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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북한 3대세습 쉽지 않아…내부불만 점점 늘 것

등록 2011-07-03 19:47

서대숙 교수는 “그동안 남한의 북한 지원이 북한 체제를 공고히 하고 지배층만 돕는 일이라고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는데, 만약 남한의 원조가 북한 정권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북한이 망하는 징조의 하나가 아니냐”고 반문한다. “우리가 북한에 대해 뭘 하더라도 그 체제 안에서 잘사는 사람은 잘살고 못사는 사람은 못사는 겁니다. 그걸 남한 돈으로 당장 어떻게 해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오산”이라고 말했다.
 김정효 기자 <A href="mailto:hyopd@hani.co.kr">hyopd@hani.co.kr</A>
서대숙 교수는 “그동안 남한의 북한 지원이 북한 체제를 공고히 하고 지배층만 돕는 일이라고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는데, 만약 남한의 원조가 북한 정권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북한이 망하는 징조의 하나가 아니냐”고 반문한다. “우리가 북한에 대해 뭘 하더라도 그 체제 안에서 잘사는 사람은 잘살고 못사는 사람은 못사는 겁니다. 그걸 남한 돈으로 당장 어떻게 해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오산”이라고 말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현정부 정책 입안자들 북한 모르는 것 같아
남북정상, 서울 핵회의서 만남 가능성 없어
관계 풀려면 북 도와야…북-미 수교 불가능
이인우 기획위원 iwlee21@hani.co.kr

서대숙 전 하와이대 한국학연구소장

일제강점기 한국 공산주의 운동 연구와 현대 북한 정치의 국제적인 권위자인 서대숙(80) 전 미국 하와이대 정치학 석좌교수가 최근 한국을 다녀갔다.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에 설치될 ‘서대숙 문고’를 둘러보기 위해 방한했다. 그가 평생 모은 3700여점의 일제하 한국 독립운동 사료와 책 등의 망실을 우려한 독립기념관 쪽에서 보관소 마련을 제안해 문고가 설치되게 되었다고 한다. 팔순의 노경인 서 교수는 “평생 함께한 분신과도 같은 책과 사료들을 떠나보내는 준비이니 어느 정도는 슬픈 여행”이라며 쓸쓸해했다. 인터뷰는 지난 6월10일 그가 머물렀던 호텔에서 있었다. 서 교수는 김일성 등 공산주의 운동을 연구하게 된 계기와 ‘빨갱이’로 몰려 한국 정부로부터 배척당한 뒤 미국으로 귀화한 일화 등과 함께 3대 세습 과정에 있는 북한에 대한 견해를 들려주었다. 서 교수는 김정은으로의 3대 세습은 지난한 과정이 될 것이며, 미국과 북한의 국교 정상화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1950~60년대에 남한 사람이 북한 공산주의를 연구하면 빨갱이로 몰리기 십상이었을 텐데 어떤 계기로 김일성과 북한 공산주의를 연구하게 되었나요?

“미국 컬럼비아대 박사과정 때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교환교수로 온 헌트라는 분의 권유가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때 세미나 주제가 ‘커뮤니즘’이었는데, 한국에는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이 없었느냐는 물음에 아무 대답도 못했어요. 그랬더니 그분이 당신 정도가 모른다면 다른 많은 한국인들도 모를 테니 당신이 직접 연구를 해봐라, 그러면서 다음 학기 발표 주제로 정해주는 겁니다. 앞이 캄캄했죠. 그래서 방학 동안 사방으로 자료를 찾아보니까 일본 헌병들이 독립운동을 탄압하려고 참으로 열심히 조사해 놨더군요. 그 자료들을 모아 가지고 논문을 써서 헌트 교수한테 냈더니 아주 흡족해하면서 자기가 정식으로 추천할 테니 박사학위 논문으로 이걸 써라, 그래서 그게 전공이 됐습니다.”

-유명한 <조선공산주의운동사>가 그 논문이군요.

“1964년에 박사학위를 따니까, 컬럼비아대에서 프린스턴대 출판부에 추천을 해줬어요. 거기서 무려 2년간 심사를 진행해서 1967년에 책으로 나왔는데, 출판 여파가 참 크더군요. 그 책으로 인해 과분하게도 일약 최고 학자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남들이 20년 걸리는 정교수 자격을 불과 6년 만에 땄으니 말이죠.”

