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오른쪽)과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운데)가 지난달 30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대담을 한 뒤, 사회를 맡은 박순성 동국대 교수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한국사회 미래를 말하다] 최장집-박세일 특별대담
월드컵·지방선거에서 보인 젊은세대 에너지
기성세대가 수용해 미래가치로 발전시킬만 박세일
자기표현 과감해졌지만 공동체 의식은 부족
역사·전통·도덕으로부터 단절된 자유는 위험 박순성 교수(이하 사회) 최근 월드컵 기간에 나타난 한국의 응원 열기, 특히 청년층의 움직임에 대한 이야기로 대담을 시작해보자. 월드컵 응원 열기는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볼 수 있지만 촛불집회, 지방선거 등에서 보여준 정치참여 등 정치적인 측면과도 잇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봤나? 최장집 교수(이하 최) (우리나라)청년들은 지금 사회경제적인 맥락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층이다. 미래의 진로 선택이 불투명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발랄하고 어떤 권위나 규범에 대해 저항적인 면도 있다. 자기의 삶을 즐길 줄 아는 세대이기도 하다. 집단적인 축제라고 할까, 광장으로 나오는 에너지는 강렬하다. 이는 이명박 정부 출범 초기, 촛불집회 등 정치적 양태로 나타났다.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는 투표율을 3% 정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고, 선거 결과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가치관이나 가치정향에 있어서 이명박 정부와 상충한다고 할까? 혹은 정치사회학적인 면에서 기성 질서나 지배적 가치와 젊은 세대 사이에는 조화될 수 없는 긴장이 느껴진다. 이런 젊은 세대들의 가치관이나 행동양식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박세일 이사장(이하 박) 월드컵(의 응원 열기)을 보면서 느낀 건 두 가지다. 하나는 젊은이들이 자기표현이 대단히 과감해졌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러면서도 공동체적 연대에 대한 갈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이 사회가 공동체적 소속감과 연대감을 충분히 제공해주지 못해서 월드컵 같은 장에서 모여 소리를 치며 공동체적 연대감을 찾는 게 아닌가. 나는 젊은이들의 자유스러움을 대단히 긍정적으로 보는데, 다만 첨부하고 싶은 게 있다. 첫째는 자유롭게 표현하고 주장하는 것은 바람직한데 모든 가치적 권위에 대해 무조건 비판적인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이다. 둘째는 자유추구와 더불어 공동체를 소중히 여겼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공동체에 대한 자기책임이라든가, 공동체에 대한 기여 등에 대하여도 적극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산업화-민주화 역할 인정을 vs 대립구조를 통합구조로 사회 (젊은 세대를 통해) 한국 사회 미래에 대한 예측을 해본다면? 박 나는 젊은이들의 공동체적 가치에 대한 존중이 부족하다고 본다. 특히 우리 사회는 그 발전과 변화가 너무 빠르고 압축적이어서 세대간 살아온 역사적 시대적 경험의 차이가 심하여 역사를 보는 눈, 국가를 보는 눈, 인생을 보는 눈이 굉장히 서로 다르다. 거기에 우리 사회 기성세대들이 자기들이 살아온 역사를 젊은이들에게 자세히 알려주는 노력도 부족했다. 그래서 서로 소통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역사, 전통, 도덕 등은 모두 선조들의 지혜다. 그것을 소중히 하면서도 젊은층의 자유, 과감, 발랄 등이 조화되면 좋을 텐데. 역사적 콘텍스트 없이는 미래에 대한 방향감과 사명감이 안 나온다. 그러한 속에서 발랄함과 과감함만 있으면 머지않아 공허감으로 전환된다. 집단적 공허감이다. 그때 등장하기 딱 좋은 게 파시즘이다. 최 우리 사회는 짧은 시간에 사회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대격변을 거쳤기에 세대간 갈등이 커질 수밖에 없는 환경을 갖고 있다. 