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에 인터뷰가 실리는 날 강준만 교수는 미국으로 떠났다. 그의 목표는 미국에 ‘강준만식 한국학’을 소개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 돌아가는 걸 보면 서구 민주주의의 보편적 관점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게 너무 많다. 서구는 물론 중국, 일본과도 다른 한국만의 그 무엇이 작동해 그 힘으로 한국이 산업화도 하고 민주화도 하고, 한류의 나라가 되었다. 그 한국만의 ‘무엇’을 세계에 알리고 싶다. 보수적인 의제라고 해서 (진보 쪽이) 그동안 너무 내팽개쳐 놓았는데 내가 해보겠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미 교환교수 떠나는 ‘지식 전사’ 강준만 교수
강준만은 ‘문제적 인간’이다. 1990년대 한국 사회의 금기와의 싸움에는 그가 있었다. 비판자들을 냉혹한 실명비판의 도마에 올려놓고 생체 해부에 가까운 비평을 감행했다. 그로 인해 피 흘리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그의 피도 흥건했다. 200여권의 책을 지치지도 않고 “써대고” 있는 괴물 같은 근성은 경외감마저 불러일으킨다. 그런 그가 최근 <미국사 산책> 17권을 완간했다. <한국 근·현대사 산책> 시리즈도 각각 18권과 10권을 냈다. 한 해에 스무권이 넘는 책을 낸 적도 있는 그에게 저술의 양은 뉴스 거리도 아니지만, ‘산책’이란 책의 제목에서 기자의 직업적 후각이 발동했다. ‘천하의 강준만’은 날카롭고 긴 창을 옆구리에 끼고 단기필마로 적진을 피 튀기며 누비는 지식 전사가 아니던가? 그런 그가 역사 속을 한가로이 산책이나 하고 있다니. 인터뷰를 청하는 메일을 보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빨리 답변을 보낼 줄은 몰랐다. 전주에 오시면 술 한잔 하자고. 전북대 연구실로 찾아간 것은 1월12일이었다. 추운 날씨였는데 그의 연구실은 더 추웠다. 사람 참, 썰렁하게 사네…. 테이블에 마주 앉았더니 비타500 두 상자를 준비해 놓았다. 결기가 느껴졌다. 맺혔던 그 무엇이 실밥 터지듯 툭툭 터지고, 다시 평정으로 돌아가길 몇 번. 2시간 반의 토로였다. 인터뷰 말미에 두 사람은 비타민 음료를 나눠 마시며 치열함과 원숙함이 양립할 수 있는 명제인가에 대해 스쳐가듯 대화를 나눴다. 가능했으면 좋겠다, 라고 그가 말했다. 인터뷰/이인우 기획위원 iwlee21@hani.co.kr
-최근 활동이 뜸한 것 같다. 근황을 먼저 소개해달라.
“활동이 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책을 더 썼는데, 독자들이 요즘은 덜 읽어주더라(웃음).”
-핸드폰은 왜 없나? 불편하지 않은가?
“24일 미국 콜로라도대학에 1년간 교환교수로 나간다. ‘강준만식 한국학’을 소개하러 가는데, 그걸 핑계 삼아 생활방식을 조금 바꿔보려는 중이다. 미국 생활 하려면 차가 있어야 된다고 해서 얼마 전 운전면허를 땄다. 핸드폰도 하나 준비중이고. 자발적인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나로서는 획기적인 변화다. 허허.”
그는 89년 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래 23년 만에 처음으로 미국에 간다고 한다.(대학교수가 그동안 차도, 핸드폰도 없이 어떻게 살았을까? 신문방송학 교수가 미국 여행 한 번 안 하고 여태껏 버티다니!)
-생활의 변화가 강준만이라는 사람의 삶의 태도나 방식의 변화를 예고하는 건가? 확대해석인가?
“솔직히 전에는 사람 만나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그런데 이제는 사람 만나는 일에도 시간을 내고 있다. 동창회도 나가고. 주변에서 그러더라. 야, 강준만이도 이제 나이를 먹었구나, 사람이 그리워지는 걸 보니. 인생이란 큰 차원에서 볼 때 내가 조금 달라지는 국면에 서 있는 것 같기는 하다.”
