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1일 퇴임하는 박시환 대법관이 11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집무실에서 대법관으로 보낸 지난 6년간의 소회를 밝히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퇴임 앞둔 박시환 대법관
인터뷰/여현호 선임기자 yeopo@hani.co.kr
인터뷰/여현호 선임기자 yeopo@hani.co.kr
진보입장 5명 역부족…서럽고 분하기도
사건에 쫓기다보니 기대 못미쳐 아쉬움
보수언론의 원색적 공격, 사회 도움 안돼 “여러분, 예전에는 법원장실에 불려가고 그랬던 적이 있었어요. 지금이야 그런 일이 없겠지만, 법원장이 재판과 관련해서 부르면 가지 마세요. 재판관은 재판을 하는 사람인데 누군가에게 불려가서 설명을 하고 해명을 한다는 게, 그게 판사입니까. 가지 마세요. 궁금하면 법원장 자기가 법정에 와서 방청하라고 그러세요. … 여러분은 판사입니다. 생각대로 하세요. 밖에서 무책임이니 유책임이니 말하는데, 그게 다 재판을 자기들 원하는 쪽으로 끌어내기 위해 판사들에게 부담을 주려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서 내린 결론인데 그게 왜 무책임입니까. 무책임한 재판, 얼마든지 하세요.” 회의장에 모인 판사들이 와 하고 폭소를 터뜨리며 박수를 보냈다. 자리를 함께한 법원장들도 벙글거리며 웃었다. 지난 10월 부산지역 판사들을 대상으로 한 박시환(58) 대법관의 특강 모습이었다고 한다. 강연을 들은 한 부장판사는 “배석판사들이 너무 얌전해서 걱정이었는데, 그 강연 뒤에는 합의(판결 방향 논의를 위한 회의)에 들어오는 판사들의 눈이 반짝반짝하더라”고 전했다. 그리 보면 박 대법관은 스스로 말한 대로 “복 받은 사람”이다. 2003년까지 18년 동안 법관 생활을 하면서 소신대로 판결하고, 옳다고 믿은 대로 행동했다. 법원을 떠난 지 2년여 만에 많은 이들의 기대와 주목 속에 대법관으로 임명되어서는 소수자와 약자의 인권 보호를 위한 진보적 판결을 많이 내놓았다. 사법부의 독립과 법관의 양심에 따른 판결은 그가 평생을 두고 지키려 한 가치였다. 그 과정에서 날선 비난의 표적도 됐지만, 감내했다. 대법관 퇴임을 앞둔 지금은, 많은 이들의 기대에 제대로 부응했는지, 못내 아쉽다. 지난 8일 대법원에서 열린 퇴임기념 세미나에서 박 대법관은 “6년간 일하면서 다양화, 진보, 소수 입장을 대변하는 의미에서 대법관에 임명되었다는 부채감과 두려움이 있었으나 결과물이 초라했던 것 같다”며 “많은 일을 처리하는 한 구성원에 불과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소수는 서럽고, 분하기도 하다”고 소회를 털어놓았다. “다수는 소수를 거북하게 여기고, 불편해하며, 위험하게 느끼고, 불안감·이질감·적대감을 표출하기도 한다”며 “소수를 배려하지 않으면 자칫 ‘그들만의 사법부’가 될 수 있다”는 경고도 했다. 11월21일로 6년의 임기를 마치는 박 대법관을 11일 대법원 집무실에서 만났다. -트위터에서 ‘지난 6년 독수리 5남매는 소수자, 약자의 인권을 위해 분투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대법관 14명 가운데 5명이었으니 실제로 분투라고 할 만한 상황이 적지 않았을 것 같다. “결과물로 만들어낸 것이 별로 없어 초라한 느낌이 많이 든다. 소수자로서 설움과 아쉬움도 없지 않고, 역부족도 많이 느꼈다.” -스스로의 기대만큼 못했다는 말로 들린다. 대법관의 업무 부담이 많다 보니 기록 더미 속에서 지쳤을 수도 있고, 때를 맞춰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있는 것 같다. “바로 그렇다. 쏟아지는 사건에 쫓기다 보니 제대로 다뤄야 할 문제를 발굴하거나, 판결이라는 결과물로 엮어낼 수 있도록 이론을 구성할 여유가 없어 사건을 놓친 경우가 없지 않다. 