맺어온 세계와 사람들과의 절연을 의미했다. 현실세계의 이중성은 이상주의자 정태춘에게 인간의 윤리성을 근본적으로 회의하게 만들었고, 그것은 “인간이 이뤄놓은 문명 자체에 대한 불신과 인류라는 종 자체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졌다. 그런 정태춘에게 “민중과 역사를 호도하면서 이룩되는 문명의 위선에 대한 가장 유효한 경멸”은 “가수가 노래를 부르지 않고 시인이 시를 쓰지 않는 것”이었다. -더 옛날로 가볼까요? 80년대 중반 6월항쟁을 전후해 정상급의 대중가수에서 요즘말로 하면 ‘개념’ 연예인으로 변신한 이유는? “체질적으로 나는 주류 문화가 맞지 않았습니다. 예기치 않은 히트 뒤에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하려 했는데 대중들에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비로소 나를 돌아보게 되었어요. 다른 예술인들이 하는 이야기(그는 이 무렵 <실천문학> 등 반체제 문학을 섭렵했다)도 들으며 내가 지향할 세계, 내가 만들고 불러야 할 노래, 내가 살아야 할 삶에 대해 여러 생각을 했지요.” -(박은옥에게) 가수로서 남편의 정신적 변화에 어떤 괴리감을 느끼지는 않았나? “이 사람이 운동진영으로 들어간 게 청계피복노조가 전태일 기념 일일찻집 행사에 초청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였지만, 어느날 갑자기는 아니었어요. 그의 성향을 잘 아는 제게는 정태춘의 음악이 개인 일기에서 ‘사회 일기’로 바뀌었을 뿐이었습니다. 다만, 나중에 내가 일상의 짐에서 벗어나 노래의 열정이 되살아날 무렵에 이 사람은 음악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던 점이 힘들다면 힘든 시기였지요.” -음악을 접고서는 무슨 일을 하며 지냈나요? “처음에는 한 2년 시를 열심히 썼습니다. 시집 <노독일처>(2004)를 내고 다시 한 권 분량쯤을 더 쓴 뒤로는 관심사가 사진으로 옮겨갔습니다. 한동안은 가죽 바느질을 혼자 익혀서 가방 따위를 만드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랐고. 나는 늘 뭘 만들고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지 요즘은 붓글씨를 배워 짤막한 한시를 짓는 재미에 푹 빠져 지냅니다.” “(박은옥) 음악을 닫아놓으니까, 창작 에너지가 다른 곳으로 터져나오나 봐요.” -사진은 주로 어떤 소재를 다루나? “좀 폼나게 얘기하면 아이러니를 즐기는 편입니다. 세상의 아이러니, 숨겨진 이면, 외면당한 것들에 시선이 많이 갑니다. 팬 카페에 가명으로 사진 사이트를 열어놓고 남 얘기 하듯 사진을 올리고 있어요.” -정말 더이상 음악활동을 하지 않을 건가요? 이번처럼 ‘불가피한 경우’를 대비해 완전히 장담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요? “글쎄요, 뭘 미리 장담하는 게 그렇기도 하지만, 아무튼 현재로서는 바뀐 게 없습니다.” “(박은옥) 이 사람 이야기에는 앞으로 ‘장담할 수 없지만’이라는 말을 꼭 붙여야겠어요(웃음).” -정치의 계절입니다. 더러 정태춘을 필요로 하거나, 발언을 요구받는 경우도 있을 법한데? “더러 있긴 했지요. 나를 진보 쪽의 한 모습으로 세우고 싶어하는. 하지만 내가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에 대해 제대로 고민하지 않고 있으니, 해줄 말도 능력도 없어요.” “이번 앨범은 오로지 박은옥을 위한 것
다시 부른 ‘92년 장마 종로에서’는