-그 얘긴 뒤에 또 하고, 초기의 강준만은 우리 사회의 금기였던 지역감정, 정치갈등 문제 등에 대해 강렬한 발언을 많이 했다. 왜 전라도, 김대중, 안티조선(일보) 같은 결코 유리할 것 없는 화두에 자신의 학자적 생명을 걸었나?
“원천적으로 지역문제에 대해서는 내 안에 쌓였던 분노 같은 게 있었다. 그런데다 내가 본래 삐딱해서인지 우리 사회의 내면화된 금기를 깨고 싶었다. 비교적 학맥에서 자유로웠던 입장도 작용했고. 실제적인 측면에서는 개마고원 출판사 장의덕 사장의 영향이 컸다. 당시 김대중이란 호남 출신 정치인에 대한 여러 편견에 도전하는 글들을 여기저기 썼는데, 장 사장이 그걸 가지고 책을 만들자고 해서 낸 게 <김대중 죽이기>(1995)다. 이어서 <전라도 죽이기>도 썼고. 그런 책들이 큰 반향을 일으키니까 그때부터 그런 쪽으로 나선 거다. 한 십년 갔나….”
-말이 나온 김에 노무현에 대해서도 질문하고 싶다. 열렬한 지지자이기도 했고, 비판자이기도 했다.
“그가 죽은 뒤 좀더 거시적인 시각에서 시간적 거리를 두고 그를 보게 된다. 나는 노무현을 정확히 ‘한국인의 얼굴’이라고 말한다.(그게 무슨 의미냐고 묻기도 전에) 한국 사람의 피에, 민족성에는 아웃사이더의 피가 흐른다. 외세의 침탈과 수탈, 식민지, 미군정과 동족상잔, 개발시대의 디아스포라와 고난에 찬 민주화의 여정 등 역사의 격랑을 한국인들 대부분은 주체가 아닌 아웃사이더로 살았다. 소위 우리 사회에서 성공했다는 사람들에게도 대부분 이런 피가 흐르고 있다. 이중성의 피가. <노무현과 국민사기극>(2001)에서도 썼지만, 이해관계가 없을 때는 뒤집어 엎어야 하는 세상이지만, 이해가 걸려 있을 때는 이기는 편에 서야 살 수 있는 세상이 한국 사회다. 뒤엎어야 한다고 거품을 물다가도 정작 뒤엎겠다고 나서는 사람한테는 절대 표를 안 준다. 그래서 내가 대한민국 국민들아 사기 좀 그만 치라고 한 것이다. 그에 대한 호오를 떠나 노무현의 명암과 부침은 한국 사람들 대부분의 내면 속에 동일하게 반복된다. 엄청나게 뻔뻔한 인간들이 쌔고 쌨는데, 바보같이 그 정도로 죽냐고 통곡할 때의 그 원통함과 서러움의 응어리가 바로 노무현이고 나의 얼굴이다.”
2003년 ‘민주당 분당-우리당 창당’때 좌절
“문제 지적한 것인데 돌아온 건 모진 비난”
‘분노·증오서 소통·성찰로’ 삶의 자세 전환 비타500을 또 하나 깠다. -하나 더 물어보자. 당신이 천착한 주제 중의 하나가 지역주의였다. 스스로 ‘전라도주의자’로 매도될 정도로. 민주화 이후 호남지역의 정치를 어떻게 보는가? “내가 그 주제로 진보 쪽 분들한테 욕을 많이 먹은 적이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화를 주도한 지역이 호남이니 앞으로도 호남이 진보·개혁정치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나는 그것이 부당하다고 본다. 진보정치가 가능하려면 사회경제적 조건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호남이 (노동자가 많이 모여 사는) 울산인가? 과거 지역차별을 받은 것을 가지고 역할을 더 떠맡으라는 것은 호남을 두번 죽이는 짓이다. 차별해소, 지역 균형발전 같은 명제와 진보정치의 실현은 별개의 사안이다.” -호남 민중과 디제이 집권으로 덕을 본 토호나 정치적 기득권자들을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더라. “진보적인 분들 가운데서도 지역문제를 보는 시각에 문제가 있는 분들이 많다. 토호니 지방건설업자니 이런 사람들 문제가 많은 건 나도 안다. 그런데 지역에 살면서 가만히 들여다보면 토호와 서민의 이익은 분리될 때보다 같이 가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런데 서울에서는 자꾸 계급적으로만 보려 한다. 그러니 이론과 현실이 안 맞게 되는 거다. 새만금 문제가 대표적이다. 나도 새만금 공사에 반대했지만, 지역에서 그 문제는 환경문제 이전에 차라리 인권문제였다. 절박한 삶의 터전의 문제였단 말이다.”