어떤 문제가 쟁점이 되면 법리로서 이를 구체화하는 게 필요한데, 조금씩 타이밍을 놓치면서 의미가 감소돼서 쟁점화하지 못한 경우도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이 그런 경우 아닌가. 2002년 서울남부지원 판사 시절에 양심적 병역거부를 받아들여야 한다며 위헌심판 제청까지 한 사건인데, 결국은 스스로 대부분 유죄를 선고했다. “이미 2004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있었고 헌법재판소도 합헌 결정을 한 사건이어서, 이를 변경하려면 다시 전원합의체에 사건을 올려서 종전 판례를 변경해야 했다. 당장은 아니라도 언젠가는 논의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계속 관련 사건을 모으면서 관심을 가져왔다. 그런데 비슷한 사건을 맡은 대법관 여러 사람의 의견을 모아봤더니 부정적 의견이 훨씬 많았다. 그리되니 전원합의체로 갈 수도 없었다.” -아쉬움도 크겠지만 한 일도 많다. 독수리 5형제 시절의 대법원에선 권리구제와 적법 절차에 중점을 둔 판결이 많아졌다.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는 배제한다는 원칙을 확립한 것 등은 큰 성과다. “제주지사 선거법 위반 사건에서 그런 판결이 나왔다. 다만, 그런 결론은 몇몇 대법관의 역할이라기보다 전체적으로 법률가들의 문제의식이 바뀐 때문이다.” -국가보안법 규정에 대한 엄밀한 해석도 지난 5~6년의 뚜렷한 특징이다. 예컨대 지난해 대법원은 실천연대 사건에서 ‘이적 목적을 추정해선 안 된다’는 판결을 내놓았다. “좀더 엄격하게 적용하라는 취지다. 국가보안법의 해석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게 함부로 이적성을 추정하는 것이다. 그리되면 반대자를 억압하는 도구로 쓰일 위험이 커진다. 그 때문에 국가보안법도 남용 금지 조항을 두고 있는 것이다. 평소에 굉장히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는데, 실천연대 사건에서 이적표현물을 놓고 마침 그 문제가 쟁점이 됐다. 치열한 논의 끝에 결국 판례 변경에까지 이르게 됐다. 이적성을 추정해선 안 된다는 의견이 강하게 존재한 탓에 그리된 것이다. 실제로 반국가단체의 문제는 제한적으로 해석할 이유가 있다. 기존 판례에서도 북한이 적화통일을 노리는 집단이면서 동시에 평화통일을 위해서 협력·교류해야 할 상대방이라는 양 측면을 다 갖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 두 측면이 있으니까 후자의 측면으로 접근할 때에는 반국가단체 성격이 없는 것 아니냐고 본 것이다. 이는 실제로 수사와 재판 현실에서 문제가 된다. 예컨대 그동안에는 북한과 접촉하기만 하면 이유를 불문하고 일단 반국가단체와 접촉한 것이 되어 범죄 구성요건을 충족하게 되고, 공안당국이 수사를 개시하거나 소환할 수 있게 된다. 처벌을 면하려면 만난 목적에 이적성이 없다는 점을 피의자가 입증해야 한다. 요즘 북한과의 접촉이 활발한데, 이렇게 되면 공안당국의 눈에 벗어나는 사람을 선별적으로 수사대상으로 삼을 수 있게 된다. 당시 나의 소수의견은 범죄 성립 여부를 검사가 입증해야 한다는 일반 원칙에 충실하게 그 당사자가 북한의 반국가단체적 측면과 접촉하였다는 점까지를 검사가 입증해야만 수사와 처벌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인데, 일부에서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볼 수 없다는 말이냐고 거두절미해서 부각시키니까 이상한 주장처럼 들린 것이다.” -실제로 재임중 보수언론 등의 공격의 표적이 많이 됐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으니까 크게 신경을 안 썼다. 하지만 바람직하지는 않은 것 같다. 좀더 세련되고 수준 높은 사회가 되려면 다른 견해에 대해서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 충분히 알아보고 생각하는 게 우선이다. 그러다보면 토론도 이뤄지고 경우에 따라선 자기 입장의 부족한 점이 수정될 수 있다. 그러지 않은 채 한 측면만 보고 원색적인 공격을 하면 적대감만 쌓이게 돼 사회의 발전이나 안정에 도움이 안 된다.”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저가발행 사건에선 비슷한 성향의 대법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려 결국 무죄가 다수의견이 됐다. “나는 유죄 의견이었지만, 순수하게 법리로만 보면 달리 생각할 여지가 전혀 없는 사건은 아니라고 본다. 