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인터뷰를 위해 마리아칼라스홀을 찾았을 때 이장희씨는 무대 위에서 자작곡 <나는 누구인가>를 부르고 있었다. 작달막한 키에 중절모를 쓴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없을 수는 없었다. “방송 두번이 근 30년 만에 나를 가수로 다시 태어나게 한 것 같다. 한 친구가 방송 안 나온다더니 잘만 나왔네 하길래, 그래 못난 놈이 못난 짓 했다 어쩔래 하고는 웃어주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30년만에 가수활동 재개하는 이장희
복고 바람이 한 사내를 실어 왔다. 굳이 호명하지 않았다면 나타나야 할 이유도 별반 없었다. 하지만 막상 등장하자 아주 멀리서부터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늦은 밤 쓸쓸히 창가에 앉아 꺼져가는 불빛을 바라보면은 어디선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한잔의 추억·1972) 아마도 그 소리의 진원지는 40년 전쯤부터일 것이다.
1970년대 청년문화의 일탈적 아이콘이었던 싱어송라이터 이장희(64)씨가 30년 만에 노래 한 곡을 발표한다. 지인의 강권으로 출연한 티브이 연예프로그램에 이어 대중들의 큰 호응을 얻었던 ‘세시봉 콘서트’에 찬조출연한 게 계기였다. 공식적으로 컴백이라는 표현을 쓰기엔 나이로 보나 오랜 공백기로 보나 아직 이른 감이 있지만, 그가 다시 노래를 만들고 부른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또한 없다. 인터뷰는 그가 자청했다. 자신이 최근 지은 노래 <울릉도는 나의 천국>을 홍보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내친김에 그의 명곡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1973), <안녕>(1979) 등과 최근 방송에서 불러 화제가 된 <내 나이 60하고 하나일 때>를 함께 수록한 시디 음반을 5월 말~6월 초에 낼 것이라고 한다. 가을께엔 티브이 콘서트도 계획하고 있다. 새 가요를 작곡해 발표하면 완벽한 컴백이 될 것이다. 인터뷰는 그의 열렬한 팬이 연습 장소로 제공한 서울 강남구 대치동 마리아칼라스홀에서 지난 10일 있었다.
-<울릉도는 나의 천국>은 어떻게 발표하게 됐나?
“방송을 본 분은 아시겠지만, 내가 사랑하는 울릉도를 노래로 표현하고 싶다고 공개적으로 말한 적이 있다. 그 후 만나는 울릉도 분들마다 그 노래 언제 나오냐고 물어왔다. 그냥 있어서는 도리가 아니다 싶었다.”
-노래는 얼마 만에 하는 건가?
“제대로 노래 연습 해보는 게 한 30년쯤 되는 것 같다.”
-이제 음악활동을 새로 시작하는 건가?
“글쎄, 이미 시작된 거 아닌가?(웃음) 요즘 매일 한시간씩 기타 연습을 하는데, 꼭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가는 느낌이다. 가수로서 노래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린다고나 할까?” 1947년생인 이장희는 우리나라 싱어송라이터 1세대를 대표하는 작곡가 겸 가수 겸 디제이였다. 1971년 <그 애와 나랑은>으로 가수로 데뷔해 <한잔의 추억>(1972), <그건 너>(1973)에 이어 불후의 명곡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와 <한 소녀가 울고 있네>(1974)를 잇따라 히트시켰다. 그 무렵 나이든 남자들도 기르지 않은 콧수염, 불량기 넘치는 오토바이, 담배를 꼬나문 건방진 이미지는 그를 일약 청년문화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70년대 청년문화 아이콘, 복고바람 타고 귀환
새 노래 ‘울릉도는 나의 천국’ 곧 시디로 발표
