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훈 전 대법관은 대법관 정년퇴임식에서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신석정 <들길에 서서>)란 시구를 인용하며 자신의 법관 생활을 회고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퇴임후 강단에 서는 이홍훈 전 대법관
인터뷰/여현호 선임기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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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은 중용 지켜야 치우친 법해석 막아
소외층에 관심 가질때 법 통한 사회통합
대법원·헌재, 다양한 성향으로 구성 필요 이홍훈(65) 전 대법관은 천생 판사다. 지난 5월31일 34년간의 법관 생활을 끝내는 정년퇴임식에서 그는, 퇴임사를 ‘대법관 이홍훈’이 아니라 ‘법관 이홍훈’으로 끝냈다. “법관으로 시작해 법관으로 끝낸 사람, 법관의 길을 걸으려고 노력한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그만큼의 자긍심과, 그래도 남는 아쉬움이 담겼다. 자긍심은 “다른 이의 절박한 인생과 마주하고 사회의 큰 변화의 정점에 서게 되는 숙명”을 지닌 법관으로서, “정의를 선언하는 벅찬 일”을 다하려 노력했다는 감회이다. 그는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낸 대법원 시절은 물론, 형사법정의 젊은 판사 때 내린 판결들을 지금도 기억한다. 아쉬움은, 근대 사법 60년 만에 이제 겨우 몇 년 변화의 싹을 틔우기 시작한 사법부가 다시 옛날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걱정에서 비롯된다. 법관으로서 몸가짐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려 애쓰는 동안 넉넉지 못한 가정형편을 방치했다는 회한도 있다. 새 학기부터 석좌교수로 강의를 맡게 된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의 연구실에서 이 전 대법관을 만났다. -진보 성향의 대법관들을 일컫는 ‘독수리 5형제’ 중 한 사람으로 꼽혔다. 하지만 스스로는 중도와 중용을 강조했다. “삶의 철학을 떠나, 법관은 마땅히 중용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법 해석이 자칫 균형을 잃을 수 있다. 양극화와 각종 대립이 심한 우리 사회에서 중용은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그래야만 법을 통한 사회통합도 가능하다. 그러면서 기본권이나 평등 등 우리가 추구해야 할 미래의 지향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판결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보람도 있고, 아쉬움도 있다.” -지금의 대법원이 달라진 것은 어느 때보다 논의가 활발하고 그 결과가 두꺼운 판결문에 고스란히 반영된다는 점이라고 한다. 큰 변화 아닌가? “그렇다. 과거 대법원이 한쪽 성향 일변도로 구성됐다면, 이용훈 대법원장 체제에선 생각이 다른 여러 법관으로 구성됐다. 논의가 활발해지는 계기가 됐다. 성향이 비슷하면 논의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미국 연방대법원처럼 보수·중도·진보가 3 대 3 대 3으로 되는 것까지는 아니라도, 우리 사회의 여러 사정을 감안해 적절한 구성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실, 근대 사법이 시작된 지 60년이라지만 그동안 사법부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렇다 보니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는 등 사회적으로 주어진 책임을 다하지 못한 부끄러운 역사도 갖게 됐다. 이제 막 이를 바로잡기 시작한 단계에서 자칫 옛날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아쉽고 마음이 아프다.” -법원의 변화를 보여주는 판결 가운데 하나가 지난 3월 나온 ‘파업을 당연히 업무방해죄로 처벌해선 안 된다’는 전원합의체 판결이다. “내가 주심이었다. 1년간 참 힘든 논의를 거쳤다. 우리 헌법은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고 있다. 그런데 단체행동으로 파업이 벌어졌다면, 그건 일을 하지 않은 것이니까 사용자와의 계약 위반이다. 계약상 의무 불이행으로 민사적 책임을 지는 것은 별개로 하고, 이를 업무방해라며 형사적으로 처벌한다면 헌법의 취지에 반하는 일이 된다. 업무방해란 게 파업 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시작됐다고 하는데, 이를 도입한 영국과 일본에서도 지금은 다 사문화됐다. 