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유학을 떠날 때는 10년이 넘도록 외국을 떠돌지 몰랐다는 백태웅 교수는 이제 한국에 정착하고 싶어했다.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향후 10년 안에 유럽연합 같은 지역기구가 등장할 것으로 전망한다. 할 수만 있다면 이른 시일 안에 한국의 대학으로 돌아와 동아시아공동체 결성에 대비한 연구와 국제 네트워크를 조직하는 일에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1990년대 사노맹 사건의 주역 백태웅 교수
인터뷰/이인우 기획위원 iwlee21@hani.co.kr
인터뷰/이인우 기획위원 iwlee21@hani.co.kr
내년 총선 민심의 풍향계로 요즘 주목되는 도시가 부산이다. 저축은행 사건의 시장바닥 피눈물과 문재인의 진정성과 김진숙의 투쟁이 그곳에 있다. 야권은 부산에서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기 위해 이 지역 출신의 새로운 인재들을 구하고 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언론에 이름이 등장하는 ‘인재’ 가운데 눈길을 끈 사람이 있다. 1989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을 결성하고 사회주의 혁명 운동을 전개했던 백태웅(48)씨다. 그는 6년여의 감옥살이를 ‘준법서약서’로 끝맺고 그를 아낀 추기경과 스승의 도움으로 자본주의 중심 미국으로 건너가 법대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12년이 흐른 얼마 전 그가 한국에 들어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인터뷰를 청했다. 정치에 관심 있느냐고 물었고, “정치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국제법 전공 교수로서 그는 70~80년대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 투쟁 경험을 아시아 민중 전체의 자산으로 삼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년 선거의 중요성을 내세워 정치를 걸고넘어지는 기자에게 그는 “많은 분들의 가르침과 조언을 구하고 싶다”고 여운을 남겼다. 사노맹의 백태웅은 7월21일 한달 남짓의 한국 체류를 마치고 미국 하와이로 돌아갔다.
독재 맞서 새사회 꿈꾸는 이들의 공통코드였을뿐
박노해 시인과 만나자마자 의기투합 단체결성
충격적 강령, 반성도 하지만 시대와 나의 한계 -사회변혁운동에는 어떻게 투신하게 되었나? “서울대 프락치 사건으로 감옥에 갔다가 1985년 말 나와 보니 변혁운동의 방법론을 두고 백화제방 식의 논의가 한창이었다. 그때 민추협의 중심 지도자가 김영삼 대통령이었는데 이성헌, 김영춘씨 같은 분들이 그 진영으로 들어가 있었고, 나한테도 비서로 오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왔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좀더 철저한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에 노동운동 쪽으로 갔다. 경제적 측면의 민주화, 즉 노동의 인간화가 더 시급한 과제라고 판단했다.” -그것이 사회주의 운동으로 전화하게 된 첫번째 결단이었나? “노동의 민주화를 통해 한국 사회 전반의 민주화가 가능하고 나면 그 이후의 사회는 어때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많았는데, 핵심 키워드가 ‘노동해방’이었다.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들이 실질적으로 대접받는 개혁이 아니면 안 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나에게 굳이 죄가 있다면 그 흐름을 아예 내놓고 사회주의라고 표방한 데 있었다.(웃음)”
-그 무시무시한(웃음) 사회주의란 명찰을 꼭 먼저 달아야만 했나? “당시의 사회주의는 이념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코드였다고 생각한다. 냉전논리와 군사독재에 맞서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의 공통된 코드. 더욱이 그때는 민주주의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시대이다. 그래서 더욱 결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죽음을 불사함으로써 사람들이 더 나은 사회에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 수 있다면 지금 우리는 사라져도 좋다고 여겼다. 사회주의라는 금기어에는 비타협적인 싸움을 결사적으로 하겠다는 자기 결의의 측면이 컸다.”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은 누가 제안한 이름인가? “박노해 시인과 나 둘이서 그 이름을 정했다. 1988년 4월1일로 기억한다. 국가보안법 제3조 반국가단체 구성의 수괴는 형량이 사형 아니면 무기징역이다. 사상범들이 30~40년씩 갇혀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 이름을 공개적으로 쓰는 순간 우리에게 닥칠 운명을 우린 잘 알고 있었다. 비장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작은 밀알이 되자는….” -사노맹의 강령에는 토지 무상분배라거나, 재벌기업의 몰수 등이 들어 있었다. 