비슷한 성향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도 법리에 따라 얼마든지 결론이 다를 수 있다.” -4대강 사업과 새만금 사업 등에 대해서도 다수의견은 ‘막대한 예산이 투입된 국책사업’이라는 이유로 사업을 존속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행정부의 개발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인 소극적 판결이었다는 점에서 아쉽다. “우리 사법부가 전통적으로 사법소극주의를 강하게 취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권위주의 정부를 오래 겪다 보니 행정이 목적 달성을 위해 편법을 많이 취해오기도 했다. 정책 결정이나 집행이 법치주의와 법원칙에 맞도록 법원이 적극적으로 감시·감독을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최근엔 대법원이 정책법원으로서의 기능보다 3심제에서 최종적 권리구제 기관이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는 경향이다. 그러다 보니 대법관 지명도 다양성보다는 사건 처리 능력 등을 앞세우는 듯하다. 사법부가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하다가 퇴행하는 것은 아닌가? “새 대법원장도 정책법원으로 가야 한다는 고민을 하고 있다. 다만 현실이 그쪽으로만 질주하기는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당장은 국민의 권리구제 요구도 무시할 수 없으니까 사건 처리 등에서 준비된 사람이 대법관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2003년 4차 사법파동 때 서열과 기수 중심의 대법관 지명에 반대해 사표를 던졌다. 그런 관행이 재연되는 게 아니냐는 걱정도 있는데? “자타가 공인하는 엘리트 판사들이 대법관이 되는 것 자체는 전혀 문제될 일이 아니다. 다만 그런 일이 대법관 선발에서 주류적 현상이 되면 엘리트주의가 심화되게 된다. 법원의 관료화도 여기서 비롯된다. 실력이 뛰어나지 않더라도 보통의 법관 중에서 여러 다른 자질을 갖춘 법관을 대법관으로 선발함으로써 엘리트주의나 법원의 관료화를 완화시킬 수 있다면 차라리 그러는 게 더 의미가 있다고 본다. 대법관이 법관 인사의 종착역, 승진의 일환으로 되어선 안 된다.” 대법관 선발, 엘리트주의 매몰되면 좋지 않아
법관 넘어서 전체 법조인에서 뽑아야 다양성
퇴임뒤 강단으로…공익적 활동 힘 보탤 생각 -대법관 임기제도 문제 아닌가? “대법원이 정책법원의 기능을 하기엔 대법관 임기 6년은 짧다. 대법관을 법관들에서 주로 뽑는 관행도 지양해야 한다. 지금은 기껏 서울대냐 아니냐 정도의 다양성인데, 앞으로는 전체 법조인 중에서 가치관이나 살아온 경험 등을 고려해서 다양하게 뽑아야 한다. 다양성을 갖추려면 가치관의 다양성이 중요하고, 가치관이 다양하려면 그 사람이 살아온 경로와 경험이 다양해야 한다. 그렇게 확 넓히려면 대법관 선발 절차도 바뀌어야 한다. 지금의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는 그런 점에서 국민의 다양한 의사를 반영하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위원 구성이나 후보 추천 절차 등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대법원이 정책법원이 되려면 상고사건 수의 조정도 필요해 보인다. 어떤 방안이 있겠는가? “사건 수가 늘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다. 우선은 제대로 재판을 받았다는 느낌을 확실히 주도록 하급심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1심이든 2심이든 서둘러 쫓기듯 하니까 국민들이 승복 못하는 것 아닌가. 대법원에서 정책법원 성격의 사건을 다룰 때는 전원합의체로 하는 게 맞다. 그렇게 하려면 사건을 걸러야 하는데, 그건 방법의 문제다. 