그런데도 업무방해죄를 그대로 적용한다면 헌법 정신에 너무 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쉬움은 있지만 과거보다 많이 진전된 판결이라고 생각한다.” 대법원은 지난 3월17일 전국철도노조 파업에 대한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노동관계 법령에 따라 정당한 쟁의행위로 인정되는 경우가 아닌 한 노동자들의 파업을 곧바로 업무방해죄로 처벌하도록 한 기존의 대법원 판결의 변경을 선언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사용자의 자유의사가 제압될 수 있다고 보이면 업무방해죄가 성립한다고 밝혔다. ‘의미 있는 변화’라는 평가 못지않게 ‘실효성이 적다’는 비판이 무성했던 까닭이다. -대법원 구성으로 보면 그런 판결도 쉽지 않았을 성싶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시간이 가면서 다른 대법관들이 이해를 많이 하게 됐다. 헌법의 정신에 맞게 해석하는 게 대법원의 법 해석이 갈 길이라고 거듭 얘기했다. 처음에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았는데, 1년 동안 7~8차례의 토론을 거쳐 지혜를 모았다.” -미국 대법원처럼 직접 방을 찾아가 설득하기도 하는가? “미국은 사건이 한달에 두서너건꼴이지만 우리 대법원은 훨씬 많은 사건을 다루고 있어 그렇게까지 하진 못한다. 워낙 바쁘다.” -말대로 대법원의 업무량이 많다. 그래서 대부분의 대법관이 기록을 싸들고 집으로 간다는데, 유독 밤늦게까지 사무실을 지켰다. 따로 서재가 없어 집에서 일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집에 가면 아무래도 집중력이 떨어지니까… 대법관 초반엔 주말에도 사무실에 나왔는데, 직접 운전이 힘들다 보니 나중에는 집에서도 일했다. 평생 해왔던 일이라 기록은 싸들고 다녔다.” -그런 업무 부담에서 벗어났다. 어떻게 지내나? “주중 사나흘은 전북 고창 고향마을에서 나무를 심고 풀을 뽑으며 지낸다. 하루에 샤워를 세번 할 정도로 땀을 쏟으며 일한다. 장화가 땀으로 흥건해진다. 52년 만의 귀향이라 낫질과 삽질도 제대로 못했는데 해보니 판사 때보다 재미있다. 자연에서 일하니까 마음의 평안도 얻어진다. 아내와 평생 함께 일할 기회가 없었는데, 같이 앉아서 풀도 뽑고, 있는 반찬과 밥을 함께 먹는 것, 그게 행복이더라. 건강도 좋아졌다. 눈은 수십년 기록을 보면서 혹사한 탓에 여러모로 조심스럽다. 친구들 중엔 백내장 수술한 이도 있고 하니까.” -손학규 민주당 대표, 김근태 전 의원, 고 조영래 변호사 등이 다 경기고·서울대 동기동창이다. “다 친한 친구들이다. 권력의 독재, 개발독재, 인간의 존엄 등에 대해 함께 많은 얘기를 하고 고민도 했다. 대학 시절 민주화운동의 초심은 세월이 가도 크게 변하지 않는 것 같다.” -사법시험 공부를 늦게 시작했다고 들었다. 당시의 법관 생활이 크게 힘들었을 것인데. “어려운 시대였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불합리와 불평등으로 국민을 힘들게 하던 유신독재 시대였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판결로써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뜻에 반하는 판결도 있었지만, 민주주의 체제가 확립되는 쪽으로 조금씩 변하고 있어서 희망을 가지고 살았다. 가족이 경제적으로 힘들더라도 법관으로서 국민을 위해 뭔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주어진 기회를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중간에 사표를 내려고 한 적도 많았다.” -가정 형편을 생각하면 개업을 했어야 하지 않나? “형사 단독 판사 때 이런 분위기에선 도저히 법관 구실을 못하겠다고 생각해 사표를 썼더니, 지금 나가면 개업지 제한 때문에 변호사도 제대로 못한다고 말리더라. 가족을 먹여살릴 방법이 도저히 보이지 않아 포기했다. 탈법으로 딴 지역에 개업하고 몰래 일을 하기도 한다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법관으로서 삶에 후회는 없나? “후회는 없다. 다만, 다시 살아보라면 스님이나 과학자가 맞는 것 같다. 원래 고등학교 때 이과였다. 지금도 물리학 책이 재미있다. 불교의 선과 물리학은 통하는 게 많다. 법관으로서 사회현상을 볼 때도 물리학, 법학, 불교철학을 두루 생각하려 노력했다. 생과 사의 문제 등 투철하게 고민하고 관심을 가질 문제들이 많다. 법관으로서 나를 이끌어온 힘이다.” -재판에서 그런 생각들이 어떻게 투영됐나? “형사재판 과정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절박한 삶,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 등을 어떻게 양형에 반영할 수 있는지 고민을 많이 했다. 20~30년 전의 소소한 사건들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30여년 전 형사 단독 판사 때 사건인데, 택시기사가 근무 뒤 한잔하는 술집에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다. 