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제화 되지 못하고 사라지는 ‘금요일의 발표’들. 위에서부터 한상률 전 국세청장 검찰 수사발표, 청와대 5.6 개각 발표, 효성그룹 2세들의 국외부동산 취득의혹, 삼성그룹 경영권 불법승계 의혹을 담은 사진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왜 금요일에 FTA 번역오류 등 민감하고, 삼성 불법승계 등 굵직한 사안 발표가 몰려 있나
‘뉴스화’되지 않도록, 인터넷 뉴스 소비 높은 시간 피하고 신문 열독률 낮은 주말을 찾아
‘뉴스화’되지 않도록, 인터넷 뉴스 소비 높은 시간 피하고 신문 열독률 낮은 주말을 찾아
3일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한글본 번역 오류와 관련된 언론 브리핑을 하겠다고 밝혔다. 우리나라의 무역과 경제에 큰 영향이 끼칠 사안을 금요일 오후 3시에 브리핑하겠다는 것에 대해 출입기자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외교통상부 한 출입기자는 “200개가 넘는 방대한 분량의 번역 오류를 발표하면서 전날 밤 9시에 문자로 브리핑이 있다고 출입기자들에게 알렸다”며 “금요일 오후에 발표를 하면 당일 인터넷 뉴스소비가 높은 시간을 피하고 주말에 주목도 못 받아서 해당 뉴스 자체가 죽어버린다”고 말했다. 의도를 의심하는 기자도 있다. 또 다른 기자는 “특별히 금요일에 해야만 할 필연적인 일정도 없는데 이렇게 일정을 잡아 의아했다”며 “이를 모를 리 없는 부처의 노림수”라고 꼬집었다.
종편 선정 발표는 설연휴 앞둔 12월31일
미국 백악관을 둘러싼 정치 현실을 다룬 미국 인기드라마 <웨스트윙(West Wing)>을 보면 ‘쓰레기 버리는 날(trash day)’이라는 은어가 나온다.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신문 지면도 줄고 대중의 관심도 떨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이때에 맞춰 민감한 사안의 언론 브리핑을 몰아서 하면 큰 관심받는 일 없이 슬쩍 넘어가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보도자료 따위를 몰아서 내는 금요일을 쓰레기 버리는 날이라 일컫는 것이다.
독자의 요일별 뉴스 이용 실태는 한국이나 미국이나 비슷한 실정이다. 한국신문협회가 지난 2008년 조사한 ‘신문독자의 신문 이용행태 조사연구’를 보면 어떤 요일에 나오는 기사냐에 따라 이용 정도는 크게 갈렸다. 열독률이 가장 높은 월요일 같은 경우 93.7%에 달했고 다른 요일들도 80%대였지만, 토·일요일은 58.6%로 크게 떨어졌다.
최근 논란이 된 ‘금요일의 발표’들을 보면 사안이 굵직굵직하다. 가깝게는 지난 6일(금요일)에 발표된 정부 개각이 있다. 정부가 개각 발표를 금요일 저녁에 한 것은 유례가 없다는 지적이 일었다. 발표된 개각 내용은 재보선에서 드러난 민심에도 불구하고 쇄신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였다.
[%%HANITV1%%] 권력 핵심과 연루된 의혹에서 ‘금요일의 미덕’은 자주 엿보인다. 대통령 형제의 연루 의혹이 불거졌던 한상률 전 국세청장의 검찰수사 발표도 지난 4월15일 금요일에 있었다. 이미 결과를 내놓고도 발표 시기를 조율했다는 의혹이 무성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사돈 기업인 효성그룹 2세들의 국외 부동산 취득 의혹에 대한 기소도 금요일(지난해 7월16일)에 발표됐다.
재계 거물이 연루되거나 여론이 민감한 사안이면 관례가 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정도로 휴일 전 발표는 잦다. 삼성그룹 경영권 불법승계 의혹사건에 대한 대법원 선고는 통상 있던 목요일이 아닌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이 있던 2009년 5월29일(금요일) 이뤄졌다. 무려 13년을 끌어온 사건이었다. 방송통신위원회의 종합편성·보도 채널 선정 발표도 설연휴를 하루 앞둔 12월31일에 있었다. 정부 합동조사단의 ‘상하이 스캔들’ 조사 결과 발표도 금요일(2010년 3월25일)이었다.
공공요금 인상과 같은 서민경제에 민감한 내용도 금요일을 주로 발표날로 택했다. 기획재정부는 지난해 7월30일(금요일) 전기요금과 가스요금이 각각 3.5%, 4.9% 인상하는 내용 등을 담은 인상안을 발표했다. 이날도 기획재정부 차관 주제로 열린 ‘물가안정 대책회의’에서 상승요인을 반영한 ‘공공요금 조정’이 곧 있을 것임을 시사했다.
알맹이 없어도 평일에 별도 브리핑룸에서…
법조 출입경력 4년의 한 신문사 기자는 “정권과 코드가 맞느냐 맞지 않느냐에 따라 검찰의 수사발표 시점과 열의가 크게 다른 것이 보인다”며 한상률 사건과 농협 해킹 사건을 대비했다. “한상률 사건의 경우 이미 주초에 결론이 난 것을 출입기자들이 아는 상태였고 항의도 했지만 금요일 오후에 이뤄졌다. 반면, 농협 해킹 사건의 경우 출입기자 입장에서 발표 내용에 알맹이가 빠져 있다고 보였는데도 평일에 별도 브리핑룸에서 프리젠테이션을 할 정도로 이례적으로 이뤄졌다.”
김유진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은 “언론의 전반적인 정부 비판 기능이 무력해진 가운데, 금요일 발표는 해당 내용의 의제화를 막는 결과를 낳고 있다”며 “해당 기관들은 특별히 금요일 발표를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를 악용하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영상 조소영 피디, 글 권오성 기자 트위터 @5thsage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