너무 충격적인 것이라는 생각은 안 해봤나? “내용적으로 미숙한 점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충격요법이 필요했지만, 우리의 준비 부족에 대한 반성과 회의도 많았다. 시대의 한계였고, 우리 자신의 한계였다. 그런 시대 상황 없이 살 수 있었더라면 좀더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가져보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박노해 시인과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 “처음 만난 것은 1987년 초였다. 그는 김문수·유시민·심상정 등과 서노련 활동을 같이 하고 있었다. 나도 일정 정도 조직이 겹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서노련의 일부가 우리와 ‘노동자해방동맹’이란 단체로 통합을 하게 되면서 알게 됐다. 우린 만나자마자 바로 의기투합했다.” -1992년 구속돼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직후인 1998년 8·15 특사 때 특별 가석방으로 출옥했다. 그리고 이듬해에 미국 유학을 떠났다. “내 석방과 사면에는 국제사면위를 비롯해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님, 강원룡 목사님과 스승이신 이수성 전 총리, 지도교수이셨던 최송화 교수님 등이 탄원해주셨다. 지속적으로 내 신변을 걱정해준 한겨레신문에도 감사한다. 국제인권법 분야에서 세계적 권위를 갖고 있는 노터데임(노트르담)대학으로 가도록 제안해 준 분이 1년 후배인 조국 교수였다. 그밖에도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양심수 준법서약서를 전향 운운하는 건 지나쳐
국제법 학자로 아시아공동체 위한 활동 하고파
한국, 대단한 나라…국제연대로 위대성 나눌때 -박노해도 같은 시기에 석방돼 나왔는데 그분에 대해서는 유독 전향이나 변절이니 하는 비난이 많이 뒤따랐다. “전향 운운은 잘못된 시각이다. 김대중 정부가 전향제도 폐지를 공식 선언한 뒤 양심수 석방의 현실적인 수단으로 ‘준법서약서’란 걸 제안했다. 그때 감옥 안에서 여러 입장이 있었지만, 박 시인과 나는 준법서약서의 본질적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현실적으로 어렵게 들어선 민주정부에도 양심수 문제를 풀 수 있는 명분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래서 그때 ‘대한민국 헌법에 바탕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향해 왔고, 앞으로도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겠다’는 요지의 준법서약서를 써냈다. 요식 절차에 대한 요식적인 답변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마저도 거부하면서 끝까지 감옥에 남은 분들의 결단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한국 사회가 민주화되어 가는 과정에 맞는 실천의 방식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런 판단을 전향이라고 하는 이름표를 붙이면서까지 문제삼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고 본다.” -더 옛날 이야기를 해보자. 학도호국단이란 군사학생조직의 총학생장으로 1984년 민주적인 총학생회 부활을 이끈 뒤 이른바 학원 프락치 사건에 연루돼 폭력사범으로 구속됐다. “당시에는 경찰이 가짜 학생 등 프락치를 학교에 심어 학생 동향을 탐지했다. 그들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일부 폭력사태가 생겼는데, 적어도 경찰이 지목한 ‘혐의자’ 중에는 폭력과 관계 있는 사람이 없었다. 경찰은 이 사건을 학생운동의 폭력성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막 조직된 서울대 학생회를 와해시키는 계기로 활용하고 싶어했다. 그러다 보니 서울대 학생회의 전·현 간부들을 ‘혐의자’로 몰아 대거 구속시킨 것이 이른바 ‘서울대 프락치 사건’이다.” 그러면서 그는 잊었던 아픈 기억이 되살아났는지 학생 시절의 ‘지우고 싶은 일화’ 하나를 털어놓았다. “당시 총장님이 내게 사람을 보내 은밀히 제안을 해왔다. 지금부터 한달 동안 제주도에 가서 휴양을 즐기다 와라. 그러면 한국청소년연맹 대표로 미국에 가게 해주겠다. 공부를 더 하길 원하면 국비 유학을 주선해 주겠다. 정치를 하고 싶으면 고위층 비서로 갈 수 있도록 주선을 하겠다. 비용 같은 것은 걱정하지 마라. 그러나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하면 널 제적시킬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보다 더한 일도 기다리고 있을 거다…. 그때 그 이야기를 전해준 분이 평소 제가 좋아하고 존경하던 분이어서 그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다 나왔다. 내가 아무리 학생회장이라고 해도 겨우 스물두살, 대학교 4학년일 뿐인데, 그 어린 사람한테 그런 제안을 하다니 얼마나 사회가 부도덕한 상태였던가? 어떻게 학생에게 그런 종류의 선택을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총장님이 어느 분인지 궁금하다. 그 이후 구속돼 감옥에 가 있는 동안 공장 경비원으로 일을 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으로 안다. 