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병을 달고 다니는 체질인 박기호 신부는 고 이태석 신부의 삶을 다룬 <울지마 톤즈>를 보고 내내 울었다고 한다. ‘항암 치료’라는 의료 방식에 화가 나기도 했다고 한다. 그의 책 <산 위의 신부님>에 실려 있는 박 신부의 유서에는 이런 당부가 실려 있다. 때가 이르러 불치의 진단을 받거나 치매의 증상이 오면 반드시 본인에게 알려줄 것. 내 손으로 먹고 마시고 내 발로 배설을 다루지 못할 때가 오면 효과적인 단식을 도와줄 것. 듣고 말할 수 없을 때가 오면 중환자실에 홀로 누워 마지막 고귀한 시간을 허비하지 않도록 해줄 것….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산위의 신부님’ 펴낸 박기호 신부
세계화 구조 속에 인간 가두고 소비중독·환경 파괴
쇼핑, TV…편리함 끊어버리는 ‘오프운동’ 벌여
영성공동체 ‘산위의 마을’은 무소유 실천 ‘머니 오프’ 박기호 신부는 2004년 가톨릭 신자들의 영성공동체인 ‘산위의 마을’을 세운 사람이다. 우리나라에는 경기도 화성의 산안마을(일본인 야마기시 미요조가 창안한 야마기시즘 실현 공동체) 같은 생활공동체, 강원도 화천의 시골교회공동체 같은 기독교 공동체들이 있으나 사제가 만들고 이끄는 가톨릭 신앙공동체는 산위의 마을이 처음이자 유일하다. 박 신부는 현대 자본주의 소비문화가 인간의 삶을 물질에 종속시키고, 나아가 생태환경을 파괴한다고 보고 1990년대 후반부터 동료 신부, 신도들과 함께 반소비문화 운동에 나섰다. ‘산위의 마을’은 그 운동의 연장선에서 세워졌다. 무소유와 농업노동의 실천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평화로운 공존을 추구한다. 충북 단양의 산골짜기에 선 산위의 마을에는 현재 박 신부를 비롯해 28명의 주민이 무소유를 실천하며 생활하고 있다. 박 신부를 만난 건 그가 산위의 마을 생활을 기록한 책 <산 위의 신부님>을 낸다는 소식을 듣고서였다. 그는 ‘특별한 말씀’을 원하는 기자에게 “책이 좀 팔려서 우리 마을의 뜻이 더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작은 체구, 소박한 얼굴, 투박한 손, 어눌한 말투에서 오히려 강한 신심과 의지력이 풍겨났다. -‘산위의 마을’을 얘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살이공동체’에 대한 말씀을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예수살이공동체는 저와 동료 사제들이 젊은 가톨릭 신앙인들과 함께 1998년 시작한 반소비문화 생활운동입니다. 신앙적 차원에서 보면 세계화의 구조 속에 인간을 가두고 소비중독과 생태환경 파괴를 가져오는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 시스템은 ‘악령’과 같습니다. 반소비문화 운동은 인간의 주체적 삶을 가로막는 악령과의 싸움인 셈이지요.” -그 싸움은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를 말하는가요? “예를 들면 우리들은 소비문화에 저항해 ‘오프(Off)운동’이란 걸 합니다. 편리함을 끊어버리는 일상의 수행이지요. ‘쇼핑 오프’는 쇼핑을 안 하고 사는 것입니다. 텔레비전 오프, 신용카드 오프, 메이크업(화장) 오프, 승용차·휴대폰 오프… 완전히 끊기가 어려우면 카드를 줄이고, 자동차 타기를 줄이고, 아파트 평수를 줄입니다.” -‘산위의 마을’은 그 예수살이공동체 정신을 삶 자체로 실천하는 것이겠군요. “그렇습니다. 산위의 마을은 무소유의 실천을 추구하는 것이니 ‘머니 오프’ 운동이 되겠지요.(웃음) 소유에 의존하지 않고 자연친화적인 공동농업을 통해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생활구조를 만들어보자고 구상한 게 ‘산위의 마을’입니다.”