“다시 음악 하는건 잃어버린 고향 찾는 느낌” -음악에 심취하게 된 건 언제부터인가? “서울중학교 2학년 때 삼촌 친구였던 영남이형(가수 조영남)이 우리집 마루에 걸터앉아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데 그게 얼마나 멋있던지. 그때부터 팝송에 빠졌어. 고교(서울고) 시절엔 미치다시피 했고. 장남인 나에 대한 기대가 컸던 아버지 손에 기타가 몇개 부서져 나갔어도 음악이 좋았어.” 이장희는 고교 시절부터 작곡을 해 그의 히트곡 중 <자정이 훨씬 넘었네>는 그 시절 습작이었다. 대학(연세대 생물학과)에 와서는 윤형주, 유종국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포크송그룹(라이너스)을 결성했다. 그러나 또래들과의 예기치 않은 폭력사건에 휘말려 왼쪽 시력을 크게 잃고 학업이 어려움에 봉착하자 대학을 자퇴했다. 그가 방황을 겪으며 음악다방에서 무명가수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건 이 무렵이었다. -가수로 정식 데뷔한 계기는? “영남이형, 형주, (송)창식이, (김)세환이가 다 스타가 되었을 때야. 그런데 부르는 노래는 대부분 번안곡이었어. 그래서 이젠 우리 노래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 내가 곡을 몇 개 만들었어. 윤형주의 <비의 나그네>, 송창식의 <애인>, 김세환의 <좋은 걸 어떡해> 등. 그때 음악프로듀서 이종환씨가 노래도 직접 해보라고 권하길래 <그 애와 나랑은>으로 데뷔하게 됐지.” -작곡에 소질을 보인 이유가 따로 있는가? “내가 작사·작곡을 다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릴 때 영향이 컸다고 생각해. 영남이형이 다녀간 뒤 가곡 <바우고개>로 기억하는데 그 악보에 멜로디와 피아노 악보가 같이 있었어. 피아노 악보를 기타로 내 식대로 쳐보면서 노래를 배웠는데, 그렇게 음악을 배운 게 터닝포인트였던 것 같아. 무엇은 생략해도 되고 무엇은 절대 안 된다는 감을 그때 갖게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실례되는 말이지만, 노래도 잘한다기보다는 자기 멋에 취해 부르는 것 같았다. “아하, 바로 그거, 내가 하고 싶은 얘기다. 영남이형, 창식이, 세환, 형주 다들 노래 잘하잖아? 반면에 나는 기분으로 불렀다. 멋지게 발산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을 함축하는 쪽이었지. 작곡도 가사가 먼저야. 노랫말이 나오면 그것으로 끝. 가사의 기분을 따라가면 딱 그 음이 나와. 머리 싸매고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콧수염이 멋졌는데, 원래 기를 생각이었나?
“오토바이 타다 넘어져 흉터가 생겼어. 그걸 가리려고 길렀는데, 기르고 보니 괜찮아. 아, 이것 봐라 싶더라. 그때는 수염 기르는 사람도 없었으니 더욱 척하고 싶지 않겠어? 콧수염과 모터사이클이 그렇게 내 트레이드마크가 됐어.”
-지금은 없네요?
“쉰살에 깎았어. 어느날부터 사람들이 날 알아보는 게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어. 아무도 날 못 알아보는 내가 되어 살고 싶다는 마음이 커지던 차에 쉰이 왔길래 깎아버렸지. 머리도 밀고 싶었는데 명색이 방송국, 신문사 사장인데 불량스러워 보일까봐 그건 참았어. 그러다가 사업을 그만두고 머리를 짧게 잘랐다가 예순이 왔을 때 밀어버렸어.”
-기억나는 연애담 없나? 첫 부인이 된 애인한테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를 작곡해 바친 일화는 유명하지 않나?
“친구들이 나보고 로맨티시스트라고 하는데, 나는 어릴 적부터 뭘 하면 대충 하지 않고 진짜로 하고 싶었어. 연애도 하면 제대로 푹 빠져보려고 했지. 그런 걸 여자들이 좋아했나봐.”
-당신 노래 중 개인적으로 조영남씨가 부른 <불 꺼진 창>을 아주 좋아했다. 절절한 실연의 사연이 없다면 절대 저런 노래 안 나올 거라고 여겼는데 그런가?
“팝송을 들으며 자란 사람이라 트로트는 잘 몰랐지만, 그때 작곡가로서 우리 트로트 멜로디가 너무 엔카 같아 아쉬웠어. 우리 분위기의 트로트를 한번 만들어보자고 작정하고 덤벼든 게 그 노래야. 사연? 그런 건 없어요.”
1975년은 한국 사회에 특기할 만한 해였다. 그해 4월 월남이 패망하자, 정권 차원의 위기의식을 느낀 박정희 정권은 5월 긴급조치 9호를 발령해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 자체를 봉쇄했다. 또한 청바지, 통기타, 장발 등으로 대표되는 청년문화가 퇴폐 분위기를 조장해 사회 기강을 해친다며 이른바 건전가요 운동을 전개해 이장희의 <불꺼진 창>을 비롯해 상당수 가요들이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방송·판매를 금지 당했다.
