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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엄마, 이혼도 재혼도 좋은데 그때 약속 왜 안 지켰어?

등록 2012-02-10 20:47수정 2012-04-18 10:28

불쑥불쑥 찾아오는 좌절감과 슬픔, 무기력에 휘둘리고 있다면, 지금 당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상처받은 어린 내가 울고 있는지 살펴보세요.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불쑥불쑥 찾아오는 좌절감과 슬픔, 무기력에 휘둘리고 있다면, 지금 당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상처받은 어린 내가 울고 있는지 살펴보세요.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가족
엄마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
초등학교 때 부모님이 이혼했다. 아빠는 외국으로 떠났고, 엄마는 재혼했다. 나는 엄마의 ‘희망’과 ‘혹’ 사이를 줄타기하며 불안한 유년기를 보냈다. 하지만 세상의 편견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대입·취업·결혼 같은 통과의례들은 묵묵히 잘 치러냈다(!). ‘불우한 유년시절’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삼십대 중반에 접어든 지금, 내 안에서는 그때 ‘상처받은 아이’가 자기 얘기를 들어달라고 아우성이다. 아이가 지목하는 ‘가해자’는 주로 엄마인데, 늙은 엄마는 이제 아이의 얘기를 들어줄 의지도 기력도 없다. 또다른 나, ‘어린 시절의 상처받은 나’를 어루만져야 하는 숙제가 또 내 몫으로 남았다. 아직 심리상담가한테 ‘정신줄’을 잡아달라고 돈을 치를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사실 엄마는, 당신이 “불가항력적이었다”고 말하는 이혼·재혼에 대해 내가 비난할까봐 두려워하신다. 하지만 내 인생을 엄청나게 뒤흔든 엄마의 그 선택들에 대해 난 의외로 관대하다. 그런 근본적인 문제에 반항하는 건 견적이 안 나온다는 걸 일찌감치 깨쳤다고나 할까. 반면 고군분투하는 성장과정에서 보여줬던 엄마의 사소하고 무심한 말과 행동들은 오히려 엄마가 조금만 노력했어도 막을 수 있었던 ‘사건’으로 각인돼 용서가 안 된다.

희망과 혹 사이의 나
엄마가 무심코 던진 말과
번번이 무시당한 약속들…

어른이 돼서도 내 안에는
‘상처받은 아이’가 있다

‘국민학교’ 5학년 때였다. 그때 난 엄마를 새아빠, 새형제들한테 내주고, 한집에 살면서도 늘 엄마가 그리운 아이였다. 어느 날 엄마가 말했다. 토요일 학교 끝나고 교문 앞에서 만나자고, 맛있는 거 사준다고. 그주 내내 토요일만 기다렸다. 드디어 그날. 공교롭게도 우리 분단이 방과후 청소를 하는 날이었다. 엄마가 기다릴까봐, 가버릴까봐 애가 탔다. 친구들한테 “엄마가 기다려서 청소 못한다”고 해버리곤 튀었다. 엄마는 오지 않았다. 아이들이 청소를 다 끝내고 나올 때까지. 교문 앞에 서 있는 나를 향해 친구들은 “거짓말쟁이”라고 욕했다. 억울했지만 할 말이 없었다. ‘무슨 일이 생겼나?’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학교 앞 공중전화로 가서 집에 전화를 걸었다. 새아빠가 받았다. 엄마와의 ‘비밀약속’을 들킬까 겁이 났다. 되지도 않게 음성을 변조하고 잘못 건 척해버렸다. 애써 속는 척해주던 새아빠의 목소리가 떠오르면 지금도 낯이 뜨겁다. 집으로 갔다. 엄마는 밥을 하고 계셨다. 엄마 뒤꽁무니를 뱅뱅 맴돌다 물었다. “엄마, 왜 안 왔어?” 엄마가 화를 냈다. “너는 엄마 바쁜 것도 안 보이니?”

만일 엄마가 “너한테 내가 제일 잘못한 게 뭐냐”고 묻는다면, 난 엄마의 이혼도, 재혼도 아닌 이 ‘사건’을 꼽겠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애정결핍… 이제 와 돌이켜보면 난 부모님의 이혼 뒤 이런 심리적 증상들을 홀로 견뎌내고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엄마는 어린 딸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 무관심·무능력했을 뿐만 아니라, ‘번번이’ 이런 식으로 약속을 어기고, 사과하지 않고, 나를 이해심 없는 아이라고 비판했다.