-마을 소개를 부탁합니다. “충북 단양군 가곡면 보발리 해발 490m의 산골짜기에 집을 짓고 더덕, 야콘, 콩 등을 재배하며 살고 있습니다. 무소유와 농업노동을 공동체의 원칙으로 받아들인 가톨릭 신앙인들이 주민입니다. 현재 다섯 가정과 독신남녀 등 30대 후반~50대 초반의 성인들과 아이 5명 등 모두 28명이 삽니다. 초등생들은 보발분교에 다니고, 중학생 또래 아이 한 명은 마을 안에서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방식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입 재수중인 청년도 한 명 있구요.” -무소유라면 재산을 다 내놓아야 하는 겁니까? 쉽지 않은 결단일 것 같은데요. “입촌 희망자는 먼저 한달 정도 살아보게 하고, 괜찮으면 1년을 준비기간으로 줍니다. 재산을 맡기고 마을에서 계속 살지 여부는 그때 선택하도록 합니다. 돈은 마을에서 관리하며 각자가 꼭 필요한 경우에만 타서 씁니다. 야마기시 공동체는 재산을 모두 기부하도록 하지만, 한국은 아직 그런 방식에 익숙하지 않아서 도중에 퇴촌하게 되면 남은 돈을 되찾아가도록 합니다.” -마을이 2004년에 시작됐는데 가장 오래 있는 사람은? “열다섯 가정 중 열 가정이 나갔습니다. 가장 오래 있는 친구는 앞에서 얘기한 재수생 청년입니다. 6년 전에 부모님 따라왔다가 부모는 나가고 혼자 남았어요. 아주 훌륭한 청년입니다. 저는 이 친구가 나중에 마을의 학교 선생님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외국의 공동체에는 산부인과, 유치원, 학교가 다 있어서 공동체 안에서 나고 자라 선생님이 되는 젊은이들이 나옵니다.” -마을을 이뤄 사는 데 가장 어려운 점은? “역시 사람 사는 곳이다 보니 인간관계입니다. 살아온 환경이나 사고방식의 차이, 표현의 미숙에서 오는 오해 등이 갈등을 낳기도 합니다. 그래서 미사 때면 양보와 비움의 가치에 대해 종종 이야기합니다.” -공동체의 삶에서 만족을 느끼는 부분은? “대부분이 ‘돈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도시에서 살려면 돈이 가장 중요한데, 여기서는 특별히 가계 수입과 지출을 따질 필요가 없지요. 우리 마을을 거쳐간 열 가족 중 여덟 가족이 도시로 돌아가지 않고 다시 귀농을 했습니다. 비록 무소유까지는 아니더라도 ‘돈 없이도 가능한 삶’을 발견했던 거죠.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 마을이 일종의 귀농인턴이나 인큐베이팅 역할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문명의 이기를 일부러 포기하는 생활인데, 보통사람들에겐 지나친 이상주의 같기도 합니다만.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걸 이해합니다. 그러나 물질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공허를 느끼고 삶이 지닌 진정한 가치를 그리워하지 않습니까? 산위의 마을 같은 영성공동체의 가치는 평화로운 삶이 단지 이상만이 아니라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는 삶이라는 걸 보여주는 데도 있습니다.” -신부님 개인적인 이야기도 듣고 싶습니다. 35살에 신학생이 되어 41살에 신부 서품을 받았으니 늦깎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어떻게 해서 신부가 되었나요? “저는 평범한 청년이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와 한문서적을 내는 출판사에 다녔습니다. 30살 무렵 교회 활동의 일환으로 나환자촌(경남 산청군 성심인애병원)에 봉사활동을 갔는데, 그곳 사람들을 보며 처음으로 인간 존재에 대한 본격적인 의문이 싹텄습니다. 환자들의 상태가 아주 좋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그분들의 표정이 어둡지 않았어요. 어느날 손가락이 없어진 할아버지가 복싱을 하자면서 자기는 통뼈라 맞으면 아주 아프니 조심하라며 웃어요. 