과거의 세대들은 분단과 전쟁과 산업화를 경험한 세대다. 아주 못살던 농업사회 단계에서 세계 굴지의 개발도상국가로 올라서는 과정을 경험한 세대다. 젊은 세대들은 분단의 아픔, 이데올로기 갈등, 전쟁 경험 등을 학교교육과 같은 간접적인 지식으로 배웠다. 이와 같은 과거 세대의 토양을 젊은 세대들도 이해는 해야 하겠지만, 그러나 과거의 토양을 다시 불러오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박 교수는) 젊은 세대들이 과거의 경험과 공동체적 가치를 수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반대로 옛날 세대가 젊은 세대의 가치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면서 뭔가 미래지향적인 가치를 새롭게 발전시키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박 자유와 공동체는 항상 같이 가야 한다. 질서 없는 자유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그런데 공동체를 존중하지 않고는 질서를 얘기할 수 없다. 왜 우리나라에서 (세대간) 갈등이 나타나는가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정치적으로 상호보완적이 아니라 권력투쟁적 대립관계로 발전해온 역사와 관계가 있다.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산업화 없이는 민주화가 가능하지 아니했다. 그래서 산업화 시대의 비민주성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민주세력이 정치투쟁에선 산업화 세력과 싸우더라도, 역사해석에서는 산업화의 중요성을 인정해야 했다. 그 부분이 안 됐다. 같은 얘기로 산업화만으로 국가가 완성될 수 없다. (산업화 세력도) 민주화 세력의 역사적 역할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젊은 세대들에게 산업화와 민주화가 상호보완적으로 국가발전에 기여하고 수렴되는 것으로 가르쳐야 한다. 다수의 젊은이들은 이성적으로는 우파인데, 감성적으로는 좌파인 것 같다. 이러한 모순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상호보완적으로 보지 못하는 역사해석의 갈등에서 오는 것 같다. 최 박 교수 말씀의 연장선상에서 말해보면, 무엇보다도 한국 현대사가 이원적인 대립구조를 통해서 전개됐다는 생각이 든다. 분단국가를 만들고 60~70년대 산업화를 이끈 우리 사회의 지배 엘리트들이 ‘민주화 이전의 한국 사회’를 만들어놓았다고 한다면, 민주화 세력은 이 질서 속에서 체제를 반대하는 힘으로 성장했다. 그 결과 이념적인 양극화 내지 갈등이 심화, 표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이원적으로 양극화된 대립구조를 민주주의라는 틀 속에서 개선해 갈 수 있는 통합의 구조로 발전시키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과제가 아닐까 한다. 불편해도 경쟁은 필요vs 경쟁의 공정성이 문제 사회 그렇다면 역사해석에 대한 상호이해를 전제로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박 두 가지만 꼽아 보겠다. 첫째는 국가발전능력의 하락이다. 국가발전능력의 하락이란 안팎의 국가적 과제를 해결하고 미래를 향해 국력을 모아갈 수 있는 국가능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게 어디서 오냐면 정치능력의 하락에서 온다. 즉 정당정치의 낙후와 의회정치의 낙후가 정치능력의 하락을 가져왔다. 시민사회의 능력이 떨어진 것도 추가적 요인이다. 그동안 시민운동의 도덕성과 정당성이 크게 훼손을 받으면서, 시민사회가 자기가 할 일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두번째가 사회통합능력의 하락이다.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이 봉합되고 통합되는 게 아니라 더 확산되고 격화되고 있다. 왜 그런가? 불평등의 증대 등 사회경제적 이유도 들 수 있지만, 내가 볼 땐 한국의 정당과 정치가 사회를 통합하지 못하고 오히려 분열시키고 있다. 정당이나 정치가 새로운 국가비전을 제시하는 정책경쟁을 한다면 국민통합이 가능한데, 전혀 비전과 정책에 관심이 없고 사익을 위한 권력투쟁만 하니까 분열에 기여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언론·시민사회·종교·학계도 말은 통합을 주장하지만 행동과 사고는 분열적이다. 