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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호주제 폐지, 강금실과 이뤄낸 ‘여성장관 합작품’”

등록 2010-05-30 17:41

2006년 부임한 지은희 총장은 “기업에서 덕성 출신에 대한 평가가 아주 좋고 여성운동가들 가운데도 덕성인이 많은 것은 서로 화합할 줄 알며 배운 것을 사회에서 실현하려는 학풍의 결과”라고 말한다. 분규 대학 이미지가 강했던 덕성여대는 지 총장이 온 뒤 각종 학내소요가 자취를 감추었고, 교수 연구실적과 졸업생 취업률 등 각종 대학평가 지표가 상승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A href="mailto:khan@hani.co.kr">khan@hani.co.kr</A>
2006년 부임한 지은희 총장은 “기업에서 덕성 출신에 대한 평가가 아주 좋고 여성운동가들 가운데도 덕성인이 많은 것은 서로 화합할 줄 알며 배운 것을 사회에서 실현하려는 학풍의 결과”라고 말한다. 분규 대학 이미지가 강했던 덕성여대는 지 총장이 온 뒤 각종 학내소요가 자취를 감추었고, 교수 연구실적과 졸업생 취업률 등 각종 대학평가 지표가 상승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전 여성부장관 지은희 덕성여대 총장
* 강금실 : 당시 법무부 장관




덕성여대 지은희(63) 총장은 노무현 정부 첫 여성부 장관이었다. 그는 장관 취임 때 “호주제 폐지를 위해 장관이 됐다”고 공언했다. 1980~90년대 여성운동의 최전선에 서 있던 여성운동가로서 양성평등의 법제화는 당연한 목표였다. 한국 사회의 역사적인 호주제 폐지는 그렇게 시작됐다.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성매매방지법도 그의 재임 때 만들어졌다. 여성운동이 비등점을 넘어서던 때에 하필 그가 장관인 것은 그가 그 ‘화기’를 감당할 적임자로 선택됐다는 뜻이다. 그의 별명이 ‘지칼’인 것이 선택의 의도성을 짐작게 한다.

2006년 총장에 부임해 지난해 연임한 그는 참여정부의 각료급 인사 가운데 이명박 정부의 거칠기 짝이 없던 물갈이 태풍 속에서 현직을 유지한 몇 안 되는 인물로 꼽힌다. 외조를 아끼지 않았던 남편과 사별한 아픔도 잠시, 올해로 ‘창학’ 90년을 맞이한 덕성여대의 미래 비전을 짜느라 바쁜 그를 만났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북한산 자락의 수유동 캠퍼스에서였다. 마침 졸업 예정 학생들이 앨범사진을 찍는 날이라 캠퍼스 곳곳이 그야말로 사람이 꽃이고 꽃이 사람이었다.

운동하다 입각해 ‘여성계 숙원’ 현실화
“성매매방지·공공보육 등 그때 거의 정비”
참여정부 인사 물갈이속에도 현직 유지

-어려운 시기에 연임에 ‘성공’하셨습니다. 늦었지만 축하합니다.

“저의 경우 사실상의 교수 직선 총장이란 점이 방패로 작용한 것 같습니다만, 재선 후 교육부 종합감사를 ‘세게’ 받았어요. 무려 열네분이나 나오시고, 연말연시에 입시까지 겹친 시기도 좀 그랬구요. 저야 뭐, 그냥 앉아서 그간 해온 일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스크린해 보는 망외의 소득을 얻었지만.”

-교육부가 뭘 하긴 하려고 했군요.

“노 코멘트. 호호호.”

-이번 6·2 지방선거에 노무현 정부 사람들이 많이 출마했는데, 정치엔 관심 없으십니까?

“어휴, 전 아직 임기가 3년이나 남았구요, 할 일도 많구요, 학교 일이 재미도 있어요. 선거와는 일체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총장을) 3선 하실 계획이군요.

“자꾸 그러시면 저 학교에서 쫓겨납니다.(웃음)”

-지난 4월로 덕성여대가 ‘창학 90년’을 맞이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오랜 역사를 가진 줄 몰랐습니다.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 이런 말씀 들어보셨나요?”

-처음입니다. 굉장히 의미 깊은 잠언 같습니다.