환자들 중에는 변호사도 있었고, 30년 경력의 내과의사도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들이 뭔가 나 자신에게 행복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하더군요.” -사제가 되겠다는 결심은 언제 했나요? “나환자촌을 다녀온 뒤 미감아들의 서울 여행을 주선하는 사업을 하면서 테레사 수녀가 이끄는 사랑의 선교회를 알게 됐고, 원장 수녀님의 영성지도를 받아 교리신학원을 다니게 되면서부터가 아닌가 합니다. 그때 여러 분들이 저와 동료들을 성소자로 이끌려고 노력을 하신 것 같아요. 나는 나이가 많은 축이라 뒷줄에 있던 입장이었는데, 이상하게 저만 남았어요. 돌아보면 내가 뭘 스스로 설정해서 길을 갔다기보다는 주변의 좋은 분들이 만들어 주는 길을 따라 사제의 길로 들어선 것 같습니다. 운명이지요.” -신학교를 마치고 서품을 받을 때 한번 탈락하는 아픔을 겪었다고 하던데요. “제 인생에서 처음 겪은 큰 사건이었습니다. 그때 서품 심사에서 4명이 탈락했는데, 그 이유는 지금도 베일에 묻혀 있습니다. 80년대 민주화운동 시기에는 신학교에서도 종종 시위가 벌어지곤 했는데, 나는 제일 나이가 많은 학생이란 이유로 종종 주동자로 분류됐는데 그런 게 쌓여서 문제가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김수환 추기경님이 따로 불러 1년만 참고 기다리라며 위로해 주시기도 했지만, 신학생에게 서품 탈락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여서 한동안 공황상태에 빠져 지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 시련도 결국은 하느님의 은총이었습니다. 만약 그런 일을 내가 겪지 않았다면 과연 나같이 많은 면에서 부족한 사제가 과연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었을까 싶어요.” -어린 시절은? “목포에서 나고 무안에서 자라 함평에서 초등학교를 들어간 뒤 3학년 때부터 고흥에서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마을 이장을 할 때 여순반란 사건에 연루돼 오랫동안 도피생활을 했습니다. 어머니가 스무살 되던 때였는데 나와 동생들의 출생지가 제각각인 걸 보면 아버지 피신처를 따라 온 가족이 옮겨다니는 생활을 했던 듯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삶이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물질문명 발달할수록 진정한 삶의 가치 그리워해
평화로운 삶이 이상만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 -동생이 <노동의 새벽>의 시인인자, 노동운동가인 박노해씨인데 그가 노동운동을 한다는 걸 알고 있었나요? “기평(박노해의 본명)이는 선린상고를 졸업한 뒤로 독립해서 살았어요. 군대에 다녀와서 안양의 어느 운수회사에서 운전사로 일하면서 노동운동에 관여하고 있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지만, 구체적으로는 잘 몰랐지요. 다만 제가 아버지 없는 장남이다 보니 조금 걱정은 했습니다. 결혼도 했으니만큼 무슨 일을 하든 가정생활만큼은 제대로 하며 살았으면 했지요.” -동생이 박노해라는 사실은 가족들이 언제 알았나요? “수배를 받아 쫓겨다닌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노동의 새벽>이 나올 때도 박노해가 기평인 줄은 몰랐지요. 내가 신학교에 다닐 때 일인데 그 시집을 읽고 감동해 여러 권을 사서 친구들에게 선물도 하고, 학보에 장문의 서평을 투고하면서도 박노해가 기평일 거라고는 짐작조차 못했어요. 나중에 안기부에서 찾아와서야 기평이가 관련됐다는 걸 알게 됐지요. 그때 안기부도 <노동의 새벽>이 기평 단독 작품인지, 공동 창작인지를 추적하고 있었습니다.” -동생의 활동이 신부 서품 탈락과 어떤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나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교회가 그 정도로 옹졸하지는 않습니다.” -작년에 박노해씨를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노동운동가보다는 영성운동가의 면모가 보였습니다. “동생이 출옥한 뒤 둘이서 자기 나이에 책임지되, 욕되지 않게만 살자고 했어요. 