왜 이렇게 됐는가? 생각해보니 우리 사회의 공동가치가 없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우리’가 없어지고 있고 우리나라에서 ‘나라’가 없어지고 있다. 그건 지도자와 국민 모두의 주인의식이 크게 후퇴하고 있는 데서 온다. 최 좀 다르게 얘기할 수밖에 없겠다. 사회적 저변층 내지 일반 서민대중을 정치적으로 대표하지 못하고 있는 것, 이것이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가 제대로 하지 못한 제일 중요한 문제점이다. 또 이와 연결되어 있는 책임성의 문제가 있다. 민주주의에서 선거를 해서 다수를 얻은 집단이 통치를 위임받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정책 결정하고 법을 만드는 대표들에게 책임성을 부과해야 하는데 그 정도가 너무나 약하다. 예를 들어 정부가 지출을 하는 예산이 어떻게 쓰이는지 감시·감독할 수 있는 체제가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다. 중앙정부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지출을 보더라도, 2000년에는 22% 됐던 것이 2009년에는 25% 정도로 빠른 속도로 커졌다. 국가부채 운운하면서도 지출은 엄청 늘어났는데, 사회복지라든가 사람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하는 정도는 상당히 적었다.
박세일, 공동체 소중히 여기는 ‘정책 진보’ 되길 물론 유럽의 복지국가들을 보면, 정부지출이 많다. 독일 같은 경우는 45%, 영국·프랑스 53%, 미국은 40% 등 상당히 많다. 그러나 이 나라들은 복지를 위해 교육 등 사회복지가 보편화되어 있다. 한국의 낮은 사회복지 수준을 고려한다면 한국도 결코 정부지출이 적은 편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많은 예산이 어떻게 쓰이는지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지방정부를 보면 단적으로 나타난다. 서울만 보더라도 광화문광장 앞을 지나다닐 때마다 돈을 거리에 뿌려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정부지출에는 우선순위라는 게 있다. 재벌 중심의 성장정책이 지속되고 가정배경이나 사회경제적 변수와 학력 성취도의 상관관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데도 이를 개선하는 데 정부지출의 효과가 크지 않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박 최 교수의 의견에 동의한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는 됐지만 소수자·약자의 이해관계가 정치적으로 잘 대표되지 않고 있다. 정치적으로 잘 대표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정책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정책적으로 표현이 안 되나? 진보정당이든 보수정당이든 자기 비전과 철학이 없기 때문이다. 정책적으로 소수자나 약자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책이 나오고, 그걸로 경쟁을 해야 하는데, 한국의 정당엔 두 가지가 없다. 국민이 없고, 정책이 없다. 국가비전이 없다. 여야가 똑같다. 말만 보수적인 레토릭을 쓰고 진보적인 레토릭을 쓰지만, 다 구호 수준이다. 정책 내용이 없다. 민생은 정책에 영향을 받지 정치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복지국가에 대해서도, 이 세상에 복지국가를 지향하지 않는 나라는 없다. 성장을 위해 지출을 하든, 복지를 위해 지출을 하든 결국 모든 건 복지로 간다. 문제는, 성장을 강조하는 건 고용창출 등 장기적 복지 쪽으로 복지문제를 풀려고 하는 것이고, 복지를 강조하는 것은 공적부조 등 단기적 복지를 강조하는 것이다. 성장을 통한 장기복지를 강조할 것이냐, 공적부조와 같은 단기복지를 강조할 거냐는 공동체가 처해 있는 상황과 발전단계에 따라 정하면 된다. 그때 구체적 정책을 가지고 진보-보수가, 좌우가 논쟁을 할 수가 있다. 성장과 복지를 대립적으로 보면 안 된다. 성장도 복지를 위한 것, 복지도 복지를 위한 것이다. 양극화, 빈부격차 등 말만 꺼내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구체적 정책안을 갖고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 진보-보수 논쟁이 생산적이 된다. 