순정한 진보와 이상주의자에 대한 헌정” “(박은옥) 이 사람의 말은 모든 걸 ‘당대의 문제로만’, 또는 당대의 문제‘만’ 바라보지 말라는 뜻이에요. 지금의 문제를 외면하고 있는 게 아니라. 지금의 문제에서 벗어나 더 넓고 더 깊게 보라는 뜻이죠. 제가 볼 때 이 사람은 (세상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어요. 오히려 시선이 좀더 넓고, 더 깊고, 더 멀리 가 있다고 봅니다. 다만 그 거리가 너무 커서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요. 나는 음악을 접고 있는 정태춘씨의 마음상태를 그렇게 이해합니다.” “이 사람아, 그건 괜한 미화일세. 내 이야기에 ‘더 큰’이니 ‘더 멀리’니 하는 말은 안 썼으면 합니다.” 음악활동에 대한 두 부부의 의견차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신경전이었다. 인터뷰를 마칠 무렵에도 정태춘은 음악을 안 하겠다면서 앨범 내고 인터뷰까지 하는 자신을 무척이나 쑥스러워했다. ‘앨범과 공연 홍보’는 돈을 쓴 제작 관계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로서 하는 것이지만, 더이상 음악이나 운동과 관련해 거론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끝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박은옥은 조금 달랐다. 이 사람에게 이 앨범이 누군가에게 띄우는 편지라면, 저에게는 누군가의 위안이었으면 좋겠어요. 어떻게든 이 삶을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한테 비록 힘은 못 되어 주더라도, 고단한 시간의 위안이 될 수 있다면… 제가 정태춘의 노래를 부르며 그러했듯이.
1980·90년대 ‘노래하는 시인’이자 대표적 ‘저항가수’부부
정태춘·박은옥은
가수 정태춘은 1954년 평택에서 8남매의 일곱째로 태어나 평택고를 나왔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매형이 사다 준 기타로 음악을 시작했다. 바이올린으로 음대에 진학하려고 재수하던 시절 제도교육 음악에 회의를 느끼고 대중가요 작곡을 시작했다. 1978년 데뷔 앨범 <시인의 마을>이 대히트하면서 1979년 여러 방송사의 작사상, 신인가수상 등을 받았다. 시적인 노랫말과 음유적인 창법의 그의 노래는 록밴드 산울림의 ‘아니, 벌써’와 더불어 당시 한국 가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받았다.
본격적으로 자기 음악을 추구한 2집, 3집의 실패로 잠시 좌절을 겪다가 ‘떠나가는 배’(1984), ‘북한강에서’(1985)가 크게 인기를 얻으면서 노래하는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억압적인 사회현실에 시선을 돌리면서 대표적인 저항가수이자 문화운동가로 변신했다. 1990년대의 음반검열 철폐 운동의 선두에 서서 사전심의제 폐지를 이끌어낸 주역이었다. 2000년대 초에는 고향인 평택 미군기지 반대 운동 등에 헌신했다. 스스로를 “완고한 이상주의자”라고 부르는 그는 2002년 10번째 앨범과 2004년 시집 <노독일처>를 마지막으로 절필한 채 사실상 ‘은둔’했다. “민중의 삶은 여전히 고달픈데, 세상은 모른 체 명랑한 것이 싫었다.” 부산 출신의 박은옥은 가수 최백호의 소개로 서울 레코드사에 왔다가 정태춘을 만나 그의 곡으로 솔로앨범 <회상>을 낸 뒤 1980년 결혼했다. 두 사람이 함께 부른 ‘사랑하는 이에게’는 지금도 널리 애창되는 듀엣 곡이다.