잡혀간 아들에게 편지를 쓰다가 갑자기 숨을 거뒀다고 들었다. “어느날 밤 숨어 지내던 방에 돌아와 보니 부모님이 와 계셨다. 당시 부산진경찰서 형사가 부모님에게 형님, 누님 하며 접근해 아들이 훌륭한 일을 했다, 지금 고비만 잘 넘기면 나중에 큰 인물이 될 것이니 잡히지 않게 잘 숨기라며 환심을 산 뒤 한달쯤 지나 부모님에게 자기가 높은 분한테 잘 얘기했으니 지금 자수하면 아무 처벌 받지 않고 나올 수 있다고 속였던 거다. 그 말을 믿은 부모님이 같이 가면 풀어준다고 했다면서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런데 그때 나는 자취방 창문에서 뛰어내리기만 하면 도망을 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걸 못했다. 그래도 법대생 아들에 대해 부푼 꿈과 기대를 지녔던 부모님에게 차마 창문을 넘어 도망치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 손을 잡고 자취방을 나선 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그때 나를 넘겨받은 형사는 나중에 날 격투 끝에 검거했다며 1계급 특진에 현상금 500만원을 받아갔다고 한다. 육군장교 출신으로 국가관과 공직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계셨던 아버지는 그 후 나라에 대한 원망과 당신에 대한 자책이 겹치면서 참 많이 힘드셨던 것 같다….” -운동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다면 무엇을 했을까? “요즘도 가끔 생각나는 일이 있다. 법대에 입학해 첫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어느 교수님이 ‘법학이란 빵을 위한 학문이다’ 그랬다. 법대에 와서 고매한 학문 논하지 마라. 어떻게 하면 니가 먹을 빵을 잘 벌고, 실용적인 측면에서 사회에 봉사하는 법률가가 될 수 있을지를 고민하라… 그런데 선배들은 그랬다. 법을 공부한다는 것은 기존 체제를 정당화하는 보조자의 길일 뿐이라고. 개인적으로 아쉽다면, 군사독재라는 폭압적인 현실과 법적으로 제기할 수 있는 문제를 연결시켜 그 속에서 세상을 바꾸고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가르쳐준 사람이 내게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사회정의, 법이라는 것이 단지 지배자의 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친 것처럼, 법을 민중의 것으로 만들고 그 속에서 능동적으로 정의의 수단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전망을 제시해 주었더라면… 그때는 80년대였다. 시대의 한계였고, 나의 한계였다.” -미국에서는 국제법을 전공한 학자로서 아시아 지역의 인권과 한국의 역할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온 것으로 안다. “나의 주된 연구 테마는 아시아 지역의 인권 규범은 어떤 발전 단계에 있고, 어떤 인권 기구가 성장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변화가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한국 노동자의 정리해고와 필리핀으로의 공장 이전이 맞물린 김진숙씨의 한진중공업 사건에서도 우리는 이미 일국의 노동문제가 범지역 차원의 노동문제이고 인권문제가 되고 있음을 보지 않는가.” -내년 총선과 대선은 향후 수십년 한국 정치의 흐름을 좌우할 분수령이 될 것 같다. 정치에는 관심이 없는가? 지식인으로서 우리 사회의 미래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내년의 정치 공간을 남의 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많아지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치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나는 오래 나가 있어서 준비가 없는 사람이다. 정치적 활동보다는 동아시아공동체가 구체화될 때를 대비하는 국제적 네트워크의 형성에 기여하고 싶다. 좀더 길고 넓은 전망을 가지고 현실 속에서 고투하는 사람들의 고민을 배우고 싶을 뿐이다.” 사노맹의 ‘급진적 사회주의자’ 백태웅은 인터뷰 말미에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하자, 할 듯 말 듯 망설이다 이런 말을 했다.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을 비교해 볼 때 새삼 우리나라가 대단한 나라라는 것을 실감한다. 한국은 식민지 시대로부터 기적 같은 역사의 길을 걸어왔다. 그럼에도 한국인들은 하루하루를 힘들어하며 살고 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룩한 경제와 민주주의의 성과를 자랑스러운 유산으로 만들 수 있을까? 우선 경제적 민주화와 정의를 더욱 밀고 나가야 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국내적 시각을 넘어 국제적인 연대와 실천을 통해 우리 현대사의 ‘위대성’을 나누어야 할 때가 아닐까? 올해 말의 동아시아정상회담(EAS)에는 18개국이 모이고, 10년 안에 동아시아공동체(EAC)가 만들어질 것으로 전망한다. 동아시아의 평화와 인권 협력을 위하여 한국의 정치지형을 뛰어넘는 새로운 시야가 나와야 하지 않을까? 한국에 가면 이런 이야기를 조심스럽게나마 많은 사람들과 하고 싶다는 꿈을 늘 꿨다.