-북한 공산주의 연구를 하면서 오해도 많이 받았을 것 같은데요.


“내가 박사를 하고 나니까 컬럼비아에서 같이 공부하던 동료 학생들 사이에 저놈 빨갱이다 이런 얘기가 나돌았습니다. 나중에는 내가 총련 돈을 받았다는 소문으로 이어졌고요.”

-학자로서 대성공했는데 금의환향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까?

“1969년 당시 고려대가 아세아문제연구소를 만들어 외국에 있는 한국인 학자들을 스카우트했어요. 그 일을 맡은 게 얼마 전 작고한 김준엽 선생이었지요. 그분하고 하와이에서 만나 도쿄까지 왔다가 한국에는 끝내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먼저 들어간 김준엽씨가 상황을 살펴보고는 돌아가는 게 좋겠다는 거예요.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주일 미국대사 고문으로 도쿄에 와 있었던 컬럼비아대 은사에게 부탁을 했어요. 그분이 미국 중앙정보국(CIA)을 통해 서울 분위기를 알아보고는 절대 들어가선 안 된다고 말려요. 당시 한국 중앙정보부장이던 김형욱이가 (김일성이를 미화한) 서대숙이가 들어오면 자기 손으로 죽이겠다고 그랬다는 겁니다.”

눈물을 머금고 미국으로 돌아간 서대숙은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 증오로 변하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좋다, 조국이 어디 남한뿐이냐? 그는 그렇게 북쪽으로 눈을 돌렸다. 북에서도 좋은 조건을 제시하며 손짓했다. “결국은 안 갔어요. 내가 기독교 집안이고 아버지가 목사이신데 어떻게 공산당을 하느냐, 그렇게 다짐했어요. 주변에서 많은 분들이 충고도 해주었고. 그래서 남도 북도 아닌 미국 시민권을 갖게 된 거지요.”

-북한에서는 초청을 많이 했을 것 같은데요.

“1974년에 처음 평양에 갔어요. 2주일 정도 있으면서 북한을 둘러봤습니다.”

-그때 평양에 간 사실을 한국에서도 나중에 알았습니까?

“잘 요리해 먹었죠.(웃음) 도쿄를 거쳐 바로 하와이로 돌아갔는데, <한국일보> 1면에 제가 서울에 와서 일문일답까지 한 것으로 보도가 됐어요. 서대숙 교수가 이북에 다녀왔는데, 이북에서는 전쟁 준비가 다 돼 있다는 식이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기자가 도쿄에서 내 친구 이야기를 듣고 기사를 송고했는데 중앙정보부 사람들이 나와서 자기들 필요한 대로 고쳐서 기사를 내보냈다는 겁니다. 이북에서는 그 기사를 보고 서대숙이는 자본주의 개라고 욕을 해댔지요. 허허.”

-한국 정부의 의혹이나 감시 같은 활동이 언제 끝났나요?

“노태우 대통령 때입니다. 그때 학생들 사이에서 주체사상이 널리 유행하니까, 정부 사람들이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나 같은 사람이 주체사상이 뭔지 가르치게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1989년 정부의 공식 초청을 받아 서울대에서 1년간 ‘북한개론’을 가르쳤습니다.”

-북한 얘기를 해보죠. 북한은 지금 김정일의 아들 김정은으로의 3대 세습 작업이 진행중인데, 과연 순조로울지가 초미의 관심사입니다.

“3대 세습이 성공할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사실 부자 세습은 어느 정도 이해도 가고, 또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성공적일 수도 있지만, 3대째로 넘어가는 문제는 쉽지 않을 겁니다. 과연 김정일이 죽고 나서도 젊은 김정은의 말이 먹혀들지가 관건인데… 최근 북한을 보면 고위직 인사들이 사라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보통 숙청이라고들 하는데, 지금 벌어지는 일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최고위층인 국방위원회에서도 두 사람인가 세 사람이 사표 내고 그만뒀는데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이건 뭔가 3대 세습에 대한 불만과 같은 ‘매우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는 걸로 저는 해석합니다. 아마도 이런 일은 점점 더 증가할 걸로 봅니다.”