여자가 싫다고 하니까 소주병을 깨서 들이댔다. 큰 상처도 안 났는데, 야간에 흉기를 든데다 이 사람이 집행유예 기간이어서 실형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겐 초등학교 1, 2학년 아이만 둘 있었다. 아빠가 구속된 뒤 애들이 학교에 안 나오니까 담임선생이 찾아갔더니 겨울에 냉방에서 생쌀을 먹고 있더라는 것이다. 담임선생을 법정에 불러 증언을 듣고 공판 관여 검사에게 공소장을 변경할 수 없느냐고 넌지시 물었다. 검사가 공소장 변경을 해줘서 벌금형을 선고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아이들이 학교 잘 다닌다는 편지도 받았다.” -하지만 현실에선 법정의 그런 따뜻함보다 법관들의 엘리트 의식이 더 두드러진다. “걱정은 할 만하다. 누구든 자기 생각에 빠져들 수 있다. 엘리트라는 법관은 더 그렇다. 내 생각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가장 위험하다. 다른 생각을 더 해보고, 그러고 나서도 법리나 정의에 맞아야 하고 합리성과 정당성도 갖춰야 하는 게 법관의 판단이다.” -법을 통한 사회 통합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민주화가 없었다면 우리 사회가 이렇게 발전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세계사를 봐도 민주화와 국가경제의 발전은 같이 갔다. 영국의 발전은 마그나카르타 등 프랑스나 미국보다 수백년 빠른 민주화에서 비롯된다고 봐야 한다. 우리 사회의 민주화 수준과 그 힘은 여전히 탄탄하다. 분단 상황을 이야기하지만, 그럴수록 우리 내부의 사회 통합이 중요하다. 소외계층과 약자에 대한 관심이 특히 필요하다. 존 롤스의 <정의론>에도 나오지만 능력 있는 사람의 능력은 그 자체가 사회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자본이다. 능력 있는 사람이 세금을 많이 내고 큰돈을 기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게 정의에 합당하다.” -판결에선 그런 정신을 어떻게 구현할 수 있는가? “형식적으로 법리만 적용하는 판결보다, 깊은 철학적 사유를 통해 법리뿐 아니라 정의에 맞는 판결을 내놓아야 한다.” 젊은 세대들이 전향적으로 판례 바꿔나가야
가정경제 어려웠지마 30여년 법관생활 보람
새학기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로 -그런 과정에서 가장 큰 벽은 ‘그동안 그렇게 해왔는데…’라는 사고방식 아닌가? “대법원에선 실제로 판례를 바꾸기가 쉽지 않다. 하급심에서 뭔가 조금이라도 바꿔 대법원에 올리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생각이 더 앞설 수도 있는 젊은 세대가 아래에서 전향적으로 판례 변경을 추동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젊은 법관들이 기존의 판례에 너무 얽매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 사회 일각에선 법관의 판결을 두고 매도하곤 하지만, 개별 법관의 자율성 강화는 앞으로 사법부가 가야 할 길이다. 다양성을 반영하고 이를 이해하는 풍토가 되었으면 한다. 그런 다양성 위에서 사회가 발전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일각에선 개별 법관의 판결을 통제하려는 듯한 움직임도 있다. “그게 가능하겠는가. 가야 할 길이 아니라면 국민의 반발이 클 것이다. 20~30년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그런 일이 있어서도 안 될뿐더러, 그렇게 영향을 미칠 시대도 이미 아니다. 설령 그런 일이 있더라도 법관 개개인이 지켜내야 한다.” -올해 2명, 내년에 4명의 대법관이 바뀐다. 헌법재판소에서도 여러 재판관이 퇴직한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를 새로 구성하면서 다양성을 잃지 않을까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 “생각이 비슷한 분들로만 구성하지 말고, 판결 성향이나 삶의 궤적 등을 평가해서 국민의 전체적인 의견이 판결이나 결정을 통해 반영될 수 있도록 구성해야 한다. 사회 통합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좀 느리더라도 근본을 놓치지 말아야 뿌리가 튼튼하고 나무도 잘 자란다. 미국의 경우 20~30년마다 진보와 보수가 엇갈려 법원을 주도하면서도 판결의 흐름은 균형을 유지해왔다. 전후 미국 사회가 안정적으로 발전해온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너무 보수적인 쪽으로만 가면 기득권 유지에 연연하게 된다. 국가의 틀이 커진 만큼 조화롭게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정리 황춘화 기자 sflower@hani.co.kr
