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권의 지방선거 후보단일화 논의에 대해 묻자, 한상진 교수는 “‘단일화= 선거 승리’라는 명분이 확실하게 체감되어야 가능성이 열리지 않겠느냐. 정치란 게 꼭 선의를 가지고 하는 게임이 아닌 만큼 아직 전망하기 뭣하다”면서도 “꼭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덧붙였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사회이론연구소 연 한상진 교수
“어제도 새벽 5시까지 영국 사회학저널에 보낼 원고를 썼어요. 정년이 되니 할 일이 더 많습니다.” 강단을 떠난 65살 은퇴 교수라고 보기에 그는 아직 젊었다. 더욱이 마음은 연부역강하던 때와 다름없을 터, 정년의 소회를 묻는 기자의 질문이 오히려 어색했다. 비판적 사회이론가로, 진보적 사회학자로 1980년대 이후 격동의 한국 사회를 예의 주시하며 날카로운 분석과 전망을 내놨던 한상진 교수가 지난 2월 30년간 몸담았던 서울대에서 정년퇴임하고 자기 이름 석자를 앞세운 연구소를 열었다.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 부근 주상복합건물에 자리잡은 ‘한상진사회이론연구소’는 주인을 따라 이사 온 책들의 열기로 가득했다. 그는 이 ‘조그만’ 연구소를 발판으로 본래 전공인 사회이론 분야를 새롭게 천착할 계획이다. 또 ‘동아시아 전통에 기반하면서 동시에 세계와 대화할 수 있는 사회이론’을 정립하고 싶은 학자적 포부를 밝혔다. 동양적 민본주의에서 서구식 근대화의 대안을 찾아보고자 하는 것인데, 그는 특히 한국의 ‘80년대적 시대정신’에서 새로운 비전을 발견하고 싶어했다. 정년퇴임 뒤 ‘동아시아에 기반한 이론’ 모색
“한국사회 민주주의 체감지수 현저히 악화” 시민사회 ‘역사적 대타협’으로 지배구조 혁신
“80년대 세대가 변화욕구 결집하는 국면 온다” -지난달 22일 정년 기념 강연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제목이 ‘80년대는 무엇을 남겼나’였던데요. “지금 우리 사회가 지닌 내부 잠재력은 80년대 이래 어떻게 성장해서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사회학자로서 조망해 보고자 했습니다. 1980년대를 치열하게 통과한 이른바 386이라고 불리는 80년대 세대는 여러 가지 이념 과잉에 의한 혼란이 있었지만, 정치적으로 소외되고 경제적으로 약자였던 민중을 발견하고 민중을 공동체 안으로 포용하려는 운동을 실천적으로 수행했던 집단입니다. 그 세대 안에는 굉장한 ‘모럴 리소시스’(도덕적 자산)가 있습니다. 그 세대가 성장해서 이제는 우리 사회 여러 분야에서 중간 허리를 구성하고 있고, 앞으로 계속 위로 올라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저는 이걸 우리 사회의 중요한 잠재력으로 봅니다. 이런 내부 잠재력을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활용하고, 그런 힘의 기반 위에서 사회통합을 이룰 지혜를 찾아보자는 게 강연의 요지였습니다.” -사회이론연구소를 열었는데, 취지와 포부를 들려주십시오. “아주 고마운 질문입니다.(웃음) 제가 원래 사회이론을 전공했는데, 요즘 시대는 취업이다 뭐다 해서 기본학문인 사회이론을 가르치고 배우는 게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어요. 그래서 전공학자로서 사회이론을 발전시키고 확산시키기 위한 작지만 의미있는 활동센터를 제공해야 하지 않겠냐 싶어서 연구소를 열게 됐습니다. 또한 한·중·일 3국의 전문 학자들과 연대해 동아시아 전통에 기반하면서 서구와도 대화가 되는 그런 개방적인 사회이론의 가능성을 모색해 보고자 합니다.” -화제를 본격적으로 현실 문제로 돌려보겠습니다. 원로 사회학자로서 현재 한국 사회가 당면한 핵심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국민적 요구나 심각성이란 점에서 양극화 문제를 먼저 들겠습니다. 어떻게든 해결해야 하지만 개선하기가 참으로 쉽지 않은 난제입니다. 다음은, 현란한 구호로서가 아니라 국민들의 눈높이에서 민주주의의 진짜 의미를 실천하는 일입니다. 이와 관련해 지난 2월 연구소의 첫번째 작업으로 2010년 현재 민주주의 체감지수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시민들이 실생활에서 ‘시민적 자유권’을 얼마나 체감하는가 하는 정도를 통해 한국 민주주의의 현주소를 알아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번 조사에서 나타난 놀라운 사실은 국민들의 생활 속 눈높이에서 볼 때, 언론·표현·집회·결사의 자유, 임의동행이나 검문검색에 두려움을 갖지 않을 권리,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등 아주 기본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체감지수가 2007년 조사에 비해 현저히 악화되었다는 점입니다. 과거 민주화 과정에서 많이 개선했다고 믿어온 것들이 다 되살아난 겁니다. 언론들도 한번 조사해 보세요. 100점 기준에 50점이 안 됩니다. 이런 현실을 놔두고 무슨 자유민주주의입니까? 국민 눈높이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것이 새삼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최근의 조사 결과인 만큼, 아무래도 이명박 정권의 등장과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물론이죠.”