형으로서 김문수나 이재오 같은 유의 정치바람만은 안 탔으면 하고 바랐는데, 다행히 그쪽으론 안 가서 고마웠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나눔문화 운동이 쉽지 않은 일인데 별다른 스폰서나 홍보도 없이 해나가는 걸 보면 대견하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형으로서 뭔가 도움을 주고 싶은데 별로 힘이 없어 미안하기도 합니다.” -지난 5년간 산위의 마을에 살면서 겪고 느낀 일들을 <산 위의 신부님>이란 책에 담았는데, 책은 어떻게 해서 내게 되었나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신앙공동체를 우리나라에서도 만들어보고 싶어 ‘산위의 마을’을 시작했는데, 애초의 구상을 얼마나 실천했는지 도와주신 많은 분들에게 큰 책임감을 느낍니다. 만나는 주교님마다 이야기해보지만 가톨릭 공동체가 우리밖에 없다 보니 너무 안 알려져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이번 책이 ‘산위의 마을’에 대한 관심을 조금이나마 불러일으켰으면 합니다.” 인터뷰/이인우 기획위원 iwlee21@hani.co.kr
쇼핑, TV…편리함 끊어버리는 ‘오프운동’ 벌여
영성공동체 ‘산위의 마을’은 무소유 실천 ‘머니 오프’ 박기호 신부는 2004년 가톨릭 신자들의 영성공동체인 ‘산위의 마을’을 세운 사람이다. 우리나라에는 경기도 화성의 산안마을(일본인 야마기시 미요조가 창안한 야마기시즘 실현 공동체) 같은 생활공동체, 강원도 화천의 시골교회공동체 같은 기독교 공동체들이 있으나 사제가 만들고 이끄는 가톨릭 신앙공동체는 산위의 마을이 처음이자 유일하다. 박 신부는 현대 자본주의 소비문화가 인간의 삶을 물질에 종속시키고, 나아가 생태환경을 파괴한다고 보고 1990년대 후반부터 동료 신부, 신도들과 함께 반소비문화 운동에 나섰다. ‘산위의 마을’은 그 운동의 연장선에서 세워졌다. 무소유와 농업노동의 실천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평화로운 공존을 추구한다. 충북 단양의 산골짜기에 선 산위의 마을에는 현재 박 신부를 비롯해 28명의 주민이 무소유를 실천하며 생활하고 있다. 박 신부를 만난 건 그가 산위의 마을 생활을 기록한 책 <산 위의 신부님>을 낸다는 소식을 듣고서였다. 그는 ‘특별한 말씀’을 원하는 기자에게 “책이 좀 팔려서 우리 마을의 뜻이 더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작은 체구, 소박한 얼굴, 투박한 손, 어눌한 말투에서 오히려 강한 신심과 의지력이 풍겨났다. -‘산위의 마을’을 얘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살이공동체’에 대한 말씀을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예수살이공동체는 저와 동료 사제들이 젊은 가톨릭 신앙인들과 함께 1998년 시작한 반소비문화 생활운동입니다. 신앙적 차원에서 보면 세계화의 구조 속에 인간을 가두고 소비중독과 생태환경 파괴를 가져오는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 시스템은 ‘악령’과 같습니다. 반소비문화 운동은 인간의 주체적 삶을 가로막는 악령과의 싸움인 셈이지요.” -그 싸움은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를 말하는가요? “예를 들면 우리들은 소비문화에 저항해 ‘오프(Off)운동’이란 걸 합니다. 편리함을 끊어버리는 일상의 수행이지요. ‘쇼핑 오프’는 쇼핑을 안 하고 사는 것입니다. 텔레비전 오프, 신용카드 오프, 메이크업(화장) 오프, 승용차·휴대폰 오프… 완전히 끊기가 어려우면 카드를 줄이고, 자동차 타기를 줄이고, 아파트 평수를 줄입니다.” -‘산위의 마을’은 그 예수살이공동체 정신을 삶 자체로 실천하는 것이겠군요. “그렇습니다. 산위의 마을은 무소유의 실천을 추구하는 것이니 ‘머니 오프’ 운동이 되겠지요.(웃음) 소유에 의존하지 않고 자연친화적인 공동농업을 통해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생활구조를 만들어보자고 구상한 게 ‘산위의 마을’입니다.”
