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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김 추기경이 남긴 뜻…개발보다 사람이 먼저”

등록 2010-01-28 21:42수정 2010-01-29 15:55

천주교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는 “너무 빨리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개발을 안 할 수는 없지만 그 과정이 인간을 황폐화시키면서까지 이뤄져선 안 된다”고 말했다. 강 주교는 한국천주교의 최고 의결기구인 주교회의 의장도 맡고 있다.  제주/허호준 기자 <A href="mailto:hojoon@hani.co.kr">hojoon@hani.co.kr</A>
천주교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는 “너무 빨리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개발을 안 할 수는 없지만 그 과정이 인간을 황폐화시키면서까지 이뤄져선 안 된다”고 말했다. 강 주교는 한국천주교의 최고 의결기구인 주교회의 의장도 맡고 있다. 제주/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강우일 주교




보름 남짓 후면 김수환 추기경 선종 1주기(2월16일)이다. 김 추기경 서거 직후 전국에서 일어난 뜨거운 추모열기는 놀라울 정도였다. 김 추기경이 사회참여에 적극 나선 1970년대부터 마지막 투병생활까지, 바로 곁에서 그를 지켜본 강우일 주교(65·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겸 제주교구장)는 장례미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추기경님의 고난이 왜 필요했는지를. 추기경님은 당신의 투병생활과 죽음을 통해서, 경제위기와 사회불안으로 깜깜하고 싸늘하게 식어버린 국민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덥혀주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강 주교의 바람만큼 우리 사회는 따뜻해지지 않은 거 같다. 그가 지난달 낸 성탄 메시지엔, 사람을 희생시켜 성장을 추구하는 사회를 향한 매우 강한 비판이 담겨 있다. 지난 주말 제주시의 천주교 제주교구 중앙성당에서 그를 만났다. 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뜻과,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어떤지를 들었다.

­추기경 장례미사 때 주교님이 읽으신 고별사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고별사를 쓰셨습니까?

“그때의 심경을 그대로 쓴 겁니다. 추기경님이 (말년에) 주로 병원에 계셨습니다. 병원에 가서 자주 뵙고, 또 퇴원하시면 혜화동(혜화동성당)으로 가서 뵙고 그랬죠. 자꾸 쇠약해지시고 심신이 소진되어 가시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런 심경을 얘기한 겁니다.”

­고별사 중 특히 ‘주님 이제 그만하면 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 추기경님 좀 편히 쉬게 해주세요’라고 기도를 올렸다는 부분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올릴 정도로, 추기경님이 강남성모병원(현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실 때 고통스러워하셨나요?

“모든 사람이 결국 이 세상을 떠날 때는 힘들어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 과정이죠. 특히 숨쉬는 걸 너무 어려워하시고, 그런 육체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을 찾으려고 하는, 신앙과 믿음을 지키려고 애쓰시는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성인들도 그렇거든요, 신앙이 철석같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는 게 아니고 숨 거두는 순간까지도 유혹받고 믿음에 대한 도전을 받는 게 사람입니다. 추기경님도 육체적인 어려움 속에서 마음의 어려움, 하느님이 안 보이는 어려움을 겪으신 거 같아요. 그런 과정을 겪으시는 걸 보고 너무 옆에서 마음이 안타깝고, 그래서 기도가 나왔죠.”


­추기경님을 추모하는 열기가 굉장했습니다. 명동엔 추기경님을 마지막으로 배웅하려는 시민들의 줄이 끝없이 이어질 정도였는데요, 이런 추모열기를 예상하셨습니까?

70년대부터 선종 때까지 김수환 추기경 보좌
“가장 약한 사람들에게 힘이 되길 원하신 분”

“정말 놀랐어요. 추기경님을 좋아하는 분들이 많은 줄은 알았지만 그렇게 많은 신자와 시민들이 추운 날씨에 몇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리고 참배하실 줄은 전혀 예상을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람들이 추기경님의 서거로부터 뭘 느꼈을까요?