“세상은 더 나빠지고 있는데 다들 너무 명랑…
내 능력의 한계에도 절망했구요” -타이틀 곡 ‘바다로 간 시내버스’는 특별히 아내 박은옥에게 헌정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박은옥에게 잘 맞는 노래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만든 노랩니다.(웃음) 저는 역사적으로 특별한 체험을 한 386세대에게 깊은 연대감을 지니고 있는데 그 노래는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박은옥으로부터 시상을 얻어 결국 내 안의 이야기로 돌아온 느낌도 없지 않지요.” “(박은옥) 내게도 가장 특별한 노래예요. 상투적인 말일지 모르지만 이 노래를 녹음하며 가장 많이 울었어요. 왠지 가장 슬프고 동시에 가장 위안이 되는 노래였습니다.” -개인적으로 ‘눈먼 사내의 화원’이 참 좋았습니다. 정태춘이란 가수의 자전적 냄새가 많이 나는 듯했어요. “(박은옥) 자기 이야기가 가장 많이 담긴 노래지요. 눈먼 남자한테 아름다운 화원이란 얼마나 가혹한 운명인가요? 그런데 정태춘씨가 그러더군요. 눈먼 사내만이 볼 수 있는 화원이라고. 원래는 내가 부르기로 했다가 녹음 날 목이 너무 안 좋아 만든 사람이 불렀는데, 곡을 위해서는 잘된 일이었어요.” -앨범 후기에 여러 이름들이 보이더군요. “개인적으로 친한 이원규·박남준 시인이 지리산 쪽에 사는데 그 사람들 집에 놀러 갔다가 섬진강을 보고 ‘강이 그리워’를, 박남준 시인의 시집에서 좋은 구절을 골라 트로트 곡으로 만든 게 ‘섬진강 박 시인’, 울주에 사는 백무산 시인을 따라 반구대 암각화 구경을 갔다가 고래 이미지에 이끌려 ‘저녁 숲 고래여’를 만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사는 이 반구대 고래 이야기가 가장 맘에 듭니다. 사진가 김홍희 후배의 몽골 사진전에서 본 모래바람이 ‘꿈꾸는 여행자’를 낳았고, ‘날자, 오리배’는 박민규의 단편소설 ‘아, 하세요 펠리컨’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이런 분들이 정태춘의 노래를 “재촉하고 기다려준 사람들”인가요? “시인 곽재구·도종환, 판화가 이철수 등이 동갑내기 친구들인데 자주 그랬죠. 가수가 말로만 떠들지 말고 노래를 하라고. 그러면 내 말을 듣기 싫은 사람들이 노래라고 듣겠냐, 고 나는 뻗대고. 허허.” -2002년 이후 사실상 절필하고 곡을 만들지 않았는데, 새로 앨범을 만든 것은 마음이 바뀐 것인가? “이번 앨범은 오로지 박은옥을 위한 겁니다. 노래를 녹음하면서는 오랫동안 새 앨범을 기다려준 벗들에게 감사하는 마음도 담았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이 부부가 전하는 사연은 이랬다. 음악활동을 중단한 지 7~8년쯤 된 2010년 어느날 밤 두 부부의 대화는 심각했다. 음악을 다시 하자, 안 한다. 그러면 적어도 나를 위한 노래는 만들어줄 수 있지 않으냐. 싫다. 박은옥을 위해 만들어도 결국은 내 마음이 담기는데 나는 내 마음을 남에게 내보이기 싫다. 그날 밤의 부부싸움은 결국 박은옥의 항복으로 끝났다. 더는 내 욕심 때문에 이 남자를 힘들게 하지 말자. 그런데 다음날 아침 정태춘이 불쑥 말을 꺼냈다. 좋다. 이번 한번만이다. “(박은옥) 왜 하룻밤새 마음이 바뀌었는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희한했어요. 7~8년 채근하다가 비로소 내가 마음을 접으니까, 이 사람 마음이 돌아선 게….” 기자가 짐작건대 전적으로 미안함이었을 것이다. 고집을 부리던 정태춘은 그날 밤 뒤척이는 꿈결에서 자기 곁에서 세월을 흘려버린 한 젊고 아리따운 가수를 만났던 게 아닐까.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 보지요. 활동을 중단한 무렵이 노무현 정권 등장 전후인데 어떤 설명이 가능할까요? “저는 인간의 삶은 자기를 둘러싼 세계와의 투쟁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예술은 더 그렇죠. 그런데 나를 둘러싼 상황이 변하면서 내 투쟁 방식이 별로 의미 없는 것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내 투쟁이 너무 이상적이랄까, 원론적이고, 남들에게도 그렇게 비쳤던 것 같구요. 