소외층에 관심 가질때 법 통한 사회통합
대법원·헌재, 다양한 성향으로 구성 필요 이홍훈(65) 전 대법관은 천생 판사다. 지난 5월31일 34년간의 법관 생활을 끝내는 정년퇴임식에서 그는, 퇴임사를 ‘대법관 이홍훈’이 아니라 ‘법관 이홍훈’으로 끝냈다. “법관으로 시작해 법관으로 끝낸 사람, 법관의 길을 걸으려고 노력한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그만큼의 자긍심과, 그래도 남는 아쉬움이 담겼다. 자긍심은 “다른 이의 절박한 인생과 마주하고 사회의 큰 변화의 정점에 서게 되는 숙명”을 지닌 법관으로서, “정의를 선언하는 벅찬 일”을 다하려 노력했다는 감회이다. 그는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낸 대법원 시절은 물론, 형사법정의 젊은 판사 때 내린 판결들을 지금도 기억한다. 아쉬움은, 근대 사법 60년 만에 이제 겨우 몇 년 변화의 싹을 틔우기 시작한 사법부가 다시 옛날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걱정에서 비롯된다. 법관으로서 몸가짐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려 애쓰는 동안 넉넉지 못한 가정형편을 방치했다는 회한도 있다. 새 학기부터 석좌교수로 강의를 맡게 된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의 연구실에서 이 전 대법관을 만났다. -진보 성향의 대법관들을 일컫는 ‘독수리 5형제’ 중 한 사람으로 꼽혔다. 하지만 스스로는 중도와 중용을 강조했다. “삶의 철학을 떠나, 법관은 마땅히 중용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법 해석이 자칫 균형을 잃을 수 있다. 양극화와 각종 대립이 심한 우리 사회에서 중용은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그래야만 법을 통한 사회통합도 가능하다. 그러면서 기본권이나 평등 등 우리가 추구해야 할 미래의 지향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판결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보람도 있고, 아쉬움도 있다.” -지금의 대법원이 달라진 것은 어느 때보다 논의가 활발하고 그 결과가 두꺼운 판결문에 고스란히 반영된다는 점이라고 한다. 큰 변화 아닌가? “그렇다. 과거 대법원이 한쪽 성향 일변도로 구성됐다면, 이용훈 대법원장 체제에선 생각이 다른 여러 법관으로 구성됐다. 논의가 활발해지는 계기가 됐다. 성향이 비슷하면 논의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미국 연방대법원처럼 보수·중도·진보가 3 대 3 대 3으로 되는 것까지는 아니라도, 우리 사회의 여러 사정을 감안해 적절한 구성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실, 근대 사법이 시작된 지 60년이라지만 그동안 사법부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렇다 보니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는 등 사회적으로 주어진 책임을 다하지 못한 부끄러운 역사도 갖게 됐다. 이제 막 이를 바로잡기 시작한 단계에서 자칫 옛날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아쉽고 마음이 아프다.” -법원의 변화를 보여주는 판결 가운데 하나가 지난 3월 나온 ‘파업을 당연히 업무방해죄로 처벌해선 안 된다’는 전원합의체 판결이다. “내가 주심이었다. 1년간 참 힘든 논의를 거쳤다. 우리 헌법은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고 있다. 그런데 단체행동으로 파업이 벌어졌다면, 그건 일을 하지 않은 것이니까 사용자와의 계약 위반이다. 계약상 의무 불이행으로 민사적 책임을 지는 것은 별개로 하고, 이를 업무방해라며 형사적으로 처벌한다면 헌법의 취지에 반하는 일이 된다. 업무방해란 게 파업 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시작됐다고 하는데, 이를 도입한 영국과 일본에서도 지금은 다 사문화됐다. 그런데도 업무방해죄를 그대로 적용한다면 헌법 정신에 너무 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쉬움은 있지만 과거보다 많이 진전된 판결이라고 생각한다.” 