-가요계 정화조처 후 그해 12월에 대마초 사건이 터져 가요계를 떠났다. 그때 확실히 연루된 건가?
“연루된 거지 뭐. 처음엔 호기심이었지만, 나중엔 좋았어. 음악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거의 만연 수준이었어. 그러나 우린 그게 그렇게 중범죄라고는 생각 못했어.”
-대마초 파동으로 구속된 뒤 가요계를 떠나버렸다. 극단적인 선택이었는데.
“75년 12월2일 잡혀 들어가 구치소에 20일 있었는데, 그때 마누라가 만삭이었어. 창살 밖으로 눈이 내리는데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어. 29살 나이에 큰 시련이잖아? 그때 결심했어. 이제 음악은 그만하자, 이만하면 됐다. 다른 삶을 살아보자. 구치소에서 나오는 길로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다.”
노래를 잘한다기보다 가사 표현에 집중
지금 나이에 맞는 좋은 곡 만드는 것이 꿈
“인생의 쓸쓸함, 아름다움 담아내고 싶다” 이장희는 이후 가요계를 떠나 명동에서 옷가게를 하다가 1979년 우연히 만난 후배 밴드 ‘사랑과 평화’ 멤버들의 간청으로 데뷔 음반을 제작했다. <한동안 뜸했었지> <장미> <어머님의 자장가> <뭐라고 딱 꼬집어 얘기할 수 없어요>와 같은 ‘사랑과 평화’의 명곡들이 모두 이장희의 손에서 나왔다. ‘사랑과 평화’는 음반 출시 2주 만에 스타가 됐다. 이후 동생(이승희. 작고. 본명이 이경희인 그도 음악인이었다) 친구였던 김현식과 김수철 등이 찾아와 곡을 주게 됐고. 김태화의 <안녕>도 그때 만들어졌다. -미국 이민은 계획한 것이었나? “정확히 말해 계획적인 이민은 아니었어. 80년인가, 미국에서 열린 태평양가요제에 김태화의 <난 바보처럼 살았군요>가 초청됐는데 그 음반 제작자가 나였어. 그래서 따라갔는데, 뉴욕에 내려보니 나한테 딱이야. 내가 머리를 좀 굴려 그대로 눌러앉은 거지.” -엘에이 라디오방송 ‘라디오코리아’를 운영해 성공한 이야기는 당시 국내에서도 많이 알려졌다. “88년에 한국으로 돌아오려다 접은 뒤 89년 2월1일 정식 개국했다. 엘에이에서 한인 대상으로 라디오를 하면 장사가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어. 내가 사업 감각이 좀 있는데다 디제이 하면서 배운 것도 있었어. 불과 6개월 만에 손익분기점을 돌파했으니 가히 폭발적이었지.” -돈 많이 버셨겠네요? “아냐, 돈은 많이 못 벌었어. 사람들은 내가 많이 번 줄 아는데, 사업 접고 나올 땐 거의 맨몸이다시피 했다.” -2003년 라디오코리아 사업을 접은 이유는? “방송국을 리스해서 운영했는데, 잘되니까 리스료를 자꾸 올려. 방송국 값도 치솟아 미국인들끼리 사고팔고 해. 안 되겠다 싶어 내가 사들이려고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어. 새 주인은 리스료를 2배로 올리고. 그때 사업적으로 판단했어. 또 초등학교 시절부터 내 인생의 롤모델이 트로이 유적을 발굴한 하인리히 슐리만이야. 50살까지 열심히 돈 번 뒤 미련 없이 은퇴하고 자기 하고 싶은 일 했잖아. 나는 그때 55살이었어.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못 벗어날 것 같았어.” -그래도 15년간 키운 분신 같은 회사인데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근본적으로 나라는 사람은 일을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야. 나르시스트. 이병철, 정주영 같은 사람들이 자이언트가 된 건 그 사람 자체가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어서야. 나는 아냐. 나는 자연이 좋고, 여행이 좋고, 책이 좋고, 여자도 좋은 그런 보통 사람이야. 고민은 많았지만, 그때 은퇴 결정은 내 평생 최고의 결정이었어.” -엘에이에서 울릉도로 들어간 게 궁금하다. “처음엔 하와이가 목표였어. 97년인가 친구(기타리스트 조원익)를 따라 울릉도에 갔다가 완전히 반했어. 