박노해 시인과 만나자마자 의기투합 단체결성
충격적 강령, 반성도 하지만 시대와 나의 한계 -사회변혁운동에는 어떻게 투신하게 되었나? “서울대 프락치 사건으로 감옥에 갔다가 1985년 말 나와 보니 변혁운동의 방법론을 두고 백화제방 식의 논의가 한창이었다. 그때 민추협의 중심 지도자가 김영삼 대통령이었는데 이성헌, 김영춘씨 같은 분들이 그 진영으로 들어가 있었고, 나한테도 비서로 오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왔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좀더 철저한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에 노동운동 쪽으로 갔다. 경제적 측면의 민주화, 즉 노동의 인간화가 더 시급한 과제라고 판단했다.” -그것이 사회주의 운동으로 전화하게 된 첫번째 결단이었나? “노동의 민주화를 통해 한국 사회 전반의 민주화가 가능하고 나면 그 이후의 사회는 어때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많았는데, 핵심 키워드가 ‘노동해방’이었다.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들이 실질적으로 대접받는 개혁이 아니면 안 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나에게 굳이 죄가 있다면 그 흐름을 아예 내놓고 사회주의라고 표방한 데 있었다.(웃음)”
-그 무시무시한(웃음) 사회주의란 명찰을 꼭 먼저 달아야만 했나? “당시의 사회주의는 이념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코드였다고 생각한다. 냉전논리와 군사독재에 맞서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의 공통된 코드. 더욱이 그때는 민주주의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시대이다. 그래서 더욱 결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죽음을 불사함으로써 사람들이 더 나은 사회에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 수 있다면 지금 우리는 사라져도 좋다고 여겼다. 사회주의라는 금기어에는 비타협적인 싸움을 결사적으로 하겠다는 자기 결의의 측면이 컸다.”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은 누가 제안한 이름인가? “박노해 시인과 나 둘이서 그 이름을 정했다. 1988년 4월1일로 기억한다. 국가보안법 제3조 반국가단체 구성의 수괴는 형량이 사형 아니면 무기징역이다. 사상범들이 30~40년씩 갇혀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 이름을 공개적으로 쓰는 순간 우리에게 닥칠 운명을 우린 잘 알고 있었다. 비장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작은 밀알이 되자는….” -사노맹의 강령에는 토지 무상분배라거나, 재벌기업의 몰수 등이 들어 있었다. 너무 충격적인 것이라는 생각은 안 해봤나? “내용적으로 미숙한 점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충격요법이 필요했지만, 우리의 준비 부족에 대한 반성과 회의도 많았다. 시대의 한계였고, 우리 자신의 한계였다. 그런 시대 상황 없이 살 수 있었더라면 좀더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가져보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박노해 시인과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 “처음 만난 것은 1987년 초였다. 그는 김문수·유시민·심상정 등과 서노련 활동을 같이 하고 있었다. 나도 일정 정도 조직이 겹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서노련의 일부가 우리와 ‘노동자해방동맹’이란 단체로 통합을 하게 되면서 알게 됐다. 우린 만나자마자 바로 의기투합했다.” -1992년 구속돼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직후인 1998년 8·15 특사 때 특별 가석방으로 출옥했다. 그리고 이듬해에 미국 유학을 떠났다. “내 석방과 사면에는 국제사면위를 비롯해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님, 강원룡 목사님과 스승이신 이수성 전 총리, 지도교수이셨던 최송화 교수님 등이 탄원해주셨다. 지속적으로 내 신변을 걱정해준 한겨레신문에도 감사한다. 국제인권법 분야에서 세계적 권위를 갖고 있는 노터데임(노트르담)대학으로 가도록 제안해 준 분이 1년 후배인 조국 교수였다. 그밖에도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양심수 준법서약서를 전향 운운하는 건 지나쳐