대법원은 지난 3월17일 전국철도노조 파업에 대한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노동관계 법령에 따라 정당한 쟁의행위로 인정되는 경우가 아닌 한 노동자들의 파업을 곧바로 업무방해죄로 처벌하도록 한 기존의 대법원 판결의 변경을 선언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사용자의 자유의사가 제압될 수 있다고 보이면 업무방해죄가 성립한다고 밝혔다. ‘의미 있는 변화’라는 평가 못지않게 ‘실효성이 적다’는 비판이 무성했던 까닭이다. -대법원 구성으로 보면 그런 판결도 쉽지 않았을 성싶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시간이 가면서 다른 대법관들이 이해를 많이 하게 됐다. 헌법의 정신에 맞게 해석하는 게 대법원의 법 해석이 갈 길이라고 거듭 얘기했다. 처음에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았는데, 1년 동안 7~8차례의 토론을 거쳐 지혜를 모았다.” -미국 대법원처럼 직접 방을 찾아가 설득하기도 하는가? “미국은 사건이 한달에 두서너건꼴이지만 우리 대법원은 훨씬 많은 사건을 다루고 있어 그렇게까지 하진 못한다. 워낙 바쁘다.” -말대로 대법원의 업무량이 많다. 그래서 대부분의 대법관이 기록을 싸들고 집으로 간다는데, 유독 밤늦게까지 사무실을 지켰다. 따로 서재가 없어 집에서 일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집에 가면 아무래도 집중력이 떨어지니까… 대법관 초반엔 주말에도 사무실에 나왔는데, 직접 운전이 힘들다 보니 나중에는 집에서도 일했다. 평생 해왔던 일이라 기록은 싸들고 다녔다.” -그런 업무 부담에서 벗어났다. 어떻게 지내나? “주중 사나흘은 전북 고창 고향마을에서 나무를 심고 풀을 뽑으며 지낸다. 하루에 샤워를 세번 할 정도로 땀을 쏟으며 일한다. 장화가 땀으로 흥건해진다. 52년 만의 귀향이라 낫질과 삽질도 제대로 못했는데 해보니 판사 때보다 재미있다. 자연에서 일하니까 마음의 평안도 얻어진다. 아내와 평생 함께 일할 기회가 없었는데, 같이 앉아서 풀도 뽑고, 있는 반찬과 밥을 함께 먹는 것, 그게 행복이더라. 건강도 좋아졌다. 눈은 수십년 기록을 보면서 혹사한 탓에 여러모로 조심스럽다. 친구들 중엔 백내장 수술한 이도 있고 하니까.” -손학규 민주당 대표, 김근태 전 의원, 고 조영래 변호사 등이 다 경기고·서울대 동기동창이다. “다 친한 친구들이다. 권력의 독재, 개발독재, 인간의 존엄 등에 대해 함께 많은 얘기를 하고 고민도 했다. 대학 시절 민주화운동의 초심은 세월이 가도 크게 변하지 않는 것 같다.” -사법시험 공부를 늦게 시작했다고 들었다. 당시의 법관 생활이 크게 힘들었을 것인데. “어려운 시대였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불합리와 불평등으로 국민을 힘들게 하던 유신독재 시대였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판결로써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뜻에 반하는 판결도 있었지만, 민주주의 체제가 확립되는 쪽으로 조금씩 변하고 있어서 희망을 가지고 살았다. 가족이 경제적으로 힘들더라도 법관으로서 국민을 위해 뭔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주어진 기회를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중간에 사표를 내려고 한 적도 많았다.” -가정 형편을 생각하면 개업을 했어야 하지 않나? “형사 단독 판사 때 이런 분위기에선 도저히 법관 구실을 못하겠다고 생각해 사표를 썼더니, 지금 나가면 개업지 제한 때문에 변호사도 제대로 못한다고 말리더라. 가족을 먹여살릴 방법이 도저히 보이지 않아 포기했다. 탈법으로 딴 지역에 개업하고 몰래 일을 하기도 한다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법관으로서 삶에 후회는 없나? “후회는 없다. 다만, 다시 살아보라면 스님이나 과학자가 맞는 것 같다. 원래 고등학교 때 이과였다. 지금도 물리학 책이 재미있다. 불교의 선과 물리학은 통하는 게 많다. 법관으로서 사회현상을 볼 때도 물리학, 법학, 불교철학을 두루 생각하려 노력했다. 생과 사의 문제 등 투철하게 고민하고 관심을 가질 문제들이 많다. 법관으로서 나를 이끌어온 힘이다.” -재판에서 그런 생각들이 어떻게 투영됐나? “형사재판 과정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절박한 삶,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 등을 어떻게 양형에 반영할 수 있는지 고민을 많이 했다. 20~30년 전의 소소한 사건들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30여년 전 형사 단독 판사 때 사건인데, 택시기사가 근무 뒤 한잔하는 술집에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다. 여자가 싫다고 하니까 소주병을 깨서 들이댔다. 큰 상처도 안 났는데, 야간에 흉기를 든데다 이 사람이 집행유예 기간이어서 실형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겐 초등학교 1, 2학년 아이만 둘 있었다. 