이라크 파병이라든가, 한-미 에프티에이 추진이라든가 하는 문제들에 대해 박수를 치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정치가 바꿔놓은 세상 속으로 슬쩍 편입하기는 더욱 싫었고.” 한때 노무현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나 정작 대선에서는 민노당의 권영길 후보를 지지했던 정태춘은 어떤 점에서는 “완고한 이상주의자”였다. 그의 이상은 어쩌면 순수한 의미의 사회주의 혹은 무정부주의적인 것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그런 그에게 현실 정치에서의 승리만으로 진보의 목표를 이룬 양하는 일부 운동 세태가 용납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정권이 군부독재에서 김대중과 노무현으로 넘어왔지만, 자본에 대한 종속은 오히려 더 악화되고 있다는 현실에 그는 좌절감과 분노를 느낀 듯했다. “나를 진보쪽으로 세우고 싶어하지만
제대로 고민 않고 있으니 해줄 말 없어
가장 유효한 경멸은 노래 부르지 않는 것” “결국 문제는 자본인데, 사람들이 그걸 읽지 못하는 건지, 일부러 외면하는 건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미 산업주의자들의 식민지가 되어버렸고, 문예·문학·철학·담론이 사라졌습니다. 세상은 시장과 상품이 밀림처럼 그 자리를 점령해버렸구요. 나는 이걸 정당하다고, 어쩔 수 없다고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세상은 더 나빠지고 있는데 다들 너무 명랑해졌어요. 나는 그게 싫었습니다. 문제를 알면서도 달라진 상황에 대응하지 못하는 내 능력의 한계에도 절망했구요. 그래서 뛰어내린 거죠, 뭐. 제가 그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변화된 세계라는 열차에서 뛰어내리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그건 결국 그가 관계 맺어온 세계와 사람들과의 절연을 의미했다. 현실세계의 이중성은 이상주의자 정태춘에게 인간의 윤리성을 근본적으로 회의하게 만들었고, 그것은 “인간이 이뤄놓은 문명 자체에 대한 불신과 인류라는 종 자체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졌다. 그런 정태춘에게 “민중과 역사를 호도하면서 이룩되는 문명의 위선에 대한 가장 유효한 경멸”은 “가수가 노래를 부르지 않고 시인이 시를 쓰지 않는 것”이었다. -더 옛날로 가볼까요? 80년대 중반 6월항쟁을 전후해 정상급의 대중가수에서 요즘말로 하면 ‘개념’ 연예인으로 변신한 이유는? “체질적으로 나는 주류 문화가 맞지 않았습니다. 예기치 않은 히트 뒤에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하려 했는데 대중들에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비로소 나를 돌아보게 되었어요. 다른 예술인들이 하는 이야기(그는 이 무렵 <실천문학> 등 반체제 문학을 섭렵했다)도 들으며 내가 지향할 세계, 내가 만들고 불러야 할 노래, 내가 살아야 할 삶에 대해 여러 생각을 했지요.” -(박은옥에게) 가수로서 남편의 정신적 변화에 어떤 괴리감을 느끼지는 않았나? “이 사람이 운동진영으로 들어간 게 청계피복노조가 전태일 기념 일일찻집 행사에 초청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였지만, 어느날 갑자기는 아니었어요. 그의 성향을 잘 아는 제게는 정태춘의 음악이 개인 일기에서 ‘사회 일기’로 바뀌었을 뿐이었습니다. 다만, 나중에 내가 일상의 짐에서 벗어나 노래의 열정이 되살아날 무렵에 이 사람은 음악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던 점이 힘들다면 힘든 시기였지요.” -음악을 접고서는 무슨 일을 하며 지냈나요? “처음에는 한 2년 시를 열심히 썼습니다. 시집 <노독일처>(2004)를 내고 다시 한 권 분량쯤을 더 쓴 뒤로는 관심사가 사진으로 옮겨갔습니다. 