일정 경력의 재판연구관이 할 수도 있고, 대법원의 소부가 할 수도 있다.” -퇴임 뒤 뭘 할 것인가? “학교로 가려고 한다. 다만 법조영역에서 공익적 활동이 필요하면 힘을 보탤 생각이다. 예컨대 법적 분쟁의 사전예방을 위해 초기 법률적 행위의 형성 단계에서 조언을 해주는 법률서비스가 필요하다고 본다. 뜻있는 사람들이 그런 활동기구를 만들어서 도움과 봉사를 요청하면 참여할 용의가 있다.” -지금까지 사회적 발언을 아끼지 않았는데, 앞으로도 그런 일이 있지 않겠는가? “우선은 되도록이면 조용히 있으려고 한다. 그동안 발언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어떤 역할을 해야겠다고 의식을 갖고 한 것은 아니었다.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일들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대법관 자리까지 오게 됐다. 나로서는 과분했다. 이 자리가 불편하고 조심스럽고 힘들고 민망스러웠다. 이제 일을 마쳤으니 본래 내 자리로 돌아가고 싶다. 무슨 발언을 하려는 생각도 당장은 없다. 혹시 그런 일이 있다면 시대적인 상황과 역할에 대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해야 할 것 같다.” -법관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법관이라는 자리는 정말 좋은 자리다.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엄청나게 많이 주어져 있다. 많은 일을 얼마든지 제대로 할 수 있는 자리가 법관이다. 권한만큼 책임도 있다. 이를 자각했으면 좋겠다. 지금 후배들을 보면 조직 속의 한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너무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지내고 있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자신감이나 긍지, 책임감을 좀더 가지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하고 세상을 좋게 변화시킬 수 있다. 그리했으면 좋겠다.” 정리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
사건에 쫓기다보니 기대 못미쳐 아쉬움
보수언론의 원색적 공격, 사회 도움 안돼 “여러분, 예전에는 법원장실에 불려가고 그랬던 적이 있었어요. 지금이야 그런 일이 없겠지만, 법원장이 재판과 관련해서 부르면 가지 마세요. 재판관은 재판을 하는 사람인데 누군가에게 불려가서 설명을 하고 해명을 한다는 게, 그게 판사입니까. 가지 마세요. 궁금하면 법원장 자기가 법정에 와서 방청하라고 그러세요. … 여러분은 판사입니다. 생각대로 하세요. 밖에서 무책임이니 유책임이니 말하는데, 그게 다 재판을 자기들 원하는 쪽으로 끌어내기 위해 판사들에게 부담을 주려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서 내린 결론인데 그게 왜 무책임입니까. 무책임한 재판, 얼마든지 하세요.” 회의장에 모인 판사들이 와 하고 폭소를 터뜨리며 박수를 보냈다. 자리를 함께한 법원장들도 벙글거리며 웃었다. 지난 10월 부산지역 판사들을 대상으로 한 박시환(58) 대법관의 특강 모습이었다고 한다. 강연을 들은 한 부장판사는 “배석판사들이 너무 얌전해서 걱정이었는데, 그 강연 뒤에는 합의(판결 방향 논의를 위한 회의)에 들어오는 판사들의 눈이 반짝반짝하더라”고 전했다. 그리 보면 박 대법관은 스스로 말한 대로 “복 받은 사람”이다. 2003년까지 18년 동안 법관 생활을 하면서 소신대로 판결하고, 옳다고 믿은 대로 행동했다. 법원을 떠난 지 2년여 만에 많은 이들의 기대와 주목 속에 대법관으로 임명되어서는 소수자와 약자의 인권 보호를 위한 진보적 판결을 많이 내놓았다. 사법부의 독립과 법관의 양심에 따른 판결은 그가 평생을 두고 지키려 한 가치였다. 그 과정에서 날선 비난의 표적도 됐지만, 감내했다. 대법관 퇴임을 앞둔 지금은, 많은 이들의 기대에 제대로 부응했는지, 못내 아쉽다. 