-마을 소개를 부탁합니다. “충북 단양군 가곡면 보발리 해발 490m의 산골짜기에 집을 짓고 더덕, 야콘, 콩 등을 재배하며 살고 있습니다. 무소유와 농업노동을 공동체의 원칙으로 받아들인 가톨릭 신앙인들이 주민입니다. 현재 다섯 가정과 독신남녀 등 30대 후반~50대 초반의 성인들과 아이 5명 등 모두 28명이 삽니다. 초등생들은 보발분교에 다니고, 중학생 또래 아이 한 명은 마을 안에서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방식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입 재수중인 청년도 한 명 있구요.” -무소유라면 재산을 다 내놓아야 하는 겁니까? 쉽지 않은 결단일 것 같은데요. “입촌 희망자는 먼저 한달 정도 살아보게 하고, 괜찮으면 1년을 준비기간으로 줍니다. 재산을 맡기고 마을에서 계속 살지 여부는 그때 선택하도록 합니다. 돈은 마을에서 관리하며 각자가 꼭 필요한 경우에만 타서 씁니다. 야마기시 공동체는 재산을 모두 기부하도록 하지만, 한국은 아직 그런 방식에 익숙하지 않아서 도중에 퇴촌하게 되면 남은 돈을 되찾아가도록 합니다.” -마을이 2004년에 시작됐는데 가장 오래 있는 사람은? “열다섯 가정 중 열 가정이 나갔습니다. 가장 오래 있는 친구는 앞에서 얘기한 재수생 청년입니다. 6년 전에 부모님 따라왔다가 부모는 나가고 혼자 남았어요. 아주 훌륭한 청년입니다. 저는 이 친구가 나중에 마을의 학교 선생님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외국의 공동체에는 산부인과, 유치원, 학교가 다 있어서 공동체 안에서 나고 자라 선생님이 되는 젊은이들이 나옵니다.” -마을을 이뤄 사는 데 가장 어려운 점은? “역시 사람 사는 곳이다 보니 인간관계입니다. 살아온 환경이나 사고방식의 차이, 표현의 미숙에서 오는 오해 등이 갈등을 낳기도 합니다. 그래서 미사 때면 양보와 비움의 가치에 대해 종종 이야기합니다.” -공동체의 삶에서 만족을 느끼는 부분은? “대부분이 ‘돈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도시에서 살려면 돈이 가장 중요한데, 여기서는 특별히 가계 수입과 지출을 따질 필요가 없지요. 우리 마을을 거쳐간 열 가족 중 여덟 가족이 도시로 돌아가지 않고 다시 귀농을 했습니다. 비록 무소유까지는 아니더라도 ‘돈 없이도 가능한 삶’을 발견했던 거죠.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 마을이 일종의 귀농인턴이나 인큐베이팅 역할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문명의 이기를 일부러 포기하는 생활인데, 보통사람들에겐 지나친 이상주의 같기도 합니다만.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걸 이해합니다. 그러나 물질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공허를 느끼고 삶이 지닌 진정한 가치를 그리워하지 않습니까? 산위의 마을 같은 영성공동체의 가치는 평화로운 삶이 단지 이상만이 아니라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는 삶이라는 걸 보여주는 데도 있습니다.” -신부님 개인적인 이야기도 듣고 싶습니다. 35살에 신학생이 되어 41살에 신부 서품을 받았으니 늦깎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어떻게 해서 신부가 되었나요? “저는 평범한 청년이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와 한문서적을 내는 출판사에 다녔습니다. 30살 무렵 교회 활동의 일환으로 나환자촌(경남 산청군 성심인애병원)에 봉사활동을 갔는데, 그곳 사람들을 보며 처음으로 인간 존재에 대한 본격적인 의문이 싹텄습니다. 환자들의 상태가 아주 좋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그분들의 표정이 어둡지 않았어요. 어느날 손가락이 없어진 할아버지가 복싱을 하자면서 자기는 통뼈라 맞으면 아주 아프니 조심하라며 웃어요. 환자들 중에는 변호사도 있었고, 30년 경력의 내과의사도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들이 뭔가 나 자신에게 행복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하더군요.” -사제가 되겠다는 결심은 언제 했나요? “나환자촌을 다녀온 뒤 미감아들의 서울 여행을 주선하는 사업을 하면서 테레사 수녀가 이끄는 사랑의 선교회를 알게 됐고, 원장 수녀님의 영성지도를 받아 교리신학원을 다니게 되면서부터가 아닌가 합니다. 그때 여러 분들이 저와 동료들을 성소자로 이끌려고 노력을 하신 것 같아요. 나는 나이가 많은 축이라 뒷줄에 있던 입장이었는데, 이상하게 저만 남았어요. 돌아보면 내가 뭘 스스로 설정해서 길을 갔다기보다는 주변의 좋은 분들이 만들어 주는 길을 따라 사제의 길로 들어선 것 같습니다. 