자식을 낳으면 부모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들 하는데, 난 딸을 낳고 ‘엄마로서’ 엄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더 많았다. 엄마가 재혼했을 때, 엄마는 아빠와 나와 오빠가 함께 살던 ‘우리 집’에 덜컥 새식구들을 들였다. 아, 그때 난 엄마의 재혼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돼 있었다. 이런 ‘사건’도 있었다. ‘국민학교’ 6학년 때 뭘 좀 사달라고 했을 때, 엄마가 말했다. “그러니까 엄마가 널 싫어하는 거야.” 내 인생에 가장 악영향을 미친 엄마의 어록이다. ‘그러니까=내가 못됐으니까’ ‘엄마가 널 싫어하는 거야=엄마는 날 정말 싫어하는구나’. 애정결핍에 시달리던 자존감 낮은 딸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실언이었다.

물론 엄마도 억울하단 걸 안다. ‘널 버린 아빠도 있고, 널 구박한 새아빠도 있는데, 널 가장 사랑한 나한테만 왜 그래!’ 엄마의 항변은 일면 타당하다. 더구나 20년도 넘은 이런 시답잖은 일들에 연연하는 건 일종의 ‘비난 깔때기’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일이 잘 안 풀리고, 뭔가 답답할 때… 남 탓을 하고 싶을 때, 비난하기 딱 좋은 게 바로 ‘불우한 유년시절’의 제공자인 엄마인 건 아닌지.

사실, 내 안에 있는 이 글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 난 온갖 사소한 기억의 찌꺼기들까지 다 끄집어내 울고 짜며 ‘폭풍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내가 나한테 놀랐다. 하지만 나는 그 적나라하고 찌질한 기록들의 ‘폭력성’을 이미 경험한 적이 있기에, 차마 엄마한테 그걸 들이밀 수는 없었다. 몇해 전, 엄마는 외국에 사는 숙모에게서 ‘묵직한’ 편지 한통을 받았다. 시누이인 엄마한테 받은 ‘상처’를 A4 십수장에 빼곡히 적어 보내온 거였다. 그때 폭탄을 맞은 듯 정신을 못 차리던 엄마, 나까지 그럴 수야…. 분노로 써내려간 글들을 읽고, 순화하는 과정을 거듭했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글을 쓰고, 다듬는 동안 나는 상처가 상당히 아무는 걸 느꼈다. 이제 나 말고는 기댈 곳이 없는 엄마에게 이런 한풀이를 하는 건, 어린 시절의 내가 아무리 떼를 써도 어른이 된 내가 받아줄 수 없다는 것도 명료해졌다. 이제, 굳이 누군가-특히 엄마가- 들어주지 않아도 난 괜찮을 것 같다.

새로 시작하는 와이(Y)씨

99>마음속 ‘어린 나’를 돌봐주세요

  우선 불행한 과거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용기를 내고, 기꺼이 고통과 직면하고 있는 와이(Y)씨, 당신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는 언제인가, 어디선가 어린아이였으며, 어린아이였을 때 겪은 일은 단순히 ‘나’라는 존재의 배경지식이 아닙니다. 특히 부모와 내가 맺었던 관계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지속적으로 삶의 중요한 영역을 지배합니다.

부모가 나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봐주고, 나의 감정이나 욕구에 민감하게 반응해주며, 나를 가치 있는 존재로 여겨주면 나는 점차 나 자신을 그런 존재로 받아들여 자존감을 형성합니다. 반면에 “너는 정말 형편없구나. 쓸모없는 애야”라는 말을 듣고 자란 아이는 스스로를 무가치한 존재로 여기면서 사소한 일에도 쉽게 상처받고 우울해지고 의기소침해지곤 합니다. 지금 와이씨에게 자주 엄습하는 좌절감, 슬픔, 무기력감은 이런 연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런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나의 과거가 나에게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쳤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 영향력은 주로 힘들고 어려운 일, 스트레스 상황에서 자주 발견됩니다. 분명 그럴 일이 아닌데 과도하게 화가 나거나, 다른 사람과 갈등이 잦거나 할 경우 이는 우리 마음속의 상처받은 아이가 움직인 결과일 수 있습니다.

지금 와이씨가 하는 것처럼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고 그때의 감정을 기억해낸 뒤 지금 느끼는 감정과 비교해보는 것은 상처받은 과거의 어린 나를 돌보는 좋은 방법입니다. 상처받은 어린 내가 고개를 들고 힘들다고 호소하면 다정하고 민감한 부모가 되어 그 아이를 어루만지고 보듬어주세요.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감정을 공감해준다면 그 아이는 점차 삶에 생기를 주는 내면의 또다른 자아로 거듭날 것입니다.

도움말: 조선미 아주대병원 정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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