지난 8일 대법원에서 열린 퇴임기념 세미나에서 박 대법관은 “6년간 일하면서 다양화, 진보, 소수 입장을 대변하는 의미에서 대법관에 임명되었다는 부채감과 두려움이 있었으나 결과물이 초라했던 것 같다”며 “많은 일을 처리하는 한 구성원에 불과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소수는 서럽고, 분하기도 하다”고 소회를 털어놓았다. “다수는 소수를 거북하게 여기고, 불편해하며, 위험하게 느끼고, 불안감·이질감·적대감을 표출하기도 한다”며 “소수를 배려하지 않으면 자칫 ‘그들만의 사법부’가 될 수 있다”는 경고도 했다. 11월21일로 6년의 임기를 마치는 박 대법관을 11일 대법원 집무실에서 만났다. -트위터에서 ‘지난 6년 독수리 5남매는 소수자, 약자의 인권을 위해 분투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대법관 14명 가운데 5명이었으니 실제로 분투라고 할 만한 상황이 적지 않았을 것 같다. “결과물로 만들어낸 것이 별로 없어 초라한 느낌이 많이 든다. 소수자로서 설움과 아쉬움도 없지 않고, 역부족도 많이 느꼈다.” -스스로의 기대만큼 못했다는 말로 들린다. 대법관의 업무 부담이 많다 보니 기록 더미 속에서 지쳤을 수도 있고, 때를 맞춰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있는 것 같다. “바로 그렇다. 쏟아지는 사건에 쫓기다 보니 제대로 다뤄야 할 문제를 발굴하거나, 판결이라는 결과물로 엮어낼 수 있도록 이론을 구성할 여유가 없어 사건을 놓친 경우가 없지 않다. 어떤 문제가 쟁점이 되면 법리로서 이를 구체화하는 게 필요한데, 조금씩 타이밍을 놓치면서 의미가 감소돼서 쟁점화하지 못한 경우도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이 그런 경우 아닌가. 2002년 서울남부지원 판사 시절에 양심적 병역거부를 받아들여야 한다며 위헌심판 제청까지 한 사건인데, 결국은 스스로 대부분 유죄를 선고했다. “이미 2004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있었고 헌법재판소도 합헌 결정을 한 사건이어서, 이를 변경하려면 다시 전원합의체에 사건을 올려서 종전 판례를 변경해야 했다. 당장은 아니라도 언젠가는 논의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계속 관련 사건을 모으면서 관심을 가져왔다. 그런데 비슷한 사건을 맡은 대법관 여러 사람의 의견을 모아봤더니 부정적 의견이 훨씬 많았다. 그리되니 전원합의체로 갈 수도 없었다.” -아쉬움도 크겠지만 한 일도 많다. 독수리 5형제 시절의 대법원에선 권리구제와 적법 절차에 중점을 둔 판결이 많아졌다.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는 배제한다는 원칙을 확립한 것 등은 큰 성과다. “제주지사 선거법 위반 사건에서 그런 판결이 나왔다. 다만, 그런 결론은 몇몇 대법관의 역할이라기보다 전체적으로 법률가들의 문제의식이 바뀐 때문이다.” -국가보안법 규정에 대한 엄밀한 해석도 지난 5~6년의 뚜렷한 특징이다. 예컨대 지난해 대법원은 실천연대 사건에서 ‘이적 목적을 추정해선 안 된다’는 판결을 내놓았다. “좀더 엄격하게 적용하라는 취지다. 국가보안법의 해석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게 함부로 이적성을 추정하는 것이다. 그리되면 반대자를 억압하는 도구로 쓰일 위험이 커진다. 그 때문에 국가보안법도 남용 금지 조항을 두고 있는 것이다. 평소에 굉장히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는데, 실천연대 사건에서 이적표현물을 놓고 마침 그 문제가 쟁점이 됐다. 치열한 논의 끝에 결국 판례 변경에까지 이르게 됐다. 이적성을 추정해선 안 된다는 의견이 강하게 존재한 탓에 그리된 것이다. 실제로 반국가단체의 문제는 제한적으로 해석할 이유가 있다. 기존 판례에서도 북한이 적화통일을 노리는 집단이면서 동시에 평화통일을 위해서 협력·교류해야 할 상대방이라는 양 측면을 다 갖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 두 측면이 있으니까 후자의 측면으로 접근할 때에는 반국가단체 성격이 없는 것 아니냐고 본 것이다. 이는 실제로 수사와 재판 현실에서 문제가 된다. 