우리 사회의 담론 시장을 이러한 방향으로 학자와 언론인들이 중심을 잡아줘야 한다. 나는 이제는 권력투쟁 정치에서 국가경영 정치로 바꿔야 한다고 항상 강조한다. 그렇게 되면 정책이 중요해지고 정책경쟁이 일어나고 합리성이 존중되고, 절충과 타협 등이 나온다. 그런데 아직도 과거의 권력투쟁 정치가 많이 남아 있다. 이걸 극복하면 불필요한 낭비도 줄이고 정치안정도 가져오고 우리나라의 국가발전능력과 사회통합능력도 높일 수 있다. 최 한국 정당의 특징은 사회로부터 나오지 않고 권력으로부터 창출되었다는 점이다. 모든 정당들은 엘리트들이 만든 것이다. 그러다보니 정당간 경쟁은 치열하고, 사용되는 레토릭은 사생결단하듯 공격적이지만 실제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는 별로 차이가 크지 않다. 레토릭의 차이만 크다는 건 진짜 이슈를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생활문제, 민생문제를 정당들이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하는 것, 이것이 한국 정당정치의 가장 큰 문제다. 지난번 6월 지방선거 때 학교 무상급식 확대문제를 중심으로 사회복지 이슈가 선거쟁점으로 떠올랐던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무상급식 문제는 상당히 감상적이고 부분적인 이슈이다. 기왕에 진보세력이 복지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면, 한국적 복지국가는 어떤 것이냐에 대해 전체적인 비전과 그에 따른 정책 플랫폼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여기에서 두가지 문제만 강조하고자 한다. 하나는 시장경제적·사회적 위험에 대응하는 사회보장 못지않게 재분배 문제의 중요성을 인지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교육문제에 대한 이해 방법이다. 어떻게 값싸고 양질의 (공)교육을 제공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사회정책의 틀에서 접근하는 것이다. 그래야 시장경쟁으로 들어가기 전에 저소득층 자제들이 시장에서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 난 우리 사회에 경쟁이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다고 본다. 경쟁은 부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시장경쟁을 주장하는 것은, 부자를 부자로 만들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를 부자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경쟁은 불편하고 비인간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경쟁 없이 인간과 공동체가 발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불가피하다고 하는 존 스튜어트 밀의 경쟁관을 나는 지지한다. 최 경쟁은 필요하다. 문제는 경쟁이 공정한가에 있다. 한 사회를 구성하는 영역은 세 가지다. 국가, 시장, 공동체다. 시장은 자율적인 경쟁이 중심이 되고, 공동체는 연대라든가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사회집단, 공동체 가치가 중시되는 영역이다. 결국 이 세 영역의 균형적 결합이 필요한데 국가의 역할은 여기에 맞춰져야 한다. 공동체 자유주의 vs 진보적 자유주의 사회 박 교수는 일찍이 공동체 자유주의를 말했고, 최 교수도 최근 진보적 자유주의를 말했다. 자유주의에 대한 생각과 함께 개헌에 대한 생각도 말해 달라. 박 서로 크게 차이가 없는 개념이라 생각한다. 다만 공동체적 자유주의는 동양적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동양은 본래 인간을 개체적인 존재이면서도 공동체적인 존재로 본다. 일원론적이다. 둘째, 공동체 자유주의에서 소중히 여기는 공동체는 가족과 이웃 등으로 구성되는 사회적 공동체만 있는 게 아니라,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는 역사적 공동체도 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자연 공동체다. 인간은 자연을 떠날 수가 없다. 이들 세 가지 공동체를 소중히 하는 자유주의를 하자는 주장이다. 개헌 논의가 있나 본데, 난 안되리라고 본다. 