“근대 여성교육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차미리사(1879~1955) 여사가 1920년 덕성의 모태가 된 조선여자교육회를 창립하면서 내세운 교훈입니다. 봉건사상에 짓눌려 신음하던 당시 여성들에게 자립적인 삶과 주체적인 사고, 행동을 일깨운 이 말은 오늘날에도 전혀 퇴색하지 않은 여성해방 운동의 핵심이자 여성해방의 이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여성해방 이념을 모태로 설립한 학교가 있었고, 차미리사라는 선각자가 계셨다는 걸 우리 사회가 너무 모르고 있었네요.

“좋은 대학일수록 훌륭한 정신적 지주가 있는데, 제가 덕성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도 차미리사 같은 훌륭한 사표가 있다는 겁니다. 특히 독립운동가가 세운 대학이 많지 않은 현실에서 덕성의 이런 뿌리는 우리 사회가 소중히 간직해야 할 자랑이라고 자부합니다.” (조선여자교육회는 이후 근화여학교(1925)로 발전했는데, 일제가 교명이 무궁화를 상징한다며 교체를 강요해 1938년부터 덕성으로 바뀌었다.)

-차미리사는 어떤 분이었나요?

“18살 때 딸 하나 낳고 남편이 죽었어요. 이후 기독교에 귀의해 미리사란 세례명을 얻은 뒤 여성으로서 자각을 갖게 되었나 봅니다. 신식 교육을 받고 중국과 미국까지 가서 신학을 공부하며 안창호 선생 등과 함께 독립운동과 민족교육운동을 했습니다. 귀국해서는 학교도 못 가는 아주 불우한 처지의 여성들을 위한 교육운동을 결심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부인 야학을 세웠는데, 이때 전국 67개 지역을 돌며 강연과 모금활동을 했답니다. 21세기도 아닌 1920년 그 시절에 여성강연단을 조직해 전국을 돌며 모금운동을 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해요? 미국 유학 갔다 온 사이 딸아이가 없어져 끝내 찾지 못하는 참기 어려운 고통을 겪으면서도 학교를 세우고 가장 어려운 계층의 여성교육에 헌신한 것은, 저도 여성운동을 했지만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선각자는 <한겨레> 같은 신문이 나서서 널리 알려주면 더욱 뜻깊을 것 같습니다.”

-돌아가서 꼭 전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덕성은 어떤 점을 자랑하고 싶은가요? 취업 잘되는 여학교?

“물론, 취업률이 정규 여자대학 1위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누구든 일단 우리 학교에 들어오면 학생 개인의 성향과 능력에 맞는 맞춤식 교육을 통해 지적 능력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 실질적으로 필요한 인재로 책임지고 키워내겠다는 점을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학교는 전체 학생이 6000명 정도인 비교적 작은 규모여서 맞춤식 교육을 하는 데 아주 적합합니다. 제가 총장으로 와서는 최소한의 국제적 의사소통능력 향상을 위해 신입생 전원이 3주간의 기숙 영어프로그램을 이수토록 하고 있기도 하구요.”

-슬로건이 ‘마이 베스트 파트너, 덕성’입니다. 모두들 리더십을 말하는 시대에 파트너십을 강조하는게 신선하게 느껴집니다.

“너도나도 리더십을 강조하는 시대지만, 사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덕목은 파트너십입니다. 남자 대 여자든 나라 대 나라든 지금의 시대정신은 상대방을 지배하고 활용하는 게 아니라, 함께 상생하는 파트너십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한국 사회에는 그런 인재상이 더욱 절실하지요.”

-총장님의 교육철학이자 덕성의 교육목표인 셈이네요.

“동행과 나눔의 가치를 아는 인재, 그런 사람이 정말 중요하지 않나요? 사실 어느 조직에서도 제일 필요로 하는 사람은 혼자 유능한 사람이 아니라 유능하면서 함께 나눌 줄 아는 사람이잖아요? 제가 총장으로 와서 중점적으로 추진한 것이 이런 방향으로 교양교육 방향을 세우고 차츰 전공교육으로 심화·확대하자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글로벌 파트너십을 갖춘 창의적 덕성인’을 만들고자 하는 게 교육목표라면 목표입니다.”

-구체적인 대학 발전 계획은 어떻게 세우고 있습니까?

“가을쯤 정식으로 공표할 계획입니다. 창학 100년을 맞는 2020년까지 추진할 비전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세계 수준의 교육중심 명문대학’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목표 아래 맞춤식 특성화 교육을 강화하고 대학 전체를 레지덴셜 칼리지(기숙학교)로 만들려 합니다. 아름다운 캠퍼스는 친환경 에코캠퍼스로 더욱 발전시켜 지역주민과 함께 향유하고자 합니다. 아시아 중심대학을 지향하려 합니다. 한국이 아시아에서 중심적 역할을 해야 할 때를 대비해 덕성이 그걸 이끌 인재를 키워낼 것입니다.”