아빠가 구속된 뒤 애들이 학교에 안 나오니까 담임선생이 찾아갔더니 겨울에 냉방에서 생쌀을 먹고 있더라는 것이다. 담임선생을 법정에 불러 증언을 듣고 공판 관여 검사에게 공소장을 변경할 수 없느냐고 넌지시 물었다. 검사가 공소장 변경을 해줘서 벌금형을 선고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아이들이 학교 잘 다닌다는 편지도 받았다.” -하지만 현실에선 법정의 그런 따뜻함보다 법관들의 엘리트 의식이 더 두드러진다. “걱정은 할 만하다. 누구든 자기 생각에 빠져들 수 있다. 엘리트라는 법관은 더 그렇다. 내 생각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가장 위험하다. 다른 생각을 더 해보고, 그러고 나서도 법리나 정의에 맞아야 하고 합리성과 정당성도 갖춰야 하는 게 법관의 판단이다.” -법을 통한 사회 통합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민주화가 없었다면 우리 사회가 이렇게 발전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세계사를 봐도 민주화와 국가경제의 발전은 같이 갔다. 영국의 발전은 마그나카르타 등 프랑스나 미국보다 수백년 빠른 민주화에서 비롯된다고 봐야 한다. 우리 사회의 민주화 수준과 그 힘은 여전히 탄탄하다. 분단 상황을 이야기하지만, 그럴수록 우리 내부의 사회 통합이 중요하다. 소외계층과 약자에 대한 관심이 특히 필요하다. 존 롤스의 <정의론>에도 나오지만 능력 있는 사람의 능력은 그 자체가 사회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자본이다. 능력 있는 사람이 세금을 많이 내고 큰돈을 기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게 정의에 합당하다.” -판결에선 그런 정신을 어떻게 구현할 수 있는가? “형식적으로 법리만 적용하는 판결보다, 깊은 철학적 사유를 통해 법리뿐 아니라 정의에 맞는 판결을 내놓아야 한다.” 젊은 세대들이 전향적으로 판례 바꿔나가야
가정경제 어려웠지마 30여년 법관생활 보람
새학기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로 -그런 과정에서 가장 큰 벽은 ‘그동안 그렇게 해왔는데…’라는 사고방식 아닌가? “대법원에선 실제로 판례를 바꾸기가 쉽지 않다. 하급심에서 뭔가 조금이라도 바꿔 대법원에 올리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생각이 더 앞설 수도 있는 젊은 세대가 아래에서 전향적으로 판례 변경을 추동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젊은 법관들이 기존의 판례에 너무 얽매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 사회 일각에선 법관의 판결을 두고 매도하곤 하지만, 개별 법관의 자율성 강화는 앞으로 사법부가 가야 할 길이다. 다양성을 반영하고 이를 이해하는 풍토가 되었으면 한다. 그런 다양성 위에서 사회가 발전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일각에선 개별 법관의 판결을 통제하려는 듯한 움직임도 있다. “그게 가능하겠는가. 가야 할 길이 아니라면 국민의 반발이 클 것이다. 20~30년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그런 일이 있어서도 안 될뿐더러, 그렇게 영향을 미칠 시대도 이미 아니다. 설령 그런 일이 있더라도 법관 개개인이 지켜내야 한다.” -올해 2명, 내년에 4명의 대법관이 바뀐다. 헌법재판소에서도 여러 재판관이 퇴직한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를 새로 구성하면서 다양성을 잃지 않을까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 “생각이 비슷한 분들로만 구성하지 말고, 판결 성향이나 삶의 궤적 등을 평가해서 국민의 전체적인 의견이 판결이나 결정을 통해 반영될 수 있도록 구성해야 한다. 사회 통합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좀 느리더라도 근본을 놓치지 말아야 뿌리가 튼튼하고 나무도 잘 자란다. 미국의 경우 20~30년마다 진보와 보수가 엇갈려 법원을 주도하면서도 판결의 흐름은 균형을 유지해왔다. 전후 미국 사회가 안정적으로 발전해온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너무 보수적인 쪽으로만 가면 기득권 유지에 연연하게 된다. 국가의 틀이 커진 만큼 조화롭게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정리 황춘화 기자 sflow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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