운명이지요.” -신학교를 마치고 서품을 받을 때 한번 탈락하는 아픔을 겪었다고 하던데요. “제 인생에서 처음 겪은 큰 사건이었습니다. 그때 서품 심사에서 4명이 탈락했는데, 그 이유는 지금도 베일에 묻혀 있습니다. 80년대 민주화운동 시기에는 신학교에서도 종종 시위가 벌어지곤 했는데, 나는 제일 나이가 많은 학생이란 이유로 종종 주동자로 분류됐는데 그런 게 쌓여서 문제가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김수환 추기경님이 따로 불러 1년만 참고 기다리라며 위로해 주시기도 했지만, 신학생에게 서품 탈락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여서 한동안 공황상태에 빠져 지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 시련도 결국은 하느님의 은총이었습니다. 만약 그런 일을 내가 겪지 않았다면 과연 나같이 많은 면에서 부족한 사제가 과연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었을까 싶어요.” -어린 시절은? “목포에서 나고 무안에서 자라 함평에서 초등학교를 들어간 뒤 3학년 때부터 고흥에서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마을 이장을 할 때 여순반란 사건에 연루돼 오랫동안 도피생활을 했습니다. 어머니가 스무살 되던 때였는데 나와 동생들의 출생지가 제각각인 걸 보면 아버지 피신처를 따라 온 가족이 옮겨다니는 생활을 했던 듯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삶이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물질문명 발달할수록 진정한 삶의 가치 그리워해
평화로운 삶이 이상만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 -동생이 <노동의 새벽>의 시인인자, 노동운동가인 박노해씨인데 그가 노동운동을 한다는 걸 알고 있었나요? “기평(박노해의 본명)이는 선린상고를 졸업한 뒤로 독립해서 살았어요. 군대에 다녀와서 안양의 어느 운수회사에서 운전사로 일하면서 노동운동에 관여하고 있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지만, 구체적으로는 잘 몰랐지요. 다만 제가 아버지 없는 장남이다 보니 조금 걱정은 했습니다. 결혼도 했으니만큼 무슨 일을 하든 가정생활만큼은 제대로 하며 살았으면 했지요.” -동생이 박노해라는 사실은 가족들이 언제 알았나요? “수배를 받아 쫓겨다닌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노동의 새벽>이 나올 때도 박노해가 기평인 줄은 몰랐지요. 내가 신학교에 다닐 때 일인데 그 시집을 읽고 감동해 여러 권을 사서 친구들에게 선물도 하고, 학보에 장문의 서평을 투고하면서도 박노해가 기평일 거라고는 짐작조차 못했어요. 나중에 안기부에서 찾아와서야 기평이가 관련됐다는 걸 알게 됐지요. 그때 안기부도 <노동의 새벽>이 기평 단독 작품인지, 공동 창작인지를 추적하고 있었습니다.” -동생의 활동이 신부 서품 탈락과 어떤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나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교회가 그 정도로 옹졸하지는 않습니다.” -작년에 박노해씨를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노동운동가보다는 영성운동가의 면모가 보였습니다. “동생이 출옥한 뒤 둘이서 자기 나이에 책임지되, 욕되지 않게만 살자고 했어요. 형으로서 김문수나 이재오 같은 유의 정치바람만은 안 탔으면 하고 바랐는데, 다행히 그쪽으론 안 가서 고마웠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나눔문화 운동이 쉽지 않은 일인데 별다른 스폰서나 홍보도 없이 해나가는 걸 보면 대견하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형으로서 뭔가 도움을 주고 싶은데 별로 힘이 없어 미안하기도 합니다.” -지난 5년간 산위의 마을에 살면서 겪고 느낀 일들을 <산 위의 신부님>이란 책에 담았는데, 책은 어떻게 해서 내게 되었나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신앙공동체를 우리나라에서도 만들어보고 싶어 ‘산위의 마을’을 시작했는데, 애초의 구상을 얼마나 실천했는지 도와주신 많은 분들에게 큰 책임감을 느낍니다. 만나는 주교님마다 이야기해보지만 가톨릭 공동체가 우리밖에 없다 보니 너무 안 알려져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이번 책이 ‘산위의 마을’에 대한 관심을 조금이나마 불러일으켰으면 합니다.” 인터뷰/이인우 기획위원 iwl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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