-계획하신 대로 잘 추진되길 바랍니다. 과거에 덕성 하면 분규가 심한 대학이란 이미지도 있었습니다. 재단 분규는 어떻게 됐나요?

“분규란 게 양면성이 있습니다. 그 자체가 민주화의 한 과정인 반면 통과의례의 진통 속에서 학교발전이 뒤졌다는 측면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제가 부임한 뒤로 학생, 교수, 교직원 모두가 저를 믿고 화합해주어서 점거다 농성이다 이런 게 다 없어졌어요. 제가 참 운이 좋은가 봐요. 학교는 지난 4년간 안정을 되찾았지만, 아직 재단은 임시이사 체제입니다. 오는 9월 정이사 체제로 복귀해 재단운영을 정상화하는 게 올해 덕성의 최대 숙제입니다.”

‘창학 90년’ 덕성, 아시아 중심대학 지향
여성 교육운동가 차미리사 이념이 모태
리더십보다 글로벌 파트너십이 더 중요

-잘될 것 같습니까? 굉장히 어려운 임무가 숨어 있었네요.

“교육부나 구재단이나 학내 구성원이나 모든 당사자들이 윈윈하는 타협점이 있을 겁니다. 누군들 학교가 망하기를 바라겠습니까? 제가 그래도 운동을 20년 이상 했고 정부에 들어가 법도 만들어본 경험이 있으니, 노력하면 반드시 절묘한 선을 찾을 수 있다, 그걸 내가 어떻게든 해내겠다, 그런 각오입니다.”

-화제를 돌려 보겠습니다. 총장님은 여성운동을 하다 제2대 여성부 장관이 되셨습니다. 정부에 들어가서 한국 사회에 무엇을 기여했습니까?

“제 자랑이 아니라, 다른 분들에게 물어봐도 ‘아, 그건 지은희가 잘한 거다’라고 할 만한 게 네가지 정도는 됩니다. 우선 ‘보육의 공공성’을 높여 보육예산을 3배쯤 늘렸습니다. 두번째는 ‘호주제 폐지’이고, 세번째는 찬반양론이 있긴 하지만 ‘성매매방지법 제정’입니다.”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호주제 폐지나 성매매방지법이나 다 당시에는 너무 앞서간다는 비판이 많았잖아요?

“사실 성매매는 언제나 불법이었는데, 사람들이 오해해서 내가 이걸 갑자기 불법으로 만들었다고 얼마나 비난했는지 몰라요. 우선은 성매매를 통해 이득 보는 집단을 도태시키고 나서 참여정부부터 시작해 그다음 정부, 또 그다음 정부 식으로 서서히 없애가자는 것이고 그 첫단추가 성매매방지법이었는데 그걸 그렇게 비난했어요. 남자들이.(웃음) 호주제 폐지는 사실 민법 개정이라 법무부 소관이었는데 당시 (같은 여성인) 강금실 장관이 양해해 줘서 여성부가 주도하게 됐습니다. 남자 장관이었으면 안 해줬을 겁니다. 성매매방지법도 마찬가지구요. 이게 그때 법무부 강금실, 여성부 나 이렇게 (여성 장관들로) 세팅이 잘돼서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네번째는 뭡니까?

“이른바 ‘성인지 예산’ 개념의 도입입니다. 2004년인가요? 정부 예산을 짤 땐데 제가 국무회의에서 ‘예산 편성 지침에 성인지 예산 개념이 들어가야 합니다’라고 얘기를 했더니, 다른 국무위원들 얼굴이 다 이상하게 변해요. 그때 노무현 대통령이 나서서 ‘자, 이 분위기를 보시죠. 제가 대표로 여쭤보겠습니다. 도대체 성인지 예산이 뭡니까’ 이렇게 묻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간단합니다. 예산을 편성·집행·평가할 때 처음부터 그 예산이 양성평등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따져보며 예산을 짜라는 뜻입니다’ 그랬죠. 그랬더니 노 대통령이 ‘아, 그런 건 좋은 거네요. 그렇게 합시다’ 했어요. 국무회의 다음날 어느 신문에 ‘예산에도 성이 있나?’라는 기사가 나기는 했지만 말이죠.”

-여성계가 오랫동안 주장하고 추진했던 일들이 그때 많이 현실이 되었군요.