예컨대 그동안에는 북한과 접촉하기만 하면 이유를 불문하고 일단 반국가단체와 접촉한 것이 되어 범죄 구성요건을 충족하게 되고, 공안당국이 수사를 개시하거나 소환할 수 있게 된다. 처벌을 면하려면 만난 목적에 이적성이 없다는 점을 피의자가 입증해야 한다. 요즘 북한과의 접촉이 활발한데, 이렇게 되면 공안당국의 눈에 벗어나는 사람을 선별적으로 수사대상으로 삼을 수 있게 된다. 당시 나의 소수의견은 범죄 성립 여부를 검사가 입증해야 한다는 일반 원칙에 충실하게 그 당사자가 북한의 반국가단체적 측면과 접촉하였다는 점까지를 검사가 입증해야만 수사와 처벌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인데, 일부에서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볼 수 없다는 말이냐고 거두절미해서 부각시키니까 이상한 주장처럼 들린 것이다.” -실제로 재임중 보수언론 등의 공격의 표적이 많이 됐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으니까 크게 신경을 안 썼다. 하지만 바람직하지는 않은 것 같다. 좀더 세련되고 수준 높은 사회가 되려면 다른 견해에 대해서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 충분히 알아보고 생각하는 게 우선이다. 그러다보면 토론도 이뤄지고 경우에 따라선 자기 입장의 부족한 점이 수정될 수 있다. 그러지 않은 채 한 측면만 보고 원색적인 공격을 하면 적대감만 쌓이게 돼 사회의 발전이나 안정에 도움이 안 된다.”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저가발행 사건에선 비슷한 성향의 대법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려 결국 무죄가 다수의견이 됐다. “나는 유죄 의견이었지만, 순수하게 법리로만 보면 달리 생각할 여지가 전혀 없는 사건은 아니라고 본다. 비슷한 성향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도 법리에 따라 얼마든지 결론이 다를 수 있다.” -4대강 사업과 새만금 사업 등에 대해서도 다수의견은 ‘막대한 예산이 투입된 국책사업’이라는 이유로 사업을 존속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행정부의 개발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인 소극적 판결이었다는 점에서 아쉽다. “우리 사법부가 전통적으로 사법소극주의를 강하게 취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권위주의 정부를 오래 겪다 보니 행정이 목적 달성을 위해 편법을 많이 취해오기도 했다. 정책 결정이나 집행이 법치주의와 법원칙에 맞도록 법원이 적극적으로 감시·감독을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최근엔 대법원이 정책법원으로서의 기능보다 3심제에서 최종적 권리구제 기관이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는 경향이다. 그러다 보니 대법관 지명도 다양성보다는 사건 처리 능력 등을 앞세우는 듯하다. 사법부가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하다가 퇴행하는 것은 아닌가? “새 대법원장도 정책법원으로 가야 한다는 고민을 하고 있다. 다만 현실이 그쪽으로만 질주하기는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당장은 국민의 권리구제 요구도 무시할 수 없으니까 사건 처리 등에서 준비된 사람이 대법관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2003년 4차 사법파동 때 서열과 기수 중심의 대법관 지명에 반대해 사표를 던졌다. 그런 관행이 재연되는 게 아니냐는 걱정도 있는데? “자타가 공인하는 엘리트 판사들이 대법관이 되는 것 자체는 전혀 문제될 일이 아니다. 다만 그런 일이 대법관 선발에서 주류적 현상이 되면 엘리트주의가 심화되게 된다. 법원의 관료화도 여기서 비롯된다. 실력이 뛰어나지 않더라도 보통의 법관 중에서 여러 다른 자질을 갖춘 법관을 대법관으로 선발함으로써 엘리트주의나 법원의 관료화를 완화시킬 수 있다면 차라리 그러는 게 더 의미가 있다고 본다. 대법관이 법관 인사의 종착역, 승진의 일환으로 되어선 안 된다.” 대법관 선발, 엘리트주의 매몰되면 좋지 않아