웬 하와이? 내가 이승만이더냐 싶더라. 2004년 귀국해 애견 라코만 데리고 울릉도로 들어갔어. 그놈이 4년 전에 죽어 큰 십자가 하나 세워줬다. 그놈 무덤 곁에 가면 생각이 나. 내가 죽으면 니 곁에 묻히겠구나….” -동해 바다 한가운데 울릉도로 간 건 꽁꽁 숨어 살고 싶었던 게 아니었나? “(단호한 표정으로) 아냐, 결코 아냐! 대자연이 좋아서야. 내가 미국 살 때도 데스밸리를 수백번 갔어. 88년 한국에 돌아오려 했을 때도 선승들의 기도처인 설악산 개조암에 들어가 석달을 지냈다. 울릉도를 선택한 것도 그런 기질과 일맥상통하는 거야.” -방송에서 부른 <내 나이 60하고 하나일 때>가 7080세대의 가슴을 찡하게 했다. “그 노래는 28살 때인 74년 고대 신입생 환영회에 초청을 받고 만든 노래다. 신입생들한테 무슨 노래를 할까 생각하다가 만들었지. 그때 그런 노래를 왜 만들었냐고 물으면, 그때 그런 기분이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어. 얘들아, 환갑이 지나도 우리들에게 꿈이 남아 있을까, 하는.” -노랫말에서 예언적인 암시 같은 게 느껴진다.(웃음) 당신에게 꿈이 남아 있다면? “갑자기 물어보니 말문이 막히네. 글쎄, 내게 꿈이 남아 있다면, 아마도 그건 내 나이에 맞는 좋은 곡을 만드는 게 아닐까? 인생의 쓸쓸함 혹은 아름다움 같은 게 담긴. 그런 노래가 내 안에서 나왔으면 좋겠다. 울릉도 노래도 완성해 냈으니, 내가 다시 할 수 있겠지요?” 그는 17일 미국을 거쳐 프랑스로 가 와인투어를 할 예정이라고 했다. 20여년 전부터 거의 매일 1병꼴의 와인을 마셔왔는데, 아직도 왜 프랑스 와인이 좋다고 하는 줄 모르겠단다. 그래서 직접 가서 프랑스 와인에 자신이 모르는 어떤 비밀이 있는지 알아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는 인터뷰를 하면서 두 가지 부탁을 했다. 하나는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지켜줄 것, 이장희란 사람이 특별한 사람이거나 건방진 사람으로 묘사되지 않는 것. 그는 어린 시절 음악을 알기 전에는 탐험 이야기와 모험소설에 열광했다. 이때부터 줄곧 그의 인생의 목표는 ‘나는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살리라’였다고 전한다. 인터뷰/이인우 기획위원 iwlee21@hani.co.kr
“글쎄, 이미 시작된 거 아닌가?(웃음) 요즘 매일 한시간씩 기타 연습을 하는데, 꼭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가는 느낌이다. 가수로서 노래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린다고나 할까?” 1947년생인 이장희는 우리나라 싱어송라이터 1세대를 대표하는 작곡가 겸 가수 겸 디제이였다. 1971년 <그 애와 나랑은>으로 가수로 데뷔해 <한잔의 추억>(1972), <그건 너>(1973)에 이어 불후의 명곡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와 <한 소녀가 울고 있네>(1974)를 잇따라 히트시켰다. 그 무렵 나이든 남자들도 기르지 않은 콧수염, 불량기 넘치는 오토바이, 담배를 꼬나문 건방진 이미지는 그를 일약 청년문화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70년대 청년문화 아이콘, 복고바람 타고 귀환
새 노래 ‘울릉도는 나의 천국’ 곧 시디로 발표