-유시민, 문성근씨 등 그간 논쟁했던 분들과 털고 갈 것은 없는지.
“보통 비판을 해도 인간에 대한 애정만은 운운하는데, 사람인 이상 그거 잘 안되더라. 밉고 괘씸하지. 그런데 요즘은 밉고 괘씸한 게 없다. 내가 그런 쪽으로 생각을 안 하니까, 오히려 소통의 여지가 더 생기고, 사람 보는 시각도 달라지더라. 그렇다고 비판이 의미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의미가 있되, 중간의 영역이 좀더 넓다면 의미가 더 크지 않겠느냐 하는 게 요즘 생각이다. 중간영역이 아직 좁다면 내가 그쪽으로 더 옮겨가서 좀 넓혀보면 어떨까? 그런 생각. 그러다 보니 죄송스럽지만, 그분들이 뭘 하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이젠 별 관심이 없다. 그분들은 그분들대로 열심히 일하고, 나는 나대로 다른 일을 하고 싶은 거다. 누가 되든, 민주당이든 참여당이든 한나라당 사람이든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사안이라면…. 요즘 내가 그런 쪽이다.”
-그런 변화가 세월 탓인가? 아니면 어떤 깨달음이 온 건가?
“주변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나이다. 야, 천하의 강준만이도 이젠 나이가 들었네, 늙었네, 그런다. 사람에게 세월은 아마도 가장 강력한 변인이겠지만, 그것 말고도 내게 변화를 강제한 것이 있다. 민주당 분당(열린우리당 창당) 사건이다. 그 사건을 겪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변화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비타500 한 상자를 더 가져왔다.
-결정적인 전환점이란 말씀?
“그렇다. 완전한 전환점. 당시 민주당 분당, 즉 열린우리당 창당은 내가 보기에 지역주의에 기반한 기회주의였다. 그래서 반대한 것인데, 내게 돌아온 것은 모진 비난이었다. 쉽게 하는 말로 전라도주의자, 김대중주의자였다. 민주당을 분당하고 노통 권력 중심으로 당을 새로 짜는 걸 지지하는 건 나로서는 내 이론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호남지역에서조차 심리적으로 왕따가 되었다. 내 편이라고 생각했던 수많은 사람들, 독자들이 나에게 등을 돌렸다. 아, 그때 받았던 비난 중에는 감당하기 어려웠던 게 너무 많았다. 니 책을 찢어서 쓰레기통에 던졌다, 니 책을 몽땅 불태워버렸다…나도 화가 났다. 이게 제대로 성찰이 있는 나라냐고. 그래, 성찰 따윈 애시당초 없는 사회다, 그냥 이렇게 흘러가는 거다. 사람들도 독자들도 사실은 자기가 필요로 할 때 내가 떠들어주니 호응한 거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심하게는 이래서 지식인을 졸이라고 하는구나 하는 비하까지 했다. 그 뒤론 나 스스로 답을 찾아 나서게 되더라. 그런 걸 안 겪고 그냥 세월의 힘으로 원숙해지고 그랬더라면 좋았을까 싶기도 하지만.”
비타500을 이번엔 기자가 깠다.