한국 헌법은 한번 전반적으로 검토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권력구조뿐만 아니라 인권조항도 포함하고 경제 기본철학 등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의 헌법 논의는 대단히 정파적이고 편의적이라 별로 성공하기 어렵다고 본다. 최 난 자유주의 앞에 접두사를 붙이는 것은 별로라고 본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 사회는 자유주의가 자리잡지 못했다. 자유주의의 취약성, 이것이 한국 사회의 특징이다. 한국은 자유주의가 뒷받침되지 않는 민주화를 했다고 생각한다. 이제야 본격적으로 자유주의의 의미와 가치를 성찰해보는 조건이 됐다는 생각이 든다. (자유주의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좀더 풍부하게 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 부족한 인권과 평등 사상을 더 풍부히 하고, 국가권력의 권위주의적 팽창을 견제하고 제한할 수 있는 가치로서 자유주의의 가치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박 우리나라는 “민주화는 했는데 자유주의가 없는 민주화였다”란 최 교수의 문제제기에 공감한다. 굉장히 중요한 문제제기다. 서구는 선 자유화 후 민주화였는데, 우리는 선 민주화 후 자유화다. 우리나라는 이제부터는 자유주의를 정착시키는 게 대단히 중요한 과제라고 본다. 자유주의를 위해선 정치권력뿐 아니라 경제 및 사회권력 그리고 종교권력으로부터 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보호해야 한다. 그리고 이 보호를 제도적 문화적으로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최 자유주의 내용 속에 한 공동체가 가질 수 있는, 지향할 수 있는 좋은 가치들이 많이 들어가 있다고 본다. 자유주의 가치가 정착될수록, (진보와 보수가) 민주주의 제도적 틀 안에서 경쟁과 합의를 발전시킬 수 있는 토양은 풍부해질 것이다. 개명된 보수로 도약을 vs 책임있는 진보 나와야 사회 끝으로 각기 진보와 보수에 대한 충고를 해주고,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도 간단히 언급해 달라. 최 보수는 ‘개명된 보수’로 질적 도약을 이뤘으면 한다. 과거사를 긍정적으로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사회를 만들었던 구질서는 적잖은 문제를 갖고 있다. 보수의 가치가 아직도 50~60년대, 60~70년대 산업화 시기에 머물러 있다는 느낌을 가질 때가 많다. 세상은 상전벽해가 여러 번 됐다. 세계화 시대도 지나 포스트 세계화 시기다. 이념이나 지배적인 가치관 같은 것이 냉전 시기에 묶여 있어선 안 된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민주주의나 자유주의의 기본 가치마저도 존중하지 않는 양상을 너무 많이 보게 된다. 보수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가치를 존중하면서도 보수로서의 도덕적 지도력을 갖는 게 필요하다. 그런 변화를 기대한다. 박 이명박 정부에 대해 평가하라고 했는데, 경제나 외교 부분에서는 성과를 보이지만 국정운용의 철학과 가치를 제시하는 부분이 약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지금 우리 사회는 대단히 정체성이 혼란스럽고 개인의 가치가 혼돈스럽다. 이럴 때 가치 합의의 국정운용이 필요하다. 여당에 대한 고언은 더이상 분열과 갈등, 그 결과로서의 무능을 보이지 말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왜 분열하는가? 이익 때문이다. 가치와 비전의 공유가 없기 때문이다. 다음은 진보에 대한 고언 세 가지를 하겠다. 첫째는 진보의 일각에 해당하는 말인데,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소중히 해주기 바란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안에서의 좌파, 대한민국 안에서의 진보가 되기를 바란다. 둘째는 국가경영과 국가정책을 소중히 해줬으면 한다. 우리 사회에 정서적인 진보는 많은데 정책적 진보는 약하다. 그러면 좌파 포퓰리즘으로 갈 우려가 있다. 셋째, 공동체를 소중히 하는 진보가 됐으면 한다. 책임 있는 진보가 안 나오면 다음에 국정운영을 맡길 수가 없다. 정리 이창곤 최원형 기자 g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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