-그럼 현재 남한의 대북정책 기조는 그런 체제 불안정성의 증가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아야 할까요?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뭔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다루고 있다는 느낌이 거의 안 들 정도입니다. 이북을 제대로 연구하고 아는 사람들이라면 이렇게까지 남북관계가 악화되지 않았을 텐데… 마치 총쏘기 몇초 전 같은 이런 분위기는 정말 좋지 않습니다.”

-이명박 정부 임기 안에 뭔가 정상이 만난다든가 하는 극적인 돌파구가 생길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을까요?

“그런 일 없을 겁니다. 얼마 전 이명박씨가 베를린에서 내년 서울서 열리는 핵안보정상회의에 김정일을 초청한다고 했는데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김정일을 어떻게 보는 거예요? 북한선 하느님 같은 존재예요. 김정일이 세계 정상들 틈에 자기도 끼었다고 으쓱댈 것 같아요? 내가 김정일 참모라도 가지 말라고 할 거예요. 정말 북한 사회를 조금이라도 알고 한 초청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최근 북한과 중국이 압록강변 황금평 공동개발에 나섰습니다. 북-중 관계가 밀접해지면 통일은 더욱 요원해지는 게 아닌가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그렇죠. 그러나 북한이 살려면 중국에 기대는 수밖에 없으니. 중국 역시 변방 지역의 안정이 최대 과제 아닙니까? 그러니 양쪽 사이가 나빠질 수가 없어요. 중국은 북한에 대해 양보할 수 있는 한 양보할 거예요. 그 사람들 북한 먹여살리는 거 쓰촨(사천)성 하나 정도밖에 안 되지 않겠습니까?”

-현실적으로 통일의 전망은 더욱 어두워졌군요.

“지금처럼 나쁜 때가 어디 있었나요? 지금 시점에서는 통일을 말하는 것조차 우습지요. 그동안 북한에 쌀도 주고 비료도 주다가 이명박 정부 들어 이젠 못 준다, 쌀 받고 싶거든 먼저 굽히고 들어와라 이렇게 나가고, 저쪽은 저쪽대로 그래, 우리가 굶은 게 어제오늘이냐? 너 아니면 상대할 사람이 없는 줄 아냐? 이러니 최악이 아닐 수 없지요.”

-남북관계를 언제까지 파탄상태로 둘 수는 없을 텐데,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북한을 도와주는 방법밖에 달리 무슨 수가 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방법은 한가지예요. 경제적으로 윤택한 쪽이 없는 쪽을 도와줘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지, 못살고 못 먹는 쪽이 허리띠 졸라매 가며 잘사는 집을 도울 수 없는 게 세상 이치 아닌가요? 북쪽이 우리한테 먼저 뭘 잘해주기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에요. 제가 제일 아쉬워하는 것은, 남쪽의 대북정책 담당자들입니다. 다른 나라 정책을 부러워하거나 카피하려 하지 마세요. 남북관계의 특수성 같은 조건은 다른 어느 나라에도 없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대로의 특성과 괴로운 점이 있고 그것이 바로 해결의 실마리이자 대상이어야 하는데, 그 점을 좀 소홀히 보는 것 같아요.”

-새 주한 미국 대사에 한국계인 성 김이 임명됐습니다.

“지금 오바마가 중국계를 중국 대사로, 한국계를 한국 대사로 보내는 정책을 취하는 것 같습니다. 미국 입장에서 성공 여부는 두고 봐야겠지만, 한국 입장에서는 나쁠 게 없다고 봅니다. 아무래도 같은 동족 아닙니까.”

-남북관계 개선과 함께 북한과 미국의 수교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저는 한마디로 북-미 수교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미국에서는 한번 적으로 간주된 나라와는 무역이나 통상을 금지하는 법률이 있습니다. 이게 한번 금지대상에 오르면 없애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북한이 이 ‘자격’을 얻은 게 6·25 때입니다. 북한이 미국과 국교를 열려면 먼저 그걸 없애는 게 선결조건인데 현 상태에서 그게 미국 의회를 통과하겠어요? 결국 해답은 북한이 먼저 완전 비핵화를 실현하는 것인데, 그건 북한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지요.”