미 콜로라도대서 1년간 ‘한국학’ 소개 예정
귀국뒤 중립지대서 비판하고 칭찬할 생각
“치열함과 원숙함, 양립 가능했으면 좋겠다” -인간적인 고통이 느껴진다. “사람들은 실명비판하고 그럴 때가 더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지나고 보니 오히려 그쪽이 더 쉬웠다. 그때는 내 뒤에 확실한 내 편이 있어서 아무리 극한의 대치를 해도 힘들다는 생각을 안 했다. 그런데 민주당 분당 때처럼 양쪽이 싸울 때 중간쯤에 서서 양쪽의 문제점을 지적하니 어느 쪽에서도 환영을 못 받더라. 그래서 투쟁보다 성찰이 더 어렵다는 걸 알게 된 거고. 그러자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남은 인생은 분노, 증오, 그런 따위가 아닌 다른 세계로 가봐야겠다고. 그런데 그 길로 가려니, 글을 ‘싸납게’ 써서는 안 되는 것이더라. 그 길로 가기로 작정하면 글쓰기도 달라져야 하는 걸 알았다. 생각이 바뀌면 문체가 바뀌고, 문체가 바뀌면 생각이 바뀌고… 그때 내 앞에 떠오른 주제가 이 지긋지긋한 승자독식 문화에 도전해 보는 거였다. 승패에 따라 10 대 빵으로 갈리는 이놈의 사회, 7 대 3, 6 대 4 정도라도 될 수는 없을까… 그런데 그런 심심한 주장을 정색하고 하면 누가 열광하겠는가? 상대편한테까지도 비웃음을 살 게 뻔하지. 그래서 직접적인, 직설적인 글은 통하지 않는다는 걸 또 깨닫게 되는 거고….” -그래서 요즘 당신의 글쓰기가 역사 속으로 가고, 미국으로 가고, 문화로 가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논문 몇 편을 들고 왔다. <빨리빨리의 문화정치학> <자동차의 미디어 기능에 관한 연구> <아파트의 문화정치학> <죽음의 문화정치학> <간판의 문화정치학>…. “이런 것들이 요즘 내 관심사다. 예컨대 <빨리빨리…>는 한국의 속도 커뮤니케이션을 다룬 논문이다. 이걸 연구해보니 민주당 분당 사건이 조금 이해가 되더라. 기회주의라고 내가 공격했던 많은 사람들 중에는 사실 기회주의라기보다는 빨리빨리 뭔가 개혁도 하고 바꿔도 보고 싶은 조급증이었다는 것을….” -거친 분류지만 진보에서 중도로 건너간 게 맞나? 아니면 내용은 진보이면서 소통의 영역을 넓혀간다는 차원에서 중간영역의 확장이냐? “굳이 따진다면 후자이다. 내가 중도로 옮겨간다는 게 아니라, 내가 주장하고 싶은 내용을 더 많은 사람들과 같이 소통하고, 그것을 통해 좀더 바람직한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내 보자는 거다. 낮은 단계의 권모술수라 해도 좋다. 그렇게 해서라도 대중들에게 내 이야기가 더 다가갈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오늘 주제는 성찰인 것 같다. 분노나 증오 같은 센 단어가 소통이나 성찰 같은 부드러운 단어로 바뀌어가는 과정… 개인적으로 성찰의 의미를 찾는다면? “<한겨레>에서 한의사 고은광순씨가 계룡산 밑에 한의원을 새로 연 기사를 봤는데 그분이 ‘지금까지는 사회 변화를 위해 목소리를 많이 냈지만 앞으로는 나와 주변사람들이 좀더 행복해지는 세상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더라. 전적으로 공감한다. 거대 주제에서 작은 주제로 사고의 대상을 옮기고 싶다. 그걸 후퇴 또는 보수화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해한다. 하지만 큰 것에서는 성찰의 기회를 얻기 어렵다. 예컨대 당장 엠비정권으로부터 정권을 되찾는 게 목적인 사람에게는 성찰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그렇다고 투쟁만이 승부에 도움이 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큰 것을 놓고 싸우는 사람이 있으면, 곁에서 작은 것의 의미를 축적해 가는 사람들도 있어야 한다. 그들이 같은 방향으로 함께 나아갈 때 승부도 이기는 것이 아닌가?” -이런 걸 원숙해진다고 해야 하나? 당신의 치열함과 원숙함은 공존할 수 있을까? “원숙해진다고 치열함이 사라지는건 아니다. 나도 노력해 보련다. 귀국하면 다시 실명비판을 시작할 생각이다. 중립지대에서의 실명비판도 가능하지 않겠나? 양쪽을 다 비판하고 견인도 하는. 그러나 과거와 같이 분노를 자극하고, 증오를 증폭시키는 그런 방식은 아닐 것이다.” 자리를 옮겨 술을 마셨다. 사실상 초면이나 다름없는데도 편했다. 기자는 그의 변화가 결실을 거두기를 진심으로 기원했고, 연장의 그는 기자의 건방을 흔쾌히 받아주었다. 혹한의 전주에서, 익산으로 옮겨가며 마지막 열차가 들어올 때까지 우리는 즐겁게 대취했다.