“다시 음악 하는건 잃어버린 고향 찾는 느낌” -음악에 심취하게 된 건 언제부터인가? “서울중학교 2학년 때 삼촌 친구였던 영남이형(가수 조영남)이 우리집 마루에 걸터앉아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데 그게 얼마나 멋있던지. 그때부터 팝송에 빠졌어. 고교(서울고) 시절엔 미치다시피 했고. 장남인 나에 대한 기대가 컸던 아버지 손에 기타가 몇개 부서져 나갔어도 음악이 좋았어.” 이장희는 고교 시절부터 작곡을 해 그의 히트곡 중 <자정이 훨씬 넘었네>는 그 시절 습작이었다. 대학(연세대 생물학과)에 와서는 윤형주, 유종국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포크송그룹(라이너스)을 결성했다. 그러나 또래들과의 예기치 않은 폭력사건에 휘말려 왼쪽 시력을 크게 잃고 학업이 어려움에 봉착하자 대학을 자퇴했다. 그가 방황을 겪으며 음악다방에서 무명가수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건 이 무렵이었다. -가수로 정식 데뷔한 계기는? “영남이형, 형주, (송)창식이, (김)세환이가 다 스타가 되었을 때야. 그런데 부르는 노래는 대부분 번안곡이었어. 그래서 이젠 우리 노래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 내가 곡을 몇 개 만들었어. 윤형주의 <비의 나그네>, 송창식의 <애인>, 김세환의 <좋은 걸 어떡해> 등. 그때 음악프로듀서 이종환씨가 노래도 직접 해보라고 권하길래 <그 애와 나랑은>으로 데뷔하게 됐지.” -작곡에 소질을 보인 이유가 따로 있는가? “내가 작사·작곡을 다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릴 때 영향이 컸다고 생각해. 영남이형이 다녀간 뒤 가곡 <바우고개>로 기억하는데 그 악보에 멜로디와 피아노 악보가 같이 있었어. 피아노 악보를 기타로 내 식대로 쳐보면서 노래를 배웠는데, 그렇게 음악을 배운 게 터닝포인트였던 것 같아. 무엇은 생략해도 되고 무엇은 절대 안 된다는 감을 그때 갖게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실례되는 말이지만, 노래도 잘한다기보다는 자기 멋에 취해 부르는 것 같았다. “아하, 바로 그거, 내가 하고 싶은 얘기다. 영남이형, 창식이, 세환, 형주 다들 노래 잘하잖아? 반면에 나는 기분으로 불렀다. 멋지게 발산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을 함축하는 쪽이었지. 작곡도 가사가 먼저야. 노랫말이 나오면 그것으로 끝. 가사의 기분을 따라가면 딱 그 음이 나와. 머리 싸매고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가수 이장희의 트레이드마크는 콧수염이었으나 지금은 없다. 20대 때는 멋있어서 길렀고, 50대에 콧수염을 깎고 예순에 머리를 민 것은 “자유로워지기 위해서”였다.
지금 나이에 맞는 좋은 곡 만드는 것이 꿈
“인생의 쓸쓸함, 아름다움 담아내고 싶다” 이장희는 이후 가요계를 떠나 명동에서 옷가게를 하다가 1979년 우연히 만난 후배 밴드 ‘사랑과 평화’ 멤버들의 간청으로 데뷔 음반을 제작했다. <한동안 뜸했었지> <장미> <어머님의 자장가> <뭐라고 딱 꼬집어 얘기할 수 없어요>와 같은 ‘사랑과 평화’의 명곡들이 모두 이장희의 손에서 나왔다. ‘사랑과 평화’는 음반 출시 2주 만에 스타가 됐다. 이후 동생(이승희. 작고. 본명이 이경희인 그도 음악인이었다) 친구였던 김현식과 김수철 등이 찾아와 곡을 주게 됐고. 김태화의 <안녕>도 그때 만들어졌다. -미국 이민은 계획한 것이었나? “정확히 말해 계획적인 이민은 아니었어. 80년인가, 미국에서 열린 태평양가요제에 김태화의 <난 바보처럼 살았군요>가 초청됐는데 그 음반 제작자가 나였어. 그래서 따라갔는데, 뉴욕에 내려보니 나한테 딱이야. 내가 머리를 좀 굴려 그대로 눌러앉은 거지.” -엘에이 라디오방송 ‘라디오코리아’를 운영해 성공한 이야기는 당시 국내에서도 많이 알려졌다. “88년에 한국으로 돌아오려다 접은 뒤 89년 2월1일 정식 개국했다. 엘에이에서 한인 대상으로 라디오를 하면 장사가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어. 내가 사업 감각이 좀 있는데다 디제이 하면서 배운 것도 있었어. 불과 6개월 만에 손익분기점을 돌파했으니 가히 폭발적이었지.” -돈 많이 버셨겠네요? “아냐, 돈은 많이 못 벌었어. 사람들은 내가 많이 번 줄 아는데, 사업 접고 나올 땐 거의 맨몸이다시피 했다.” -2003년 라디오코리아 사업을 접은 이유는? “방송국을 리스해서 운영했는데, 잘되니까 리스료를 자꾸 올려. 