국제법 학자로 아시아공동체 위한 활동 하고파
한국, 대단한 나라…국제연대로 위대성 나눌때 -박노해도 같은 시기에 석방돼 나왔는데 그분에 대해서는 유독 전향이나 변절이니 하는 비난이 많이 뒤따랐다. “전향 운운은 잘못된 시각이다. 김대중 정부가 전향제도 폐지를 공식 선언한 뒤 양심수 석방의 현실적인 수단으로 ‘준법서약서’란 걸 제안했다. 그때 감옥 안에서 여러 입장이 있었지만, 박 시인과 나는 준법서약서의 본질적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현실적으로 어렵게 들어선 민주정부에도 양심수 문제를 풀 수 있는 명분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래서 그때 ‘대한민국 헌법에 바탕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향해 왔고, 앞으로도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겠다’는 요지의 준법서약서를 써냈다. 요식 절차에 대한 요식적인 답변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마저도 거부하면서 끝까지 감옥에 남은 분들의 결단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한국 사회가 민주화되어 가는 과정에 맞는 실천의 방식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런 판단을 전향이라고 하는 이름표를 붙이면서까지 문제삼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고 본다.” -더 옛날 이야기를 해보자. 학도호국단이란 군사학생조직의 총학생장으로 1984년 민주적인 총학생회 부활을 이끈 뒤 이른바 학원 프락치 사건에 연루돼 폭력사범으로 구속됐다. “당시에는 경찰이 가짜 학생 등 프락치를 학교에 심어 학생 동향을 탐지했다. 그들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일부 폭력사태가 생겼는데, 적어도 경찰이 지목한 ‘혐의자’ 중에는 폭력과 관계 있는 사람이 없었다. 경찰은 이 사건을 학생운동의 폭력성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막 조직된 서울대 학생회를 와해시키는 계기로 활용하고 싶어했다. 그러다 보니 서울대 학생회의 전·현 간부들을 ‘혐의자’로 몰아 대거 구속시킨 것이 이른바 ‘서울대 프락치 사건’이다.” 그러면서 그는 잊었던 아픈 기억이 되살아났는지 학생 시절의 ‘지우고 싶은 일화’ 하나를 털어놓았다. “당시 총장님이 내게 사람을 보내 은밀히 제안을 해왔다. 지금부터 한달 동안 제주도에 가서 휴양을 즐기다 와라. 그러면 한국청소년연맹 대표로 미국에 가게 해주겠다. 공부를 더 하길 원하면 국비 유학을 주선해 주겠다. 정치를 하고 싶으면 고위층 비서로 갈 수 있도록 주선을 하겠다. 비용 같은 것은 걱정하지 마라. 그러나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하면 널 제적시킬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보다 더한 일도 기다리고 있을 거다…. 그때 그 이야기를 전해준 분이 평소 제가 좋아하고 존경하던 분이어서 그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다 나왔다. 내가 아무리 학생회장이라고 해도 겨우 스물두살, 대학교 4학년일 뿐인데, 그 어린 사람한테 그런 제안을 하다니 얼마나 사회가 부도덕한 상태였던가? 어떻게 학생에게 그런 종류의 선택을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총장님이 어느 분인지 궁금하다. 그 이후 구속돼 감옥에 가 있는 동안 공장 경비원으로 일을 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으로 안다. 잡혀간 아들에게 편지를 쓰다가 갑자기 숨을 거뒀다고 들었다. “어느날 밤 숨어 지내던 방에 돌아와 보니 부모님이 와 계셨다. 당시 부산진경찰서 형사가 부모님에게 형님, 누님 하며 접근해 아들이 훌륭한 일을 했다, 지금 고비만 잘 넘기면 나중에 큰 인물이 될 것이니 잡히지 않게 잘 숨기라며 환심을 산 뒤 한달쯤 지나 부모님에게 자기가 높은 분한테 잘 얘기했으니 지금 자수하면 아무 처벌 받지 않고 나올 수 있다고 속였던 거다. 그 말을 믿은 부모님이 같이 가면 풀어준다고 했다면서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런데 그때 나는 자취방 창문에서 뛰어내리기만 하면 도망을 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걸 못했다. 