컬럼비아대 박사과정때 교수 권유로 북한연구
‘빨갱이’ 몰려 귀국 못하고 미국시민권자로 살아
나라 망친 이승만, 건국박물관에 기념해선 안돼

-결국 핵을 포기하는 게 관건인데, 북한한테 먼저 무장해제하라는 것이니, 그래서 수교까지 가기가 어렵다는 말씀이군요.

“어렵다는 얘기가 아니라 안 된다는 얘기죠.”

서 박사는 인터뷰 말미에 남기고 싶은 말을 묻는 질문에 잠시 생각하다가 이승만 대통령 이야기를 꺼냈다.

“최근에 이승만 박사 쪽을 공부하거나 지지하는 분들이 나한테 이메일 등을 보내 왜 자꾸만 ‘국부’를 혹평하고 다니냐며 비난을 합니다. 나는 우리 근현대사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이승만 박사 같은 사람이 나라를 망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만 정신차렸더라면 단독정부는 세워지지 않았을 거고, 또 기왕에 단독정부를 세웠다면 남한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로 이끌었어야 하는데, 그는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명박 정부 들어 ‘건국박물관’(현재 서울 광화문 옛 문화관광부 청사 자리에 짓고 있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짓는다고 하던데 거기에 박정희, 김대중, 김영삼, 노무현 같은 사람은 들어가도 이승만은 안 됩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가장 큰 과오에 대해 묻자 “헌법까지 고쳐가며 종신집권하려고 한 거죠. 사사오입이니 뭐니 하며 별 추태를 다 부렸잖아요? 그 사람이 그렇다고 국민들에게 사과한 적도 없어요. 이명박씨도 연평도 포격으로 사람이 죽고 다치자 대통령으로서 국민들한테 사과했는데, 수백만명이 죽고 다친 6·25 때 자기는 맨 먼저 도망쳐놓고 국민들한테 사과 한마디 없었던 게 이승만이란 사람입니다. 전두환 같은 무뢰한이 자기는 7년 하고 그만뒀다는 염치없는 자랑을 늘어놓게 만든 것도 연원을 따지자면 이승만의 잘못입니다.”

서대숙 전 하와이대 한국학연구소장
서대숙 전 하와이대 한국학연구소장
서대숙은 김일성의 항일빨치산투쟁 학문적 논증 ‘센세이션’

서대숙은 1931년 간도 룽징(용정)에서 함경북도 회령 출신의 목사 서창희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룽징의 홍중소학교와 영신중학을 다녔다. 일제 패망 후 북한 지역에 소련군이 진주하자 온 가족이 공산주의를 피해 1946년 월남했다. 서울중학교를 거쳐 1950년 연희대(현 연세대)에 입학했다가 6·25전쟁이 터져 부산에서 미군 통역관으로 일했다. 통역을 해준 미군 대령의 도움으로 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로 유학을 가 인디애나주립대를 거쳐 1964년 컬럼비아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7년 프린스턴대학 출판부에서 책으로 나온 그의 박사학위 논문 <조선공산주의운동사>는 가짜설이 나돌던 김일성의 항일빨치산무장투쟁 경력을 학문적으로 논증해 남한 사회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북한의 초청을 받아 평양을 오가며 북한 정치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명성을 얻었으나, 한국 정부로부터는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사 1980년대까지 감시와 배척의 대상이 됐다. 이후 미국 국적을 취득한 그는 휴스턴대와 컬럼비아대를 거쳐 하와이대에서 정치학과 교수 겸 한국학연구소장, 석좌교수 등을 지냈다. 학계에서 은퇴한 지금은 자식들이 살고 있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고 있다. 한국어를 잘 못하는 두 아들이 “한국 역사에 대해서만큼은 여느 한국인 못지않게 잘 알도록 하기 위해” 삼국시대부터 미국 이민에 이르는 가족사까지를 아우른 영문 한국사를 완성하는 것이 “여생의 마지막 사업”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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