“문제 지적한 것인데 돌아온 건 모진 비난”
‘분노·증오서 소통·성찰로’ 삶의 자세 전환 비타500을 또 하나 깠다. -하나 더 물어보자. 당신이 천착한 주제 중의 하나가 지역주의였다. 스스로 ‘전라도주의자’로 매도될 정도로. 민주화 이후 호남지역의 정치를 어떻게 보는가? “내가 그 주제로 진보 쪽 분들한테 욕을 많이 먹은 적이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화를 주도한 지역이 호남이니 앞으로도 호남이 진보·개혁정치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나는 그것이 부당하다고 본다. 진보정치가 가능하려면 사회경제적 조건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호남이 (노동자가 많이 모여 사는) 울산인가? 과거 지역차별을 받은 것을 가지고 역할을 더 떠맡으라는 것은 호남을 두번 죽이는 짓이다. 차별해소, 지역 균형발전 같은 명제와 진보정치의 실현은 별개의 사안이다.” -호남 민중과 디제이 집권으로 덕을 본 토호나 정치적 기득권자들을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더라. “진보적인 분들 가운데서도 지역문제를 보는 시각에 문제가 있는 분들이 많다. 토호니 지방건설업자니 이런 사람들 문제가 많은 건 나도 안다. 그런데 지역에 살면서 가만히 들여다보면 토호와 서민의 이익은 분리될 때보다 같이 가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런데 서울에서는 자꾸 계급적으로만 보려 한다. 그러니 이론과 현실이 안 맞게 되는 거다. 새만금 문제가 대표적이다. 나도 새만금 공사에 반대했지만, 지역에서 그 문제는 환경문제 이전에 차라리 인권문제였다. 절박한 삶의 터전의 문제였단 말이다.”