방송국 값도 치솟아 미국인들끼리 사고팔고 해. 안 되겠다 싶어 내가 사들이려고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어. 새 주인은 리스료를 2배로 올리고. 그때 사업적으로 판단했어. 또 초등학교 시절부터 내 인생의 롤모델이 트로이 유적을 발굴한 하인리히 슐리만이야. 50살까지 열심히 돈 번 뒤 미련 없이 은퇴하고 자기 하고 싶은 일 했잖아. 나는 그때 55살이었어.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못 벗어날 것 같았어.” -그래도 15년간 키운 분신 같은 회사인데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근본적으로 나라는 사람은 일을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야. 나르시스트. 이병철, 정주영 같은 사람들이 자이언트가 된 건 그 사람 자체가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어서야. 나는 아냐. 나는 자연이 좋고, 여행이 좋고, 책이 좋고, 여자도 좋은 그런 보통 사람이야. 고민은 많았지만, 그때 은퇴 결정은 내 평생 최고의 결정이었어.” -엘에이에서 울릉도로 들어간 게 궁금하다. “처음엔 하와이가 목표였어. 97년인가 친구(기타리스트 조원익)를 따라 울릉도에 갔다가 완전히 반했어. 웬 하와이? 내가 이승만이더냐 싶더라. 2004년 귀국해 애견 라코만 데리고 울릉도로 들어갔어. 그놈이 4년 전에 죽어 큰 십자가 하나 세워줬다. 그놈 무덤 곁에 가면 생각이 나. 내가 죽으면 니 곁에 묻히겠구나….” -동해 바다 한가운데 울릉도로 간 건 꽁꽁 숨어 살고 싶었던 게 아니었나? “(단호한 표정으로) 아냐, 결코 아냐! 대자연이 좋아서야. 내가 미국 살 때도 데스밸리를 수백번 갔어. 88년 한국에 돌아오려 했을 때도 선승들의 기도처인 설악산 개조암에 들어가 석달을 지냈다. 울릉도를 선택한 것도 그런 기질과 일맥상통하는 거야.” -방송에서 부른 <내 나이 60하고 하나일 때>가 7080세대의 가슴을 찡하게 했다. “그 노래는 28살 때인 74년 고대 신입생 환영회에 초청을 받고 만든 노래다. 신입생들한테 무슨 노래를 할까 생각하다가 만들었지. 그때 그런 노래를 왜 만들었냐고 물으면, 그때 그런 기분이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어. 얘들아, 환갑이 지나도 우리들에게 꿈이 남아 있을까, 하는.” -노랫말에서 예언적인 암시 같은 게 느껴진다.(웃음) 당신에게 꿈이 남아 있다면? “갑자기 물어보니 말문이 막히네. 글쎄, 내게 꿈이 남아 있다면, 아마도 그건 내 나이에 맞는 좋은 곡을 만드는 게 아닐까? 인생의 쓸쓸함 혹은 아름다움 같은 게 담긴. 그런 노래가 내 안에서 나왔으면 좋겠다. 울릉도 노래도 완성해 냈으니, 내가 다시 할 수 있겠지요?” 그는 17일 미국을 거쳐 프랑스로 가 와인투어를 할 예정이라고 했다. 20여년 전부터 거의 매일 1병꼴의 와인을 마셔왔는데, 아직도 왜 프랑스 와인이 좋다고 하는 줄 모르겠단다. 그래서 직접 가서 프랑스 와인에 자신이 모르는 어떤 비밀이 있는지 알아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는 인터뷰를 하면서 두 가지 부탁을 했다. 하나는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지켜줄 것, 이장희란 사람이 특별한 사람이거나 건방진 사람으로 묘사되지 않는 것. 그는 어린 시절 음악을 알기 전에는 탐험 이야기와 모험소설에 열광했다. 이때부터 줄곧 그의 인생의 목표는 ‘나는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살리라’였다고 전한다. 인터뷰/이인우 기획위원 iwl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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