“무엇보다 추기경님은 항상 사회에서 가장 약한 사람, 힘없는 사람에게 힘이 되어주고 옆에 있어주는 걸 원하셨어요. 거기에 대해서 여러 오해도 받고 반대도 받고 그러셨지만 그 자세는 일관되게 지켜 나가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오셨다고 생각합니다.”

­추기경님은 1970~80년대 민주화운동의 든든한 기둥이셨습니다. 그런데 90년대 이후엔 보수적으로 바뀌신 게 아니냐는 비판이 진보진영 일부에서 나왔습니다. 추기경님이 돌아가신 직후에도 ‘비판할 건 비판하자’는 주장이 있었고요. 물론 이런 주장은 진중권씨의 말처럼 “당신들은 추기경님처럼 살 자신이 있느냐”는 한마디 말에 묻혀버렸지만요. 그런 얘기를 들었을 때 마음이 어땠습니까?

“추기경님은 신앙인으로 사셨고, 사제로 사셨습니다. 현대 교회의 가르침이란 게, 세상 속에서 백성들과 함께 걸어가는 교회를 많이 가르치기 때문에, 그 가르침을 몸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하셨죠. 바깥 사람들은 추기경님이 어떤 정치적 입장을 세우고 그 입장에 따라 행동하시는 걸로 생각을 하는데…, 그러니까 이른바 진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추기경님을 자기 편이라고 여기다가 조금 자기들 생각과 다른 입장에서 말씀을 하시니까 추기경님을 비판하는 소리가 나왔는데, 제가 보기엔 추기경님은 (평생 동안) 변하신 게 없습니다. 변했다고 생각하는 건 추기경님의 퍼스낼리티, 신조, 신념을 몰라서 오해하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강우일 주교는 경기고 59회다. 이장무 서울대 총장과 어윤대 전 고려대 총장 등이 그의 동기다. 꽤 공부를 잘했던 그는 고교 졸업 무렵 갑자기 진로를 바꿔 신부가 되기로 결심한다.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신부가 될) 생각이 없었다. 대학 갈 무렵에 갑자기 바뀌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가는 출세의 길을 나도 가야 하는가, 세상을 의미있고 보람있게 갈 수 있는 길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는 말했다. 증조할머니 때부터 4대째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집안 분위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일본 조치대 철학과로 진학한다. 일본에서 신학을 공부하려면 먼저 철학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조치대는 김수환 추기경의 모교이기도 하다. 여기서 그는 김 추기경과 운명적인 만남을 한다.

­추기경님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습니까?

“제가 일본 조치대학에서 철학 공부를 하고 있을 때 추기경님이 추기경 서임을 받고 학교 기숙사로 절 면회 오셨습니다. 한국 사람으로선 기숙사에 저 혼자밖에 없었는데, 추기경이 되시고 나서 저한테까지 찾아와주시니 황송하고 반갑고 감사했죠. 추기경님이 일제 말기에 학병으로 나갈 때, 학병을 안 나가려 안간힘을 쓰시다가 어쩔 수 없이 나가게 됐는데, 그때 (조치대의) 기숙사 사감이 독일 출신의 게페르트 신부님이셨습니다. 우리나라 서강대를 설립하신 분이죠. 추기경님이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갔더니, 게페르트 신부님이 우시면서 강복(무릎을 꿇고 있으면 양손을 머리 위에 얹어 축복을 내리는 의식)을 주셨다고 합니다. 제가 도쿄의 신학교에 가니까, 게페르트 신부님이 신학교 학장이셨습니다. 제가 신부가 되고 나서 도쿄를 방문할 때마다 게페르트 신부님을 찾아뵈면, 신부님은 항상 ‘내가 김수환과 너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강우일 주교(65·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겸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65·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겸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는 1977년 서울대교구장 비서로 임명된 이후 2002년 제주교구장으로 부임할 때까지 줄곧 김수환 추기경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했다.