법관 넘어서 전체 법조인에서 뽑아야 다양성
퇴임뒤 강단으로…공익적 활동 힘 보탤 생각 -대법관 임기제도 문제 아닌가? “대법원이 정책법원의 기능을 하기엔 대법관 임기 6년은 짧다. 대법관을 법관들에서 주로 뽑는 관행도 지양해야 한다. 지금은 기껏 서울대냐 아니냐 정도의 다양성인데, 앞으로는 전체 법조인 중에서 가치관이나 살아온 경험 등을 고려해서 다양하게 뽑아야 한다. 다양성을 갖추려면 가치관의 다양성이 중요하고, 가치관이 다양하려면 그 사람이 살아온 경로와 경험이 다양해야 한다. 그렇게 확 넓히려면 대법관 선발 절차도 바뀌어야 한다. 지금의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는 그런 점에서 국민의 다양한 의사를 반영하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위원 구성이나 후보 추천 절차 등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대법원이 정책법원이 되려면 상고사건 수의 조정도 필요해 보인다. 어떤 방안이 있겠는가? “사건 수가 늘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다. 우선은 제대로 재판을 받았다는 느낌을 확실히 주도록 하급심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1심이든 2심이든 서둘러 쫓기듯 하니까 국민들이 승복 못하는 것 아닌가. 대법원에서 정책법원 성격의 사건을 다룰 때는 전원합의체로 하는 게 맞다. 그렇게 하려면 사건을 걸러야 하는데, 그건 방법의 문제다. 일정 경력의 재판연구관이 할 수도 있고, 대법원의 소부가 할 수도 있다.” -퇴임 뒤 뭘 할 것인가? “학교로 가려고 한다. 다만 법조영역에서 공익적 활동이 필요하면 힘을 보탤 생각이다. 예컨대 법적 분쟁의 사전예방을 위해 초기 법률적 행위의 형성 단계에서 조언을 해주는 법률서비스가 필요하다고 본다. 뜻있는 사람들이 그런 활동기구를 만들어서 도움과 봉사를 요청하면 참여할 용의가 있다.” -지금까지 사회적 발언을 아끼지 않았는데, 앞으로도 그런 일이 있지 않겠는가? “우선은 되도록이면 조용히 있으려고 한다. 그동안 발언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어떤 역할을 해야겠다고 의식을 갖고 한 것은 아니었다.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일들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대법관 자리까지 오게 됐다. 나로서는 과분했다. 이 자리가 불편하고 조심스럽고 힘들고 민망스러웠다. 이제 일을 마쳤으니 본래 내 자리로 돌아가고 싶다. 무슨 발언을 하려는 생각도 당장은 없다. 혹시 그런 일이 있다면 시대적인 상황과 역할에 대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해야 할 것 같다.” -법관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법관이라는 자리는 정말 좋은 자리다.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엄청나게 많이 주어져 있다. 많은 일을 얼마든지 제대로 할 수 있는 자리가 법관이다. 권한만큼 책임도 있다. 이를 자각했으면 좋겠다. 지금 후배들을 보면 조직 속의 한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너무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지내고 있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자신감이나 긍지, 책임감을 좀더 가지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하고 세상을 좋게 변화시킬 수 있다. 그리했으면 좋겠다.” 정리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
| |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