강준만 교수
귀국뒤 중립지대서 비판하고 칭찬할 생각
“치열함과 원숙함, 양립 가능했으면 좋겠다” -인간적인 고통이 느껴진다. “사람들은 실명비판하고 그럴 때가 더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지나고 보니 오히려 그쪽이 더 쉬웠다. 그때는 내 뒤에 확실한 내 편이 있어서 아무리 극한의 대치를 해도 힘들다는 생각을 안 했다. 그런데 민주당 분당 때처럼 양쪽이 싸울 때 중간쯤에 서서 양쪽의 문제점을 지적하니 어느 쪽에서도 환영을 못 받더라. 그래서 투쟁보다 성찰이 더 어렵다는 걸 알게 된 거고. 그러자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남은 인생은 분노, 증오, 그런 따위가 아닌 다른 세계로 가봐야겠다고. 그런데 그 길로 가려니, 글을 ‘싸납게’ 써서는 안 되는 것이더라. 그 길로 가기로 작정하면 글쓰기도 달라져야 하는 걸 알았다. 생각이 바뀌면 문체가 바뀌고, 문체가 바뀌면 생각이 바뀌고… 그때 내 앞에 떠오른 주제가 이 지긋지긋한 승자독식 문화에 도전해 보는 거였다. 승패에 따라 10 대 빵으로 갈리는 이놈의 사회, 7 대 3, 6 대 4 정도라도 될 수는 없을까… 그런데 그런 심심한 주장을 정색하고 하면 누가 열광하겠는가? 상대편한테까지도 비웃음을 살 게 뻔하지. 그래서 직접적인, 직설적인 글은 통하지 않는다는 걸 또 깨닫게 되는 거고….” -그래서 요즘 당신의 글쓰기가 역사 속으로 가고, 미국으로 가고, 문화로 가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논문 몇 편을 들고 왔다. <빨리빨리의 문화정치학> <자동차의 미디어 기능에 관한 연구> <아파트의 문화정치학> <죽음의 문화정치학> <간판의 문화정치학>…. “이런 것들이 요즘 내 관심사다. 예컨대 <빨리빨리…>는 한국의 속도 커뮤니케이션을 다룬 논문이다. 이걸 연구해보니 민주당 분당 사건이 조금 이해가 되더라. 기회주의라고 내가 공격했던 많은 사람들 중에는 사실 기회주의라기보다는 빨리빨리 뭔가 개혁도 하고 바꿔도 보고 싶은 조급증이었다는 것을….” -거친 분류지만 진보에서 중도로 건너간 게 맞나? 아니면 내용은 진보이면서 소통의 영역을 넓혀간다는 차원에서 중간영역의 확장이냐? “굳이 따진다면 후자이다. 내가 중도로 옮겨간다는 게 아니라, 내가 주장하고 싶은 내용을 더 많은 사람들과 같이 소통하고, 그것을 통해 좀더 바람직한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내 보자는 거다. 낮은 단계의 권모술수라 해도 좋다. 그렇게 해서라도 대중들에게 내 이야기가 더 다가갈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오늘 주제는 성찰인 것 같다. 분노나 증오 같은 센 단어가 소통이나 성찰 같은 부드러운 단어로 바뀌어가는 과정… 개인적으로 성찰의 의미를 찾는다면? “<한겨레>에서 한의사 고은광순씨가 계룡산 밑에 한의원을 새로 연 기사를 봤는데 그분이 ‘지금까지는 사회 변화를 위해 목소리를 많이 냈지만 앞으로는 나와 주변사람들이 좀더 행복해지는 세상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더라. 전적으로 공감한다. 거대 주제에서 작은 주제로 사고의 대상을 옮기고 싶다. 그걸 후퇴 또는 보수화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해한다. 하지만 큰 것에서는 성찰의 기회를 얻기 어렵다. 예컨대 당장 엠비정권으로부터 정권을 되찾는 게 목적인 사람에게는 성찰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그렇다고 투쟁만이 승부에 도움이 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큰 것을 놓고 싸우는 사람이 있으면, 곁에서 작은 것의 의미를 축적해 가는 사람들도 있어야 한다. 그들이 같은 방향으로 함께 나아갈 때 승부도 이기는 것이 아닌가?” -이런 걸 원숙해진다고 해야 하나? 당신의 치열함과 원숙함은 공존할 수 있을까? “원숙해진다고 치열함이 사라지는건 아니다. 나도 노력해 보련다. 귀국하면 다시 실명비판을 시작할 생각이다. 중립지대에서의 실명비판도 가능하지 않겠나? 양쪽을 다 비판하고 견인도 하는. 그러나 과거와 같이 분노를 자극하고, 증오를 증폭시키는 그런 방식은 아닐 것이다.” 자리를 옮겨 술을 마셨다. 사실상 초면이나 다름없는데도 편했다. 기자는 그의 변화가 결실을 거두기를 진심으로 기원했고, 연장의 그는 기자의 건방을 흔쾌히 받아주었다. 혹한의 전주에서, 익산으로 옮겨가며 마지막 열차가 들어올 때까지 우리는 즐겁게 대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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