한동안은 가죽 바느질을 혼자 익혀서 가방 따위를 만드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랐고. 나는 늘 뭘 만들고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지 요즘은 붓글씨를 배워 짤막한 한시를 짓는 재미에 푹 빠져 지냅니다.” “(박은옥) 음악을 닫아놓으니까, 창작 에너지가 다른 곳으로 터져나오나 봐요.” -사진은 주로 어떤 소재를 다루나? “좀 폼나게 얘기하면 아이러니를 즐기는 편입니다. 세상의 아이러니, 숨겨진 이면, 외면당한 것들에 시선이 많이 갑니다. 팬 카페에 가명으로 사진 사이트를 열어놓고 남 얘기 하듯 사진을 올리고 있어요.” -정말 더이상 음악활동을 하지 않을 건가요? 이번처럼 ‘불가피한 경우’를 대비해 완전히 장담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요? “글쎄요, 뭘 미리 장담하는 게 그렇기도 하지만, 아무튼 현재로서는 바뀐 게 없습니다.” “(박은옥) 이 사람 이야기에는 앞으로 ‘장담할 수 없지만’이라는 말을 꼭 붙여야겠어요(웃음).” -정치의 계절입니다. 더러 정태춘을 필요로 하거나, 발언을 요구받는 경우도 있을 법한데? “더러 있긴 했지요. 나를 진보 쪽의 한 모습으로 세우고 싶어하는. 하지만 내가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에 대해 제대로 고민하지 않고 있으니, 해줄 말도 능력도 없어요.” “이번 앨범은 오로지 박은옥을 위한 것
다시 부른 ‘92년 장마 종로에서’는
순정한 진보와 이상주의자에 대한 헌정” “(박은옥) 이 사람의 말은 모든 걸 ‘당대의 문제로만’, 또는 당대의 문제‘만’ 바라보지 말라는 뜻이에요. 지금의 문제를 외면하고 있는 게 아니라. 지금의 문제에서 벗어나 더 넓고 더 깊게 보라는 뜻이죠. 제가 볼 때 이 사람은 (세상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어요. 오히려 시선이 좀더 넓고, 더 깊고, 더 멀리 가 있다고 봅니다. 다만 그 거리가 너무 커서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요. 나는 음악을 접고 있는 정태춘씨의 마음상태를 그렇게 이해합니다.” “이 사람아, 그건 괜한 미화일세. 내 이야기에 ‘더 큰’이니 ‘더 멀리’니 하는 말은 안 썼으면 합니다.” 음악활동에 대한 두 부부의 의견차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신경전이었다. 인터뷰를 마칠 무렵에도 정태춘은 음악을 안 하겠다면서 앨범 내고 인터뷰까지 하는 자신을 무척이나 쑥스러워했다. ‘앨범과 공연 홍보’는 돈을 쓴 제작 관계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로서 하는 것이지만, 더이상 음악이나 운동과 관련해 거론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끝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박은옥은 조금 달랐다. 이 사람에게 이 앨범이 누군가에게 띄우는 편지라면, 저에게는 누군가의 위안이었으면 좋겠어요. 어떻게든 이 삶을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한테 비록 힘은 못 되어 주더라도, 고단한 시간의 위안이 될 수 있다면… 제가 정태춘의 노래를 부르며 그러했듯이.
1980·90년대 ‘노래하는 시인’이자 대표적 ‘저항가수’부부
정태춘·박은옥은
가수 정태춘은 1954년 평택에서 8남매의 일곱째로 태어나 평택고를 나왔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매형이 사다 준 기타로 음악을 시작했다. 바이올린으로 음대에 진학하려고 재수하던 시절 제도교육 음악에 회의를 느끼고 대중가요 작곡을 시작했다. 1978년 데뷔 앨범 <시인의 마을>이 대히트하면서 1979년 여러 방송사의 작사상, 신인가수상 등을 받았다. 시적인 노랫말과 음유적인 창법의 그의 노래는 록밴드 산울림의 ‘아니, 벌써’와 더불어 당시 한국 가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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