그래도 법대생 아들에 대해 부푼 꿈과 기대를 지녔던 부모님에게 차마 창문을 넘어 도망치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 손을 잡고 자취방을 나선 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그때 나를 넘겨받은 형사는 나중에 날 격투 끝에 검거했다며 1계급 특진에 현상금 500만원을 받아갔다고 한다. 육군장교 출신으로 국가관과 공직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계셨던 아버지는 그 후 나라에 대한 원망과 당신에 대한 자책이 겹치면서 참 많이 힘드셨던 것 같다….” -운동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다면 무엇을 했을까? “요즘도 가끔 생각나는 일이 있다. 법대에 입학해 첫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어느 교수님이 ‘법학이란 빵을 위한 학문이다’ 그랬다. 법대에 와서 고매한 학문 논하지 마라. 어떻게 하면 니가 먹을 빵을 잘 벌고, 실용적인 측면에서 사회에 봉사하는 법률가가 될 수 있을지를 고민하라… 그런데 선배들은 그랬다. 법을 공부한다는 것은 기존 체제를 정당화하는 보조자의 길일 뿐이라고. 개인적으로 아쉽다면, 군사독재라는 폭압적인 현실과 법적으로 제기할 수 있는 문제를 연결시켜 그 속에서 세상을 바꾸고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가르쳐준 사람이 내게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사회정의, 법이라는 것이 단지 지배자의 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친 것처럼, 법을 민중의 것으로 만들고 그 속에서 능동적으로 정의의 수단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전망을 제시해 주었더라면… 그때는 80년대였다. 시대의 한계였고, 나의 한계였다.” -미국에서는 국제법을 전공한 학자로서 아시아 지역의 인권과 한국의 역할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온 것으로 안다. “나의 주된 연구 테마는 아시아 지역의 인권 규범은 어떤 발전 단계에 있고, 어떤 인권 기구가 성장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변화가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한국 노동자의 정리해고와 필리핀으로의 공장 이전이 맞물린 김진숙씨의 한진중공업 사건에서도 우리는 이미 일국의 노동문제가 범지역 차원의 노동문제이고 인권문제가 되고 있음을 보지 않는가.” -내년 총선과 대선은 향후 수십년 한국 정치의 흐름을 좌우할 분수령이 될 것 같다. 정치에는 관심이 없는가? 지식인으로서 우리 사회의 미래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내년의 정치 공간을 남의 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많아지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치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나는 오래 나가 있어서 준비가 없는 사람이다. 정치적 활동보다는 동아시아공동체가 구체화될 때를 대비하는 국제적 네트워크의 형성에 기여하고 싶다. 좀더 길고 넓은 전망을 가지고 현실 속에서 고투하는 사람들의 고민을 배우고 싶을 뿐이다.” 사노맹의 ‘급진적 사회주의자’ 백태웅은 인터뷰 말미에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하자, 할 듯 말 듯 망설이다 이런 말을 했다.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을 비교해 볼 때 새삼 우리나라가 대단한 나라라는 것을 실감한다. 한국은 식민지 시대로부터 기적 같은 역사의 길을 걸어왔다. 그럼에도 한국인들은 하루하루를 힘들어하며 살고 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룩한 경제와 민주주의의 성과를 자랑스러운 유산으로 만들 수 있을까? 우선 경제적 민주화와 정의를 더욱 밀고 나가야 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국내적 시각을 넘어 국제적인 연대와 실천을 통해 우리 현대사의 ‘위대성’을 나누어야 할 때가 아닐까? 올해 말의 동아시아정상회담(EAS)에는 18개국이 모이고, 10년 안에 동아시아공동체(EAC)가 만들어질 것으로 전망한다. 동아시아의 평화와 인권 협력을 위하여 한국의 정치지형을 뛰어넘는 새로운 시야가 나와야 하지 않을까? 한국에 가면 이런 이야기를 조심스럽게나마 많은 사람들과 하고 싶다는 꿈을 늘 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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