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이명박 정부 2년을 돌아본다면? “우선 여러 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대통령이 일정 수준 이상의 지지율을 유지하는 것은 지난 2년에 대한 만족감보다는 경제 문제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심리가 많이 작용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서민생활 안정을 기조로 한 경제정책 등에서 점수를 딴 측면도 있구요. 반면, 남북관계는 과거 정권과의 차별화를 꾀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많이 꼬이고 헝클어진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가장 심각하게 보는 것은 한국의 시민사회가 가진 굉장히 미래지향적인 역동성을 계속 억제하고 침해하는 방식으로 나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인터넷에 대한 관료적·기술적 통제, 시민사회의 활동에 대한 신경질적 대책 등이 촛불집회 이후 아주 강화되었고, 언론 자체를 통제하에 두려는 정치적 욕구도 대단히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시민의 자유권이 객관적으로 봐서도 현저히 위축됐습니다. 이는 꼭 진보적이거나 야당을 지지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전국민이 큰 차이 없이 느끼는 전국적인 현상입니다. 이명박 정부 출범 후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그만큼 줄어들고 시민의 자유로운 참여와 의사표현이 억제되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이런 퇴행적 현상은 앞으로 지식기반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한 국민 개개의 창의력 발전을 심각하게 억압하는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경제적 쟁점은 더 두고 봐야 하겠지만, 시민 기본권과 연관된 민주주의는 이미 빨간불이 들어와 있습니다. 이 상황을 현저히 개선시키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는 한, 이명박 정부는 이로 인해 커다란 정치적 난관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민주당 등 야권 역시 국민들의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권정당으로서의 능력과 리더십 부재가 심각해 보입니다. “대안정당으로서 얼마나 정부 비판에 각을 세우면서 동시에 대중이 신뢰할 수 있는 실현가능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느냐에 여러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야권은 현재의 분열적인 구조를 혁파하지 못한다면 원하든 원치 않든 보수세력의 재집권을 돕는 꼴이 되고, 자칫 잘못하면 뭐랄까, 야당 및 진보세력의 (정치적) 주변화 현상마저 가져오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해법은 명확합니다. 현재 민주당은 일종의 관행화된 기득권 구조, 특히 지역과 연관된 기득권에 포위돼 있는데, 그걸 그대로 가져가서는 시민사회의 요구를 수용하기 어렵고 지지받기도 어렵겠지요. 진짜 풀뿌리정당을 향한 모험적 시도도 요구됩니다. 풀뿌리정당화는 노무현 정부 때 시도했다가 실패한 바 있는데, 이를 뼈아픈 교훈으로 삼아 당을 밑에서의 요구를 수용하는 개방적 체제로 탈바꿈시킨다면 흩어진 야권을 하나로 모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새로운 리더십의 형성이 가능할까요? “과감한 문호개방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주 선이 굵은 지도자들이 통합야당의 틀 안에서 각자 자기 노선을 갖고 경쟁하고 협력하는 그런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잡음이 많기는 하지만, 한나라당이 앞서가는 이유는 이명박 세력, 박근혜 세력 등이 각자 자기 노선을 갖고 있어서 국민 관심을 끄는 것 아니겠습니까?” -진보정치 쪽은 어떻습니까? 국민들과 거리가 멀어진 채 위축된 모습입니다. “저의 제안은 이념이 진보를 규정해주는 시대는 지났다는 걸 인정하자는 겁니다. 이념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보단 과감하게 삶의 현실로, 생활정치 패러다임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저는 참 중요한 팩트라고 여기는 게 있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경제적인 번영이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는 했는데 경제가 안 따라주면 그런 민주주의에 그다지 큰 가치를 두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게 한국인의 의식구조이고,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입니다. 결국 민주주의 틀 안에서 어떻게 경제적 번영을 이루느냐가 진보진영에게도 핵심적 화두가 되어야 합니다. ‘좋다, 우리는 보수와는 이러이러한 점이 다른 경제적 번영 프로그램이 있다. 이 프로그램의 핵심은 이거고, 이걸 위해 우리는 투쟁한다’, 이런 게 나와야 해요.” -이명박 정부는 대기업, 즉 재벌들에게 규모에 걸맞은 정치·사회적 역할을 기대하는 것 같습니다. 최근 동계올림픽 유치를 명분으로 삼성 이건희 회장을 단독으로 사면시킨 것이 좋은 예입니다. 