“조금 더 자랑을 하자면 저는 그 과정에서 민주적인 거버넌스(의사결정 구조)를 실천했던 점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호주제 폐지도 사실은 (보수층의 반대로) 될 것이 아니었는데, 사전에 (강경한 입장의) 여성운동단체들과 미리 의견을 조율해 현실적 타협안을 만든 것이 결국 좋은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학교 일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제가 운동을 해봐서 그런지 교수실이든 어디든 먼저 찾아가는 게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런 자세가 몸에 배어 있어서 갈등을 푸는 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현 정부의 여성정책은 어떻습니까?

“호호호.”

-논평하기가 곤란하다는 웃음인가요?

“애초 여성가족부였는데 이걸 여성부로 축소했다가 얼마 전 다시 여성가족부로 돌아왔잖아요? 시간 낭비잖아요.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우리는 여성정책에 관한 한 세계적으로 모범국가 소리를 듣고 있는데 그걸 그냥 이어가면 되는데 왜 왔다갔다하는지 아쉽습니다. 어쨌든 우리 여성부는 젠더(생물학적 성이 아닌 사회적 성을 의미) 관점을 표방하는 만큼 이런 방향을 잘 살려나가는 정책을 계속 펴나가길 바랍니다.”

-앞으로 여성운동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봅니까?

“법 제정 운동은 줄 겁니다. 거의 정비는 됐어요. 그런데 실제 현실에서 그 법이 얼마나 제대로 시행되고 관철되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 못해요. 남녀고용평등법을 만들었지만, 여성의 평균임금은 남자의 60% 수준이잖아요? 그러니 의식이 아니라 실제 생활을 바꾸는 운동으로 나가야 합니다. 지금까지가 이슈파이팅이었다면 앞으로는 그 이슈를 실제로 실현해 보이는 운동가가 나와야 하는 게 아니냐 싶습니다.”

-여성운동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사회학을 전공했고 직장생활 7~8년 하면서 여성 현실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이효재(86·전 이화여대 교수) 선생님을 만난 거지요. 저 자신 교육을 통해 차별받는 여성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는 자각이 있었는데 그때 훌륭한 은사를 만난 겁니다. 상당수의 여성운동가들이 이효재 선생의 제자들이니 한 스승의 그늘이 얼마나 큰가를 실감합니다.”

-어린 시절엔 어떤 아이였나요? 모범생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데요.

“친구들이 그래요. 잘 웃고 애교 잘 떨던 니가 여성운동을 할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다나요. 이화여고 때 선생님 한분이 법대 나온 분이었는데 늘 ‘세상에는 너희들 같은 (좋은 환경의)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어려운 사람이 참 많다는 걸 잊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거기서 큰 감화를 받아 사회학을 전공하게 되었어요.”

-교육이 중요하다는 걸 또 한번 느끼게 합니다. 자녀교육은 어떻게 하셨나요?

“딸 하난데 바깥일 때문에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못 가졌어요. 그런 거치고는 잘 자라줬습니다.”

-부모 모습이 딸에게 영향을 많이 끼쳤다고 생각하나요?

“그건 나보다 그 친구에게 물어야겠지만, 아무래도 저의 모습을 조금은 자랑스러워한 게 아닐까요?(웃음) 혼자서도 자율적이고 자립심 강하게 성장해 주었으니, 그거 하나는 자랑하고 싶습니다.”

-성공하셨군요. 저도 10대 딸이 둘인데 부럽습니다. (배석한 홍보실장 송혁준 교수가 여성부가 아니라 교육부로 가셨어야 할 분이라며 거들었다.)

“현재까지는 성공인데, 앞으론 또 모르죠, 뭐. 호호.”

-별명이 ‘지칼’입니다. 매사 분명하고 일처리도 칼 같다고 해서 붙은 거라던데요?

“제가 공사 구분이 명확하긴 해요. 그런데 사실 그거 구분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의외로 사람들이 안 하는 거지. 칼 같은 데가 있긴 한데… 남들한테 그래요. 그래, 내가 칼은 칼인데 얼음칼이다라고요. 지나고 보면 다 녹아버리는 그런 칼이라고. (홍보실장을 보며) 안 그래요?”

-(홍보실장을 보며) 그렇습니까?

“(홍보실장이 우리 두 사람을 보며) 으음, 그래야 살죠, 진짜 칼이면 어떻게 살아요? 다 죽이고 나면 누구하고 일하겠어요?”(일동 웃음)

인터뷰/이인우 기획위원 iwl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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