­주교님은 25년 동안 가까이서 김수환 추기경님을 모셨는데요, 잘 알려지지 않은 추기경님의 인간적인 면모를 좀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일반인들도 느끼겠지만, 아주 소박한 분이셨습니다. 정치적 사회적 위상과는 달리 처음부터 소박한 삶을 원하셨고 그렇게 사셨습니다. 여기저기 다니실 때도 사람들을 거느리고 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으셨고, 운전기사가 모는 차량을 타는 것도 불편해하셨습니다. 그래서 공식 행사는 어쩔 수 없지만, 사적인 행사엔 제가 직접 운전해서 모시고 다녔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젊을 때는 제가 운전을 좀 거칠게 하는 편이었는데, 추기경님은 그렇게 거칠게 모는 차를 좋아하셨습니다. 속이 시원하시다고….(웃음) 또 소박한 차림으로 등산도 가고 나들이도 가시곤 했는데, 산에서 사람들이 ‘혹시 추기경님 아니시냐’고 물으면 ‘사람들이 많이 닮았다고 해요’라고 농담도 하셨습니다.”

강 주교를 인터뷰하기로 마음먹은 건, 김수환 추기경 1주기가 가까워졌다는 점도 있었지만 그의 성탄 메시지가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정부가 재개발 정책을 밀어붙여 수천억, 수조원의 부가가치가 소수의 토지·가옥 소유주와 건설회사에 돌아가도록 하고 있다”, “지역사회 민의에 가장 겸손해야 할 제주도의회에서 민의를 무시하고 해군기지를 유치하기 위한 동의안을 변칙 통과시켰다”는 등, 성탄 메시지엔 용산참사와 제주 해군기지 건설계획에 대한 강한 비판이 담겨 있었다. 최근의 현안으로 얘기가 옮겨오자, 그의 표정은 결연해지고 느릿느릿하던 말투엔 또렷하게 힘이 들어갔다.

­주교님의 성탄 메시지를 읽고 톤이 세서 좀 놀랐습니다. 이젠 어느 정도 해결이 된 셈이지만, 용산참사에서 정부와 우리 사회가 얻어야 할 교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너무 빨리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개발을 안 할 수는 없지만 그 과정이 인간을 황폐화시키면서까지 이뤄지면 안 됩니다. 사람이 먼저지요. (철거지역의) 주민들이, 특히 세입자들이 옮겨갈 수 있는 거주단지를 정부나 사업 추진하는 쪽에서 마련하고 철거를 하든지 해야지, 사람이 있는데 불도저로 밀어버리는 건…, 그렇게 해선 안 되죠.”

성탄 메시지서 용산 참사·제주 해군기지 비판
“사람들이 있는데 불도저로 밀어버리면 안돼”

­성탄 메시지를 보면 ‘사회집단 등을 빈곤으로 내몰면서 인간을 희생시켜 경제성장을 이루는 건 용납될 수 없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지금 정부가 추진하는 사업이나 경제성장 정책이 그런 측면을 갖고 있다고 보십니까?

“그렇습니다. 용산도 그렇고, 서울뿐 아니라 여러 군데서 멀쩡한 아파트들을 새로 재개발해서 큰 이윤을 창출하려고 하는 게 그렇죠. (재개발을 하면) 거기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돈 있는 사람들인데, 돈 없는 사람들은 더 열악한 데로 갈 수밖에 없어요. 빨리 부자 되는 것만 좋은 게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좀더 정을 느끼면서 사는 그런 개발을 해야 합니다. 제가 아시아지역 주교모임에 나가서 보면, 아시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가 일본 아닙니까, 그런데 일본 주교들이 제일 안타깝게 느끼는 문제가 인간관계가 거의 무너졌다는 겁니다. 경제적 가치만 좇다 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데, 우리도 결국 그런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줄곧 반대해 오셨는데요, 반대하시는 이유가 뭔가요?