민주주의를 뛰어넘는 과도한 경제논리, 국익논리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큽니다. “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이 경제성장이란 화두 아래 연합하는 추세가 가시화되고 있고, 그런 것들이 언론 영역의 재편과 연관되어서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지난 두 정권의 10년을 통해 상당한 개선을 이뤘지만, 재벌권력을 어떻게 민주적으로 통제할 것인가는 여전히 중요한 화두입니다. 재벌이 한국 사회에서 하고 있는 역할은 양면적입니다. 하나는 국가경쟁력을 이끄는 좋은 투입요소라는 측면이고, 다른 쪽은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근로 빈곤층 확대 및 고용 불안을 초래하는 부정적 측면입니다. 어차피 이명박 정부는 입장이 분명하지만, 향후 한국의 경제 문제는 이런 양면성을 관리하면서 재벌과 중소기업이 상생하는 길을 어떻게 모색하느냐가 핵심이 될 것입니다.” -재벌을 민주적 통제 영역 안에 두기 위해서는 어떤 사회적 합의가 필요할까요? “재벌과 하청기업 사이에 국가권력이 개입한다 해도 그 3자만으로는 안 됩니다. 어차피 권력관계인데, 재벌권력이 압도적으로 강하니까요. 이익은 자신에게 돌리고 부담은 타자에게 전가하는 방식으로 경쟁 우위를 유지하는 것은 잘 알려진 논리 아닙니까? 이런 재벌의 생리상 스스로를 견제하기는 어렵습니다. 결국 민주주의 문제로 돌아가서, 이해상충집단 사이에 공존공영을 담보할 수 있는 ‘사회적 협력 시스템’과 그걸 가동시킬 수 있는 범사회적인 리더십과 협력체계가 절실히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일방적 권력구조 아래서는 재벌은 항상 손쉬운 방법으로 자기에게 유리한 생존게임만 하려고 할 것입니다.” -시민적 민주주의의 관점에서나 경제 민주주의 관점에서나 어쩌면 한국 사회는 이제 지배구조 자체의 변화가 필요한 단계에 이른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이 주제가 제기되는 근본 동인은 국가권력도 재벌권력의 문제도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현안은 시민사회의 고유한 영향력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새로운 거버넌스(지배구조) 체계 안으로 연결시키느냐가 핵심입니다. 어차피 국가는 국가대로, 재벌은 재벌대로 권력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새로운 비전과 그것을 이끌 화두는 어쩌면 좀 진부한 용어이지만 국가도 재벌도 아닌 시민사회의 ‘역사적 대타협’입니다. 한국 사회는 팽팽한 균형 속에서 대립하고 갈등하는 여러 사회세력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과거와 같은 승자독식의 편협한 거버넌스 구조로부터 좀더 폭넓은 ‘사회적 협치’를 이끌어내는 거버넌스 체계로 이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는 거거든요. 물론 이것은 아직 전례가 없는 것으로, 이게 가능하려면 정부, 재벌, 노동자가 다 참여할 수 있어야 하고, 사회적 대표성과 정당성을 갖는 범사회적인 리더십이 부상해야 됩니다. 새로운 거버넌스에 대한 요구는 많은데 이걸 어떤 리더십과 어떤 틀로 추구할 수 있고 성과를 낼 수 있을까는 아직 그림이 분명치 않습니다. 어려운 과제입니다.” -권력구조 개편과 관련지어 볼 수 있습니까? “권력구조 개편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인 것은 분명하지만, 내각제든 무엇이든 단순히 정부 형태를 바꾸는 것이라면 오십보백보입니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그리고 시민사회의 영향력을 서로 잘 연결시키는 거버넌스가 돼야 하는데, 그걸 추진할 수 있는 리더십이 현 상태로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어떤 계기가 되면 우리 사회 안에 성장하고 있는 강력한 통합지향적인 세력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점이 올 거라고 봅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상대적으로 다른 세대에 비해 도덕적 자산이 충만한 80년대 세대가 점점 사회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면서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새로운 변화 욕구로 결집하는 국면이 오지 않겠느냐, 나는 그렇게 전망합니다. 정확히 그 임계점이 언제냐를 예측하긴 어렵지만 반드시 오리라는 것만은 확신합니다. 그 상황이 어쩌면 한국 사회의 품격을 높이고, ‘뉴 거버넌스’ 그런 걸 모색하는 하나의 귀중한 모멘텀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3월부터 중국 칭화대에서 강의하신다고 들었는데, 잘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중국의 사회변동과 중산층의 역할에 대해 강의합니다. 방대한 규모로 형성중인 중국의 중산층이 어떤 정치·사회적 관심을 가지고, 중국 사회변화에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는 중국 정부는 물론이고 세계 지식인들의 관심사입니다. 저는 중국 중산층의 의미있는 한 부분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권위주의에 비판적이고 사회참여적인 경향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 있습니다. (80년대 개혁 지향의 한국 중산층을 의미했던) ‘중민’ 비슷한 현상을 중국에서도 발견하고 있다고나 할까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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