“평화입니다. 19세기 이후에 교황들이 예외없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신 주제가 평화입니다. 전쟁은 안 된다, 군비증강도 안 된다는 메시지를 항상 열강에 보내셨습니다. 군비 축소를 여러 차례 강조하셨고, 그것이 지금 가톨릭교 전체 교리의 중요한 부분이 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남북 대치 속에 살아왔기 때문에 그동안 평화에 대해 잘 얘기하지 못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제주도는 제일 남쪽에 있습니다. 남북 대치상황 때문이 아니라 국제무역의 주요 항로를 확보하기 위해 해군기지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굳이 제주도에 기지를 만들면서까지 그런 활동을 해야 하는지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항로를 보호하려면 기존 기지나 해군으로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제주를 평화의 섬이라고 발표했는데, 그 한복판에 최신 무기를 진열한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평화를 궁극적 가치로 본다면, 군사기지를 건설하는 것보다는 그 돈으로 가난한 나라를 돕는 게 더 큰 외교적 성과를 달성할 수 있다고 봅니다.”

­중앙정부가 추진하고 있고, 제주도지사와 제주도의회가 동의를 했는데 현실적으로 해군기지 건설을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건 압니다. 그러나 제가 목소리를 높인 또하나의 이유는, 제주에서 살다 보니까 제주도가 대한민국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새삼 생각하게 됐기 때문입니다. (1948년의) 4·3사건이 난 지 60년이 지났는데, 그때 제주도 인구가 20만이 될까 말까 했는데 3만명이 죽었습니다. 진압군에 무력으로 대항했던 무장세력, 소위 빨치산들은 제가 알기론 천몇백명밖에 안 됩니다. 천몇백명을 토벌하기 위해 3만명을 죽였다는 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습니다. 대다수 제주도민의 정서는 국가가 우리를 학살했다는 겁니다. 가슴속에 한이 맺혀 있죠. 그런 상황에서 정부가 뉘우침이나 사과도 없이, 물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잠깐 사과는 했지만 국민 대다수는 잊어버렸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제주에 군사기지를 설치한다는 건 안 되지 않느냐는 겁니다. 제가 보기엔 대한민국 정부가 철면피입니다. 3만명의 희생이 우리 민족 역사에 의미있는 흔적으로 남으려면 제주는 평화의 섬이 되어야 합니다.”

­정부의 고위 관리들을 만나 그런 얘기를 하셨습니까?

“했죠. 한승수 전 총리 때 두 번이나 뵙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해는 하시는데 국가사업이라 어쩔 수 없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정운찬 총리는 개인적으로 잘 모르는데…, 그쪽에서 만나자고 하면 저는 얼마든지 만날 용의가 있습니다.”

­주교님의 사회참여 활동이 김수환 추기경님을 연상시킨다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추기경님 영향을 받은 겁니까?

“저는 한 게 별로 없습니다. 다만 추기경님을 모시고 오래 살았으니까 영향을 안 받을 순 없었겠지요. 추기경님이 산동네를 방문하시고 수녀원을 방문하실 때 제일 즐겨 가시던 곳은, 공식 행사가 아니라 마음으로 애정을 느껴서 가시던 수녀원들은, 가장 없는(가난한) 가운데서 사시는 수녀분들, 그런 수녀원에 가서 시간을 보내시는 걸 좋아하셨습니다. 저도 그런 데를 함께 가면서 느낀 그런 공감대라고 할까요, 그런 걸 젊을 때부터 갖고 있었기 때문에 추기경님이 그런 데 가실 땐 항상 기쁘게 모시고 가고 그랬습니다.”

­추기경님이 선종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뵌 게 언제입니까?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어떤 얘기를 하셨습니까?

“사흘 전에 뵈었는데 그때는 이미 의식이 없으셨고요, 의식 있으실 때 뵌 건 그 1주일 전쯤 됩니다. 추기경님이 옛날 얘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제가 일본에서 공부할 때 추기경님이 찾아오셨다고 했는데, 사실 처음 뵌 건 초등학교 3학년인가 4학년 때였습니다. 6·25 때 대구로 피란을 갔는데, 추기경님이 대구교구청 비서신부로 계셨습니다. 그때 대구 주교님이 세상을 떠나셨는데, 아버지랑 저랑 밤에 기도하러 가면서 어머니가 타주신 커피를 보온병에 가득 담아서 가지고 갔습니다. 추기경님이 (선종하시기 전에) 그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자네 어머니가 타주신 커피만큼 맛있는 커피를 세상에서 마셔본 적이 없다고요.”

인터뷰/박찬수 부국장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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